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합리주의 흐름 중 한 자리를 차지하는 스피노자를 배웠다. 그러나 범신론, 그리고 이성주의자 단 두 가지의 기억만이 남아있고 안타깝게도 그 기억 마저도 매우 유약하고 희미하다. 범신론이 본질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며 또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이 이끌어나오게 됐는지, 또는 이성주의자로 분류된 그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 필자는 도대체 아무런 이해도 이룰 수 없었다. 단지 교과서 사진 속의 웃고 있는 스피노자의 얼굴만이 떠오를 뿐..(--); 이 책은 난해한 철학 뒤에 숨겨진 스피노자의 얼굴을 드러내주고 있는 스피노자 입문서이다. 저자인 로저 스크러턴은 책의 시작 부분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최대한 쉽게 스피노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의도를 적고 있다. 우선,이 책은 중세 네덜란드의 유대사회의 모습을 숨가쁘게 그려낸다. 정치적으로, 과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격동하는 시기였던 그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 그리고 그것을 행하는 그의 용기있는 삶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해서 즉, 기하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적확한' 관념을 추구했던 스피노자의 사유는 '존재론적 증명'으로부터 신론, 자유론, 정치론 등으로 계속 뻗어나간다. 이 책 속에는 스피노자가 평생을 추구했던 이와 같은 주제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온화한 느낌의 태도와 철학, 그러나 사회에 맞서서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스피노자의 단호함이 전하는 느낌은 강렬하다. 특히, 그의 톡특한 신론으로 인해 유대 종교에서 배척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굴하지 않는 학자로서의 굳건함은 절로 고개를 숙여지게 만든다. 또, 종교의 세계와 대비해서 이성적인 세계로서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는 부분은 중세를 살았던 근대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그의 시대를 앞선 사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렇듯, 이 책에는 그의 사상의 체계 뿐만 아니라 인간 스피노자의 모습 또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책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80년대 이후 들뢰즈나 네그리 등의 학자들에 대한 인기가 높은데 이들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다시금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장본인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아직 스피노자와 관련한 서적들이 많이 부족한 듯 해서 아쉬운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안타까움을 다소 가라앉혀주는 소중한 책으로서 (물론 이 책이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의미가 크다. 몇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우선 첫째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갖을 수도 있는 면모에 대해서이다. 특히 범신론은 세상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있는 신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비판했던 종교의 배타적인 면모를 띨 수도 있을 듯 보인다. 둘째는, 이성의 사회적 효용에 대한 것이다. 즉, 그가 꿈꿨던 '적확한' 관념이나 이성이 이 세상 속에서 제대로 작용할 수 있을지 다소 의심스럽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이성과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상상력이나 열정들은 실제로 사회를 구성하는 주축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이러한 상상력의 작용을 멈추고 이성, 적확한 관념으로 구성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을 노력해야 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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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모르는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타임머신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이 '허무맹랑함'을 바탕으로 하여도, 그것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고전(古典)을 읽어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말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쾌감'을 넘어서, 사람과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스피노자' 많이는 들어 보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번역본이라고 해도, "윤리학(에티카, Ethica)"정도이고, 그나마 번역이 좋지 않다는 악평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가 써놓았듯이, 라틴어로 건조하게 적힌 그의 저작은 영어나 프랑스어로도 그리 번역이 잘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런 상태니까 서양의 한문(漢文)인 라틴어를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를 평생 연구할 학자도 아닌 이상, 괜찮은 개론서 한 권을 잘 읽으면, 스피노자에 대한 대략적인 모습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논어"를 읽지 않고서도, 우리는 '공자'의 모습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비록 그것이 정치(精緻)한 면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만 이 책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나 역시도 2번을 읽어도 아직까지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스피노자의 학문적인 바탕이 단순히 근대의 사상(계몽주의나 시민사회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게다가 이슬람 문명과 유대교, 중세의 신학까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사상체계가 스피노자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렇게 얇은 책을 읽어서 스피노자를 알고자 하는 것은 과욕(過慾)이 아닐 수 없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완성시켜 준 기존의 전통과 당시의 시대상황이 책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이교도적인 사상의 융합을 터전으로 하여, 스피노자는 격동기를 살아나간다. 그는 에스파냐의 종교전쟁과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갈등, 그리고 절대 왕권의 붕괴라는 시대를 겪으면서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탐구한다. '신'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던 시기에 그는 '무신론자'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했으나, 철저하게 감성을 배격하고 기하학에 바탕을 둔 이성 중심의 철학을 추구해 간다.
이성 중심의 철학이라고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과는 다른 길을 간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관찰하는 세계와 자신의 생각이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 책의 저자가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이런 관심은 19세기의 지식사회학적 관점과 유사하다. 저자는 스피노자 사상의 진실한 계승자를 '셀링'과 '헤겔', '맑스'로 보고 있지만, 이들 세 명의 사상은 저자가 밝힌 스피노자의 사상과는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자신의 신념과 사고체계를 무오류의 진리로 파악하고, 그 진리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자리매김하려 했던데 반해, 스피노자는 자신이 자신의 진리와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이는 자신의 사상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불가분이라는 '지식사회학'과 최근의 해석학적인 관심과 유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스피노자의 사상에는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의 사고체계가 어느 정도 체계적인 반면, 그의 사상에서 탈주하여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의 자연(신)관은 '완전성', '실제성', '순수 이념(영혼)'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런 사고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전면적인 거부, 아니면 복종"이다. 자신을 규율하고 있는 절대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은 결국, "자유란 철저한 복종"이라는 '지배논리'로 변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어쩌면 스피노자 사상이 매력적이면서도, 그것에 마음이 쏠리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상이 갖는 '부자유성' 때문은 아닐까? [인상깊은구절]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책은 전(前)과학적 세계관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탈주술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다. 낡은 주술과 새로운 주술을 모두 버림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진리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 속에서 신을 인정하고, 신의 작품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신의 작품들을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주술에 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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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근대, 그 안에서는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그는 그 시대(17세기)를 주름잡았던 철학자였고, 정치적인 입장을 분명히 드러낼 줄 알았던 용기있는 지성이었다. 그러나 그 혼란의 시기에 자신의 생각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어려운 삶을, 그러나 고귀한 삶을 택했다. 그런 스피노자가 20세기 들어와서 68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데, 들뢰즈, 마트롱, 마슈레이, 발리바, 네그리를 비롯한 전위적인 학자들과, 게루 등의 전통적인 주석가들이 그러한 열정을 보여줬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상당히 미래적이었으며, 니체와 함께 후기 구조주의의 경계 안밖에 존재론과 정치체 구성에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되었다. 그 축은 내재성과 potentia 개념이 중심이었다. 그런데, 영미권에서의 스피노자 접근은 좀 다르다. 여러 권의 판본이 나오면서 텍스트 정리 작업이 되었는데, 가장 권위있는 결정판은 이 책의 저자 스크러턴도 동의했듯이, 컬리의 1985년 프린스턴 대학의 판본이다. 그리고 컬리를 중심으로 요벨과 같은 철학자가 스피노자를 깊이있게 다루었다. 예루살렘 컨퍼런스도 그런 스피노자 연구에 한층 깊이를 더했다. 스크러턴의 이 책은 원래 1986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나왔던 것이기 때문에, 영미권의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는 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체질적으로 유럽의 스피노자 연구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주석가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또다른 정통적인 접근을 얇은 책이지만, 조리있게 잘 보여주었다. 비록 중반 부분의 이론적인 측면의 스피노자는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겐 어렵다. 그러나 이 부분은 스피노자 철학 자체의 어려움이기 때문에, 다른 개론서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의 생애와 그의 사유를 전반적으로, 그것도 너무 전문적이거나 너무 대중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개론서가 바라는 평이한 수준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 번 읽어본다면, 입문자들에게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몇몇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스피노자를 공부한 사람도 재밌을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일독을 권한다. [인상깊은구절] ...모든 정열의 핵심에 놓여 있는 '정신적 활동'은 더 크거나 작은 완전성, 실재성, 힘 등을 표현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암시하듯이 완전성, 실재성 그리고 힘은 동일하다. 그리고 정신적 측면에서 이것은 관념의 '적확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그 속에 포함한 관념의 '적확함'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과정의 무력한 제물로 있는 정열의 극단에서부터 사물의 진리에 대한 청명한 관조를 통해 마음이 자신의 완전성과 힘을 선언하는 정신적 활동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