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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폴리 4부작, 그 마지막 책을 마쳤다. 이태리 현대사의 정치 사회적 굴곡속에서 야만적 여성 억압, 이념의 혼돈, 폭력과 살인, 범죄와 마약으로 얼룩진 나폴리. 이 소설은 이러한 어둠에서 성장, 해방, 성공이라는 밝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 사라짐, 헤어짐, 재회, 회한, 용서에 관해 이야기 한다. 4부에서는 레누의 어머니가 암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지난하게 그린다. 레누는 애증의 관계였던 어머니를 간호하며 모녀의 애틋함을 회복하고 임종을 지킨다. 니노의 성 도착증적 외도로 그와 헤어져 릴라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된 레누, 그녀와 함께 출산과 육아, 일을 무리 없이 이어가다가 릴라의 딸이 실종되면서 관계에 또 다시 금이 가지만 근근히 관계를 이어간다. 나폴리의 범죄와 그에 무심한 시민들에게 환멸을 느낀 레누는 결국 나폴리를 완전히 떠나고, 마지막 작품으로 릴라와의 우정에 관한 책을 쓴다. 릴라의 의사에 반한 책 출판에 릴라는 스스로를 실종시켜 버림으로서 질기디 질긴 우정의 끈을 잘라버린다. 대강의 큰 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내용은 방대하다. 그 중에서 레누에 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몇가지 장면을 들어 작가의 진짜 의도를 좀 생각해 보고자 한다. 4부 초반부에는 레누 어머니의 와병과 그 주변 가족들의 불화가 너무나 요란스럽다. 엄마가 건강하실때 잘하던가 아프니까 유난을 떨며 마치 자기만 효녀 효자인듯 생난리를 치는 사람들. 한국의 어느 유난스런 가족을 보는 듯 하여 불편했다. 이태리도 이렇구나.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런건가. 작가는 죽음의 과정에 대해 왜 이리 늘어지게 서술했을까. 읽는 내내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짜증이 났다. 거의 직접 체험한것처럼 화도 나고 답답했다. 지나서 드는 생각은 작가가 노린것이 이거구나 싶었다. 인간 누구에게나 언젠가 찾아올 그런 상황.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마주쳐야 하는 일을 생생히 재연해냄으로서 독자에게 현실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그래서 현실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비논리적인고 지난한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여기에 할애한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레누가 바람둥이 니노와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을 버리는 장면까지 이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니노는 조강지처를 떠나지 않았기에 결국 그의 첩으로 살아가는 레누의 모습에 같은 여자로서 정말 화가 났다. 자신의 글과 전면 배치되는 삶을 사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식을 줄줄이 낳고 아이들을 남에게 그 범죄 동네에 맡기고 일을 하러 다니는 여자. 아무리 자기 고향 동네라도 엄연히 살인과 폭력, 마약이 판치는 곳에서 자신도 살아남았으니 내 자식도 그럴 수 있다는 안일함, 의식주만으로 아이들을 양육할수 없다는 것을 실제 육아를 통해 절감하고 있는 엄마로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레누에게는 자기의 커리어나 사랑이 자녀들의 현재와 미래보다 중요했다. 그녀는 고뇌하지만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그저 이기적인 여자로 보인다. 항상 스스로를 릴라와 비교하며 오로지 그녀에게 지지않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유치하고 무책임하다. 이 대목은 동서양의 문화차이인 지 아니면 작가의 개인적 성향의 반영인 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안타까웠는데 결국 세딸들 모두 잘 큰것을 보면 아무리 이야기이지만 안도감도 들고 나의 기우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녀의 양육방식에는 전혀 동의 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감각, 사상, 명성 이 모든 것이 퇴색해서 한가히 노년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장성한 아이들이 자신의 책을 보며 비웃는듯한 장면을 보고 우울과 회한에 빠지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릴라와의 수십년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릴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수십년 우정의 역사를 책으로 펴낸 레누, 어린 딸의 실종으로 정신을 놓고 고통 속에서 살아온 릴라에게 레누는 왜 그랬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년이 흘렀어도 자식을 잃은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재기의 도구로 사용한 레누의 행동은 릴라에게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책은 레누의 입장에서 릴라를 사악한 여인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였는데 맞다. 릴라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러나 레누처럼 착한척 하며 엿을 먹이는 경우는 없다. 릴라의 행동은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는데 레누는 그렇지 않았다. 글과 말이 행동과 달랐던 그녀는 한마디로 이기적인 이중인격자였던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책으로 인해 친구가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근심하던 레누, 릴라는 그들이 어린시절 가지고 놀다 잃어버렸던 인형을 몰래 전해줌으로서 '나는 너에게 화난 것이 아니야. 나는 단지 사라지고 싶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혹은 레누는 릴라의 용서를 암시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서 두 친구가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싶었나보다.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작가는 과연 누구와 더 가까울까, 나는 둘 중 누구와 더 닮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난 둘다 별로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까 매력적인 것이지 이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적어도 나는 그들과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을것이다. 시대와 성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주적으로 일어서는 여성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사고 싶지만 둘다 서로에게 너무 음융하고 가식적이다.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상호작용해서 발전하지만 왜 꼭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성공해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싫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부족한 점을 덥고도 남을 만한 기막힌 줄거리, 무엇보다 이태리 남부에서 벌어졌던 인생들을 대리체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하며 이런 체험을 선사한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3부까지는 번역본이 나와서 쉼없이 읽고 때로는 TTS 로 들어가며 2-3일에 한권을 끝낼 수 있었다. 4부는 사전을 찾아가며 눈으로만 읽다보니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나중에는 꼼꼼히 읽는걸 포기하고 대충 내용만 파악하자는 식이었다. 릴라가 자식을 잃고 방황하다가 고향 나폴리의 역사와 문화에 몰두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휘리릭 읽었다. 실제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고 정보를 보면서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때문에. 한가지 웃기는 점은, 천하의 바람둥이에 진보적 지식인, 게다가 엄청난 미남, 릴라와 레누의 연인이었던 니노가 서서히 보수화 되어가는데, 정치인으로 성공하며 거들먹거리다 부패하고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재기하는 모습이 한국 정치인들과 너무 닮아서 쓴 웃음이 났다. 이태리가 정치적으로 그리 발전한 나라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타락은 본성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한국의 철새라는 별명도 아까운 정치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의 생각도 언제까지 같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다가도 아이를 위해 내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작지만 큰 이유를 발견했다. 모든 활동에 목적이 있을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노력이 단 한사람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정신의 타락을 막는 예방법으로 인터넷을 뒤지는 것보다는 확실히 독서가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독서의 과정에서 내 생각이 비집고 들어가 글과 섞여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용이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그런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작가님들께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요즘 관절이 안좋다. 오늘은 손까지 아파서 많이 못치겠다. 통풍에 류마티즘까지... 전문작가의 직업병 한탄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냥 평범한 아줌마의 이른 노화현상. 이 책의 화자 레누의 나이가 책을 쓰는 당시 66세였는데 4권의 책읽기를 마침내 끝내며 나도 같이 늙어버린 기분이다. 휴. 이제 작가의 말을 빌어 리뷰를 마치려 한다. She has said, it was like 'having the chance to live my life over aga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