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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이고 평온한 방법으로 행복한 가정을 잘 일궈 나가는 백인의 삶에 갑자기 끼어들어(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근원적인 붕괴를 일으키려 드는 흉악한 흑인 역으로 새뮤얼 L 잭슨이 또 나온다. 공교롭게도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시각 슈퍼액션 채널에선 1995년작 <다이 하드 3>을 틀어 주고 있는데, 어제 리뷰에 적은 대로 '전체적 맥락을 아직 보지 못한 어린이' 가 행여 이 세 편을 내리, 짧은 간격만 두고 관람하기라도 하면 어떤 왜곡된 생각을 가질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요즘은 그만큼 컨텐츠가 많이 생산되는 시대이며, 그토록 방대한 범위의 모집단에서 특정 표본만 '치우쳐(biased)' 추출했을 때 어떤 불합리한 결과가 나올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애 같은 생각을 가진 어른도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영화는 은근히 지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을 교란한다. 교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남한테 선동되기가 이렇게나 쉬우니 알아서 각성'할 것을 권고까지 하고 있다. 처음에 관객들은 검사 미치가 음주 운전을 하면서 보행자를 자신의 차로 친 후, 자신의 모든 경력이 파괴될 결과가 겁나 뺑소니 치는 과정을 다 지켜 보았다. 빛나는 경력을 잘 가꿔 나갈 것, 소중한 가정을 지킬 것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우려했을 뿐 마음의 본바탕은 착한 이라는 걸 관객들은 납득하게 되는데, 검사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뺑소니 사건 보고 들어 온 것 없는지 알아봐요'라고 지시하는 얼굴과 어조에서 그 점이 역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라는 건 감독의 의도임이 분명하나 과연 도미닉 쿠퍼가 제대로 잘 연기했는지는 평가 유보).
용의자(이런 걸 두고 유주얼 서스펙트라고 부름)가 곧바로 하나 걸려 들어온다. 흑인(!)인데다 인상도 험악하고, 전과 사항도 남한테, 그리고 당국자들에게 이런 의심을 부르기 넉넉하게 채워져 있다. 아, 미치 검사는 하늘이 돕는 사람이다. 911에 자신의 신고 육성이 녹음되어 있기까지 한데, 어디서 이런 호구가 굴러들어와 긴급한 혐의를 벗기 쉽게 생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미치가 밉살스러워 별로 감정이입하고 싶지 않은) 관객들은 차가운 눈으로 그의 행보를 계속 주시한다. 다행히도 검사는 이지 빅팀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지 않고, 경력 손상(미미한)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건 껀수를 잡아(혹은 태업으로) 이 자를 무죄로 풀어주려 든다. 지가 바로 범인이라는 걸 자신도 알고 구경하는 관객도 알며, 나중에 나타나는 의붓형도 알기 때문이다.
보는 관객들이 '이 깜둥이가 범인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작품 속에 마련된 우주에서 어느 상식적인 시선과 의식이라 해도 저 전과자에게 혐의를 둘 것이라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보려고 들면 숨겨진 객관적 진상이야 무엇이든 꼼짝없이 흰것도 검은 게 되고 마는 법이다. 이런 재미있는 장난질을 감독은 작품 속에서 여러 번 치고 있는데, 한번은 DA Office에 찾아온 경관들 앞에서 '아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고개를 떨구는 순간 진짜 용무가 있던 다른 검사가 나타나 그들을 끌고 가는 씬이다. 다른 한 번은 진짜 파멸의 순간이다 싶은, 상대측 변호사가 신고 장본인이라며 '백인이고 30대 남성입니다!를 외치며 이 법정에 출석한 누군가를 지명하려 할 때이다. 이번에야말로 미치 본인이나 구경하는 관객이나 끝장이 다가왔구나 싶을 때, 호명된 사람은 (그럴 수가 없는데도) 지가 신고했다면서 성큼성큼 나서서 판사의 심문에 응한다.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미치 검사는 하늘이 돕는 이임에 틀림 없으려나.
영어로 reasonable doubt라고 하면, 형사법상의 심리 원칙, 혹은 기준 중 하나이다. 정확하게는 beyond reasonable doubt라고 해서 하나의 어구를 형성하는데, 아주 쉽게 말하면 '냉정히 생각해 볼 때 미심쩍인 구석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근거 없고 막연한 의심이 들며 느낌이 안 좋다' 정도로는 부족하며, 반대로, 겉으로 드러난 바가 너무나 허술한데도 이를 의심 없이 넘겨서도 안 된다는 게 저 어의의 상한이다. 영어 위키에는 증거 성립의 기준이라고 일단 나와 있는데(그리고 형사 사건에서 검사에게 입증 책임이 원칙적으로 부여된다는 점에서 주로 기소하는 당사자 관련이라고도 기술되어 있으나) 사실 case의 성립, 완성을 주 목표로 삼는 저들 법제에서 매우 널리 쓰이는 표현이고 원칙이다. case가 뭘까? 한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개념 중 하나인데, 객관적(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무관하게(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이 판단하기에 '전개와 이해에 무리가 없고 그럴싸하다 싶은' 하나의 스토리(여러 증거에 의해 물론 뒷받침이 되어야 할)를 가리킨다. 검사건 변호사건 자신의 case를 판사와 배심원 앞에서 더 그럴싸하게 완성시키는 측이 재판에서 이기는 것이다(캬 설명 쩌는구만). 그래서 그 형식적 부당성을 도저히 감당 못하는 사람들은 (이하 생략)...
감독의 장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의문을 품는 게, 분명 검사가 범인인데도 어디서 대체 가짜 증인이 튀어나온 것이며, 혹 다른 흑막이 있다면 왜 저 흑인은 이를 구실로 검사를 두고두고 협박할 좋은 빌미를 하나 잡고도 그냥 터벅터벅 법정 밖을 걸어가는 걸까? 미치는 나가는 흑인을 떠보기 위해 가로막고 질문을 던진다. "(만약 아니라면) 진짜 신고자가 나서든지 하겠죠?" 이에 대한 흑인의 대답은 섬뜩하다. "(신고자가 당신이라면) 그러겠소?" 원 영어 대사는 간명하게 "Would you?"라고만 해서 더 무섭고 더 모호한데 한국어 자막은 보는 이들이 못 알아챌까봐 친절하게 풀어 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진짜 사연, 진짜 숨막히는 스릴러의 본체는 지금부터 전개된다. (하지만 모두 스포일러라서 리뷰는 여기서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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