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리얼리즘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른바 TIMES의 사진 같은 사진들 말이다. 전쟁의 참상이 생생하게 드러난 사진들, 학살의 현장, 주린 배를 드러내고 죽어 가는 어린아이들의 불거진 뼈, 폐허가 된 도시들, 남루한 표정의 노인들. 이런 사진들을 보는 순간 눈시울은 뜨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세계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고통스러워지므로 이런 사진들을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리얼리즘 사진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애써 간과하고자 하는 세계의 정직한 모습이며 실상일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은 위험한 상황에서 몸던져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작가들의 손에서 어렵게 찍혀진 사진들이고, 그 한 장의 사진은 말없이 세계를 증언한다. 그리고 건망증이 너무 심한 것이 흠일 뿐인 대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을 잠시, 아주 잠시 괴롭히는 것으로 그 임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사진들은 쉽게 우리의 눈물을 자아낸 것처럼 또 쉽게 잊혀진다. 어쩔 수 없이 눈물은 일정 정도 우리의 면죄부이다. 눈물을 흘리고,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는 뿌듯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사진을 찍은 작가의 눈높이에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사진들의 작가는 보통 서방의 기자들이거나 사진작가이다. 참혹한 현실에 몸부림치면서 사명감으로 찍어낸 사진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좀 봐라. 불쌍하지 않느냐. 끔찍하지 않느냐. 부끄러워해라.''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애이며, 그 미묘한 차이는 굶어죽은 수백 명의 난민들을 굽어보고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구부려 땅에 앉아서 그들이 죽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흐릿한 하늘을 함께 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리얼리즘 사진은 나를 울리는 것이 아니라 퍼뜩 놀라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정범태는 첫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나를 놀라게 했다. 첫머리에 적은 강운구의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그의 사진은 리얼리즘의 입장을 고수하고 5,60년대의 어려운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내 눈물샘을 제외한 구석구석을 건드려 놀라게 했다.
표지 사진으로도 쓰인 1956년 만리동의 사진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벽돌 벽을 배경으로 기댄 초로의 사내. 복장은 적당히 남루하다. 물론 사내의 모습에서 빈곤과 피곤의 흔적은 무수히 묻어난다. 놀라운 것은 그 옆에 서 있는 말인데, 희번득한 눈과 헤 벌려진 채 재갈 물린 입이 더욱 그렇다. 말은 지독하게도 제 주인을 곁눈질하고 있다. 사내는 관심없이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듯하다. 둘은 서로를 비유하며 동시에 서로를 대조시키고, 그 광경은 가슴을 선득하게 한다. 50년대, 60년대 - 말할 것도 없이 사진들이 담고 있는 풍경은 폐차에서 놀고있는 까까머리 코흘리개 아이들의 뚱한 표정, 남비를 들고 배급 - 우유가루거나 옥수수죽이거나 했을 - 을 타려고 줄 서있는 아이들,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려고 몰려든 마을사람들, 폐허가 된 집의 쓰레기더미, 시장, 닭전의 잘려진 닭발들이 죽 걸려있는 풍경, 짚신장수의 주름잡힌 곤한 표정들이다.
이 표정들, 너무 많은 표정들이 나를 짓눌렀지만 그것들은 아무 것도 한탄하거나 울부짖지 않았다. 그의 사진은 결코 암울하지 않다. 다만 무언가를 - 어떤 표정들을 환기시킬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의도도 들어있지 않다. 시대의 모습,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자화상을 그려내면서 그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어떻든 적어도 그의 사명감은 ''찍는''다는 행위 자체에 녹아있는 것이지 사진 위로 슬며시 머리를 내밀어 표정들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사진들 앞에서 사실 무척이나 낯설어 했지만 순간마다 놀라면서도 한 장 한 장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바라보면서 나는 조금씩 그 안으로 진입하는 나를 느꼈는데,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남루한 표정들은 가슴 아프기에는 너무나 내게 가까이 있었고 내가 손을 뻗어 만지려고 하는 순간, 나는 사진 밖에 있었다.
이만큼의 거리, 이만큼의 높이는 단지 적절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언가 건드리기 힘든 것이 있는 듯하다. 그 거리와 높이가 피사체, 아이들이며 노인, 짐진 사람들까지를 함께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은 지나치게 정지해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의 멈춤도 휴식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혹은 둔중한 무엇이 가슴에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이는 정지이다. 다음 순간, 아이가 하품을 그치고, 고개를 숙인 사내가 일어서더라도 그의 사진은 여전히 정지해있을 것이며 비슷한 울림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의 특징이 ''바로 이 순간'' 의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그의 사진이 사진이되 변하지 않는, 아니 적어도 5,60년대, 70년대까지 내내 고여 있거나 어딘가에 박혀 그대로 있는 그 무엇 - 무표정한 듯한, 움직이지 않는 듯한 그것까지를 담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사진들은 움직여 가면서도 내내 멈춰있다. 그 멈춰있음은 숨막히지만 나를 끌여들여 나역시 숨 멈추고 정지하게 한다. 제차 정지, 모두 숨죽인다. 갈피마다 멈춘 시간들이 이쪽을 건너다보고 있다. 나도, 붙박힌다. [인상깊은구절] -- 가난하기 때문에 암울하다거나 절망스럽다거나 한 것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참담 하던 시대 상황,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도 진지한 삶을 사는 이들로부터 정범태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휴머니티를 추출해 내고 있다. -- 남루한 상황을 포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들은 골격이 큰 사람 같은 건장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 역시 카메라만 가졌달 뿐 그들과 똑같이 가난하다는 동류의식과 직선적인 정직한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운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