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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일흔여덟이고 이것이 분명히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떠나고, 이 책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나 자신이 고른 시간에 마지막 책을 끝내고 입을 다무는 것에는 적어도 한 가지 유용한 결과가 있다. 뭔가를 쓰던 중간에―브라이언 무어가 걱정했듯이―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런 식으로 죽음에 선택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 별거 아닌 방식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p.252) 작가는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를 올해 초 자신의 팔십 세 생일 다음 날 출간하였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종종 읽었던 독자로서 아쉽다. 다만 이 작품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일 뿐이지 마지막 책은 아닐 수 있다. 소설 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작가는 밝고 긍정적이며 책의 원제는 DEPARTURE(S), 도착이 아니라 출발 내지는 떠남(들)이다. “... 치료는 불가능하지만, 관리는 가능해요... 처음에는 내 피를 상당량 뽑는 것으로, 그다음에는 화학 치료로 관리가 이루어질 터였다. 팔에 주사를 꽂아놓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입으로 먹는 방식이었다.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여생 동안 쭉. 그게 ‘관리 가능’의 의미이다. 이 병은 죽을 때까지 당신과 동행할 거다. 추가 변이가 없는 한 아마 당신을 죽이지는 않을 거다. 당신은 그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그 병과 함께 죽을 거다.” (pp.75~76) 작가는 2020년 희귀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소설에는 진단을 받은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끝에 ‘관리 가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독자인 나 또한 그저 관리가 가능할 뿐 (원인을 알 수 없어)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지금까지는) 한 가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관리 가능’ 챕터를 매우 집중하면서 읽었다. 나 또한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그 병과 함께 죽을’ 것이다. “... 그들은 사실 ‘새로운 오랜’ 친구도 ‘새로운 새’ 친구도 아니고, 그 중간쯤 되는 존쟁였다. ‘새로운 오랜 새’ 친구들?” (p.147) 소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에서 가장 소설적인 부분에서는 나의 오래된 친구인 스티븐과 진이 등장한다. 이들은 나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시절을 함께 하였던 이들이다. 나는 스티븐과 진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이유였을 수도 있는데, 스티븐과 진이 헤어지자 나도 자연스럽게 이들과 멀어졌다. 그렇게 사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세 사람이 다시 만난다. (진의 강아지 지미와 함께) 『나는 지금까지 진이 스티븐에게 했던 어떤 말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가 이 말을 나에게 한 적은 없지만, 스티븐이 잘못 들었거나 나에게 잘못 전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이런 말이다. “행복은,” 진은 말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아.” 그 이후 나는 이 생각―동시에 수백 년에 걸친 픽션에 대한 반박―을 마음속에서 수도 없이 되짚어 보았다.』 (p.183) 스티븐은 오래전처럼 나를 중간에 끼워 넣어 진과 재회한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사십여 년 전에 이루지 못했던 결합을 이룬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두 사람의 하소연을 듣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 결말은 두 사람의 다시 한 번의 결별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그저 진지하게 이 재회와 결별의 전 과정을 사색한다. (줄리언 반스는 삼십년 지기인 레이철과 2025년 재혼했다는 사실을 팔십 세 생일 파티에서 밝혔다.) 『... 우리는 삶이 공정하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것, 종종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고, 가끔 나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며, 모든 평온한 표면 밑에는 늘 갑작스럽게 혼돈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만큼은 이 행성에서 충분히 긴 세월을 보낸 게 분명하다. 아내는 충만한 삶을 살던 시절에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고 37일 뒤에 죽었으며, 나는 그녀의 빛이 죽어가는 것에 맹렬히 분노했지만, 공정함이나 정의가 교활하게 위장하고 이 문제에 끼어든다고 상상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간단한 구절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그 무렵 갑자기 내게 다가왔고 또 지금도 내가 계속 활용하고 있는 이런 말이었다. ”우주가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죽어갈 때도 그럴 것이다...』(p.200) 소설에는 줄리언 반스 자신에게 영향을 준 많은 작가들(예를 들어 마르셀 프루스트나 임마뉘엘 카레르)이 실명으로 거론된다. 또한 줄리언 반스 자신이 직접 등장하거나 자신이 깊게 투영된 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오토 픽션의 면모를 갖는다. 팔십 세에 이른 작가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언한 소설이 갖기에 적당한 외피다. ”우주가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는 소설 속 나의 말은 아마도 줄리언 반스가 생을 받아들이는 바로 지금의 태도일 것이다. 줄리언 반스 Julian Barnes / 정영목 역 /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DEPARTURE(S) / 다산책방 / 271쪽 / 2026 (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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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살아있는 지성이라 불리는 줄리언 반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이름은 내게 늘 조금 부담스러운 숙제 같았다.
지적 허영심을 채워보려 몇 번이고 그의 책을 집어 들었지만 매번 어렵고 따분한 문턱을 넘지 못한 채 겨우 마지막 페이지까지 꾸역꾸역 읽어내거나 중간에 멀어지곤 했다. 그래서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마음은 깊이 닿지 않았던 내게 줄리언 반스는 ‘가깝고도 먼’ 작가였다.
그런 그가 절필을 선언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말에 이끌려 다시 한번 그의 책을 펼쳤다. (정확히 말하며 이끌렸지만 읽고 싶은 도서목록에 올리기만 했는데 독서 모임의 4월 지정도서였기에 결국 집어 들었다.)
커버를 넘기자마자 마주한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책이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가 모호하게 섞인 작품이라는 설명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고백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가 왜 집필을 중단하게 되었는지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책은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함께 ‘기억’에 관한 이야기로 문을 연다.
사소한 기억은 이내 관계로 확장되고, 삶을 돌아보더니 죽음을 응시하다가 다시 기억으로 돌아온다.
하나같이 무거운 주제들이지만 신기하게도 책장은 가볍고 경쾌하게 넘어갔다. 곳곳에 스며 있는 반스 특유의 유머와 위트 덕분일 것이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킥킥거리며 웃음이 터진 순간들.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무슨 책인데 그렇게 재밌어?" 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런데 반스의 책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의 유머를 이해하게 된 것일까? 이번 책이 유독 쉽게 위트를 담아낸 것일까?
암튼 다른 반스의 책을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다.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는 위트 중 얼른 하나만 적어보면 병원에서 '하지만 나는 부커상을 받았습니다'라고 적힌 상상을 하는 대목 읽어야 웃음난다. ㅋ 그 외에 곳곳에 담겨 있다.
수많은 다른 작품들, 클래식은 물론 정치와 스포츠까지 그의 박학다식 분야는 어마어마 하다.
옛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며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를 틀어놓는 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작품 번호가 131번인지 127번인지 추측하는 대목에서는 묘한 호기심이 생겨 직접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 책을 읽어보았다.
개인적으로는 127번이 더 마음에 와닿았는데 마치 브리저튼의 한 장이 연상되는 듯한 음악이었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쓰였다는 이 책의 후반부에는 삶을 정리하고 작별을 준비하는 문장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 자신의 세계를 사랑해 준 독자들에게 작정하고 건네는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손을 얹었다가 슬쩍 사라지겠다는 그의 마지막 인사. 담담해서 오히려 더 먹먹하게 다가왔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반스는 한국 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책을 가리켜 "What has left will not return"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정작 책의 원제는 'Departure(s)'다.
아마도 'Departures'라는 단어가 함축적인 ‘떠남’을 의미한다면 편지 속 문장은 그 의미를 다정하게 풀어 설명한 문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 관계, 시간, 그리고 죽음. 우리 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이야기.
반스는 그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짧은 제목과 긴 설명. 두 표현 모두 이 책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린다.
이제야 나는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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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못 한 이별 통보를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을 때, 설마설마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진짜란 걸 알았다. 바짓단을 붙들고 늘어져도 돌이킬 수 없는 작별 선언. 아침까지 코를 풀어가며 엉엉 울다가(책 읽다가 우는 경험은 실로 오랜만) 성숙한 이별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떠나는 그가 나에게 남겨주려 하는 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걸 잘 간직하는 일이겠구나. 난 진짜 좋은 독자가 되고 싶다. P 262 나는 어딘지 모르는 어느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어느 소 도시의 한 카페 실외석에 앉아 있는 작가와 독자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따뜻한 날씨고 우리 앞에는 시원한 음료가 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우리 앞을 지나가는 다양하고 많은 삶의 표정을 바라본다. 나는 느리게 읽는 독자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은 더 느리게 꼼꼼히 읽고, 좋으면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느리게 읽다 보면 때때로 완전한 몰입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작가와 나란히 앉아있는 상상이 될 때가 많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순간을 겪고 나면 그 작가의 팬이 될 수밖에 없다. 내게 오로지 둘뿐이다.(반스님, 그리고 연수님) P215 떠남은 대게 도착에 이른다. (...) 우리는 가고, 우리는 도착하고, 우리는 귀환에 나서고, 다시 집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런 타성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런 궤도는 더 크고 더 모순된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우리 삶에서는 도착이 먼저 오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제목은 너무 매몰차다. (’~ 않는다’ 시리즈 때문인 걸 알지만) 원제는 deparute(s). 사전적 의미는 the action of leaving. especially to start a journey. ‘이스페셜리 투 스타트 저니’ 나에겐 이게 중요하다. 나는 반스님이 미지로의 여행을 준비하듯 이 글을 쓴 것만 같다. ‘삶은 여행’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죽음을 여행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은 처음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명랑한 염세주의자이자 불가지론자인 작가가 죽음의 가시권에서 ‘조금 더 받아들이고, 조금 더 철학적이 된다’라고 해서 안도했다. p226 결국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은 이들과 비교하면, 거기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까지 보태서 비교하면 극단적 소수자에 속한다. 이 때문에 삶은 박약한 순간으로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토록 박약한 삶에서 나약한 인간을 더 나약하게 만드는 건 ‘감정 과잉’ 또는 ‘감정적에 치우친 상태’가 아닐까. 죽음과 노화, 기억(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정체성일 수밖에 없는)의 쇠퇴에 대해서, 반스님은 늘 그랬든듯 감정과 거리를 둔 채 상태를 분석하고 본질에 다가서려고 한다. 내가 이 분을 애정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책 읽는 동안 며칠,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반나절을 줄리언 반스만 생각했다. 슬픔과 감사. 내 남은 생이 반스의 책들을 다시 읽는 시간으로 채워질 거란 확신 같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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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이렇게 현학적으로 쓸 수있다니? 사랑에 대해 이렇게 뜨거운 논리를 부여할 수 있다니!! 에 꽂혀 읽어왔던 그의 전작들은 그러나 쉽지 않았고 읽는데 오래 걸렸으며 (혹시 언젠가는? 한번 뭐라도 써보고싶다 느꼈던 지망생인) 열렬한 독자의 기를 죽이는 대단히 명석한 작가의 작품들에 불과했다 그런데 lte급 속도로 그의 마지막 책을 읽으면서. 자서전이며 소설이며 에세이인 이 책을 읽고 심장이 부풀어오르는 약을 먹은 것처럼 술도 없이 취해버렸다 인생을 반추하는 노인으로써의 그 부인을 먼저 보낸 암환자로써의 그 멋진 글을 그렇게 많아 썼지만 그마저도 잊어갈까 두려워하는 그 여전히 사랑에 관심을 두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영국에 가서 이 섹시한 작가를 만냐보고 싶다는 희망까지 품게 되었다 이 책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것이다- 에서는 헤어지는 연인에게 일방적 통보를 받은 사람처럼 안돼요 안돼!!!!!!!!!!!!를 부르짖었다 적어도 나머지 작품들은 빨리 읽고 혹시모를 다음 관찰기를 반드시 기다리겠다 그의 노벨상을 기원한다 (그의 책에 의하면 백인이라 힘드실테지만^^) |
| 잼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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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어오지않는다 어렵지맘 재밌다 줄리언 반스의 그동안의 책들은 참 몰입력있게 후루룩 읽혔는데 이번 책은 내용이 다소 심오하고 난해한 감이 있어서 정신차리고 읽어야 한다 작가의 마지막 작품인 것처럼 매우 공들인 것으로 보인다 읽어볼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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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줄리언 반스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그래도 거장의 작품을 또 한 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화자가 노년의 소설가이다.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 노화, 기억, 시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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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담담한 글의 내용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상실감과 체념. 이미 지나간 관계와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인생의 숙명. 지나간 것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곱씹을 수 있었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오래 여운이 남는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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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책을 읽고..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책을 구입한지 좀 되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이다. 줄리언 반스 작가가 쓴 책은 언제 읽어도 감동 있는 책이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책 제목처럼 왠지 인생이 마지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 속에 주인공의 삶이 힘겹게 사는 모습도 그려지고 그리고 의사가 실수로 저지르는 의술을 불신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 실수는 하는 법이지만 이건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건이 있다면 결말도 깨끗이 마무리 했을지도 모른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책 제목이 왠지 닿는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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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 기억에 관한 계시적인 명상이 축을 이룬,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이는 노년의 소설가다. 물론 작가 줄리언 반스가 겹쳐 보이긴 한다. 보통 사람들이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반스는 “가능한 한 오래 사물을 관찰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말에서 드러나듯, 반스는 자신이 평생 해온 일, 관찰하고 기록하고 질문하는 행위로 다시 돌아간다. 보통의 지식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답은 있는데 질문이 없다. “나는 아무도 내게 한 적이 없는 질문, 그리고 나 자신도 한 적이 없는 질문의 답인 것 같아.”라면서……. 소설은 이렇게 어떤 질문도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영토에 뛰어들어 질문을 창조하는 난감한 과제를 떠안는다. 그래서 읽는 속도가 늦어지고 이해의 감도 자주 떨어진다. 이 책을 추천하는 김연수 소설가는 ‘여러분도 너무 빨리 읽을 필요는 없다. 이제 더 이상 줄리언 반스의 다음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라고 질문 하나를 처연하게 던지고 있다. 반스는 시간과 필요 속에서 기억이 어떻게 미끄러지듯 변형되고 무엇이 잊히는지를 정면으로 파고든다. 기억은 정체성이며, 기억은 쇠퇴와 윤색이 겹치는 공간이라는 해석에 한눈 팔다가, 화자인 나를 따라가 보면, ‘마들렌은 프루스트가 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차에 담갔을 때 본인도 모르게 ‘불수의不隨意 자전적 기억, IAM’을 불러낸 비스킷이었다.‘ 라는 스크랩 구절에서 다시 시선이 머물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다. * 불수의不隨意: 제 마음이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태 화자의 경우도 첫 반응은 경악이었으며, 잊힌 기억들이 그런 식으로 당신을 고속 공격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고 하지만, 참 더 어렵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환상이고 필연적 실패를 가져오는 것일까? 기억을 촉발하는 경험이 애플파이를 먹는 것만큼 삶에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이제 칠십 대 중반이고, 나이 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가끔 나 자신이 지겨워진다. 관리는 가능하지만, 완치는 불가능한 혈액암 진단도 받아서다. 아무런 장난을 치지 않는, 늘 변함없고 피할 수 없고 장난에서 자유로운 기억…….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정상적 기억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될 것임에도 우리는 기억이 우리에게 장난을 친다는, 이야기를 쉽게 한다. 질문은 이어진다. 중심인물의 이름을 바꾼, 스티븐과 진의 관계를 통해서다.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수십 년 뒤 다시 재회한다. 물론 그 과정과 연결 사이에 반스가 있다. 두 사람 각자에게, 따로, 절대 그들에 관해 쓰지 않겠다고 한때 약속했다. 늙어가는 작가라면 대개 공감할 만한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하려면 어느 정도 배경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결국 그 약속을 깨뜨린다. 이 관계를 둘러싼 기억은 서로 어긋나고, 진실은 끝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반스는 이 사례를 통해 불완전한 기억의 구조를 통해 우리가 타인의 삶뿐 아니라 자신의 삶조차 얼마나 쉽게 잘못 읽으며 살아가는지를 들려준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우리 뇌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뇌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정보만 제공할 뿐인데도. 기억은 의심의 대상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시간이 덧입힌 이야기이며, 해석의 결과다. 밤중에 어떤 생각이 아무리 생생하다 해도 뇌가 몇 시간 뒤에 그것을 기억 할 거라고―또 당신에게 상기시켜 줄 거라고―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단계에서 언급할 두 가지를 반스가 고백했다. 1) 이야기―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2) 이게 내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끝을 예감하며 집필한 자전적 소설임을 밝힌다. 기억을 매개로 소설이라는 형식이 도달할 수 있는 인생의 가장 근원적이고 최종적인 질문을 탐색하며 마지막 작품임도 밝힌다. 119쪽 몇 구절은 유머로 읽혀 옮겨 적는다, 교수대 유머까진 아니지만. “내가 일어서자 진이 말했다. ’기회주의자시로군요, 미스터 반스.‘ 하지만 그 말은 내 귀에 칭찬처럼 들렸다. 기차에서 나는 그 말을 생각했다. 내가 살면서 기회주의자였나? 때로는 그랬고, 때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회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 하지만 그건 소설가가 다 그렇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적어도 자기 책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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