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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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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의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세계는 고난으로 가득한 무대이며, 인간은 슬픔의 분칠을 하고 번뇌의 옷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인간은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모든 고난에는 숨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위 신정론이란 이름하에 신을 변호하
"그날" 내용보기

박영식의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세계는 고난으로 가득한 무대이며, 인간은 슬픔의 분칠을 하고 번뇌의 옷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인간은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모든 고난에는 숨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위 신정론이란 이름하에 신을 변호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와 장치들을 개발했다. 하지만 신정론의 우산 아래서 하나님은 변호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소외되기 일쑤였다. 더욱이 통속적인 기독교 신앙은 모든 고난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신을 피조세계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우주적 독재자로 전락시키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성찰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왔다.이 책은 엄연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 과연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하나님과 고난 받는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해야 할지에 대한 현대신학의 이해와 고민을 좀 더 대중적인 논리와 언어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변호할 뿐 아니라 고난 받는 인간의 현실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애통하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이 책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세월호 참사라는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냄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실존적 고난을 넘어서서 사회역사적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민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서구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가능하게 했다면, 이제 한반도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과연 기독교 신앙이 정당하고 지속가능한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시도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작품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b********1 2016.12.1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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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내용보기
세월호와 관련된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 가장 큰 울림을 줬고,우리가 세월호 유가족을, 그로 인해 상처 받은 많은 이들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달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제목부터 참으로 와닿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일어나는 것이 적절한가? 에 대한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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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관련된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중 가장 큰 울림을 줬고,

우리가 세월호 유가족을, 그로 인해 상처 받은 많은 이들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달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제목부터 참으로 와닿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적절한가? 에 대한 물음에 이 책 역시 이것이다! 확답을 주진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이 가치관의 혼란을 어느 방향으로

정리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철학으로부터, 신학으로부터 설명하는 책입니다.

b*****7 2017.02.0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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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하여"
"고통에 대하여"" 내용보기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후 쓴 C.S.루이스의[헤아려본 슬픔]에는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강연했던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로 비탄과 절망에 처해 본 사람이라면,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참된 기독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참사로 고통 당한 자 앞에서 침묵밖에 할 수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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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떠나보낸 후 쓴 C.S.루이스의[헤아려본 슬픔]에는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강연했던 것을 후회'하는 장면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로 비탄과 절망에 처해 본 사람이라면, '고통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참된 기독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세월호 참사로 고통 당한 자 앞에서 침묵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음도, 그래서 무력감으로 힘든 나날을 보낼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대부분의 신자들은 '모든 일(고통)은 하나님의 뜻'이라고너무도 느슨하게, 너무도 쉽게말한다.사회의 부조리, 불의한 자에 의해선한 사람이 고통 당하는 일을 묵과하면서 말이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무비판적인 수용과 나약한 사유일까?불의로 고통당하는 자의 슬픔에는 관심 없는 분이실까?세월호 참사가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무신성으로 가득한 파렴치한 정치의 합작품인 걸 알고도 묵과하길 원하실까?
정말 하나님은 고통을 좋아하시는 분일까?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야 하지만, 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가?
절대 아니지 않는가!

이 책은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세월호 참사 이후 기독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풀어간 듯하다.아우슈비츠와 같은 엄청난 비극 이후 하나님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혼돈스러움을 풀어나간 한스 요나스처럼 말이다.특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경종을 울리는 듯 하다. 고통당한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언급하면,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사회적으로 알리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자신이 마땅히 져야 할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게 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편, 이 책은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고통의 심연 속에서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면서 위로를 기다리는 이웃을 위해 올바른 신학하기를 할 수 있게 따뜻하게 안내하다. 세월호 이후 먹먹했던 가슴 한 켠이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이 책과 함께 저자의 추천 도서인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정혜신, 진은영의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고통을 당한 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말없이 그 곁에 서 있는 것, 손을 잡고 슬픈 눈을 응시하는 것,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 함께 우는 것,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 전부다(p 112)"
YES마니아 : 플래티넘 s******a 2016.06.0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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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고난으로 가득한 무대이며, 인간은 슬픔의 분칠을 하고 번뇌의 옷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인간은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모든 고난에는 숨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위 신정론이란 이름하에 신을 변호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와 장치들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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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고난으로 가득한 무대이며, 인간은 슬픔의 분칠을 하고 번뇌의 옷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와 같다. 인간은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련하고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교회는 오랫동안 모든 고난에는 숨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응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위 신정론이란 이름하에 신을 변호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와 장치들을 개발했다. 하지만 신정론의 우산 아래서 하나님은 변호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역사적 존재인 인간은 소외되기 일쑤였다. 더욱이 통속적인 기독교 신앙은 모든 고난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랑과 자비의 신을 피조세계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우주적 독재자로 전락시키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성찰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왔다.

이 책은 엄연한 고난의 현실 속에서 과연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하나님과 고난 받는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해야 할지에 대한 현대신학의 이해와 고민을 좀 더 대중적인 논리와 언어로 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변호할 뿐 아니라 고난 받는 인간의 현실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애통하는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이 책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세월호 참사라는 렌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풀어냄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실존적 고난을 넘어서서 사회역사적 고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민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서구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가능하게 했다면, 이제 한반도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과연 기독교 신앙이 정당하고 지속가능한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시도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딛는 작품이다.

c*******0 2015.12.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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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함, 그리고 세상의 악이라는 트릴레마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함, 그리고 세상의 악이라는 트릴레마" 내용보기
1. 요약 。。。。。。。 ​      책은 고통과 악의 이유에 관한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들 – 교훈을 위한 것, 죄에 대한 징벌, 선을 낳기 위한 연단의 과정 –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라고 지적한다. ​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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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고통과 악의 이유에 관한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들 교훈을 위한 것, 죄에 대한 징벌, 선을 낳기 위한 연단의 과정 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이해가 가진 한계에서 찾는다. 전통적 신학에서 하나님은 제일원인’, 혹은 전능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될 때는 앞서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낼 수가 없다. 제일원인자로서의 속성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고통과 악의 원인으로 몰거나, 잘해야 인간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한(악을 도구로 선을 이루거나, 치명적인 고통으로 교훈을 주려는) 존재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함, 그리고 실제적 고통이라는 조화시킬 수 없는 트릴레마(trilemma)라는 것.

     저자는 고전적 이해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새로운 신관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물론 그 설명들은 타당한 면도 있고, 성경의 기록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그저 전능자로서 계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분은 저 멀리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인간들 사이에 들어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스스로 제한하시기도 한다.(케노시스 신학)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슬픔을 느끼신다. 나아가 그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관찰자가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고난을 겪는 분이라고, 성경의 기록자들도 말하고 있지 않던가. 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 또한 극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고통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혹은 판단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나아가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5. 감상평 。。。。。。。

     신학의 여러 분과 가운데 조직신학(또는 교의신학)이라는 게 있다. 주로 교리적인 부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따지고 보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일련의 탐구 중 가장 먼저의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직신학 안에는 변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을 지켜내는 논리와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으로 보면, 변증학은 조직신학의 여타 분야들보다 앞서서 시작된 활동이다.

     그런데 이 전통 있는 분과가 요새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하나님을 대신해 그분을 변호한다는 포지션에 서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해 내려는 신정론은 어렵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쉽지 않은 작업에 뛰어든 저자에게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책은 저자의 깊은 고민과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으려는 탐구의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근본적인 질문인 그 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그 날,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계셨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차라리 먼저 그런 일들을 막는 게 낫지 않으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에는 그분은 전능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비우실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확실히 전통적인 설명과는 조금 결이 다른 대답이다. 그리고 사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이 대답의 공헌은, 적어도 그분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도리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물론 이게 고의가 아닐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말이 툭툭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지나치게 말이 많아서,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게좀 더 진실한 반응이 아닐까.

     한편 저자의 주장은 전능성을 희생시켜서 그분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인가 하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이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 질문들을 던진 사람들과는 그 배경이 좀 다른 사람들 (아마도 같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분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셨다면, 이제 그분은 전능하지 않으신 것인가?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능이라는 엄청난 개념이 어디 처음부터 다 이해가 되기는 하는 것이었던가. 차라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까지만 바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또한 적당하 태도는 아닐까.

 

 

     생각했던 것보다 얇았지만, 그리고 문체가 가능하면 편안하게 읽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이달의 사락 p*********n 2015.06.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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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에 대해 너무 미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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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그려진 노란 종이배가 위태롭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시퍼런 바닷물에 금방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종이배를 살뜰히 들어 올려 얼른 제주항에 옮겨놓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이 책의 부제는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이 문제를 담담히 숙제로 풀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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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그려진 노란 종이배가 위태롭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시퍼런 바닷물에 금방 녹아 없어질 것 같은 이 종이배를 살뜰히 들어 올려 얼른 제주항에 옮겨놓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이 책의 부제는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이 문제를 담담히 숙제로 풀어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을 고민했던 이유이다. ‘괜찮다말하고 툭툭 털고 일어날 아픔이 있고, 오랜 기간 신음하며 끙끙 앓아야 할 고통이 있다. 아직 내게 세월호는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애도의 대상이다. 제 삼자인 나도 이럴진대,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눈 앞이 또 캄캄하다. 그래서 절름거리는 관점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더 곱씹어야 할 날것의 생각만 종횡무진이다.

이 책은 세월호라는 특별한 사건 안에서의 신정론을 다룬다. 보편적인 신정론의 문제가 아닌, 세월호가 일어난 그날의 신정론이다. 때문에 무게중심의 기울어짐은 당연하다. 신정론을 야기하는 모든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자 한다면, 다른 책을 권하겠다. 그러나 보편성이 담지한 냉정함으로는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아픔을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면, 이 책을 꼽아주겠다. 비록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의지할 지팡이 역할은 할 것 같다.

저자는 전통적 신정론과 차별화를 시도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만능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신을 제한하는 전능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힘은 통속적인 전능 개념과 다르고, 무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169).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은 피조 세계를 내리누르는 초자연적(super-natural) 이 아니라, 작금의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초월적(transcendent) 으로 실행된다.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 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고통의 무의미함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 안에서만이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미래적 현실을 희망할 수 있다(174).

저자는 세월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전통적 신정론과 현대적 신정론 사이를, 하나님의 전능과 무능 사이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가로지른다. 하나님께서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전능과 무능 사이 그 어디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당황스럽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상황이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정작 그 순간 찾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계신다니? 그런 하나님으로 인해 위안이 될 수 있는 걸까? 마침내 승리하게 될 미래적 현실을 견지하더라도, 속 시원한 해갈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제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정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절정 하나만이 아니다. 완성된 그림은 다양한 퍼즐조각을 갖는다. 그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새길 때 절정의 모습은 그 의미를 더욱 선명히 한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장사치들에 대해 분노하시는 주님도, 38년된 병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목하시는 주님도, 우리가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더욱이 세월호는 자연재해나 불가항력적인 재난이 아니라 게으름과 나태함, 부조리의 죄가 만들어 낸 민낯 아닌가? 그렇다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향해 가기 전에, 채찍을 꼬신 그리스도, 위선적인 작태 앞에 독사의 자식들이라 일침을 가하시는 그리스도를 먼저 더듬어야 하는 것 아닐까? 세월호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을 묻기 전에, 우리의 제자도가 온전한지에 대해 먼저 물어야 순서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침몰하는 세월호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하셨다. 또 지금도 애타게 그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곁에 계신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다. 정작 문제는 주님의 제자라는 교회 공동체가 고통에 대해 너무나 미숙하다는 점이다. 사순절보다 부활절에 친숙한 교회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사랑으로 자신을 절제하여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는 고사하고, 아픈 마음을 함께 공감하는 능력조차 상실한 듯하여 처참하다.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 책 제목을 곱씹다 뜬금없이 쿼바디스 도미니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베드로의 질문이 연상되었다. 베드로는 수난을 피해 예루살렘 교회를 빠져 나오다가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님 앞에 쿼바디스 도미니에를 외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는 네가 지기 싫어 도망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기 위해 교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그 한 마디 말씀에 베드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십자가를 달게 진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감히 십자가를 질 수 없다 하여 거꾸로 매달렸다. 오늘 교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베드로처럼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

 

s****4 2015.05.2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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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신학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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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거짓말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질병에 걸릴 수 있는가? 신은 죽을 수 있는가? 2) 또한 신은 네모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니면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있는가?”(159쪽)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는 왜 일어났는가?", "그 때 왜 다 구조하지 못했는가?"… "아니 다는 아니더라도 왜 최선을 다해 대처하지 못했는가?" … 질문은 질문을 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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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거짓말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질병에 걸릴 수 있는가? 신은 죽을 수 있는가? 2) 또한 신은 네모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가? 아니면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있는가?”(159쪽)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는 왜 일어났는가?", "그 때 왜 다 구조하지 못했는가?"… "아니 다는 아니더라도 왜 최선을 다해 대처하지 못했는가?" … 질문은 질문을 낳고, 아니 끊임없이 쏟아지는 내 속의 회의는 이 땅 한국에 대한 회의이자, 한국 땅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날끝은 내게 다시 향한다. "너는 뭐했는가?"고… 할말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날, 하나님은 뭐하셨나요?"라고 되묻는다. 회피이자 책임전가, 또 다른 희생양을 찾는 노력인가? 아니다. 정직한 질문일 따름이다. 삶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대답으로 이 책이 나왔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삶의 고통, 고난과 악의 문제, 그리고 악한 자들의 형통함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께 묻는다. 저자는 이 책을 그러한 관점에서 풀어낸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이야기,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 삶에는 무수한 고통과 악의 문제가 난무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한다. 그러한 부분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라는 쉬운 대답에 벌써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질문과 응답의 과정 가운데 전통적인 신학의 답변에 문제가 있음을, 우리가 너무도 쉽게 대답하는 그 대답에 무리가 있음을 경험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신학적 고찰과 응답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이해하는 과정이자, 이 땅의 삶에 대해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신학의 자리임을 이 책은 담담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면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저자는 하나님의 전능을 '약함의 신학'으로 풀어내며, 전통적인 신학적 답변의 한계와 아쉬움을 대신한다. 그런 속에 하나님의 전능의 개념을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과 결부시킨다. “아들과 함께 즐겁게 놀기 위해 스스로 약해지고 무능해질 수 있는 아빠야말로 위대한 힘을 지닌 아빠가 아닐까?”(126쪽) 전능하시기에 오히려 약해지실 수 있으며,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빌2:5)를 입고 그 죄를 대신하신, 그리고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의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신 그 분. 그러하기에 당신은 우리의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하실 수 있으심을… 그 약함의 신학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계시며 여기 계시며 또 그로 인해 위로받은 내가 또한 그들과 함께 있어줄 수 있음을, 그 능력을 덧입는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저 하나님의 전능과 신비에 맡겨드리는 ‘침묵'과 ‘공감’임을! “침묵이 하나님의 위로와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공감은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실제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되는 사건,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는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더 지독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우리라는 삶의 공간으로 나올 수 있다.”(118-119쪽) 그래서 신학의 위치는 다시 정립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 땅의 신학은 대답의 신학이 아닌, 이 땅에서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자들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고, 또한 하나님께 묻는 질문의 신학이어야 한다.”(140쪽) 그리고 그 신학의 자리에 있어야할 것이 하나 더 있으니 ‘기도'이다. 책 속에 저며든 저자의 기도문을 또박또박 나의 기도문으로 되내어본다.

 

“하나님의 영이시여, 세월호 안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과 함께하셨고, 또한 그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셨던 성령이시여, 지금 여기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또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소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여, 홀로 버려지는 아픔을 아시는 주님이시여, 십자가에서 버림받아 고난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손을 꼭 잡아주소서. 성부 하나님이시여, 저항하고 항변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하나님, 저들을 당신의 품에 고이 안아주소서. 저들을 기억하는 가족과 친지에게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소서.”(140쪽)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눈물이 맺힌다...

 

j*****l 2015.05.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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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도서] 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내용보기
정말요.. 그날, 어디 계셨나요....나는 우리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당한 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말없이 그 곁에 서 있는 것, 손을 잡고 슬픈 눈을 응시하는 것,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고통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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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그날, 어디 계셨나요..

..나는 우리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당한 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말없이 그 곁에 서 있는 것, 손을 잡고 슬픈 눈을 응시하는 것,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주는 것, 함께 우는 것,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 나는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112p

..오직 신앙의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은 아직 이 땅에서 약하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희망한다. 따라서 종말론적 희망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맹목적이며, 현실적인 약함을 숙고하지 않는 전능에 대한 신앙은 공허하다. ....180p

누구에게나 조금씩 트라우마로 남겨진 이 사건 앞에 .. 남길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진상 규명을 위해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제 날짜로 올린 이미지가 있어서 퍼옴.) 차마 다 공감하지 못할 아픔에 사람의 한계를 본다. 해마다 그날에 습관처럼 잊지 않겠다 하는 걸 넘은 변화가 있어, 모두가 조금은 더 풀어진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기보다 오히려 침묵과 공감, 경청의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침묵이 하나님의 위로와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공감은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실제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슬피 우는 자 앞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하는 존재이자 그처럼 아파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객의 구분 없이 모두 하나가 되는 거대한 존재의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되는 사건,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는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더 지독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우리라는 삶의 공간으로 나올 수 있다. .... 우는 사람과 함께 울며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기독교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다. ...119p

#그날하나님은어디계셨는가 #박영식교수님 #새물결플러스 #잊지않겠습니다??




.....한편에선 옳은 말처럼 들렸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참으로 무책임한 말처럼 들렸다.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겨버렸으니, 자신은 그저 기계적으로 치료만 하면 된다는 뜻 같기도 했다. .......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그의 말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17p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은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벌이라고 말하지 말자. 하나님은 때로 죄를 심판하거나 정화시키기 위해서 징벌을 내리신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징벌은 아니며, 더욱이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많은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을 다 알고 있는 대리자인 척 함부로 나서지 말자.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는 고통 앞에서 쓸데없는 죄책감을 타인에게 안겨줘서는 안 되며, 또 스스로 자책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는 고통 앞에서는 성서의 증인들처럼 하나님께 따져 물어야 한다. 그분께 당당하게 항변해야 한다. 어쩌면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 하나님께 따져 물으며 대항하는 것이 훨씬 더 성서적 신앙에 가까울 것이다. ...42p


...... 신학자는 아니지만,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했던 탁월한 사변가였고, 수학과 현실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난과 관련된 모든 신학적 철학적 답변을 우리는 신정론 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신정론이란 명칭은 라이프니츠에게서 유래했다.... 63p


곧 우리는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런 고통이 주어졌는가를 묻는다기보다는, 도대체 이러한 고통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를 묻는 것이다. ...97p


떨기나무의 불꽃(출3:7,9)은 하나님의 임재뿐 아니라 이집트에서 학대당하는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즉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고통, 자기 백성의 고통, 바로 그 안에 계신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는 다름 아닌 고통의 현장이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

이제 우리는 '도대체 왜?' 라는 질문에서 '지금 어디에'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103p


..나는 우리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당한 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 말없이 그 곁에 서 있는 것, 손을 잡고 슬픈 눈을 응시하는 것, 좌절하고 분노하고 절규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주는 것, 함께 우는 것, 그리고 이 어처구니 없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 나는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한다. ....112p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기보다 오히려 침묵과 공감, 경청의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침묵이 하나님의 위로와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공감은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실제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슬피 우는 자 앞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하는 존재이자 그처럼 아파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객의 구분 없이 모드 하나가 되는 거대한 존재의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되는 사건,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는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더 지독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우리라는 삶의 공간으로 나올 수 있다. .... 우는 사람과 함께 울며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기독교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다. ...119p


..오직 신앙의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은 아직 이 땅에서 약하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희망한다. 따라서 종말론적 희망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맹목적이며, 현실적인 약함을 숙고하지 않는 전능에 대한 신앙은 공허하다. ....180p




u******r 2020.11.0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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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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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읽었던 책이다. 세월호 이후 난 삶이 방향이 바뀌었다. 극보수주의자로 자처했던 삶이 진보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진보일까? 사회 정의를 구하고, 바름과 옳음을 찾는 것이 진보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치 않을 것이다. 박영식 교수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해야할까를 묻는다. 하나님은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섭리도 아니고 신정론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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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읽었던 책이다. 세월호 이후 난 삶이 방향이 바뀌었다. 극보수주의자로 자처했던 삶이 진보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진보일까? 사회 정의를 구하고, 바름과 옳음을 찾는 것이 진보라고 말해야 하나? 그렇치 않을 것이다. 박영식 교수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해야할까를 묻는다. 


하나님은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섭리도 아니고 신정론도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h****i 2017.03.2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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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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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기독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그 이전에도 보수 기독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에 역부족했지만, 세월호 이후 그들의 약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국 보수교회는 처음 예수가 보여준 초대기독교의 진정성을 상실한 함량부족과 그릇된 재료를 사용하는 불량식품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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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기독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그 이전에도 보수 기독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에 역부족했지만세월호 이후 그들의 약점은 극명하게 드러났다한국 보수교회는 처음 예수가 보여준 초대기독교의 진정성을 상실한 함량부족과 그릇된 재료를 사용하는 불량식품이 되고 말았다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사도바울의 권면을 망각한 탓이요예수 가르쳐준 교훈을 따르는 제자 삼는 일을 버렸기 때문이다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며예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다그러나 한국교회는 예수를 따르기보다권력과 명예쾌락과 돈을 따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무신성으로 가득 찬 파렴치한 정치의 합작품’(133)인데도 놀랍게도 한국 보수교회는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했고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교란시켰다국무총리 후보로 나온 문창극 후보의 모교회 강연이 사람들로부터 지탄 받고 있을 때다수의 보수교회 교인들은 문창극을 추켜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심지어 교회 안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은 경제를 좀먹는 벌레 취급이 되었고애국심이 전혀 없는 불온한 국민이 되었다세월호 침몰이 하나님의 뜻이니 잠잠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그들에게는 고통 받은 자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 거했던 예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하고 옹호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 하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신을 인간 자신이 변호해줘야 하다니.’(118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일인가.

 

 

저자는 하나님의 뜻이란 고상한 명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고통 받는 이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한국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인과응보의 논리에 함몰된 보수 기독교는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잘못 때문으로 정죄한다그들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외친다그러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존재이다그러나 고통이 그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보다 악하고 죄가 많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그들은 수많은 죄악을 지었음에도 건강하고 평안하며 떵떵 거리며 산다.(39하나님은 왜 그들은 벌하지 않는가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고하나님의 사랑을 그릇되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고통은 현실의 감춰진 부조리와 모순이 드러나는 틈이다.”(120고통은 인간의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욥의 고난을 보라한 순간의 전 재산과 자녀를 한꺼번에 잃었다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욥의 분노를 일으켰고심지어 하나님께 정죄 받았다고난은 인간의 얕은 체험이나 지식을 풀 수 없는 신비다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질문하시지만 답하지 않으신다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

 

고통당하는 이들을 쉽게 위로하지 말라어설픈 위로는 더욱 큰 아픔을 준다그들에게 굳이 하나님을 해명하거나 변호하지도 말라그냥 내버려 두라다만 그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겸허함만 있으면 된다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제럴드 싯처는 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상실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오히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해 놓고 그날 사고로 돌아가 보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다영혼 깊은 곳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고 쓰디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하나님 앞에서 울다)

 

아무도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 할 수 없다오히려 그들이 충분히 절규하도록 도와야하고충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신의 슬픔에 충분히 슬퍼하는 자만이 오히려 스스로 눈물을 닥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116이다. ‘고통당하는 자의 무능과 약함에 함께 동참함으로 부조리와 모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북돋워줘야 한다.’(121하나님의 창조적 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폭력적 무력이 아니며,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 속에 갇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창조의 모험을 감행하시는 분이다.’(107하나님의 창조적 모험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 드러난다하나님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다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

 

교회도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103쪽)

“이처럼 욥기에 따르면 인과응보의 신학, 혹은 고난의 원인을 해명하려는 신정론의 시도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 좌절된다. 어쩌면 고통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침묵뿐일지도 모른다.”(90쪽)



h****i 2017.03.1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