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초 혼돈과 혁명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지극히 평범한 회계원인 시메온의 인생사가 펼쳐진다. 1910년대의 러시아의 사회상이 지금의 우리들에겐 낯설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것 같다. 시메온이라는 인간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19세기이든 훨씬 앞선 어느 옛날이든가에 관계없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내면의 모습인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평이나 옮긴이의 짧은 글을 읽다보면 시메온을 ‘말하는 해골’ 즉 이비쿠스와 같은 악의적이고 타락한 인간으로 동일시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메온의 모습 곳곳에서 나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보는 듯 했다. 시메온은 그가 속한 세계에서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막연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걸 이룰 특별한 길이 있으리란 생각이나 노력같은 건 애당초 하지 않는다. 단지 믿는 건 어느날 손금을 봐준 짚시 여인의 부자가 될 거라는 말뿐이다. 그건 그에 대한 어떤 확신이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잡히지 않을 신기루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에 가깝다. 그럼에도 놓아버릴 수 없는 쓸데없는 기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칫 희망없는 삶의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실망과 기대를 동시에 느끼며 여전히 복권판매대에 긴 줄을 선다. 우리와 시메온이 다른 것은 단지 시메온에게 기회가 우연히 왔다는 것 뿐이다. 물론 그 기회 앞에서도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택하겠는가? 그리고 우연챦은 기회 앞에서 양심을 저버렸다고 해서 과연 그에게 우리는 떳떳하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시메온은 그 갈림길들에서 많은 부분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난 동정심을 느낀다. 그의 뒷모습은 여느 소시민의 그것들과 아직도 너무도 흡사하다. 세상에 대해 떳떳할 수 없이 주눅들고, 혼돈과 공포앞에서 맞서기보다는 제 몸 하나 숨을 자리를 비굴하게 둘러보는 나약한 그의 너무나도 작고 초라한 뒷모습에서 ….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느끼게 된다. 내게도 그와 같은 기회와 갈림길이 찾아온다면 나 역시 또 하나의 이비쿠스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 같다. 우리 안의 이비쿠스는 단지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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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라바테의 멋진 책 <이비쿠스>를 2권까지 읽었다. 알렉시스 톨스토이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내용을 섬뜩하리만치 잘 잡아낸 그림이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유럽권의 우수한 만화들이 속속 국내에도 소개가 되고 있어 참 반가웠다. 자주 접할 수 없던 느낌의 그림들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비쿠스의 삽화는 흑백이다. 담채와 아크릴 기법을 혼합했다고 하는데, 난 아크릴 기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고, 담채의 느낌은 매우 강하게 읽혀졌다. 흐릿하게 수묵이 번지는 듯한 선에서 오는 묘한 느낌이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주인공 시메온을 비롯한 인물들도, 그들의 움직임도, 흐느적거리는 듯 한 방향도, 어수선하고 혼잡한 글의 시대상황에 더 극적인 느낌을 실어주었다.
날카로운 펜의 세밀한 묘사가 아닌데도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과 움직임의 변화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동감있게 전해져왔다. 내용도 그렇고, 잘 짜여진 구조의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림이 주는 강렬함이 오히려 영화보다도 더한 시각적 자극을 주는 것 같다. 세상엔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 많다. 라바테도 그중 하나이고..앞으로 시메온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되는 바도 있긴 하지만, 빨리 보고싶다. 그의 앞에 펼쳐질 수많은 격변속에서 그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말 그대로의 이비쿠스가 될런지... [인상깊은구절] 이 세상이 불과 피 속에서 무너질 때, 전쟁이 집 안으로 번질 때, 형제가 형제를 죽일 때, 그대 부자가 될 것이다! 그대, 고생 끝에 부자가 될 것이다! 내 이 배가 야윈 만큼... ...내 젖이 말라붙은 그 만큼 더 부자가 될 것이다... 자. 이젠 가라! 이 모든 게 다 그대의 운명,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가라! 그대, 위선자에 불과하나 말하는 해골, 곧 이비쿠스 별자리를 타고 태어났구나... 서둘러 준비하라! 이 이야기는 곧 시작될 것이다, 뛰어라!이비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