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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필요성으로 시작해서 연구 결과의 활용 방안과 기대 효과로 끝나는 연구계획서를 마무리 지은 바로 그 날, 이 책을 읽었다. 연구계획서는 이 연구가 도대체 왜 흥미로운지 보다는 이 연구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써야 한다. 작성 요령에는 경제적 효과, 사회적 효과를 계량적으로 쓰라고 친절히 설명한다. 그래서 쓴다. 국민의 세금을 쓰는 연구이니 그저 내 호기심이나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연구가 무언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준다고, 즉 쓸모가 있다고 '믿고' 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그렇게 몇 년 (수개월인 경우도 없지 않다) 연구한 결과가 그런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가 들기 마련이다.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 때도 없지 않다.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재빨리 머리를 가로 젓고 내 연구의 쓸모 있음을 스스로 납득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구 계획서를 마무리지을 수 없고, 물론 엄청난 경쟁률의 연구비 심사를 통과해야 하겠지만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연구를 할 수 없음은 둘째 치고, 실험실의 대학원생들 등록금이며 푼돈에 불과한 생활비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내 연구는 쓸모가 있다.
그런데 좋은 연구란 정말로 그런 경제적, 사회적 효과를 당장에 가져오는 연구일까? 당장에 어떤 쓸모를 찾지 못하는 연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누치오 오르디네의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있음』은 기본적으로는 인문학에 관한 얘기이고, 교육에 관한 얘기지만 결국에는 나의 이런 혼돈에 대한, 여전히 혼돈스런 답이기도 하다. 쓸모 없는 것, 즉 당장에 이익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그런 것들의 유용함을 설파하는 수많이 고전들이 등장한다. 그 글들은 고결한 진리, 참된 진리, 진짜 삶을 이야기한다. 유용성만을 추구하는 삶은, 활동은 비루하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이다. 그렇게 쓰고 있다. 옳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당장에 문학보다 실용서를 찾아 읽는 이들도 이것이 옳다는 것은 심정적으로 안다.
하지만 여전히 공허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상황이 바뀔까?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과연 고전에서 나올까? 인문학에서 나올까? 고민은 어차피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을 이 책에서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유용한 쓸모 없음'에 대해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저자들이 얘기했다는 것은 그 때도 '유용성'에 대한 경도가 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유용성만을 좇는 삶에 대해 비판을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별로 유용하지 않은, 훌륭한 문학 작품도 나왔으며, 훌륭한 기초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쓸모 없는 것들에 대한 위기감이 최고조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유용한 쓸모 없는 것들이 나오고, 그저 흥미를 위해서 연구한 결과가 나중에는 엄청나게 유용한 것으로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맥스웰과 헤르츠의 연구가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쓸모 없는 것들은 여전히 쓸모 없다고 경시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쓸모 없는 것들을 붙잡고 쓸모 없음의 유용성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또 쓸모 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어느 쪽이든 쓸모 없는 것이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 쯤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인류의 역사 동안 우리가 쓸모 있는 것만을 추구했다면 지금 쓸모 있는 것을 추구하는 수준이 지금보다는 엄청나게 낮았을 것이다. 쓸모 없음은 쓸모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쓸모 없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쓸모 있게 되는 찬란한 순간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 쓸모 있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야말로 일단 '유용성의 프레임'에 갇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걱정이다. 어찌 되었든 연구의 필요성, 활용 방안, 기대 효과를 잔뜩 쓴 연구 계획서가 쓸모 있다고 평가 받을지, 쓸모가 없다고 평가 받을지. 나는 이중적이다. (2015.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