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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공간> -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길 인식론적 단절과 불연속 저자가 푸코를 분석하며 ‘주체의 공간’에서 ‘담론의 공간’을 길어 올리는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분절점’은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일 것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은 단순히 과학사(특별히 물리학사)의 과학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으로 ‘인식’의 본질을 규명한다. 선험적 현상학으로 일괄할 수 있는 주체 철학은 인식 주체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존재하는 것이 인식의 대상이라고 본다. 예컨대, 우리가 사과를 본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과 그 자체이다. 그러나 눈의 시세포에 의해 구성된 사과는 사과에 의해 반사된 빛들의 모임인만큼 이 빛들의 모임을 사과 그 자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의 인식이 도달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칸트는 ‘물자체’라고 불렀다. 푸코는 바슐라르를 빌어 이 ‘물자체’의 성립 근거를 ‘인식론’의 전환으로 돌파한다. 실제 인식의 대상은 인식 주체와 맞닿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사과’ 그 자체가 아니라 ‘사과의 어떠어떠함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사과의 붉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사과의 모양과 사과의 맛을 인식한다. 이 ‘어떠함에 대한 것’은 언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이 언어적 차원은 필연적으로 사물로부터의 단절과 불연속적 도약으로부터 가능하다. 그 사과의 어떠어떠함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의 그물 속에 그 사과에 관련한 일정한 봄을 삽입시킴으로써, 그 결과를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인식의 틀, 즉 공간적으로 다양하게 교차하고 시간적으로 누적되어 온 수많은 인식 요소들과 관련시킴으로써 그 사과를 일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인식론적 단절과 불연속은 ‘사건의 우발성’을 지지한다. 예컨대, 어느 누구나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 떨어지는 사과를 본다고 뉴턴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러더퍼드가 했던 실험을 똑같이 재현한다고 해서 그 실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뉴턴과 러더퍼드의 발견이 통찰과 직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면, 인식의 근본적 성격이 단절과 불연속에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뉴턴과 러더퍼드야말로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얻은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과학의 본성 후설은 과학의 추상성과 빈곤성을 비판한다. 과학자들과 무반성적 철학자들이 생활세계에 관념의 옷을 입히고 그를 생활세계보다 더 참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과학은 어떤 사과에서 색깔, 향기, 맛 등을 제거하고 하나의 화학식으로 표현한다. 과학은 사과의 질적 풍요로움을 사상해 버리고 하나의 공간적 표상으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푸코는 도리어 후설이 과학에 대해 소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과에 대한 화학적 파악 속에는 우리가 감각으로 포착하는 사과의 질보다 더 풍요로운 어떤 것이 들어 있다. 사과의 모양, 색깔, 향기 등을 훨씬 넘어서는 갖가지 존재 양태들이, 나아가 그 양태들이 변화하는 과정들까지도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미시 세계를 추상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시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운동 양태들의 많은 측면들을 가능성의 차원, 시간의 차원에서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후설은 과학적 사유에 도달하기 위해 버려야 할 그 부분을 바로 과학의 본질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후설의 과학 비판을 답습하고 있으며,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으로 나누어 이성을 비판할 때조차도 과학이 지닌 환원론적 기계론의 특성은 변함없이 과학은 구원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리어 과학의 본성에 천착하는 이들은 ‘과학 지상주의자’라는 어설픈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푸코의 입을 빌려 인식이라는 본질을 재규정하면서 이 오명을 단박에 벗겨낸다. 메타과학의 길 이 책은 이정우 선생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선생의 철학적 맹아라 할 만하지만 대중적으로 더 알려진 일련의 강의록에 비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오래된’ 책이 지금에서야 새로운 것은 막연했던 바슐라르의 인식론과 그 흐름의 푸코를 소개하며 내게 새로운 논리적 준거를 각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에서 인문은 여전히 주체철학의 자장 속에 있다. 따라서 주체철학은 여전히 반과학적이며, 또한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대안에 골몰한다. 물론 인문과학의 게으름만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자연과학 역시 미국식의 실용적이며 도구적인 역할에만 머물면서 과학과 역사를 통찰하는 ‘메타과학적’ 전통과 도전이 희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한 바슐라르로부터 현대 과학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영역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면서 메타과학의 길을 걷는 철학자들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자신이 문과인지 이과인지 고민하는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축복받은 이들일 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