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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에는 이게 뭔가 싶은데, 다 읽고 나면 그만 먹먹해진다. 그런 것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헤매었던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머물렀던 것이구나...... 내 마음이 그렇게 흔들렸던 것을 뒤늦게 깨닫는 심정으로.
또 이 작가의 표현 방법은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 정도로 계속되면 지루할 법도 한데,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명확하기만 한 것에는 지나친 자만이나 무시하는 태도도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니 자신없는 듯 분명하지 않은 듯 망설이는 듯 표현하는 작가의 문체가 더 좋아진다. 이런 게 바로 매력일 것이다.
고아, 부모가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결국 고아가 된다. 나이가 적고 많고의 차이가 있을 뿐. (아, 고아가 아닌 채로, 부모를 남겨 둔 채로 먼저 세상을 떠나는 자식도 있으니 모든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아니겠구나. 그 경우는 고아보다 더 슬픈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나는, 이만큼의 나이를 먹었음에도 아직 고아는 아니다. 엄마가 살아 계시니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내가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만으로 감히 추측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어려서 부모를 다 잃은 사람의 마음은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특이한 배경 설정이라고 보았다. 어려서는 상하이에서 살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부모를 모두 잃고 영국으로 가게 되고, 그리고 영국에서 자라 어른이 되고, 다시 부모의 흔적을 좇아 상하이로 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일생. 전개되는 이야기도 색다르다. 다른 소설들에서 중요하게 다룸직한 사건들은 이 소설에서는 모두 생략된다. 대신에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들을 중요한 것처럼 다루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 흐름이 몹시도 재미있다. 이런 재미를 느끼면서 읽고 있는 내가 다 신기하다. 내 독서 이력에 이런 경험이 있었던가.
역사조차 슬쩍슬쩍 끼어 드는 모습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유럽 특히 영국의 분위기나, 1930년대 후반의 중국의 실상, 그 시절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들이나 장제스의 통치 형태가 문득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 배경들이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 점에 있어서 작가는 참으로 불친절한데, 나는 그게 더 좋다. 그 멀찍이 물러서 있는 거리감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세상은 우리에게도 이만큼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걸 모르고 친절을 기대했다가 돌아오지 않는 배려에 홀로 절망하고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고아라면 더 빨리 더 자주 느꼈을지도 모를 상실감까지.
세라에게 유혹되어 함께 마카오로 가겠다고 했을 때의 주인공은 참 마음에 안 들었다. 남자는 정녕 유혹하는 여자에게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여자의 유혹은 모든 남자에게 유효한 것일까, 뭐 이런 유치한 의문도 일으켜 보았다. 마지못한 상황 때문에 끝내 유혹되지 않은 게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전개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고아라도 세라 같은 여자, 참 마음에 안 든다. 고아인 탓이 아닐 것이다, 세라라는 여자가 그런 성격인 것이었을 게다. 그걸 고아라서, 같은 고아 입장이라고 여겨서 주인공의 마음이 흔들린 것이라면 그 또한 그의 삶의 몫인 것이고. 상대를 파괴시키는 인물, 점점 더 용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니.
나의 어린 시절, 그 행복했던 날들, 다친 기억이 없어서 참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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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200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2005년에 출간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와 유사하다. 주인공은 영국의 상류층 청년이자 유능한 사립 탐정인 크리스토퍼. 풀지 못한 사건이 없는 크리스토퍼가 풀지 못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달아 실종된 사건이다. 크리스토퍼는 1900년대 초 상하이 주재 영국 기업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의 외국인 공동 구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외아들이지만 부모님의 지인인 필립 삼촌과 이웃에 사는 일본인 소년 아키라 덕분에 외롭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크리스토퍼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회사 직원과 크게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크리스토퍼는 어머니가 중국 내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아편 반대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크리스토퍼가 열 살이 되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까지 연이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졸지에 고아가 된 크리스토퍼는 필립 삼촌의 주선으로 영국에 사는 이모 손에 거둬지고, 그곳에서 영국의 상류층 청년으로 자란다. 탐정이 되어 상하이를 다시 찾은 크리스토퍼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린 시절 자신이 목격한 어머니의 싸움 상대는 아버지의 회사 직원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이 반대하는) 중국 내 아편 확산에 일조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오랫동안 불화 상태였다. 크리스토퍼는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준 필립 삼촌과 이모의 실체도 알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누린 부와 명예는 거대한 악과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임을 알고 당혹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어린 시절 크리스토퍼와 아키라가 함께 놀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대목이다. 크리스토퍼는 아키라의 소년다운 과장이나 허풍을 꿰뚫어 보면서도 아키라의 말을 쉽게 거스르지 못한다. 아키라와 함께 있을 때는 그를 미워하거나 질투하기도 하지만 막상 아키라가 곁을 떠나면 그를 몹시 그리워하는 애증의 감정을 품는다. 1인칭 관찰자 크리스토퍼와 그의 절친이자 트러블 메이커인 아키라의 관계는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 캐시와 루스의 관계를 닮았다. 어른이 되어 상하이를 다시 찾은 크리스토퍼는 아키라를 우연히 만난다. 옛 친구와 재회해 감격에 찬 크리스토퍼에게 아키라는 엄혹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나는 일본인. 너는 영국인. 전쟁이 한창인 지금 너와 나는 만나서도 안 되고 말을 섞어서도 안 되는 사이라고. 크리스토퍼는 옛 추억을 찾아 고향에 돌아왔지만, 추억 대부분이 잘못된 추억이거나 심하게 변했거나 영영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고 허망해 한다. 옛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랄까. 진실을 깨닫고 허탈해 하던 크리스토퍼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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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지금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영국의 사립 탐정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상하이 공동 조계 구역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라지고 이어 어머니 또한 사라진 다음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숙모의 손에 자랐다. 크리스토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때때로 끄집어내고는 한다. 여장부 스타일이었으며 중국에서 아편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던 어머니, 그리고 중국으로 아편을 들여오는 역할을 했던 회사에서 일하였던 아버지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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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출판사에서 발행한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님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읽고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어릴 적 상하이에서 부모님이 사라진 기억이 줄줄이 펼쳐져요. 탐정 된 크리스토퍼의 시선 따라 가볍게 시작하는데, 회상 장면이 풍부해서 은근 몰입됩니다. 후반부엔 런던에서 상하이 전쟁터로 분위기가 확 바뀌고, 기억과 현실이 뒤엉켜요. 뭔가 이상하면서도 확 끌리는 흐름! 미스터리보다 더 묘한 감정이 남아요. |
|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름만으로 구입한 소설. 2000년에 발간됐는데 고아라고 믿고 살아가는 매력적 상류층 탐정 크리스토퍼가 불완전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약간 추리소설같은 요소도 있는데 그건 전체적이야기와는 별개의 요소이고 가즈오 이시구로 특유의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문체와 더불어 철학적인 요소도 많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대표작으로 뽑히는 남아있는나날이 많이 생각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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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중 3번째로 만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다 읽고나면 많은걸 생각나게 하고 가슴이 먹먹해 진다. 어렸을 적 상하이에서의 기억과 현재 자신의 삶에서 부모님의 행방을 찾는 일련의 과정이 중첩되어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이 소설 속에는 태어난 땅에서 부모와 함께 평범하게 자라지 못하고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책 속에서 이시구로는 크리스토퍼를 통해서 고아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 전하고있다. 책을 통해 많은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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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고아다. 그런데, 고아인줄 살아간 것이다. 장소는 영국, 중국 상하이. 아편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갑자기 1958년. 탐정노름이 이어질 것 같지만, 주인공이 탐정일 뿐 추리 소설은 아니다. 혹, 추리 소설이라고생각한다면, 좀 실망스러울 수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추리소설을 쓴 것이 아니기에. 정의로운 일을 하기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가 실종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이모에게로 가고, 거기서 먹고, 자고, 유산까지 물려받는다. 살아가는데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이. 등장하는 세라라는 여인이 있는데, 둘은 서서히 애정이 싹트는 것은 맞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도피를 꿈꾸지만, 주인공이 그만의 임무로 인해 둘은 연결되지 못한다. 아마, 로맨스 소설이 아니기에 끝까지 연결됐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제니퍼라는 여자아이를 양녀로 키운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소녀이고, 아마도 말년은 이 소녀와 함께 스토리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보기에 따라서 역사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아편전쟁, 중일전쟁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역사를 큰 소재로 하고 있지만, 역사 소설은 아니다.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 가운데 인간은 슈퍼맨이 되지 못하고, 사소한 악이나 처리하고, 혹은 자신의 부모를 찾는데 전력을 다하는 사사로운 개인일 뿐 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러한 사사로움을 허먼 멜빌과 다르게 인정한다. 모비딕에서 인간은 겨우 고래 한 마리와의 사투를 벌인다. 결국, 죽인다. 그래서 승리? 그저 큰 대양에서 소심하게 살아가는 흰고래일 뿐 이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욕망은 부질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고아였을때'는 큰 세계의 흐름 속에 인간은 모두 고아라는 것을 상징한다. 고독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없어서 고아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주인공은 그렇겠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은 고독한 자아이다. 즉, 고아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아가 불쌍한 운명인가? 저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적어도 독자인 내 관점으로는 그렇지 않다. 순응도 아니다. 그렇다고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전사와 같은 강렬함도 아니다. 그저 순간순간 융통성 있게 살아가는 개인일 뿐 이다. 선과 악은 있다. 그리고 악에 대항해서 맞서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악이 거대한 것일 때 인간은 그 앞에서 멈칫 거리거나, 소소한 정도의 것 밖에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그렇는 않다. 또 다른 선을 위해서 나아가면 된다. 물론, 개인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작지만, 희망은 있다. 어차피 사회는 개인의 집합 아닌가? 유능한 탐정은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 이다. 본문 속에서도 그저 본인을 탐정이라고 할 뿐 이다. 그래서 부모를 찾을 때도 자신이 어린시절 가지고 있었던 기억과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찾는다. 결론은 아버지는 의로움이 아니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바람이 난 것이었고, 어머니는 성적 노예가 되는 것을 감당하면서까지 주인공을 위해 헌신한다. 아편에 대한 폐해를 막기 위해 애썼던 부모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당장의 '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따라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혹은 타협하게 된다. 작가는 이 타협을 중립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독자들도 이 타협을 비판하기 힘들다. 교전 속에서 발견한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일본인 친구를 만난다. 그와 함께 부모님이 갖힌 곳을 찾아 간다. 일본인은 무서워한다. 중국인들을 만날까봐 숨지만, 일본군을 만나서도 좋은 표정을 짓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첩자에 불과했기때문이다. 주인공에게는 정말 좋은 친구였겠지만, 군인들에게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다. 작가는 모든 인물들을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하게 만든다. 세라라는 여자도 마찬가지고,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각기 양갈래길이 나왔을 때 이들의 선택은 주관적이 되는데,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한 개인에게 왜 그렇게 했냐고? 현재에서 물을 수 없게 만든다. 과거에는 어쨌든 그것이 옳은 것이었고, 혹 옳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고 대답할테니 말이다. 읽는 동안 왠지 주인공과 작가가 비슷한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역자의 말에서 유사한 점을 찾기도 한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때 인간은 낯섬도 느끼고 외로움, 고독을 느낀다. 부모님들이 계시다고 해서, 좋은 친구가 있다고 해서 이 부분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이 적응할 때까지 이 부분은 늘 해결되지 않는다. '혼자', '고독'을 충분히 겪고 나서야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내가 적응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혹은 타인의 영향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을 통해 몰래 정리한 것일 수도 있다. 개인은 그 상황에서 정말 괴롭고 세상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정말 큰 세상은 자신의 고독과 외로움에 관여하지 않고 잘 흘러간다. 즉, 고아가 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거대한 흐름에 대항하지 말고 개인의 삶을 잘 붙들고 살면 되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내가 별짓을 다해도 세상의 악은 더 거대해 질 것이고, 내가 소소한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거대한 선은 유지 된다고 생각하면서 개인적인 삶에만 신경쓰면서 살면되는가? 작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인공의 세계흐름에 대한 무지를 비판했지만, 그러한 악을 경멸하고 조금이라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표현해 주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가? 그 부분은 내가 읽었던 작가의 책에서 그랬듯이 독자의 몫이다. 부모를 찾지도 못하고,(찾긴 했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부모는 아니었다.)사랑도 했지만 결국 혼자 살게되고. 이제 나이 들어서 지난 날을 과거로 추억으로 기억하며, 양녀와 함께 살아가하는 주인공.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그 판단 역시 시비는 존재하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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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은 다 원서로 먼저 접했다. 아마 일본 작가라기 보다는 영국 작가이기에 더 원서에 집착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 것이 더 좋아질 나이가 된 것인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놓친 언어의 뉘앙스들을 이제는 읽어보고 싶었던 건지. 아마 결국에는 이 작가의 번역본을 다 읽지 않을까 싶은데 첫번째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고르게 되었다. 생각보다 내가 많이 놓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고, 결말까지 다 알고있는 내용임에도 여전히 흡입력이 있었으며 주인공의 흐릿한 기억속의 감성들이 번역본에서 더 절절하게 느껴졌다. 역시 이 작가의 다른 번역본들을 찾아 볼 것 같다. 최애작가면 그럴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