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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이어지는 쌀쌀한 날씨에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당신에게 저는 에세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제 사적인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게 어쩐지 쑥쓰럽기만 하고, 뒷머리를 마구 긁적이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소설이란 형식에 매료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은 "여러분, 이거 다 허구인 거 아시죠?"라는 선전포고를 날려놓고 마음껏 허풍을 치는 장르이기 때문이죠. 어느 정도는 핍진성과 개연성을 담보하기는 해야겠지만, 전부 허황된 이야기로 채워넣어도 사람들은 그게 "소설"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에세이는 다릅니다. 에세이도 문학의 한 종류이기에 어느 정도의 허구를 섞는 건 허용되지만, 해당 에세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허구로 적으면 안 됩니다. 그건 규칙 위반이거든요.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여러분, 이거 제가 직접 겪은 일인데 한 번 들어보세요."라고 독자의 옆구리를 살살 치면서 시작하는 장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언제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얼마간의 존경심과 함께 경청의 자세로 읽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부위를 내보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일 테니까요. 문학동네 계열사인 '난다' 출판사는 2024년부터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시의적절 시리즈'입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시의적절 시리즈는 매월 한 시인이 해당 월에 얽힌 에세이를 씁니다. 꼭 월에 관련된 이야기를 적지 않아도 되지만, 형식 자체가 1월 1일, 1월 2일, …, 1월 31일, 이렇게 되어 있어서 어쩐지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기분도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그 안에 담겨진 이야기가 좀 더 진실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2024년에 시의적절 시리즈의 포문을 연 작가는 '김민정' 시인입니다. 난다 출판사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난다 출판사는 시에 많은 애정을 가진 출판사라는 느낌도 줍니다. 시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이 이 출판사를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그런 특수성 때문이겠죠. 2024년 시의적절 시리즈에는 신이인, 양안다, 오은, 서효인, 황인찬, 박연준 시인 등이 참여했고, 2025년에도 정끝별, 김용택, 백은선, 고선경 시인 등 내노라하는 시인들이 참여했습니다. 2026년 1월에는 한여진 시인이 참여했고, 2026년 2월에 이 시리즈를 장식하는 책이 바로 김상혁 시인의 『그냥 못 넘겼어요』입니다. 참, 작가의 섭외도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김상혁 시인은 2026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거든요. 분명 원고 청탁은 꽤 오래 전에 들어갔을 텐데, 에세이 출간 시기가 수상 시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걸 보니, 잘 되는 출판사와 작가는 뭘 해도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김상혁 시인의 에세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다보면, 자꾸만 멈춰서게 됩니다. 이런 내밀한 이야기까지 담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거든요. 개인적으로, 시는 문학 장르 중 가장 전위적인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담고 있는 생각이나 사상이 전위적일 때도 있고, 언어나 형식 자체가 전위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언어를 규정짓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100명의 시인이 존재한다면, 200개의 시인의 언어가 존재할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혁 시인의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의 언어라는 어렴풋한 달그림자를 쫓아보려고 노력해본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시인은 '조사'를 다루는 사람이다. 한국어에는 '조사'라는 품사가 존재합니다. 조사는 교착어에 속하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언어적인 특성으로써 이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우리는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테니, 이쯤에서 생략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아무튼, 다시 한국어에는 '조사'라는 품사가 존재합니다. 이 조사는 상당히 특이한데, 대체로 '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때때로 같은 문장을 서로 다른 뜻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에 다룬 가와사키 쇼헤이의 책 『리뷰 쓰는 법』의 서평에서 일부를 발췌해 보겠습니다. · 수프는 맛있다 가까운 예로는, 한국 소설 최고의 첫 문장을 꼽을 때 어김없이 거론되곤 하는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를 들어볼 수도 있겠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렇듯 한국어에서 조사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외로 문장의 뜻을 좌지우지하는 '키맨'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조사가 문장의 뜻에만 영향을 줄까요? 조사가 생략될 경우, 오히려 특이한 말맛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2025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현호정 작가의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 같은 작품은 조사를 과감하게 생략해서 구어체와 같은 질감을 구현했고, 이를 통해 고전 소설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사에 대해 중언부언한 건, 김상혁 시인의 『그냥 못 넘겼어요』 를 읽으면서도 이런 문장을 종종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나 데리고 살아주던 이모와 이모부가 일 나가고 없을 때면 나는 티브이 앞에 앉아 엘라니스 모리셋만 기다렸다. 이런 문장은 구어체적인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게서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지워버립니다. 분명 산문인 에세이를 읽고 있었는데,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면 꼭 운문을 읽는 말맛을 주거든요. 직접 소리내어 발음해본다면 그런 특질이 좀 더 명확하게 와닿습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느낌이 입안을 맴돕니다. 그래서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으면서 시인은 조사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조악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인은 조사만 다루는 전문직이라고 단정 짓기엔 아직 섣부른 것 같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시와 에세이는 시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 『그냥 못 넘겼어요』에는 에세이뿐만 아니라, 메모, 시, 초단편소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래동화는 돌아보았다가 돌이 된 자의 표정을 항상 일그러진 것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속고 말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여보, 살려줘. 아빠, 나 죽어요. 위와 같은 문장들을 책 속에서 경유하다보면, 시인이란 직업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수정해야겠다는 조바심이 듭니다. 시인은 '감정'을 다루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될까요? 하지만 어쩐지 이것도 엉성해보입니다.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운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곤 합니다. 그게 어떤 종류든, 크고 작든 상관없이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교훈을 혼자 품에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일부의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그걸 글로 써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죠.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이 얻은 교훈이나 느낀 감정을 전달해줍니다. 위에 적힌 문장들도 그런 종류의 글에 속해 있습니다. 김상혁 시인이 겪은 인생 속에서 솎아진 감정이겠죠. 그걸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세심하게 조각한 글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들을 읽고 나자, 시인은 감정을 다루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문학적으로, 동시에 경제적으로,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적어내려간 문장을 통해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다정한 얼굴이 얼핏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시인이 뭐하는 사람이라는 거냐?", 라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죄송합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저 김상혁 시인이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인지 좋은 에세이를 썼다는 두루뭉술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만 듭니다. 이 에세이를 다 읽고 나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런 솔직한 에세이를 쓸 수 없을 것 같다고요.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래서 이 에세이들이 저한테 더 와닿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담한 문체와 어우러진 솔직한 이야기가 읽는 사람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상혁 시인은 2월에 어울리지 않게 참 따뜻한 글을 썼다고요. 하지만 어쩐지 꼭 그래서 2월에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몇 겹의 옷을 껴입어도 찬 바람이 어딘가에서 솔솔 새어들어오는 날씨니까요. 이런 날씨에 꼭 필요한 온기가 담긴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쌀쌀한 날씨에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분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세상 망했으면 하고 바라다가 네가 깊은 잠에 빠지면 좋겠다 하지만 늦게까지 휴대전화 들여다보다가 오늘도 노트에다 사랑을 적었다고 네가 전화로 말해주었다 - 『그냥 못 넘겼어요』, 9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