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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깊이, 몸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특히 어디가 아프거나 할 때. 통증은 좀체 잊을 수가 없는 감각이다. 그래서 일부러 마음먹고 오롯이 그것만 느끼려고 덤벼들었던 기억이 있다. 통증과 하나가 되려고 집중했다. 그런데 그렇게 집중을 하고 있으니 통증의 실체가 모호해졌다.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거지? 어디라고 콕 찍을 수 없는 통증의 장소. 분명 나의 몸인데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잘 설명되지 않는 말로 억지로 표현을 해본다면, ‘내 몸이 몹시 혼돈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이다. 난 아픈 게 아니었다. 어떤 부분이 몹시 혼돈상태에 빠져있을 뿐이었다. 잠시 평화가 떠난 상태라고나 할까. 그렇게 혼돈의 몸을 느끼고 있으니 통증은 통증으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통증을 잊으려고 시작했다고 치면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통증은 생물의 생존에 꼭 필요한 감각이라고 한다. 아주 드물게 통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참 좋겠다 싶지만, 그 사람에겐 가벼운 상처도 목숨을 가져갈 수 있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살이 찢어져도 아프지 않으니 신속한 조치를 취할 시기를 놓치기가 훨씬 쉽지 않겠는가. 통증을 들여다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것 중 필요 없는 것이 있을까. 이렇게 정밀한 기계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감각 중 필요 없는 게 있을까. 그것도 그럴 리가 없다. 통증조차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견디기가 좀 쉬웠다. 그 후론, 난 아플 때마다 그 때 경험을 떠올리며 통증을 좀 가볍게 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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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폭풍우>. 제목을 보았을 땐, 폭풍우 같은 사랑? 폭풍의 언덕? 그런 생각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하지 않았다. 소설의 제목이 소설을 잘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또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다. 책을 덮는 데, 그 경험이 떠올랐다. 그 통증을 바라보던 경험이. 그리고 번개처럼 스쳐간 생각. 혹 ‘폭풍우’는 자연에 꼭 필요한 통증이 아닐까. 작가는 <폭풍우>란 제목을 그런 의도로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사나운 바람과 억수같은 비. 폭풍우! 자연과 생명체에겐 두렵고 힘든 통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에 존재하는 것 중에 필요하지 않은 게 있을까.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것 중에 필요 없는 기관은 있을까. 식물도, 동물도, 물론 인간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우주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 필요 없는 것이 있을까. 그리고 통증처럼 두렵고 기피하고 싶은 것일수록 더욱 존재를 빛나게 하는 장치가 아닐까. 그걸 견디고 이겨낸 자연에겐.
<폭풍우>란 제목이 바로 그런 의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감히 판단한다. 내 판단이 맞아야 그 제목과 내용이 정말 매력적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줄거리 소개도 없는 나의 감상문에 불만이 있는 독자가 계시다면 좀 미안하지만 지금 기분엔 도저히 줄거리를 쓸 수가 없다. 그냥 충만한 감상만으로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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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부는 날 폭풍우를 읽었다. 한여름이라야 만나는 폭풍우 그 폭풍우를 이봄에 책 속에서 만났다. 책은 폭풍우처럼 내 마음을 흔들었다. 작가는 ‘숲’이란 글자에서 시작된 생명의 흐름, 인연, 사랑, 상상의 무주나무를 통해 우주를 넘나들며 나에게 바람을 일으킨다. 마치 무주나무 아래 내가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무 아래서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인연! 그랬다. 인연을 원망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을까 많이 두려워했다. 폭풍우에 나무가 쓰러진다. 나무가 쓰러지는 것! 자연의 법칙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듯 인간관계에서도 폭풍우는 언제나 일어난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나무에게 다가온 폭풍우가 자연스럽듯 사람도 관계에서 서로에게 상처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직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이 시대의 많은 멘토들이 보내는 메시지 그 메시지를 소설을 통해 보여 주었다. 작가에게 감탄하고 놀라고 그리고 그 능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책 한권으로 즐거워지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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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희 작가의 글은 섬세하고 표현이 아름답다. 특히 자연에 대한 묘사는 마치 내가 산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이다. <폭풍우>도 그랬다. 첫 장부터... 무주 나무 아래 노인과 청년의 만남. 세상에는 노인도 많고 청년도 많아 흔한 이야기 인 듯한데 그들의 만남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폭풍우 속에서 그들의 만남이 운명이었음을 알려 준다. 나도 좀 살아서 영광이 있다면, 세상의 이치를 조금 알았다는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만 늙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늙는다는 것이다. 옛날에 용감하게 해치웠던 모든 일들이 요즘 새록새록 후회가 되는 일들이 많다. 그러면서 홀륭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일어난다. 난 이제 겨우 알아내었는데 그들은 언제부터 그렇게 훌륭히들 잘 살고 있는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이라도 눈치 챈 것은 내가 생각해도 기특하다. 요즘 아들을 쳐다보면 어린 엄마 시절에 내가 한 어리석은 행동을 아들이 하고 있을 때 마다 내가 ‘잘 살았어야 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가끔 아들 녀석이 신통방통한 짓을 하면 ‘그래 나보다 낫구나! 그래도 내가 그렇게 교육시켰나 보다 하고 웃기도 하지만……. 작가들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런 사실을 이야기로 꾸며 재미있게 알려준다. 폭풍우에는 여러 가족이 등장한다. 그 윗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보고 배우며 자라는지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전생이니, 미래 생이니 하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그리고 복과 화를 당 세대에 받느니 다음 세대에 받느니 한다. 큰 복과 화는 모르겠지만 작은 복과 화는 그대로 자식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들의 전생은 나고 나의 미래 생은 아들인 것 같다. 물론 나는 이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행복해 할 나이는 아니다. 그저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았다는 것이다. <폭풍우>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이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그 것이 나쁘고 좋고를 따지기 보다는 나 하나라도 세상에 질서에 위배되지 않게 잘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모여 세상의 의식을 좋은 기운의 의식으로 바꾼다는 것을 주인공들을 통해 이야기로 보여준다. 오랜만에 재미나는 소설을 한편 읽고 하늘을 바라본다. 맑은 하늘에 봄바람이 살랑 불어온다. 이게 사는 재미지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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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느끼는 감상을 메모 해둔 노트가 눈에 띄어 펼치니 폭풍우를 읽을 때 부분 감상문과 소설 속에서 발견한 좋은 글이 들어 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 나 글을 올려 본다.
* 작가가 알고 있는 어떤 나무로도 표현할 수 없어 만들어낸 상상의 무주나무 세 그루를 숲속에 또 다른 숲을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의 경계를 허물어 소통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작가 정신과 표현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 등장 인물들이 무주나무 숲과 교감할 때 맑고 밝고 아름다운 반짝 반짝 빛나는 언어들로 맥이 뛰고 살아있어 나 자신도 함께 빨려 들어가는 행복감을 느꼈다
* 수행이 깊어질술록 모든 생명과의 벽이 사라진다. 나를 비울 때 우주에 가득찬 생명력과 하나가 된다. 는 법어를 생각나게 하고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정신적 차원이 상당한 차원에 이르지 않고는 불가능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나무와 때를 같이한 노파, 서로 생명을 마감할 때를 알아차리고 의연히 받아 들인다. 소설 속에서 표현을 옮겨본다.
"본래 없는 것이어서 아니 쉴 사이 없이 변하는 것이어서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 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 할 수 있다면 이는 인간 모두의 바램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 위에 ‘숲’이 적히는 순간 숲이 진짜 나무가 되고 무성한 수풀이 되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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