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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 하늘 한 개 별빛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승무(僧舞)」 여승이 춤을 춘다. 머리에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하얀 고깔을 쓰고 있다. 시인은 여승의 모습에서 나비를 본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너울너울 날 듯 여승은 춤을 춘다. 고깔로 채 덮이지 않은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보인다.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이다. 오동잎 잎새마다 달빛이 묻어 있다. 달빛을 받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여승을 보며 시인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라는 대목에 승무(僧舞)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춤을 추는 여승의 두 볼에 달빛이 흐른다. “복사꽃 고운 뺨”에 나타나듯 젊은 여인이다. 젊은 여인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한밤에 춤으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고와서 서러워라”는 역설로 시인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고운 얼굴에 서린 서러움은 ‘여승’이라는 말에 새겨진 시적 울림과 어울려 이 시를 세속과 탈속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로 이끈다.
‘여승’이라는 존재는 세속과 탈속의 경계에 놓여 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항상 저 너머를 꿈꾼다. 여승은 춤을 추면서 저 너머로 가는 꿈을 꾼다. 까만 눈동자를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는 행위에는 세속을 사는 서러움과 함께 깨달음을 향한 지독한(?) 열망이 스며들어 있다. 깨달음이란 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과 그 열망을 내려놓는 깨달음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심연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인은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을 본다.
실제 여승이 눈물을 흘렸는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여승의 얼굴에서 번뇌(煩惱)를 보고 있다. 번뇌에 빠진 여승이라고? 그럼 여승이 이 한밤에 춤을 추는 이유는 그 번뇌를 떨쳐내기 위함인가?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라는 구절에 이르면, 번뇌는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세속에 있으니 세사(世事)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세사에 시달리지 않고 세속에 머문다면 그(녀)는 이미 깨달은 이가 아니겠는가? 세사에 시달리는 사람의 마음속은 당연히 수많은 번뇌들로 들어차 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여승이라고 해서,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쓴다. 몸짓으로 표현되는 여승의 춤에서 시인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별빛으로 이어지는 번뇌를 느끼고 있다. 번뇌라고? 시인만큼 번뇌에 빠진 이들이 있을까? 언어를 향한 지독한(?) 욕망에 빠진 이 사람들 또한 여승처럼 세속과 탈속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다. 시어에 새겨진 경계, 그러니까 일상 언어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시어로 시인은 여승이 춤을 추며 바라보는 ‘별빛’을 묘사한다. 여승이 추는 춤 동작 하나하나가 시인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여승의 춤을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온몸으로 여승이 추는 춤을 느낀다. 번뇌에 찬 여승이 눈물을 흘리며 별빛을 보면 시인 역시 눈물을 흘리며 별빛에 시선을 모은다. 여승이 움직이면 시인도 움직이고, 여승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 멈추면 시인도 숨을 멈추고 합장을 한다.
귀뚜라미가 우는 삼경(三更)이다. 사람들은 진작 잠에 빠져든 시간에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쓴다. 춤을 추고 시를 쓰는 일로 이들은 깨달음을 추구한다. 깨달음이라고? 도대체 깨달음이 무엇이기에 이 늦은 밤에 이들은 춤을 추고 시를 쓰는 것일까? 깨달음은 한 마리 나비일까? 여승의 머리에 앉은 나비 한 마리가 여승을 별빛으로 이끄는 것일까? 땅과 하늘을 잇는 나비 한 마리가 깨달음을 표현한다면, 장자가 꿈속에서 본 나비는 무엇이 될까? 물론 장자가 꿈꾼 세계와 부처가 꿈꾼 세계를 같은 맥락에 놓을 수는 없다. 허망하고 허망한 세계의 바깥으로 두 사람은 뛰쳐나갔지만, 장자는 인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무위의 길로 나아갔다. 이로 보면 번뇌는 인위=유위이고 “번뇌는 별빛”이라는 생각 또한 인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나비는 하늘을 날고 여승은 춤을 추고 시인은 시를 쓸 뿐이다. 나비가 춤을 추고, 나비가 시를 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시인은 춤을 추는 여승에게서 하늘을 나는 고운 나비를 본다. 장자의 꿈에 나타난 자유로운 나비가 아니다. 번뇌에 매여 눈물을 흘리는 나비를 그는 보고 있다. 한없이 곱지만 한없이 서러운 나비는 이렇게 탄생한다.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안다고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다. 깨달음은 무언가를 아는 게 아니다. “번뇌는 별빛”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누군가는 깨닫고 누군가는 어둠속을 헤맨다. 이 몸에 욕망이 남아 있는 채로 어떻게 깨달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승은 춤을 춘다. 아니, 몸에 새겨진 번뇌를 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온몸으로 시를 쓴다고 말한 어떤 시인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던 부처는 어느 날 고행을 끝내고 여인이 주는 죽을 먹었다. 고행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남아 있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한 이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행하(려)는 마음조차 내려놓음으로써 부처는 비로소 부처가 되었다. 그리고 죽을 먹었다. 춤을 끝내고 경계에 선 여승을 본다. 번뇌에서 별빛을 느끼는 여승을 본다. 새로운 고행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비는 그렇게 또 새로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2. 나라 없는 시인의 비애 마음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은 동물원으로 간다.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 난 너를 구경 오진 않았다 뺨을 비비며 울고 싶은 마음.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써서 모은 시집을 읽는다.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 문득 돌아다보면 사방에서 창살 틈으로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들여다본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 무인(無人)한 동물원의 오후 전도(顚倒)된 위치에 통곡과도 같은 낙조(落照)가 물들고 있었다. - 조지훈, 「동물원의 오후」 마음이 후줄근히 시름에 젖는 날이면 시인은 동물원으로 간다. 동물을 보러 가는 것일까? 시인은 동물들에게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하소한다.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시인은 필요한 것일까? 달리 말하면 자기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이가 시인 곁에는 없는 것일까? 시인은 동물을 구경하기 위해 동물원에 가지 않는다. 동물을 볼거리로 생각하는 마음에는 동물을 대상으로 보는 마음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시인은 “뺨을 부비며 울고 싶은 마음.”을 동물과 더불어 해소하려고 한다. 그에게 동물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대화 상대를 가리킨다.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느냐고? “혼자서 숨어 앉아 시를 써도/ 읽어줄 사람이 있어야지”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말이 통한다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읽어줄 이가 없는 시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인은 동물원 쇠창살 앞을 걸어가며 정성스레 쓴 시를 읽는다. 동물들이 시를 읽는(듣는) 독자가 되는 것일까
시를 읽다가 시인은 문득 창살 안에 있는 동물들을 들여다본다. 동물들이 무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시인과 동물은 눈빛을 나눈다. 창살 안에 갇힌 동물들을 생각하는 찰나 시인은 불현듯 “철책 안에 갇힌 것은 나였다”라는 점을 깨닫는다. 철창 바깥에 있는 “이방(異邦)의 짐승들이” 철창 안에 갇힌 시인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좀 전까지 시를 읽어주던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철창 안에 갇혀 알지 못할 말을 읊조리던 시인을 동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봤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상황을 시인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창살 밖이 창살 안이 되어버린 이 현실을 그 누가 쉽게 감당할 수 있을까? 창살 안에 자유가 없듯 창살 밖에도 자유가 없다. 묘하지 않은가? 안과 밖에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시를 쓰며 사는 일은 과연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시인은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는 걸 듣는다. ‘나라 없는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사는 시인을 가리킬 것이다. 나라 없는 시인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시는 나랏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양식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나라 없는 시인은 나랏말을 자유로이 사용하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나랏말이 자유롭지 않은데 시(인)가 자유로울 리 없다. 언어부터 의미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사람을 어찌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인)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상이 내보이는 진실에 이르는 양식(존재)이다. 나라 없는 시인은 이미 언어가 규정하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여기 나라 없는 시인이 있다’는 말은 그러므로 ‘여기 나랏말이 없는 시인이 있다’는 의미로 곧바로 이어진다. 나랏말이 없는 시인이 쓰는 시를 그 누가 읽어줄 수 있을까
나라 없는 시인은 지금 창살 안에 갇혀 있다. 창살 안에 갇혀 말이 없는 동물들과 다르지 않다.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동물이나 창살 안에 갇혔다는 점에서는 같다. 사람 하나 없는 동물원에서 시인은 인간과 동물이 뒤바뀐 “전도(顚倒)된 위치”를 발견하고는 한없이 몸을 떤다. 동물들만 갇힌 세상이 아니다.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삶을 살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통곡과도 같은 낙조(落照)”를 보며 시인은 식민지인으로서 사는 비애를 가슴 깊이 느낀다. 저녁노을이 통곡하는 시인의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 철책 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시인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까? 나라 없는 시인이 쓰는 시는 이렇게 우리네 마음을 울린다. 조지훈은 동물원을 붉게 물들인 낙조 앞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풀어낸다. 나라, 혹은 나랏말을 잃고 시를 쓰는 일은 이토록 서러울 밖에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