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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비관주의 시의 최고봉이다. 백석, 기형도, 김중식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자신만의 언어를 득한 천재의 풍모를 보인다.
새벽 세시에 겨우 냉장고나 뒤지는 인생을 자학하는 표현이나 토씨 하나를 찾아 우주를 떠돈다는 상상력, 희망엔 차도가 없다는 역설적 어휘 결합, 외로운 이는 얼굴이 선하다는, 그 등대지기가 그랬다는 쓸쓸한 통찰력 등 졸작이 거의 없는 절창들의 연속이다.
이에 비해 요새 잘나간다는 문태준의 시는 얼마나 답답한가. 연탄재 밖에 안남은 안도현의 시는 얼마나 얄팍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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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꾸로 쓴 시 "인간이 너무 흔해, 스스로 천해지는 기분이야/ 호시탐탐 몸을 버릴 기회를 노리노라"(83쪽)라고 말했던 시인은 단 한 권의 시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진이정의 시는 문학사에서 꾸준히 논의되고 있지는 않다. 그가 보여준 시 경향들이 90년대 시단을 풍미했던 모든 것들을 한갓 그의 아류로 보이게 할 만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되지 않는 것도 문단권력 때문이라면 억측일까. 아, 시인이여. 권력을 형성하기에는 너무 일찍 가버렸다. 권력을 물려주기에는 단 한 권은 너무 적었다. 그는 연작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1="">에서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악함인가"(60쪽)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대답은 다만 비유일 뿐이다. "나도 네게 비유로만 말하리라"(61쪽)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시인은 능청스럽다.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가끔 나는 바로 선다/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말이다"(62쪽) 라고 말하며 이 세상을 거꾸로 선 꿈의 세상이라고 하면서도 가끔씩은 똑바로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홀로 고고한 척 하는 지사연하는 자세가 아니라 깜빡 꿈이란 걸 잊은 채, 바라면 안될 것은 바라는 허망하고도 부질없다는 걸 인식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 순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허나 고런 때라야,/ 겨우 시가 되는 것"(62쪽)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이정은 자신의 시가 발생하는 지점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그에게 시란 모순되고 거꾸로 서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그렇게 모순되고 거꾸로 된 상태를 뒤집은 찰나의, 똑바로 서 있는 순간에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운 것들에 대하여 진이정의 시선이 단지 부정의 대상만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을 찾아온 예전의 이발관에 들어선 시인은 "추억이란 이름의 이발소 그림들, 내가 안본 사이 만종 속의 부부는 그들의 기도를 성취했는지 조금은 느슨해진 모습으로 서성거렸다"(24쪽)라며 지난 날 자신이 성취하려고 했던 기도가 그렇게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느슨해진 모습을 액자를 통해 본다. 그의 시선이 이렇듯 자신의 내부를 향할 때도 단지 부정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감탄, "아아 그는 나의 삶을 참빗처럼 남김없이 간파하고 말았던 것이리라"(25쪽)를 토해내기 위한 시선인 것이다. 고향의 이발소에서 가업을 이어받아 이발사가 된 소꿉동무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맡기는 사람이 비단 시인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듯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오래된 친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은, 곧 그 이발사가 자신이 고향을 떠나있는 동안 걸어왔던 길들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구두쇠 "전생에 나는 구두쇠였다/ 한 오리의 마음도 빼앗긴 적 없었다"(42쪽) 진이정은 전생에 구두쇠였으나 "여전히 나는 구두쇠이다"(43쪽)에서 말하고 있듯 지금도 구두쇠이다. 그는 결코 이 세상에 백 번 천 번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코 한 오리의 마음도 빼앗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구두쇠인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단 한 오리의 마음도 빼앗길 가치가 없는 절대 불신의 대상이며 부정의 대상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원한다. "누구라도 문을 열어/ 이제 확실히 말해다오/ 내가 사는 이곳은 / 사랑의 북극인가 남극인가/ 나는 감정의 펭귄인가 에스키모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곧 대답을 바라는 물음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난 내 욕정의 조국에만 충실할거야, 난 내본능의 비상소집에만 응소할 테야, 그리하여 난 내 작은 조국의 강역 내에서만 행복할 테지"(30쪽)라고 말하며 결코 이 세상에 흘러들어가지 않을 자신을 보여준다. 자신의 욕정의 조국에만 충실하고 싶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자신의 내부로 밀려들어오는 외부의 것들을 있는 힘껏 밀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이정은 <사람, 노릇,="" 하기란,="" 너무나,="" 힘들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영원한 구두쇠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버리고 오로지 단 한 권의 시집만을 남기고 가버린 건지도 모른다. 영원한 구두쇠로 남아 거꾸로 선 꿈을 꾸기 위하여.사람,>거꾸로>거꾸로> |
| 문득 나는 이 시인의 시집의 뒷켠에 있는 유하의 글을 먼저 읽었다. 진이정시인과 2인동인을 하며 서로 습작을 하던 시절. 그리고 진이정시인의 죽음으로 인해 아쉬워하고 진정 뻥 뚫린 존재의 부재에 대해 절규하는 유하의 글은 읽지도 않는 시들을 절절하게 읽게끔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성욕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시인의 어투에서 오히려 거꾸로 서버린 자신의 꿈,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당당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와 시에 대한 괴로움이 묻어있는 시들은 그 서정성으로만해도 기형도의 시를 압도할만 했다. 때론 과학적인 태도가 옅보이는 몇편의 시는 진지한 시인의 모습이 그려졌고, 시대에 대한 절규는 그가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는 것을 안타깝고 원망스럽게까지 여기게 했다. |
| 지금은 세상에 없는 진이정 시인을 생각해본다. 내가 처음 그의 시를 본 때가 언제였던가. 햇수로는 3년 전이라고 생각된다. 꽤 여러 편의 시를 외던 선배의 입을 통해 말이다. 그 시는 '시인'이었고, 이 시선집에 수록된 첫 시이다. 짧기도 하거니와 내용이 어렵지 않아 금방 외우게 되었다. 특히 '시인이여,/토씨하나/찾아 천지를 돈다'하는 첫째 연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시 한편 써보겠다고 맘먹은 터였지만, 이 구절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게는 그 정도의 소질도 끈기도 없었다. 시집은 소설과 달라 시집 한권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좋은 시 한 두편 남긴 시인일지라도 시집 전체에서 통일된 그 무엇이, 아니면 전반적인 시들이 수준이하라면 절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무성한 가운데 나는 '시인' 다름으로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를 펼쳤다. 이 시는 번호를 붙였는데 총 10편이 있다. 진이정 시인은 무게를 잡는 시인은 아니었다.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악함인가/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나는 천수경을 외었다/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훈제 통닭의 일생이여'(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1 1연 중에서) 잔뜩 철학적, 종교적 어휘를 구사해 놓고 결국은 훈제 통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하이틴, 감성 시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이 시집의 발문을 쓴 사람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시집을 낸 유하이다. 유하 역시 무게잡기 보다는 뒤틀고 풍자하기를 좋아한다. 진이정 역시 삶의 어두운 부분을 이리저리 짚어 보고 있다. 그러나 진이정 시인은 이미 타계했다. 그의 시에 죽음의 예감이 들어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책의 어조는 분명 즐거운 어조가 아니다. 풍자는 재미있지만 끝맛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리고 시가 제법 긴 것들이 많은데, 시를 읽어가면서 한 구절에만 의미를 갖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를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이든 같겠지만, 여기있는 시편들을 재미있고도 의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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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거지」
내겐 추억 없다 찰나 찰나 연소할 뿐 하얀 절망의 재도 한땐 창창한 나의 추억이었으리라 지금의 추억에 살고 지금의 추억에 사라진다 지금에게 추억의 주소를 묻는 시골영감의 순진함 추억으로 가는 지하철은 음탕하다 서로 비벼대며 참을성 있게 추억한다 가지 않는 자여 추억의 고자여 추억의 재가 날리는 아침 크게 심호흡하라 난 추억 실조에 걸려 있으므로 내 옛연인만은 추억이 아니리라 기억의 사다리 타고 일천구백유십사년의 지붕으로 올라간다 아직 내 연인은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른다 죽으러 가는 백마부대 용사들이 하얀 말 대신 트럭 타고 간다 눈물 대신 노래 부르며 간다 나는 그 가사들을 전부 기억한다 용사들의 겁에 질린 고함마저 용케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그러므로 악몽이다 다행히다 내 연인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해머 대신 싯누런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고 있다 어느새 추억은 해바라기처럼 치근덕댄다 추억의 까아만 씨앗들로 주전부리하다보면 나도 몰래 또 어른이 되어 있다 추억 다오 나는 추억 거지 나는 추억 부랑자 내 앞의 줄이 끝이 없구나 추억 되지 않으려 필사적인 최신유행들, 쉼 없는 첨단이여 전위여 촌스럽게 기다리련다 추억 다오
인간에게 공포를 안기는 것 중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어가다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비추어 말하자면 인간은 기억하지 못할 때 죽는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추억은 기억에서 끌어 올리는 삶의 한 부분이다. 진이정 시인은「추억 거지」에서 ‘기억’과 ‘추억’에 대해 나름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기억’을 그저 과거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추억’은 미화된 경험으로 비추고 있다. 기억 속에 추억이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미화된 기억 즉,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시 속의 화자를 통해 “추억이 없다”고 말한다. 이유는 “찰나 찰나 연소할 뿐”인 행동에 있다. 미래에 추억할 현재의 기억을 ‘지금’ 소진해 버리고 “지금의 추억에” 스스로 사라져 버린다. 스스로 추억의 고자가 되어 추억 실조에 걸려있다. “연소해 버린 추억”은 재가 되어 날리지만 화자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죽으러 가는 백마부대 용사들이” 눈물을 대신해 부르는 노래 가사들은 전부 기억한다. “용사들의 겁에 질린 고함마저 용케 기억한다”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악몽으로 자리한 기억이다. 악몽의 기억 시대에 사랑하는 내 연인이 태어나지 않아 다행으로 여기는 화자는 기억의 “아버지의 해머” 대신 “크레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고 있는”추억을 꺼낸다. 추억은 화자를 성장시키고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양식과 같은 것이다. 시인이 기억을 구걸하는 거지가 아니라 추억을 구걸하는 거지를 내세운 이유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한 끼 식사와 같은 것, 그 추억을 먹고 사는 화자 앞에는 줄의 끝이 없다. “추억되지 않으려 필사적인 최신 유행가들”처럼 화자도 필사적이다. 결국, 화자는 살기 위해 추억한다. 추억이 사라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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