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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고전이란 “모두가 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대표작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이제야 만나니 말이다. 그것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왠지 모를 미안함에 한 문장 한 문장 더 정성스럽게 읽었다. 솔제니친의 대표작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1956년에 소연방 최고재판소 군사심의관 회의에서 복권될 때까지 10년동안 작가 자신이 유형지를 돌며 경험한 수용소 생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때의 수용소 경험은 이 작품을 비롯하여 솔제니친의 다른 작품인 〈암병동〉이나 〈제1영역 안에서〉,〈수용소 열도〉등의 소재가 되었고, 현실에서 직접 목격한 역사적, 정치적 사건과 시대적 비극을 소재로 단순하고 소박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영하 수십도의 시베리아 한가운데에 있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슈호프. 수용소의 일과는 새벽 다섯시부터 시작된다. 아침에 기상해서, 점호, 식사, 강제노동에 동원되는 과정, 작업일정, 그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 등이 작가의 경험을 기반으로 지나치다시피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기록하기 어려운 글이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과 서로간의 경쟁이 존재하는 그곳도 하나의 세상이며 하나의 우주이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작품은 1970년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수여 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수용소에 수용된 여러 인간군상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의 체제와 이념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이념보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온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이념적 논쟁의 시선으로 이 작품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삶의 논리로 바라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세상과 단절된 수용소의 하루를 그리고 있지만, 어쩌면 울타리가 없는 우리네 일상을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가고,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저녁시간을 개인적인 소일거리로 채우다가 잠자리에 드는 우리네 일상도 그 모습만 달리할 뿐 수용소의 하루는 대동소이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에겐 자유가 있지만, 수용소내의 그들에겐 자유가 없다는 것만 빼고는 그들이 사는 하루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같은 시간, 같은 하루이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절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제자리 대신 순번을 맞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208쪽) 라는 마지막 문단은 이 책의 궁극적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슈호프나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닌 곳에서 지내는 우리에게도 하루라는 시간은 똑같다. 그 하루가 슈호프처럼 행운만 있거나, 아니면 불행한 일로만 가득한 하루로 편협되어 주어지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늘 하루가 자신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하루라고 했지만, 책속의 그의 하루를 따라 가다보면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일, 운이 없는 일도 있었지만 잠자리에 든 그의 뇌리에는 그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행복한 기억만 남았을 뿐이다. 우리네 삶은 행운이라는 시실과 불행이라는 날실로 엮어진 천과 같다. 행운과 불행은 거의 같은 분량으로 삶의 매순간 우리와 조우하지만 어느 쪽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만족감은 다르다. 행운과 불행 중 어떤 쪽을 주관적으로 보는냐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 의해 슈호프처럼 강제노동수용소의 정치범에게도 어떤 하루는 행복할 수 있고, 자유세상에서 좋은 음식에 좋은 옷을 걸치고 사는 누군가에게 어떤 하루는 불행 할 수도 있다. 오늘이라는 단어를 영어로는 Today 라고도 하고 Present day 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누군가에게는 어제처럼 반복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선물 같은 날인 것이다. 구태의연한 문구를 예로 들자면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살아간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에겐 간절한 내일이었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지나가는 듯한 하루였고, 누군가에겐 선물 같은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건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살아내는 것이 더 힘겨운 수용소에서 슈호프가 살아 낸 하루는 일상에서 살아난 우리네 하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하루였다. 우리네 눈으로 보기에는 행복할 수 있는 그 어떤 조건도 없었지만, 그 어느 날이 행복했고, 그런 행복한 날이 삼천육백오십삼 일이 이어지고 슈호프는 형기를 마쳤다. 수용소의 일상에서 찾아낸 소소한 즐거움이 그가 살아낸 수용소의 하루를 행복한 하루로 만들었다. 자유롭게 사는 우리네보다 더 행복한 하루로 말이다. 슈호프를 통해 솔제니친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슈호프처럼 행복하냐고!
PS : 모처럼 쓰는 리뷰가 근 보름이 걸렸다. 오랫동안 글을 안쓰다보니 글 한편 쓰는게 이렇게 힘들줄 몰랐다. 역시 글은 기술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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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호프는 항상 기상 신호 소리와 동시에 일어나곤 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그는 어제부터 왠지, 몸이 좋지 않았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오한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뼈마디가 쑤셔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몸도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도 병이 난 것처럼 한속이 나는가 하면, 다시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밤새 내내,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9쪽) 아침 다섯시가 되자 여느 때처럼 기상을 알리는 신호소리가 들려온다. 만 8년을 수용소에서 보내고 있는 슈호프이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매일 무한 반복되는 동일한 일상이지만 때로는 하루쯤 어긋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하루만큼 달라지기를 고대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름없고 또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수용소 104반 췌-854번,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 2차대전 중 독소전쟁때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했지만 반역죄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고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다. 10년이라는 기간, 그리고 8년이라는 기간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무한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단 하나의 하루일 뿐이다. 그래서 슈호프의 하루를 본다는 것은 곧 그가 겪어온 8년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 특히 러시아작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고역이다. 생소한 지명과 인명은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가는데 방해가 된다. 호흡이 긴 장편소설은 그나마 페이지가 지나감에 따라 적응이 되지만 중단편에서는 종종 맥락을 놓치고 헤매게 만든다. 아마 그래서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망설이지 않았나 싶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솔제니친에게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다. 솔제니친 또한 반정부활동을 명목으로 8년간이나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으니, 이 작품은 그가 경험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어렵게 읽기 시작한 고전이기에 이 기회에 솔제니친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솔제니친의 문학작품들은 소련의 스탈린 개인숭배와 대대적인 공포정치, 그리고 대숙청기간의 사회정치적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고 한다. 극도로 가혹한 중노동 생활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구호나 비판보다는 담담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한 인간의 비극을 그려 나가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경직된 독선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어디서 들었는지 드럼통을 가져온 녀석들이 열두시가 됐다고 알려준다. “열두시가 맞을거야” 슈호프가 말했다. “이렇게 해가 중천에 떠있는 걸 보니 말이야.” “중천에 해가 걸려 있으면 말이야……”하고 해군중령이 끼어든다. “열두시가 아니고 한시야.” “아니, 왜 그렇지?” 슈호프가 눈을 치켜 뜨며 반박한다. “모든 선조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어.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가 정오라는 것을 말이야.” “그건 그 사람들의 이야기야!” 중령이 말을 되받아 친다. “법령이 있은 다음부터는 오후 한시가 되었을 때, 해가 가장 높이 떠있단 말이야.” “아니, 그 따위 법령을 누가 만들었단 말이야?” “소비에트 정부지.”’(80쪽) 솔제니친은 슈호프라는 인물을 통해 지배권력에 의해 죄없이 고통 당하는 약자의 모습을 그려내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강제노동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을 통해 수용소 내부의 부패와 모순을 고발한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 즉 먹고 일하고 자는 가운데에서도 잔머리를 굴리며 편하게 지내려는 인물들이 벌이는 잔꾀, 뇌물, 속임수 등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비극적인 일상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당시 스탈린시대의 사회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부패된 정치권력과 모순되고 획일적인 사회에 대해 솔제니친은 슈호프로 대표되는 수용소내 인간들의 삶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체자리의 소포배급소 순번 줄을 대신 맡아준 대가로 체자리의 저녁까지 먹게 된 슈호프는 두 그릇의 국을 앞에 두고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우선, 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 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나, 기나긴 하루의 작업에 대해서나, 이번 주 일요일을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나,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이다. 그래, 한번 견뎌보자. 하느님이 언젠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테지!’(175쪽) 긴 하루가 지났다. 영하 수십도의 혹한 추위속에서 힘든 노동을 마치고 늦게 먹는 저녁이지만 체자리의 몫으로 나온 국을 한 그릇 더 먹는다는 것이 슈호프의 오늘은 그나마 괜찮은 하루가 된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슈호프는 아무런 범법행위를 한 적도 없고,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임무를 갖고 활동을 한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특별한 정치사상을 가져본 적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인물인 슈호프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 소련사회 지배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 것에 다름없다. 솔제니친은 이들의 비참하고 비극적인 일상을 통해 당시 사회를 고발했기에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녁 점호를 끝으로 오늘의 일과가 끝났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 저녁에는 체자리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208쪽)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때까지 우리의 하루 역시 어찌 보면 반복의 연속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 한 그릇에 더 행복해하지도 않고, 내일이라고 해서 눈앞이 캄캄할 정도의 날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또 다시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늘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삶인지를 슈호프는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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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날들 중의 하루.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다른 날들처럼 보내는 것. 변함없는 하루야 말로 우리가 원하는 삶일 수도 있다는 걸 힘든 일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최근 TV 채널에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걸 스치듯 몇 번 보았다. 전직 야구선수로 감옥에 들어오게 된 남자 주인공의 감옥 생활에 적응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져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또한 이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슈호프는 오늘 아침 무사히 하루를 맞이했다. 간첩 협의로 잡혀온 슈호프는 수용소에서 8년째 갇혀 있는 동안 어느새 감옥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하루의 분량으로 나온 빵을 침대 깊숙이 보관하는 방법, 어떻게든 취사반의 눈을 속여 죽을 더 먹는 것이 자잘한 소망이다. 죽 속에 건더기가 얼마나 들어있을까가 관건이고, 주변 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 죽 한 그릇, 빵 한 덩이를 얻는 일이다. 그럴때면 무엇보다 기분이 좋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수용소에서의 생활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추운 겨울, 영하 삼십 도가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간수들은 죄수들의 사정을 살펴주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게 숫자를 세고, 숫자가 맞지 않을 시 뒤따르는 상황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솔제니친이 정치적 이유로 감옥 생활을 8년을 했던 경험으로 탄생한 이 소설은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한다.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면서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년에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을 세운다든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다든가 하는 버릇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저 하루하루에 안주할 뿐이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 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208페이지)
그럼에도 벽돌쌓는 일을 하는 슈호프를 보면, 뭔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가 추운 겨울날 땀을 흘려가며 일할 필요가 있나 생각되지만, 작업 정지 사인이 울렸음에도, 모르타르를 치며 벽돌쌓는 일에 열심을 일하는 그였다. 반장을 위해, 더 나아가 그날 저녁의 빵을 위해 그리 애를 썼던 것인가.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그리 어둡지 않은 필체로 그렸다. 슈호프의 별다를게 없는 하루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띠게 만든다. 위 발췌된 문장에서처럼 열악한 환경, 죽음보다 못한 상황인 수용소 생활임에도 어느덧 아주 작은 일에 행복함을 여기는 일이다. 처음엔 가족을 만나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꿈꾸었으나 순간적으로 늘어난 수용소 생활에 그런 희망도 접었다. 그저 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 그것만이 그의 생활이었다.
인간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여기도 삶이 있다. 각자의 사정으로 수용소에 들어왔지만 나름의 경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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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고
날씨만큼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켜 아침을 맞이했다. 걱정과 달리 세끼는 만족스러웠고, 과업도 즐겁게 수행한 편이었다. 일을 마친 후 저녁에는 동료를 대리하여 부수입도 올렸다. 보통날보다 썩 괜찮은 하루였다. "췌-854번!"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하 슈호프)는 어제 적은 일기처럼 오늘도 어제만 같길 바라면서 옷 위에 달린 번호를 자기 이름마냥 불러대는 교도관 앞에 선다. 슈호프는 독일-소련 전쟁 당시 포로로 잡혔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십년 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보낸 인물이다. 앞서의 일기는 수용소 생활자 구 년차인 그가 취침 점호를 받은 뒤 잠자리에 들면서 어느 하루를 돌아본 소감을 독자가 재구성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러시아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군 복무 중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죄로 수년 간 수용소 생활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대개의 소설이 서사를 쌓기 위해 적어도 수일에서 수개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수용소에서 평범하고도 비범한 일일을 겪은 주인공에게 20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한다.
팔 년 넘게 자유가 억압된 공간에서 거의 모든 것들이 통제된 나날들을 보낸 사람에게 과연 하루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라는 물음이 어쩐지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이런 독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슈호프를 비롯한 수용소 수감자들은 오늘 하루도 이런 궁리에 빠져 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이 음식을 구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업을 조금 더 적게 혹은 아예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여러 고통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고픔이 가장 컸다는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과 같이 소설 속에서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집(요한 애)착을 드러내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노동에 지치고 허기진 몸을 달래기 위해 오랜 기다림 끝에 받아든, 생선 머리와 뼈, (대체로 썩은) 양배추와 감자를 넣고 끓인 국 한 그릇을 먹는 모습이 그러하다.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현장의 분위기가 이윽고 한기(寒氣)와 훈기(薰氣) 혹은 열기와 냉기로 바뀌어 피어오른다.
살아가다 문득 지난 달이나 날을 돌아보면 그날들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한 해는 더디간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수용소 안에서의 시간 감각도 밖에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기는 슈호프의 말을 곱씹어본다. '해'와 '형기'의 단순 비교는 불가하겠으나 둘 다 느린 듯 보여도 어찌됐든 '형기'는 빠르게, '해'는 천천히 가길 바라는 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지난한 세월을 온몸으로 밀고나가며 세상이 야속했지만, 그는 어느 드라마의 제목처럼 '슬기로운 수용소 생활'에 관한 노하우(know-how)를 체득하기도 했다. 어떻게 수용소 사람들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노후(know-who)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교도관, 경비병뿐만 아니라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을 함께 생활한 제104반 반원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크고 작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때로는 영리하게 때로는 멍(청)한 척 하며 대응하는 슈호프의 모습이 소설 전반에 걸쳐 묘사된다.
고단한 수용소 생활에서 슈호프와 동료들을 육체적, 심리적으로 더 위축시키는 요인이 바로 '추위'이다. 러시아를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겨울에 어울(린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겠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지만, 읽기 전부터 이후에도 계속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계속 겹쳐 보였던 게 사실이다. 좁은 감방에서 같이 자는 옆사람을 그저 37도 열덩어리로 여기며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보단, 그와 체온을 나누며 추위를 극복할 수 있는 겨울이 한결 괜찮다던 선생이 떠올라서다. 반대로 소설에서는 극심한 추위 탓에 먹고 자고 일하는 활동이 고통스럽게 그려지지만, 슈호프와 반원들이 그 추위를 이겨내고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게 된다. 멀리서는 각자도생하느라 타인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개개인이 얕거나 깊은 관계를 맺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연대의 힘을 나누는 존재임을 (무)의식중에 깨달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비록 각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고 삶의 무게에 눌려 일상에 숨겨진 의미(와 행복)를 알아차릴 여유가 없겠지만, 신영복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는 각(各)살이가 아닌 모두살이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면 먼훗날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날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부디 그런 삶을 사는 내가, 그리고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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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참으로 긴긴 하루였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슈호프는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그는 이렇게 십 년을,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지독한 수용소 생활을 버텨나가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멀리 보면 지독히도 긴 세월이지만 그에게는 그 긴 세월조차 그저 하루하루일 뿐이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기가 워낙 곤혹스럽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온 힘을 다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며 그 세월을 버텼던 것이다. 우리 삶은 어떤가. 꼭 이루고자 하는 목표나 커다란 꿈이 있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눈앞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인 사람도 만만찮게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슈호프도 처음 얼마간은 머지않아 가족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겠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점점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삶에 의미가 없는가. 커다란 목표나 꿈 없이도, 누가 보기엔 겨우 그딴 걸로 좋아라 하는 거냐 싶은 작은 것에도, 지독한 수용소 환경에서도 작은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이 담담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려내는 수용소의 하루를 통해, 참혹한 환경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찾으며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죄 없는 개인에게 비극적 운명을 안겨주는 권력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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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벤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지낸 10년의 세월을 바탕으로 수용소의 군도로 노벨문학상도 수상했었죠. 확실히 러시아에 대문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워낙 다양한 역사를 거쳐간 나라라 그런걸까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직접 경험했던 노동수용소를 묘사한 작품이예요. 힘없는 약자인 이반의 권력에 의해 소용소에 갇혀 고통당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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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호프’는 아마도 (러시아문학에 흔히 나오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애칭인 것 같다. 스탈린 시대 강제 수용소에서 수년째 복역하고 있는 슈호프의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 하지만 거의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할 만한 하루의 일이다. 강제적 규율과 엄혹한 형벌의 수용소에서 슈호프는 자율적이고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판단하고 명민하게 행동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잔뼈가 굵은 신중하고 영리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황량하고 거친 풍경의 수용소 전체를 종횡무진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시간을 맞추고 제 역할을 해내는 슈호프는 오히려 신나게 보일 지경. (영하 이십도의 혹한이데!) 그래서 스스로 감정적 충만을 체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컨디션 제로인 상태로 깬 이불 속에서 시작해, 하루일과를 마치고 이불 안으로 들어가 다시 누울 때까지. 같이 안도하며 책을 덮었다. . 체제아래서 완전히 짓누를 수 없는 ‘인간의 자유정신’이 아마도 주제. 시대의 진실, 전체주의의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겠지만 내용은 무겁지도 진지하지도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와도 닮아있는 것 같은데 도스토예프스키쪽이 훨씬 격렬하다.) 재밌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은 (당시) 소련의 혁명과 전쟁을 고스란히 통과하면서 8년의 수용소생활, 투병생활, 강제추방, 망명,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는 파란만장한 삶을 일궈낸다. 그의 삶 자체가 20세기 초반의 러시아를 상징적으로 현현. 그의 다른 작품도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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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 솔제니친이 직접 경험했던 노동 수용소의 경험을 토대로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라는 한 인물의 하루를 보여준다. 슈호프는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급변하는 소련 사회의 지배권력에 의하여 죄없이 노동수용소에 끌려와 십 년을 복역하게 된다. 함께 수감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끌려와 극한의 추위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한채 수감생활을 이어간다.하지만 슈호프는 그의 하루를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니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던지는 주제...던져 봄직한 주제 정치색과 이념 시대상황을 떠나 단순하게 한 인간의로써의 삶만 봤을 때 묵직한 질문이지 싶다. 명확한 답은 없지만 답을 찾아가는 삶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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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3일 중의 단 하루였다. 그저 눈을 떠서 다시 감을 때까지, 북해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수용소에서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 하지만 그 하루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묘한 서늘함과 함께 어떤 단단한 결의 같은 것을 마주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관통하는 고전의 힘이며, 한 인간의 하루가 인류의 보편적인 숭고함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인 솔제니친이 직접 경험했던 수용소 생활의 하루를 세련되고 절제된 문체로 묘사한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수용소 생활로 약해지고 평범해진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라는 인물을 통해 죄 없이 지배 권력에 의해 고통당하는 힘없는 약자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보여 주고 있다. 거대한 정치구호나 선동적인 폭로 없이도 처절한 수용소 생활과 슈호프와 여러 인물들의 내면을 톺아보며, 이념의 비극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슈호프는 아무 말 없이 머리조차 숙이지 않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는 밖으로 나왔다. 배가 따뜻한 놈들이 한데서 떠는 사람의 심정을 무슨 수로 이해하겠는가? 혹한이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슈호프를 엄습해서 기침이 나올 지경이었다. 기온은 영하 27도였고, 슈호프는 열이 37.2도였다. 자 이젠 누가 누구를 이길 것인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선 것은 박해영 작가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보면서였다. 어떤 삶이 가치가 있고 없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 황동만의 하루와 슈호프의 하루 그리고 나의 하루의 무게가 같을지 혹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다. 10년이라는 수용소 생활 중 슈호프가 보낸 '단 하루'의 기록. 얇은 두께였으나 읽어 내려가는 속도는 한없이 더디기만 했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나를 보며 아내는 재미가 없느냐 물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비참한 생존의 현장 속에서도 한 그릇의 죽과 고된 노동의 순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슈호프의 치열하고 밀도 높은 하루가 나의 관성적인 일상을 부끄럽게 파고들었기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그토록 무거웠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순간 앞에서는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리기를, 강물에 몸을 맡기듯 무기력하게 흘려보내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슈호프의 하루는 달랐다. 그에게 시간은 수동적으로 견뎌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얼어붙은 손마디와 차디찬 숨결로 촘촘히 '채워넣어야'하는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 정성스러운 채움이 모여 비로소 무가치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단단한 생의 마디를 형성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다른 생각을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를 때도 있다. 어쨌든 형기는 끝나 가고 실패는 점점 풀어지지 않는가 말이다. 오, 하느님! 내 발로 자유롭게 다닐 때가 있겠습니까? 예?"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결핍의 공간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건 거창한 정치구호가 아니다. 삶의 존엄은 디테일에 있다. 그것은 배급받은 빵 한 조각을 옷 안감에 정성스럽게 숨기는 마음, 아직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감사히 비워내는 태도, 그리고 영하 수십 도의 추위 속에서도 벽돌 한 장을 비뚤어지지 않게 쌓아 올리는 장인 정신에 있다. 특히 슈호프가 건강하지 않은 몸에도 추위 속에서 담을 쌓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영하 30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완벽하게 벽돌의 수평을 맞추고 모르타르를 바른다. 그 순간 슈호프에게는 간수들의 감시도, 배고픔도, 죄수라는 신분도 사라진다. 오직 그 담벽만이 세상의 전부가 된 듯 몰입한다. "이제 슈호프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슈호프는 오직 이제부터 쌓아 올릴 벽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람이 강하게 분다고는 하지만 벽돌 쌓는 일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남의 눈에는 강제 노역일 뿐이지만, 그에게 그것은 자신의 기술을 증명하고 하루를 가치 있게 만드는 '자기 작업'이었다. 걸리면 영창에 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음에도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작업 도구를 숨긴다. 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내가 정성을 들일 대상을 찾아낸다면, 그 시간은 더 이상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창조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이라는 건, 나에게 주어진 조건이 어떠하든 그 안에서 내가 선택한 행동들로 채워진 자유의지의 총합이다. 슈호프는 형기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조각을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눈 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나는 자문했다. 내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들을, 이 하루를 나는 과연 무엇으로 가치 있게 채우고 있는가. 그저 관성대로 흘려보내며 '내일은 좀 더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오늘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슈호프는 하루를 마치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가 슈호프의 하루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각자의 시간에서 길어내는 행복은 모두가 다르다. 비싼 소고기면 좋겠지만 보리 먹은 수입산 삼겹살도 괜찮다. 올리브유를 머금은 치킨도 좋지만 한 마리 가격에 두 마리를 주는 푸드트럭의 치킨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의 빈 마디를 가치 있게 채워 넣자. 일상의 여백에 제철의 색깔과 사랑의 온기를 채워 넣자. 그렇게 채워진 시간만큼은 결코 우리를 앞질러 가지 못할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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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든 작품 속에는 정치 권력에 대한 비난과 그 속에서 고통당하고 억압당하는 약하고 힘없는 약자에게 보내는 동정의 눈길과 깊은 사랑의 철학이 나타나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인간에 대한 기본적 사고이며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스탈린 공포시대의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의 한 수단이었던 혹독한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되며, 스탈린의 정치적 영향으로 억울한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한 예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