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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차오르는 기쁨과 눈물을 쏟아지게 할 것만 같은 슬픔을 동시에 자극하는 경이로운 작품이다.
신간코너에서 압도적인 두께의 벽돌 책과 조우하게 되면 늘 그렇듯, 읽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벽돌 책은 저자가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것이고, 그 분량을 쓰는 동안 저자가 투사해놓은 정신의 깊이와 혼의 정수와 다른 시간을 포기한 기회비용을 공존의 가치에서 얻으려는 숭고한 열정을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인데, 책의 성격이 그런 만큼 카누를 저어 아마존 밀림을 탐사하는 기분으로 책 읽기를 마쳤을 때, 뜻밖에도 평균기대치를 상회하는 독서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현대미술계에서 커리어를 쌓은 케기 커루가 영국의 윌트셔와 도싯의 경계에 있는 언더힐 자연보호구역에서 남편 조너선 톰슨과 함께 다양한 생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환경으로 바꾸는 소규모 리와일딩 운동을 하면서, 종교, 신화, 문학, 과학, 경제, 환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동물의 4만 년에 이르는 장대한 관계의 대서사를 방대한 자료와 실화를 추적하며 구축해낸 논픽션이다. 내게는 마치 에머슨 시대의 초절주의 명맥을 이어온 후기 초절주의자 한 명을 책으로 만난 듯한 기분이 드는 작가여서,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야생의 양심을 만난 듯 기뻤다. 이 책의 제목은 내게는 중의적이었다. 원 제목인 ‘비스틀리(BEASTLY)’는 ‘짐승 같은’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중의적 의미의 하나는 우리가 인간성이 결여된 행동을 묘사할 때 부정적으로 부르는 바로 그 사전적 의미로, 그 ‘짐승 같은’ 존재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이라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스틀리(BEASTLY)’를 순화한 와일드(WILD)로, ‘야생의’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긍정적 측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가 리와일딩(REWILDING) 프로젝트, 즉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 스스로 생태계를 회복하도록 하여 생물 다양성을 높이는 자연생태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태초 상태로 돌리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성까지 포함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때 묻지 않은 고유한 인간성인 야생의 양심, 야생의 윤리성. 야생의 공존의식, 야생의 동정심 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사회화로 억제된 상태에서도 종종 틈바구니로 분출하곤 하는 야생의 폭력성이 날 것의 본성 그대로 발호하겠지만, 회복된 우리 안의 야생의 양심과 윤리성과 동정심 등에 의해 제어될 수 있음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내게는 저자가 제목에 벌써 방대한 분량의 내용에 풀어놓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압축해 놓았다고 보는데, 내가 이 작품의 핵심요소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파괴한 야생의 자연생태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의 파괴된 야생성을 깨닫게 해주고, 인간성의 야생성까지 회복해야 한다.’는 그것이라고 본다.
<트위터에 올라온 짧은 드론 영상. 송아지 한 마리가 사육 틀veal crate[도살할 송아지를 가둬 기르는 비좁은 틀]에 갇혀 있다. 몸은 철창에 가렸지만 머리는 틈 사이로 나와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송아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입을 벌리고 커다란 혀를 길게 뻗어 하늘을 떠도는 눈송이를 휘감아 낚아챈다. 어쩌면 이게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쁨일지도 모른다. 송아지는 혀로 그 순간을 붙잡는다.> (99쪽) 이 내용에는 인간의 비스틀리성과 와일드성이 공존하고 있다. 도살하기 위해 몸조차 돌릴 수 없는 비좁은 사육 틀에 송아지를 가둬놓고 기르는 것은 인간의 야수성의 용출이고, 쇠창살의 틈새로 머리를 내밀고 혀를 길게 빼어 눈송이를 받아먹으려고 애쓰는 송아지에게서 연민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일정부분 남아 있는 인간의 순수한 야생성의 발현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비슷한 비율의 인간성을 분출하면서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다수는 여전히 스테이크를 먹을 것이며, 소수는 곡식과 채소와 과일과 견과류만을 먹을 것이다.
<해안 가까이 고래 떼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면 곧장 그린드 마스터에게 연락이 간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몰려든다. 애국심이라는 열기에 휩싸여 사내들의 전투 본능이 들끓는다. 해변에는 갈고리와 밧줄, 작살과 칼을 든 남자들이 길게 늘어서고, 배들은 굉음을 내며 고래 떼를 포위한다. 궁지에 몰린 고개들은 죽음의 해안으로 떠밀린다. 남자들은 물에 뛰어들어 고래의 숨구멍에 갈고리를 꽂고 밧줄로 끌어당긴다. 해안에 이르자마자 작살로 척수를 끊어 고래를 죽인다. 국제 해양보호단체 시셰퍼드는 지난 40년 동안 이 잔혹한 사냥에 맞서 싸워왔다. 단체의 자원봉사자들은 어딘가 꾀죄죄하고 사회의 틀에서 비켜난 사람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고래를 향한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단단하다. 모집 공고의 직무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급, 장시간 근무, 고강도 육체노동, 위험 노출, 극한 기후 조건.’ 이들은 몇 주씩 바다를 떠돌며 돌고래와 고래가 학살지로 향하지 않도록 진로를 바꿔준다. 헌신적이고 용감하며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체포되든 감옥에 가든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건 단 하나, 고래의 생명이다.> (387-388쪽)
이처럼 작품 전체에는 인간의 부정성에 의해 남획되는 동물들의 사례와 인간의 긍정성에 의해 남획을 막으려고 전생을 바쳐가면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사례들이 시이소 게임하듯 제시된다. 그러면 우리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감정의 굴곡을 겪게 되고, 그 결과 가슴에는 독자들 나름의 변증법과도 같은 정반합의 결과물이 남게 되리라고 본다.
책을 읽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자의 풍자적 반어적 어투를 따라가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우리가 왜 돼지의 고통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 우리 고통만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한 하나님이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세상 만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분이므로 돼지의 고통과 비명을 보고 있을 텐데, 그것을 외면하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확실히 하나님이 돼지의 고통에 무감각한 것은 그의 모습대로 만든 사람들이 식당에서 돼지의 고통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 아님도 알 수 있는데, 애초에 돼지를 만들 때 고통을 못 느끼도록 바위처럼 만들면 되었을 텐데, 절규를 지르다가 죽어가게 한 것을 보면 그러하니까.
저자의 어투 스타일을 계속해서 따라가자면, 이 책은 슬픔과잉반응성향 독자든 인간혐오성향 독자든 모두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일반성향의 독자라면 인간의 따뜻한 면과 잔인한 면을 중화시켜 나름 인간을 견디며 세상을 살아가지만, 슬픔과잉반응성향 독자라면 책을 통해 슬픔을 바닥까지 퍼내게 되어 슬퍼할 슬픔이 남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인간혐오성향 독자라면 인간의 짐승 같은 행위에 지나치게 반응한 나머지 남아 있던 인간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릴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 인간에 대해 완전한 무관심 상태로 빠져 인간이 바위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인간에 대해 아무런 원한도 혐오도 품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인간 종이 완전히 낯설어진 나머지 새로운 꽃을 발견한 듯 다시 인간에 대해 호기심과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테니까. 대체로 인간은 따뜻한 면을 더 많이 갖고 있어, 잔인한 면을 노출하자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그만큼 다시 인간혐오주의자로 돌아가는 기간도 길어질 테니까. 더욱 좋은 경우라면 단지 그 무렵이 살날이 오래 남지 않은 때여서 다시 인간에 대한 혐오를 느낄 시간이 없을 경우인데, 오로지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친절한 면만 간직한 채 삶을 마감할 수 있을 테니까.
일반 독자든, 어느 쪽 성향의 독자든, 의식 확장에 도움이 되는 책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 맛있는 소시지가, 그 맛있는 스테이크가, 처음에는 꿀꿀거리고, 음매, 하는 소리를 냈었다고?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거지?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어봄으로써 그와 같은 의문을 품지 않았던 자신으로부터 품어 본 인간으로 조금이나마 의식이 확장되니까. 그리하여 어느 누군가를 삼겹살 사먹는 돈으로 책을 사볼 수 있는 인간으로 개조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지나치게 도움이 된 나머지 평소에는 가축농장을 무심하게 지나치던 사람의 머리를 회까닥 돌게 한 나머지, 식식거리며 농장주를 찾아가, 당신 말이야, 다음 생에는 이 임신 틀에 갇혀 평생 동안 새끼만 낳다가 죽는 돼지로 태어날 거야, 라고 소리치는 황당한 경계 바깥 인물로 만들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고,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노마드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얼마나 대단한가? 한 인간을 절망의 바닥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또는 노마드로 끌어올리는 일만큼 힘든 일이 또 어디 있는가?
이런저런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절망해 있는 사람들에게 '짚신도 짝이 있다'는 우리 속담을 소환하면서 희망을 주는 장면까지 실려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도대체 어떤 곤충이 이걸 빨아먹을 수 있지?’ 찰스 다윈은 1862년 큐왕립식물원 부원장이자 친구인 조지프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난초, 앙그레쿰 세스퀴페달레Angraecum sesquipedale의 꽃을 묘사한 것인데, 하얗고 윤기 나는 별 모양 꽃잎 뒤에 믿기 어려울 만큼 가늘고 긴 초록빛 관[꿀주머니]이 달려 있고 그 길이는 30센티미터에 이르렀다. 깊숙이 있는 꿀에 닿으려면 혀가 아주 긴 생물이어야 했다. 다윈은 어딘가에 이 꿀을 빠는 수분자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그 예측이 현실로 드러나기까지 41년이 걸렸고, 그 난초에서 꿀을 빠는 장면을 영상에 담기까지는 130년(1992년)이 필요했다. 예언대로 나타난 존재는 마다가스카르에 서식하는 크산토판박각시나방이다. 몸길이 6-7센티미터, 날개폭 16센티미터, 흡관의 길이는 25센티미터에 달했다. 1903년 이 나방에는 크산토판 모르가니 프레딕타Xanthopan morganii praedicta라는 학명이 붙었는데, 이는 과학적 직관으로 적중한 예측에 바치는 찬사다[프레딕타는 라틴어로 ‘예견하다’라는 뜻이다].> (640-641쪽)
우리 안에 관념으로 기입되어 있는 생물다양성인식 순위는 몇 위 정도나 될까? 피라미드 구조에서 상위에 동물학자나 식물학자가 차지하고 있다면 나는 맨 밑바닥 순위에 해당하지 않을까? 역으로 모든 생명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타 생명체에 대한 내 인식지수가 그 정도로 낮은 만큼 나 역시 타인에게서나 타 종 동식물에게서 그 정도의 순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참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희망적인 것은 인간이 파괴한 수치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데이브 섹스턴과 흰꼬리수리(645-650쪽,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장면의 일례처럼, 인생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고 전생을 동물보호에 바친 위대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과 그들에게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는 염치가 여전히 내게도 조금이나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너무나 아름다운 묘사와 문장이 사방에 깔려 있어, 그만 순간순간 논픽션임을 깜박 잊고 멸종동물들을 추적한 어느 주인공의 삶을 그린 장대한 문학작품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런 한편, 이 책이 번역서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번역자의 섬세한 미학적 감수성에도 거듭 감탄하곤 했다.
우리가 읽어야 할 좋은 책의 여러 장르 전형들 가운데 한 전형이라고 감히 개인적 소회를 밝힐 수 있는 책이다. 태어났다가 인간으로 인해 제 생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수많은 생명체에 대한 속상함의 한 축과 그들을 공존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로 인해 품게 되는 희망의 한 축을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하면서 우리의 무지와 무감각을 분쇄하여 의식의 지평을 확장해 준다. 내 기준에 좋은 책을 출간해준 출판사에 감사를 드리는 일도 참 오랜만이다. |
| 구매는 오래전에 했는데 이제야 읽어보네요. 두께가 엄청나서 한 손으로 들고 읽기가 좀 부담스럽습니다 (특히 손목에) 전체적으로 매끄러우면서도 묵직함을 주는 문체에요. 읽는 내내 자연 속에서 사는 인간으로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가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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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고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계기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을 통해 개와 가축이 역사적으로 언제부터 인간과 가까워졌는지, 산천어 축제의 비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내가 일상에서 먹는 계란·돼지고기·소고기 뒤에 숨겨진 슬픈 현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던 세계가 너무 많았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무지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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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동물원에 갇힌 동물에게 자유를 되찾을 기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동물이 문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어는 탈출의 귀재다. 뼈가 없어서 눈보다 약간 큰 틈만 있어도 스르르 빠져나갈 수 있다. 2016년 뉴질랜드의 한 수족관에서 잉키라는 문어가 탈출한 적이 있다...오타고에서는 한 문어가 조명을 향해 물줄기를 뿜어 전기 설비를 고장 내고 자유를 쟁취했다... ...예전엔 나름대로 약속이 있었다. 일방적인 약속이긴 하지만 먹이와 보금자리, 안전한 공간을 내어주면 돼지는 땅을 파고 진흙을 뒹굴며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돼지를 먹었다. 야생에서도 돼지가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약속이라 불리던 관계를 우리는 얼마나 악착같이 쥐어짰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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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내용:
장점은 생태학적 사실과 철학적 통찰을 결합해 사유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단점은 구체적 실천 방법보다는 사색적 논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總評하면, 《야생의 존재》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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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 기자의 적극 추천으로 관심이 급 생겨서 보게 된 책. 지금껏 그랬듯 믿고 보는 이의 추천으로 실패한 적은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와 진지하게 고민할 주제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맺어온 동물과의 관계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주제가 주를 이루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정녕 뚜렷한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서커스를 필두로 동물들이 쇼를 벌이는 어디에서나 언뜻 보기에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련되고 매우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늘 해방을 꿈꾸고 나아가 인간들에 대해 복수를 꿈꾼다. 이따금씩 들리는 사건사고는 이에 대한 방증이자 경고인 셈. 공존할 것인가 공멸할 것인가 진정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라 생각되는 바 조금이라도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강추하고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결코 남일이거나 먼 훗날 얘기가 아닌 만큼 억지로라도 관심 가지고 봐주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