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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책을 놓고 이명박 대통령과 장관이나 실무 담당자들이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조선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세종만 해도 경연에서 신하들과 갑록을박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군주로서의 학문적 지식과 소양을 쌓는 경연마저도 양반들의 공론을 전달하는 자리가 됐던 게 바로 조선시대였다. 설치된 언론기관과 관리들의 활동을 보자면 그 시대 언론의 역할에 대해 결코 낮잡아 볼 수 없게 된다. 양반들이 왕을 향해 ‘전하, 아니되옵니다’ 를 외칠 수 있는 언로만큼은 다양하게 열려 있었던 사회가 바로 조선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크게 조선의 언론과 출판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조선의 언론은 한마디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을 담당하는 기구의 활동이 보장받았고, 관리들은 높은 대우받았을 뿐더러 그들은 간쟁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수행했다.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조선의 시대정신이었고, 그것은 언론 역시나 예외가 아니었다. 언론 삼사라고 일컬어졌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명감을 갖고 끊임없이 왕에게, 조정의 관료들에게 유교정치를 간하고 정치에서나 생활에서나 유교적 덕목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역할을 했고, 왕과 관리들은 언론 삼사 종사자들의 간언과 탄핵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직 관리뿐 아니라 낙향해 있던 선비들까지 왕을 향해 상소를 올리고, 아직 학생신분인 성균관 유생들도 가능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동맹휴학 등의 방법을 통해 왕과 조정 관리들에게 유교적 정치를 실행하라는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언로는 왕이 양반들에게 일방적으로 의견을 하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양반들이 왕을 향해 의견을 올리는 상향식으로 운영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소가 사초나 실록에 기록이 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의 권리였다는 것을 공인해준다.
황제의 입장에서 관료들을 감찰하는 기구의 권한이 강화됐던 중국에 비해 조선에서는 감찰보다는 간쟁의 역할이 강조됐다는 점에서도 조선사회는 왕권이 일방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정치에 양반들의 공론과 정치에 반영되는 체제, 왕권과 신권이 합의를 이루어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양반들의 언로가 트이고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됨으로써 언론은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왕과 양반들에게 유교적 도덕성을 요구함으로써 조선시대 지배층들이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하게끔 하는 사회적 소금의 역할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조선의 언론이 본연의 몫을 톡톡히 해낸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조선이 500년동안 사직을 지켜온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대간들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당쟁에 얽혀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기에 대간들을 제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당쟁이 격화될수록 대간의 탄핵권은 정권을 획득하려는 당파간의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대간들의 교체가 가장 빈번했던 시기가 정조 때였다는 것은 그만큼 정조와 대간들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는 당시의 상황을 추측가능하게 해준다.
당시 대립각을 세웠다고 알려진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어찰이 최근 발견됐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이 편지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지만 당시 언론활동과 관련해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걸게 한다.
하지만 양반의 언로에 비하면 일반 백성들의 언로는 미흡했다.
필자는 일반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신문고나, 왕이 지나가는 앞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는 격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는 하다. 신문고나 격쟁은 백성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에 설치됐거나, 점점 이용하는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양상이 돼 일반백성들의 표현의 통로가 확대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혹자는 한성순보가 아닌 조보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조정의 소식을 담은 조보가 정기적으로 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었다. 조보 역시나 양반들이나 접할 수 있었는데 양반이 아닌 백성들로 이용하거나 접할 수 있는 언로나 정보가 한정돼 있었다는 점은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는 조선사회의 성격이나 일반 백성들이 공식 문자인 한자를 몰랐다는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언론‘이 조선왕조 5백년을 일구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치우치다 보니, 일반 백성들의 언로나 언론을 통제한 경우에 대해서는 미흡하게 취급한 감이 없지 않다. 언론을 통제하고 장악한 임금의 경우에도 태종과 세조 등 일부 임금에 대한 사례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조의 문체 반정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권력과 언론은 갈등을 빚게 마련인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넘어가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는 언론 외에도 출판에 대해서도 제법 비중 있게 싣고 있다. 조선시대의 출판은 기술적 발달과 더불어 사림의 존재가 자리를 잡으면서 활발해졌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고려시대의 지적 활동의 중심이었던 사찰이 여전히 출판의 중심이었지만 차츰 서원으로 중심지가 이동된다. 태종이 활자를 개발할 것을 촉구하고, 종이를 공급하는 조지서가 궁중 안에 설치되고, 사림들이 세력을 얻어가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서책을 보관하는 데 그쳤던 서원으로 출판의 중심이 이동됐다는 점은 서원이 유교사회에서 사학의 중심이 돼갔던 조선사회에선 자연스러운 변화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책을 남기고, 기록하는 양반들이 늘어간 것은 문사철을 겸비한 사림들의 역량에 힘입은 바 크다. 과거를 준비하면서 문장과 시는 물론이고 이기론 등 유학적 철학까지 공부해야 했던 사림들의 일상에는 이미 서적을 귀하게 여기고, 글을 읽고 쓰는 풍토가 자리 잡았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당시 양반들의 문집과 일기류가 상당하다는 것만 보더라도 양반들의 글쓰기 문화와 기록 정신에 높은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글쓰기야 말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지식인이 갖춰야 할 소양이라는 점에서 , 또 놀라울 정도로 철저했던 사림들의 기록정신 역시나 현대인들이 본받을 만한 덕목이고.
하지만 언론과 마찬가지로 출판 역시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았다. 책을 낸다는 것은 물론이고, 종이가 귀해 씻어내서 재활용했던 그만큼 서적이 귀했고, 한자 중심으로 책이 출판됐던 그 시대의 한계는 백성들은 양반들이 누리는 수준의 표현과 문화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조선후기로 가면서 한글의 보급으로 점차 누그러졌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조선시대 언론이 관연 제구실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닐 것이다.
‘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는 제목 때문이 아니라, 작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디어 관련법으로 빚어지고 있는 현정권과 시민사회의 갈등과 국가 기구를 통해 언론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란 상황 탓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개 네티즌이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고 구속되는 미네르바사태를 목격했기 때문일거다. 21세기에도 이런 상황인데 하물며 왕조체제인 조선에서야, 하는 의혹을 품게 된 것이. 권력에 대한 언론의 역할이 무엇이고 권력을 언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새삼스레 되새겨보게 된 것이. 지금의 상황이 이 책을 펼쳐보게끔 나를 재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혹을 품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론이 권력의 통제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에서, 또 독일 나치체제에 ‘언론은 정부의 손 안의 피아노’라고 생각했던 괴벨스의 언론 통제가 크게 힘을 발휘했다는 역사적 전례가 오버랩되면서, 조선시대의 언론을 삐딱한 시선으로 되짚어 보게 했다.
조선시대에도 권력을 견제하는 대간들의 역할이 건재했다는 사실만큼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최고의 엘리트들이 이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왕과 조정의 관리들에게 굽히지 않고 간언했고, 탄핵을 불사했다. 조선사회는 사대부들이 유학에 기반한 그들의 공론을 표현했고, 거침없이 왕을 향해 “저하 아니되옵니다.’를 외칠 수 있는 언로가 열려 있었다. 왕 역시나 그들의 외침을 봉쇄하지 않고 소통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이야 말로 조선사회를 유지해주는 버팀목이 됐던 것이다. 반면에 당쟁이 확산되면서, 사대부들의 공론이 아닌 당파들의 이해에 함몰되자 조선의 언론은 권력을 향한 비판과 감시라는 제 역할을 잃어갔고, 조선정국의 불안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언론이 시대정신을 망각하고 공정성을 상실한 채 특정 세력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역사는 담담하게 그 결말을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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