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무엇이고, 왜 사는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살기가 좀 편했나 보다. 그런 한가한 고민을 하게 되다니? 지금은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지만 그 당시엔 정말 절실한 고민이었다. 마치 이런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굳이 실존의 이유가 없는것이라고, 그것은 죽은 삶이며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좀 무모하게 생각했던 거 같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자부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라고 당당히 고백하겠으나 그 당시 난 삶이 힘들었고, 지쳤으며,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잊고 지낼때였던거 같다. 그렇게 1-2달 고민에 시름거리다가 나름대로 답변을 만들어내곤 지금껏 창피한 삶을 지속해오고 있다. 지금은 그 답변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은걸로 보아 그만큼 타협적인 답변이었나보다. 그 이후로 다시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본적이 없다. 그러고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집에서 빈둥거리다 우연히 책꽂이에서 『인간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책 내용과 상관없이 그 책은 내게 다시 물었다. “너의 본성은 무엇이며, 너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래. 넌 왜 살아가는가?” 스르르 손을 내밀어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한다. (참고로 『인간본성에 관하여』는 그런 철학적인 사색인 담긴 책이 아니다. 과학서적이며 인간의 본성을 과학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책이다.) (전에 이 책의 저자인 Edward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이란 책을 예과2학년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그 책의 연장이다. 『사회생물학』에서 윌슨은 인간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문화도 생물학적인 면으로 연구가능하며 동일한 법칙에 의해 형성된것이라 주장한다. 인간이 창조해낸 문화와 지성들이 모두 생물학적 범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가? 우리는 얼마나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존재인가를 초등학교때부터 배워왔던가? 그나마 우리와 흡사한 원숭이와 같은 영장류에 비견하는 것이 자존심이 덜 상하겠으나 개미나 벌같은 곤충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며 윌슨은 결국 그런 존재들의 원천은 유전자일뿐이다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사회생물학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닭은 더 수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다. 즉 인간은 유전자의 안전한 존속을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얘기인 것이다.) 앞서의 감상에 비해 책은 무척 객관적이며 과학적이다. 책의 내용을 쭉 따라가보는 것도 재미있겠으나(이 책은 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지루하고 독후감 같은 느낌이 들거 같아 윌슨이 제시하는 3가지 딜레마를 살펴봄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 본성에 관하여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사회생물학을 참진리로 인식하고(아니 어쩌면 수학에서의 공리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있다는 점이다. “인류가 다윈의 자연선택을 통하여 진화한다면 생물종은 신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우연과 환경의 필연에 의해 창조될 것이다.” 이것이 신자연주의의 대명제이다. 이것은 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정신적 딜레마를 초래한다고 윌슨은 주장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유전자에 조작된 인간 정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일단 우리는(어쩜 유전자는) 평화를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주변 환경이 안정된다면 드디어 우리는 우리 인간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은 또 하나의 딜레마를 파생시킨다. 우리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제들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뇌에는 우리의 윤리적 전제들에 심층적이고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선천적인 감지기와 작동기가 있는데 이들중 어느것이 더 주도하고 어느 것이 더 복종해야하는 것인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이다. 세 번째 딜레마는 다행스럽게도 다음 세대들의 몫이다. 윌슨은 세 번째 딜레마의 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수록 더 객관적인 가치 체계를 선택하기 시작할수록, 그리고 마침내 냉철한 정신이 따뜻한 가슴과 만날 때, 그 궤도 집합은 더욱더 작아질 것이다. ...(중략)... 사회과학이 예측 학문으로 성숙되어 갈수록, 가능한 궤도의 수는 줄어들 뿐 아니라 우리 자손들은 그 궤도들을 따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세 번째이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즉 이제는 우리는 과학적 진보의 학문적 발달로 우리 종의 사회성과 패턴, 인간의 도덕성마저도 조절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것이지만 과연 우리의 유전자가 이것을 허락할 것인가? 세가지 딜레마의 궁극적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결국 유전자이다. 예전부터 난 내 뒤에 어떤 배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즉 나를 움직이는 어떤 다른 주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어떤 절대자이든, 나에게 접신된 잡신이든, 아니면 깊은 명상에서 우러나는 마음의 울림이든 혹은 매트릭스의 컴퓨터 프로그램인든 무언가가 나를 조정하고 있는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해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윌슨은 말하지 않는가? 유전자라고! 나의 유전자는 자신의 온전한 존속과 발전을 위해 지금 날 살아가게 하고 있다. 친구중에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심중을 알수는 없으나 한편으론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유전자의 존속자가 되느니 나를 중심으로 살고프다고.. 한편으론 궁금해진다. 그 친구의 유전자는 그를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 머.. 책중에 이타주의 장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을 유전자의 관점으로 해석한 부분이 있긴 하다. 그 유전자의 희생으로 다른 유전자의 보존-어떻게 보면 자기 유전자의 더 안전한 보존-을 이뤄낸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나의 유전자는 이 책도 읽게 했다. 이 책을 읽었음에도 난 딜레마에 빠져있다. 앞으로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내 유전자는 왜 이리 우유부단한가!! 버럭 //-_-; ) |
|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학자도 아니며 사회학자도 아니고 심지어 인문학부의 학생도 아닌 공과대생인 나에게 사회 생물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이 어떤 흥미를 유발시킬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서핑을 통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네트워크"인 노스모크(http;//no-smok.net)라는 싸이트를 접하게 되었고 이상하게 생물학도가 많은 그 싸이트에서 자연스레 유전자와 dna,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많은 노스모크 방문자들이 감명깊게 읽었다고 말하는 이 책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 관심을 가지게된 것이다. 또한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인물이 원래는 개미를 연구하는 곤충학자이며 "개미"라는 저서를 펴낸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에 나오는 개미 박사 "에드몽 웰즈", 그 박사가 이 에드워드 윌슨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은 나에게 너무나 어려웠다. 에드워드 윌슨은 반배수성,발달 경관,번연계 등등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그 상위 개념이나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 기본이 되는 전문용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써는 마치 레고 퍼즐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는 장님이 레고를 이용해 모형을 만들고 있는 것과 같았다. 솔직히 읽으면서 졸았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끈기를 가지고 열심히 읽어 나갔다. 인간의 본성을 인류의 번식을 도울 수 있는 과정에서 새겨진 현상으로 파악하며 인류의 종교,문화,예술등 모든 것들이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고 집단 생물학과 진화학적 방법론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주장은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유전자가 우리의 사소한 현상까지도 모두 규정하는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우리 유전자에 새겨지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윌슨은 여러가지의 확실한 굴곡과 잔 굴곡으로 이루어진 비탈길에서 공을 굴리는 것과 같은 상황을 예로 들고 있다. 그 공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새겨진 굴곡을 따라 굴러갈 확률이 높을 뿐 반드시 그 굴곡으로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그 중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다른 영장류나 심지어는 포유류 전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사실을 서술한 부분이다. 특히 이타적인 행동에 대한 그의 설명은 흥미로웠다. 우성 형질이 살아남는 다는 다윈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타인을 위해 버리는 이타적인 행동의 유전자는 그 자손에게 유전될 일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윌슨은 이타적인 행동이 비록 그 자신은 죽게될 수 있지만 그의 친족의 생존 확률을 높임으로써 그런 이타적인 형질을 가지고 있는 유전자가 유전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웃음과 언어 도구 사용등 여러 가지 많은 현상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떻게 유전자적 입장에서 해석되고 설명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사회 생물학이 인문학이나 생물학 보다 더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더 넓은 범주를 동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의견을 계속해서 피력하고 증명함으로써 사회 생물학에 힘을 실어준다. 인류의 여러 특질을 생물학적 벙법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윌슨은 모든 분야에서 생물학적 방법론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윌슨이라는 선구자를 통해서 세계를 측정하고 잴 수 있는 사회 생물학이라는 유용한 자를 새롭게 손에 넣게 되었다. |
| 蒙昧主義 Obscurantism 비좁음 ... 창 없는 방 ... 작동되지 않는 가전 제품... 몽매주의에 관하여 떠오르는 것들입니다. (蒙昧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 무지) "우리 것이 세계의 것이다" 학창시절에 작은 내 안에 각인 (In Printing)되었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굳어져 갈 무렵 영국으로의 길고, 긴 낯선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뿌리뽑힌 나무가 물결에 휩싸여 떠내려가듯 그렇게 내 작은 인생은 영국으로의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운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유학이라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선 단 한번도 이를 유학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삶에 떠밀린 결과였습니다. 내 안에 감추어진 교만의 산물이었고 세상을 향한 악함의 주먹질이었고 내 영안이 감겼던 무지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조금씩 걷혀갈 무렵 '우리 것이 세계적' 이라는 말에 신빙성이 없어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억울함을 느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까? 개인이 부자인 나라 그러나 나라는 가난한 나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은 가난하지만 국가는 부자 나라였습니다. 국민들의 모든 것들을 국가가 책임져 주는 사회보장 제도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는 나라 였습니다. 내 작은 틀 안에서 헤엄쳤던 지난날들의 그 화려함 들은 밤새 흘려 모아둔 눈물의 바다 그 비좁음 자체였습니다. 그 안에서 내 작은 생은 춤추며 노래하며 목이 터져라 외쳤고 하늘을 이야기했고 땅을 이야기했고 꿈을 이야기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모기의 뇌가 약 10만개 (p91) 정도 되는데 그 뇌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생각한들 그것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얕은 물가 같은 삶이었습니다. 영국에서의 삶은 내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의 비좁음과 얕은 냇물에 깊은 수로를 내는 작업을 힘겹게 실행하였습니다. 내 안에 용솟음 치는 것은 적어도 내 후손들, 혹은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비좁음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벼랑에 매어 달린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렇게 얕은 냇물을 파헤쳐 갔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오랜 시간동안 암기 위주의 학습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암기위주의 학습이 결국 비좁음을 낳았고 그것이 사회전반에 걸쳐 지금 젊은이들이 누리는 문화가 되어 버렸고 특히 기독교 안에서는 그보다 더 비좁음 속에서 허덕여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오스 기니스'의 표현처럼 자아라는 작은 동굴 속에서 사슬과 수갑에 매인 채 머리 위쪽에 난 쇠창살 달리 조그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게 되는 격이었습니다.(오스 기니스 지음 생명) 사역자들, 아니 내 자신이 학문의 깊이를 마치 세상 학문은 마귀 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세상 학문을 초등학문이라" 하였는데 내 자신은 그러한 초등 학문에 미치지도 못한 사람이 목회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을까 되짚어 봅니다. 그러기에 여기 저기 성경의 틀 안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더 이상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이 특정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단지 말세의 징조라는 안일한 대응을 할 뿐 우리네 내면 세계를 되짚어 보질 않았던 것입니다. "생물학이 인간 본성을 푸는 열쇠이다" (p38)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인간에 관해 완벽한 해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무지로 인하여 그것을 교회 안에서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해 왔던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간 본성을 푸는 열쇠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축조된 사고를 통하여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확대 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신앙의 제한된 안목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축소 시켰기에 독서묵상을 쓰는 제 자신이 바로 죄인 중의 죄인인 것입니다. "일부 생화학자들은 아직도 생명이란 원자와 분자의 활동에 불과하다 라는 신념에 만족하고 있다" (p32) 확실한 생명의 이유와 원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구해야 하는 우리의 무지, 그러기에 긴긴 밤을 세워가며 책과 씨름해야 하는 그 옛날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그 밤을 나는 지금도 계속 지새우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새로움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내면 세계는 몽매주의로 가득한 아집의 세계요 교만의 세계요 넓음의 바다라고 하는 그곳은 밤새 흘린 눈물 몇 방울의 양에 불과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지음 받았다 하기에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 완벽함을 이루는 유일한 길은 인간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은 나를 지으신 그분을 만나는 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폴 고갱 (Paul Gauguin)의 질문들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나의 존재의 의미, 내가 세상에 태어난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첫걸음인 것입니다. 인간 본성을 찾고 이해하였다면 이제는 더 깊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내 문제는 그 다음이 연결되지 않았음에 눈물지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시작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깊음으로의 길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져서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다시 교만해 질 수 없음에 이제 다시 비좁음의 틀에 갇히지 않음에 오히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는 내 작은 마음이 더 깊음의 샘물을 퍼낼 수 있는 두레박이 되어 주었습니다. 030918 목사가 되고 싶은 목사 박심원 |
|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실상 이러한 질문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의 오래된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꾸준하게 이뤄졌지만, 여전히 명쾌한 해답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하겠다. 예컨대 인간의 본성이 착한가 혹은 악한가에 대해서 각기 제기되었던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도 단지 하나의 학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 책은 생물학자인 저자가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와 그 본성을 탐구하겠다는 의도로 저술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생물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사회생물학’을 내세우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여타의 동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사회생물학을 일컬어 동물생물학과 생태학 그리고 유전학 등을 총괄할 수 있는 종합적인 학문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나아가 '기존의 행동학과 심리학 지식 속에서 사회 조직에 관련된 주요 사실들을 추출해 내고, 그렇게 추출해 낸 사실들을 개체군 수준에서 탐구되어 온 생태학 및 유전학의 토대 위에서 재구성하여, 사회 집단이 진화를 통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 그 방법을 보여주고자' 함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저자는 오랫동안 개미의 생태를 탐구해온 생물학자로서, 개미와 그밖에 동물들의 생태를 탐구한 결과를 인간의 문화에 적용하여 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결과 인간 고유의 문화라고 여겨졌던 다양한 면모가 여타의 동물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울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진화 실험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수백만 년에 걸쳐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산물‘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생물학자의 관점에서 만약 ’우월한 외계 생물 종의 대표자들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것이라고 전제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가장 먼저 기존의 철학사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소개하면서, ’인간 본성의 딜레마‘라는 제목의 1장으로부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유전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와 문화를 조망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유전적 진화‘(2장)와 ’준비된 학습‘(3장)은 물론 ’문화적 진화‘(4장)와 ’공격성‘(5장) 및 ’성(性)‘(6장) 등에 관한 주제들로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저자는 다양한 동물들의 생태와 환경에 적응하며 지내는 모습을 비교의 준거로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했던 내용들이 유전학의 관점에서 동물행동학의 논리로 서술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이타주의’(7장)나 ‘종교’(8장) 그리고 ‘희망’(9장)이라는 주제야말로 그동안 인간과 여타의 동물들을 구별할 수 있는 주요 논거로 활용되었다고 하겠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 역시 유전학의 논리를 통해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만, 실상 이러한 주제는 인간의 문화에서 습득된 지식의 축적이라는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고 파악된다. 따라서 이 주제들에 대한 저자의 다양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내세운 ‘사회생물학’이라는 관점이 적절하게 관철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독자로서 쉽게 납득할 수 없었던 점도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자연과학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 결합하여 ‘인간 본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졌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나 문화의 산물에 관해 유전학을 토대로 한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할 때,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기원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고, 90년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실려있었던 말인데, 이 책을 읽는중 문득 그 한 문장이 뇌리를 스치는 거다. 물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스승인지 제자인지도 헷갈리는 그런 비지식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장을 조금 전 읽은 책과 연결짓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낀다. 무식하면 용감하니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앞서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동물이라는 명제는 참이다. 다만, '사회적' , '정치적', '도덕적', '이성적' 등 어떤 렌즈를 인간 앞에 들이대느냐에 따라 2차적 인간의 모습이 좀 더 중점적으로 조명되는 것일 뿐이다.
저자 윌슨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을 조명함에 있어,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을 방법론으로 택하고 있다. 사회생물학이란 변증법의 논리로 말하자면, 사회학(正)과 생물학(反)의 합(合)에 해당되는 학문이다. 서양의 '합'사상은 동양의 '중도'를 닮았다. 어떤 주장의 '축적' 혹은 '진화' 여부에 따라 '합'과 '중도'를 구분할 수 있겠지만, 두 극단의 거친 손을 맞잡게 하는 부드러운 손길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대개 그렇듯 '중도'는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하며 생명력이 긴 중심점이다. 따지고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도 이런 중도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셈 아닐까? 인간은 분명 동물의 한 속(屬)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이라는 특성으로 구분된다는 말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학적 특성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책 얘기로 돌아가자.
저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도킨스를 통해서다. 역시 "유유상종"이라는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생물에 대한 해박한 생물학적 지식과 인간 그리고 사회와 문화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또한, 도킨스 뿐만아니라 데즈먼드 모리스가 겹쳐지면서 풍성한 식탁 앞에 앉아있는 듯한 행복감이 든다.
9장으로 구성된 그리 길지 않은 책이지만, 1장부터 9장까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는 짜임새있는 구성이 마음에 쏙 든다. 특히, 3장의 준비된 학습, 5장의 공격성, 6장의 성(性), 7장의 이타주의, 8장의 종교는 인상적이었다.
뱀 다리 두 개 더! 1. 2~3세기 <삼국지>의 인간 군상들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공통적인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텐데, 그것은 바로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즉 '동물적 인간'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은 아닐까? 2. 프로이트가 말한 Id(무의식)는 인간에 내재된 유전자의 의도(?) 혹은 동물적 특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더니... |
| 사회생물학. 예전 어느 실험실에서 책장 정리 한다고 거의 내다버리다 시피한, 민음사에서 펴낸 대우학술과학총서 시리즈 중 "사회생물학1,2"를 주워왔다. 윌슨 아저씨의 명성과 그의 주저를 직접 손에 넣었다는 기쁨도 잠시, 한 두장 넘겨보다가 포기해 버린지 거의 10여년이 흘렀다. 원전을 통해 윌슨 아저씨의 목소리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여기 저기서 인용된 그의 생각은 숱하게 접해왔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번역을 통해서지만. 70년대 사회생물학이라는, 거의 새로운 학문 영역이 이 책을 통해서 개척되었다. 사회성 곤충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해오시던 윌슨 아저씨는 그 연구 범위를 아주 대표적이고 친숙한 사회성 포유동물인 인간에게로까지 확대시킨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사회학이나 인류학, 심리학 등이 있었고, 물론 생리학, 의학 등의 자연과학도 당연히 존재했지만,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는 ''사회생물학''의 출현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반응들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반응은 극단적인 찬성에서 극단적인 반대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났다. 솔직히, 어느 한 분야의 대가에 대한 반박이나 비판은 그 정도의 지식 및 지위를 갖추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무조건적인 추종과 찬성이야말로 대단히 위험한 자세이지만, 단순히 평범한 한 학생 혹은 독자의 입장에선 일단 그의 강의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차다. 윌슨 아저씨의 견해에 대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형식의 반박이 이어졌고, 그에 대한 재반박이 또한 이어졌다. 윌슨의 주된 개념이 결국은 유전자 결정론으로 단순화되어 이해되었는데, 결국 이것이 숱하게 많은 반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물론 과학이란 것이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는 있지만,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는 없다는 속성으로 인해, 이에 대한 논란은 결코 해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과연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철학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다른 포유동물-넓게 봐서는 다른 생물,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비교해서 별다른 게 아닌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영역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를 위해 공격성, 성, 이타주의, 종교, 이렇게 네가지 인간의 본성(혹은 본능?)을 예로 들고 있다. 결국 그동안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주는 것으로 믿어졌던 인간의 고차원적 본성까지도 결국은 유전자 수준에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단지 ''설명 가능하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지, 그것이 참이요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과학이 결국은 자연 현상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인간 본성을 고차원적 영역에서 인지 가능한 영역으로 끌어내린 이점은 무엇인가. 윌슨 아저씨는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그로 부터 희망을 본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본성이나 행동 자체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수준에 있다면, 그 미래의 행동 패턴-궤도를 예측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거의 무작위적으로 무한한 궤적 중 가능한 몇가지를 선별해 낼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인간 사회의 평화 번영에 이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이 쓰여진 30여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래서 윌슨 아저씨도 고려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생물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우리 손앞에 놓여져 있다. 인간의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뿐만 아니라 특정한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들까지도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본성을 생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 윌슨 아저씨 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꺼려하거나 비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시대에는 그 비판이 ''가능''과 ''불가능''의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이미 가능성은 증명되었고, 비판의 무대는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그러한 학문이야말로 다음 세대를 준비할 수 있는 지식 발판이 될 듯하다. |
|
인간의 의식과 사고 등 인간 본성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일까? 아니면 과학에서 이야기 하는 유전자일까? 고대부터 근대까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고찰했다. 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신이 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에서는 영혼과 정신에서 인간 본성의 유래를 찾았다. 하지만 과학이 더 이상 신학의 시녀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현대에 첨단 과학의 시대를 구가하게 되면서부터 그러한 관점들은 낡고,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현미경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원자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DNA 의 구조가 점점 밝혀짐에 따라 인간 존재를 과학적 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 책에서 사회 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은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의 근원을 찾는다. 기존의 철학 및 신학적 관점을 과학적 관점으로 대체하여 인간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유전적 진화, 유전자가 생물의 행동에 과 진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분석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공격성', '성', '종교', '희망' 이렇게 네 가지 관점에서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본성의 근원을 추적한다. 월슨은 생물의 행동 및 진화, 인간의 본성을 유전자에서 찾는다. 따라서 기존의 탐구 방식에 익숙한 이는 심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반면 새로운 방식을 갈망하던 이라면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월슨의 탐구 방법은 아직은 낡은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도에 불과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지금의 과학적 분석을 대체하는 또 다른 방법이 언젠가 등장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의 노력에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본성을 유전자에서 찾는 오늘날의 과학적 분석은 새 시대의 부산물이다. 이 시대의 유행하는 방식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난 시대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신 혹은 영혼과 정신에서 찾았다. 그것은 신학과 철학의 부산물이었다. 이렇듯 시대마다 지배하는 관념과 방식에 따라 인간을 다르게 정의 했고, 그 본성의 근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배적 주장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단지 새 시대의 부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영혼? 유전자?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영원히 밝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본성의 근원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계속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시작과 끝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
|
사회생물학이 75년에 이 책이 78년에 쓰여졌으니 무려 30여년 전 책이다. 그런데 그간에 읽었던 책들이 다루고 있던 내용이 여기에 오롯이 원전으로 들어가 있을 줄 미처 몰랐다(물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초판이 1976년이었다). 그가 분석한 인간행동의 기본 네가지 범주(공격성,성, 이타주의, 종교)는 그 후의 많은 저작들이 다루는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인간본성이란 윤리, 철학의 문제이지 어찌하여 생물학의 연구대상일 수 있나 의심할 수 있다. 자연과학자인 저자가 어떻게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언급할만한 주제로 책을 낼 수 있을까 궁금해질 수 있다. 개미연구의 대학자로서 윌슨은 사회적 곤충의 연구를 통해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보다 참딘 정의는 생물학적 진화라는 창을 통해 가능하고 또한 그런 정의에 바탕을 둔 윤리를 탐구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무한한 반감과 반대의견을 낳을 수 있었기에 그는 이런 기준하의 인간본성연구가 지닌 딜레마를 언급한다. 우선 인간을 포함한 어떤 종도 자신의 유전적 역사가 부과한 의무를 초월하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심미적 판단과 종교신앙의 선택도 인간조상들이 진화를 거치면서 당시 환경에 적응한 산물이란 것이다. 뇌는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의 정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장치이며 이성은 그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장치의 하나라는 주장은 기존의 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초의 인간연구는 더이상 철학의 업무만이 아니게 되었고 우리는 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전 영역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헤아려낼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다.
이어서 저자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하는 윤리적 전제들을 선택해야하는 딜렘마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뇌에는 우리의 윤리적 전제들에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는 타고난 센서와 모티베이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근원에서 본능으로 진화해 윤리의 모습을 갖추어갔다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자들은 이 윤리체계를 결과된 모습만으로 다루었으나 이제 기원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즉 윤리적 실천행위들은 수천세대동안 자연선택을 거치면서 상당 수준까지 프로그램되었고 과학의 과제는 정신의 진화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 프로그램속에 짜여진 속박의 치밀함을 측정하여 뇌에서 그 것의 원시 프로그램을 찾아내고 그 속박의 중요성을 해석하는 것이다. "
말하자면 인간본성을 이루는 지침들은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탄탄한 경험적 지식을 통해서 시작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 유전적으로 결정된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윌슨은 그 설명 대상이 되는 행동은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라는 껍질로 위장하기 가장 어려운 타고나 생물학적 현상들을 함축하는 것들이다. 근친상간 금기, 상승혼, 여아살해등이 그 예들이다. 문화적, 비문화적 지체자에 대한 연구, 유전적 다양성과 그 변이에 대한 연구등은 인간행동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행동의 인종적 차이라는 질문은 미묘한 감정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단일 교배체제내의 한 종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생물학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유머러스하게도 그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현존 또는 가상의 호모 슈퍼부스라는 우월 종의 출현등을 언급하면서 그 갭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이루어낸다. |
| 1978년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을 이십년이 넘어서야 읽을 수 있다니 한국사회의 경직된 분위기가 얼마나 심한지를 생각하면 착찹하다. 저자는 인간본성의 딜레마를 여러 동물들의 사회화와 견주어서 다른 인문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서술한다. 인간의 공격성과 성, 이타주의, 종교, 희망에 대해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적절한 예와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펼쳐진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과 따뜻한 시각을 잃지 않는 에드워드 윌슨을 통해 참으로 인간됨에 대한 겸허한 사색에 빠지게 만드는 책이다. 인간을 인생을 탐구하고 노래하지 않는게 문화속에 존재하는가? 인간중심주의로 흐르는 현대 추세에서 꼭 한번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
| 인간본성, 아마도 누구나 생각해볼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을 보는 순간 꼭 사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Chapter의 제목을 읽고, 본문을 읽어도 내용이 잘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고 전체 내용과 각 chapter의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내가 사회과학쪽 분야에 문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번역이 조금 이상하거나 아니면 내용 자체가 "읽기 어렵게" 쓰여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책의 내용들은 (이해할 수 있는) 또한 많은 재미를 주었었다. 인간의 본성을 다른 생물들의 관찰에서 얻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혹은 생명현상과 관련된 DNA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으로 보는 작가의 생각과 그와 관련된 일련의 내용들은 비록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실, 생각날때마다 이 책을 읽어보곤 하는데 아직까지 이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이다. 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읽어보면서 생각해 볼 만한 문제들을 많이 제시해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