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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힘든 일을 하면서 '별로 힘들지 않아요', '할수록 늘어요'라고 말하는 고수를 만난 느낌. '그래서 고수인가?' 우엣든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하 라는 카피보다, 은유 저자가 "성폭력 피해 여성들, 마을 공동체 청년들, 시민사 회단체 활동가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도 열었다. 자기 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고 말하면서 자기 언어를 만들고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뜻을 두고 있다. 평 소 니체와 시를 읽으면서 질문과 언어를 구한다."라는 저자 소개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느낌이 무엇인지 쓰는 것이 제 숙제겠지요.
글의 차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왜 쓰는가, 들어가며, 삶의 옹호로서의 글쓰기, 감응하는 신체 만들기, 사유 연마하기, 추상에서 구체로,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 부록 노동 르포 : 효주 씨의 밤일, 인터뷰1 : 침대에 누워 대소변 받아내도 살아 있어 괜찮았어, 인터뷰2 : 장수 씨, 참고도서 : 글쓰기 수업시간에 읽은 책 들, 나오며 : 슬픔이 슬픔을 구원한다.
시선 또는 마음을 잡아끈 파트
1. 다른 삶의 이력과 마주하는 시간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 "한 해가 갈 무렵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데 지인이 묻습니다. 뭘 위해 그리 입술이 부르트도록 일해? 답을 전하는데 며칠이 걸렸던 기억이 있네요. 호흡을 가다듬어야 할까 싶어집니다. 어쩌면 미루어두고 있 는 답을 찾아야겠다 싶기도 하구요. 글쓰기가 구원이 되려나요. 무리 한 상황에서 신청해봅니다. 잘 통과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글쓰기 강좌 접수 페이지에 달린 신청 댓글이다. 짧은 서너 줄 문장 이지만 사례 중심의 구체적인 내용 전개가 돋보인다. 글쓰기가 구원 이 되느냐는 물음에 시선이 머문다. 대개의 질문은 자기 답을 확인받 으려는 절차이다. 저이는 알고 있는 듯도 하다. 글쓰기에 삶의 속도를 늦추는 요철 기능이 있고 삶의 방향을 이끄는 안내 기능이 있다는 사 실을,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다. 이미 축복.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 ㄴ라 낫질이다. 혼자서 자문자답의 노동을 반복하다가 우리는 잠시 친구로 만나는 것이다. 46쪽
잠시 잠깐 나도 글을 잘 쓰는 편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던 적이 있 습니다. 예스24블로그에 리뷰를 쓰면서 아주 크고 처참하게 깨져버 렸지만 아직도 마음 속에 조그맣게 '나도 글 잘 쓰던 적이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해주고는 합니다.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혼자서 자문자답의 노동 을 반복하다가 우리는 잠시 친구로 만나는 것이다" 앞의 글은 끄덕끄 덕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잠시 친구로 만나는 것이다"는 바로 끄덕일 수가 없습니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인데 그런 것이었을까요? 생각을 부르는 독서를 하게 되는 책이네요.
2.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스피노자는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 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금속 연마를 예로 든다. …… 일단 내 앞 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 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 장이 일어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 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 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서 영감을 기다리고 지적 자극을 위해 벤야민을 읽고 벤야민을 읽다 보면 마르크스가 궁 금하고 마르크스를 공부하려면 <자본론>을 펴야 하고……. 무능력에 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 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질보다는 양이 문장력 향상의 지름길 - 사이토 다카시, <원고지 10장 을 쓰는 힘>. 58쪽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질보다 양이다. 좋기는 한데 "일단 원고지 10장 정도 글을 써보고 줄여보고 관찰을 하고서 관찰내용을 풀어서 써보고, 좋은 글 필사도 해보고 계획적으로 매일 얼마 정도의 양을 써보고" 해야겠지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목표를 갖고 실행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더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블로그 초입의 "나는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선언이 왠지 부끄럽네요. 그 래도 덜 부끄러우려면 2019년10월16일부터 쓰고 또 쓰고, 10장을 채우는 연습을 꾸준히 쉼없이 해보렵니다.
3. 쓸모-없음의 시적 체험 잘 알려졌다시피, 김현은 남은 일생 내내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학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 학은 써먹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 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 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 도, 큰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 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 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95쪽
자기계발서나 투자서 또는 투자의 귀재들이 매번 인간에 대해 더 깊 게 알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일이 인간 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사람을 더 알고 고수가 될수록 더 많은 기부와 사회봉사활 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그런 고수가 되고 싶고 조용히 얘기해도 그 목소리가 잘 전달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4. 자기 입장 드러내기 첫 번째 파난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 니체 - 살면서 이런저런 지나침을 통과하하다 보면 정서의 결이 생겨나고 그 결에서 글이 빚어진다. 어떤 글을 읽어보았을 때 필자가 무슨 일을 경 험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라고 나는 생 각한다. 딱딱한 말로 하자면 일종의 '당파성'인데 어느 '편'에 서는 입 장, 곧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당파성은 지지 정당이나 이념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동 조하는지에 가깝다. 123쪽
요즘은 정치 얘기를 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왠만큼 친한 사 이일지라도 종교와 정치 얘기는 피하는 것이 매너, 애티켓이자 불필요 한 다툼을 미연에 방지하는 지혜이기도 한 상황. 그래도 서로 지지하는 지유와 싫어하는 이유를 얘기나눌 수 있는 것이 극한적 대립과 종교전 쟁에 준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한 방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물론 왜 내가 지지하고 왜 싫어하는지를 돌아보다보면 다른 입장에 동 의할 수도 있고 생각지 않던 문제점도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요?
5. 마음에 걸리는 일 쓰기 : 모티브 찾기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 되었다. - 조지 오웰 - 1. 미용실에서 생긴 일의 전말. 원장과 남자 손님의 행동, 표정, 대화 를 정리한다. 2. 당시 나의 기분이 나빴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다방 종업원으로 취 급한 것 같다. 아줌마라 얕본 것 같다 등등 솔직하게 날것 그대로. 3. 원장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아마도 손님을 직접 응 대하지 못한 미안한 상황을 무마하려고 무리수를 둔 듯하다는 식으로. 원장은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밥 하는 가부장제 이성애 성별 분엽에 익숙한 세대이고 끊임없이 감정 노동을 수행해야 하므로 젠더 감수성 을 키우기 어려운 직업이다 등등. 4. 나의 불만을 원장에게 말할 경우와 말하지 않는 경우를 가정해서 득실을 써본다. …… 이글의 주제는 무얼까.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이런 에 피소드가 글감이 되는 게 이 글의 주제이자 의미라고 생각한다. 사소할 수 있는 일상의 오가는 말들을 글감으로 상정하고 사유하고 발언하는 것. 누구나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존엄을 지켜갈 수 있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말이다. 159쪽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자기 존엄을 지켜갈 수 있게 하는 방편으로서의 글쓰기. 물론 침묵을 통해 많은 상황을 통과할 수도 있지만 대화와 손글씨 편지를 통해 자기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생 각을 알 수도 있다는 것. 어느 것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갈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글이 곳곳에 있고, 지금 선택하지 않았어도 그냥 버려두 기 아까운 생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펼쳐 읽을 만한 책이라고 스 스로 평가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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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을 살펴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책으로 저자의 이름과 외형도 선택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아직은 날카로운 비평을 수용할 수 없고, 그냥 따뜻한 느낌의 두루뭉술한 책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순해 보이는데 책은 강렬한 빨간색 표지에 펜들이 세로로 세워져 있다. ‘이거 만만하지 않겠는데?’
은유 작가는 글 쓰는 사람으로 2011년부터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해 현제 학습공동체 ‘말과 할 아카데미’와 글쓰기 모임 ‘메타포라’에서 정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자기 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고 말하면서 자기 언어를 만들고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평소 니체와 시를 읽으면서 질문과 언어를 구한다. 저서로 <쓰기의 말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다가오는 말들>, <올드 걸의 시집>등이 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프롤로그에서 저자의 글쓰기 삶을 살짝 구경할 수 있다. 저자는 왜 쓰며, 나는 왜 쓰려고 글쓰기 책을 찾는가?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쓰기의 최전선 속으로 산책처럼 느린 걸음을 옮긴다.
못 써도 쓰려고 노력하는 동안 나를 붙들고 늘어진 시간은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는 계기이자 내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타인과 인사하는 시간이라고. 이제는 나부터 안달과 자책을 내려놓고 빈말이 아닌 채로 학인들에 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우리 어서 쓰자고. 글쓰기에 대한 환상이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의례 멋있고, 지적이며,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깊은 본심 안에는 이런 욕망도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멋있고, 지적이며, 잘난 척하고 싶은 욕망. 그러나 몇 번의 시도를 하게 되면 바로 깨닫게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작가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은 한정적이고, 더 좋은 것은 이제 나올 것이 없다고. 괜찮은 사람, 멋진 사람들을 책을 통해 알아가면서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 마음들이 이어지면 이제 더는 쓸 수가 없다. 용기도 나지 않는다. 아주 많이 쓴 사람처럼. 그래서 웃음이 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 이유들을 무참히 밟아버리는 문장이다. 자기 한계와 욕망을 마주하며 쓰기 위해 자신을 붙들고 늘어진 시간도 글을 쓴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글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한다. 또다시 용기를 내게 만드는 문장이다. 글로써 다른 사람에게 의욕을 주거나 무언가를 결심하게 하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의 무한한 매력이다. 또한 작가의 경험에서 오는 진실한 글이 이런 힘을 발휘하는 것이겠지. 화려한 미사여구의 구성이 아니라 투박하리만치 진실 되고 솔직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살아온 삶이 글 앞에서 진실해지기를...
시의 난해함은 삶의 난폭함에서 유래한다. 삶이 종잡을 수 없다면 삶을 받아낸 시도 그럴 수밖에.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 김수영의 시를 학인들 과 함께 읽으면서 하는 말이다. 김수영의 시를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풀이라는 시였던 것 같은데, 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 수 없었다. 참고서의 말들도 이해할 수 없고, 김수영이 왜 천재 시인인지 공감하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시를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낑낑거리면서 위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해석이 아니라 나만의 해석과 느낌이 중요하다. 시를 읽고 분석한 학자의 평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 시를 읽은 느낌과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가 학인들 과 시 수업을 하는 것은 감응하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시라는 것에 반응하고 느끼는 신체.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는 그냥 흘리는 아주 사소한 것들 속에서도 느끼고 감동하는 다른 시선과 몸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김수영의 시와 기형도의 시를 도전하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정답은 없는 나만의 느낌으로 시를 읽고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당찬 다짐이 생겼다. 시인의 시집이 좋아서 통째로 필사했다던 시도 궁금하고, 어느 부분이 저자를 흔들었는지 함께 공감해 보고 싶다. 나를 흔드는 시어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문태준의 <가자미>, 최승자의 <이 時代의 사랑>,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권혁 옹의 <마징가 계보학>이 궁금해졌다. 또 할 일들이 늘어났지만 기쁨과 기대가 생겨났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는 말이 새롭게 와닿았다. 괴롭히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관계 가운데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나의 몫이다.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나를 유지해 나가는가? 보편적 관점을 어떻게 변화 시켜야 하는가? 물음을 던지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조지 오웰을 들어서 설명했다. 저자는. 저자의 글도 여러 가지 물음과 생각들을 던졌다. 시를 느끼는 방법, 세상에서 약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 등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것을 보고 느끼며 쓸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럼 일상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지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삶의 옹호자로서 글쓰기를 말하는 저자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라고 말한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신의 몸을 통과하게 하는 것이 글쓰기의 매력이라고 한다. 책들이 자신의 몸을 반응하게 하고, 그 느낌들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느껴보라고 한다.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고, 다르게 생각해 보며,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라고 한다. 이런 실제적인 방법들을 자신의 글쓰기와 연결하여 보여주고, 함께 진행하는 글쓰기 학인들의 감정과 글의 변화를 썼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지만, 중반 이후로는 참여하는 학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읽고 쓴 글들이 궁금했고, 어떤 느낌들을 나누었는지 생생하게 느꼈다.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글쓰기를 모두 마치려 했는지 모른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그 책만큼 읽어야 할 독서량이 늘어난다. 이러다가 한 줄도 못 쓰고 책 만 읽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부족한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크다. 저자의 삶의 궤적들을 따라 걸으며 인터뷰를 느끼고, 르포를 체험한다. 이혼한 아버지의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와 화해하는 아들의 모습이 담담히 그려지고, 어머니의 우울증을 진심을 다해 들어주는 인터뷰를 통해 치유한다. 사람!!! 글쓰기도 결국엔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더 많이 사랑하자. 굳이 작가를 꿈꾸지 않아도 현실에서 나의 이야기를 쓰는 강자로 살아내기 위해서. 글쓰기를 말하는 책에서 독서를 보는 시선을 느낀다. 아직 그 정도의 시선임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글쓰기를 마음에 두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신체를 갖기 원한다면 꼭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정면으로 마주 보기 힘들었던 글쓰기의 지난한 습작을 마주할 용기를 더하여 줄 것이다. 뭔가 전율을 가져오는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이뤄진 글은 갈망의 산물이 아니라 습작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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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아" 벌써 세 번째다. 요즘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데 아내의 피드백이 부정적이다. 몇 번을 고쳐 써도 나아지지 않는다. 작년 독립출판을 준비하며 글을 쓸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내는 늘 독자의 입장에서 솔직하게 평가를 해주었는데 한 두 번 수정하면 개선이 되곤 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답답한 마음에 글쓰기 책을 읽어보려던 차였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은유’ 작가에 대한 글을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사람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메모 어플에 짧게 기록해두었다. 얼마 후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있던 차에 잘되었다 싶었다. "이 책은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증언이다. 누군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여지없이 맞닥뜨리는 문제들, 고민들, 실험들, 깨침들, 변화들, 질문들에 관한 이야기다. 글을 쓰고 싶은데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할 때, '왜'라고 묻고 '느낌'으로 써 내려가는 그 섬세한 몸부림의 시간을 담았다." 본인의 글쓰기 수업 경험을 집약하여 글쓰기에 대한 농익은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책을 읽을수록 책이 나를 읽기 시작했다. 책은 내 안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갈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글을 쓰면서 어떤 쾌락을 누리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듯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따라 내 욕망의 심연으로 들어갔고 심연 속에 실타래처럼 얽혀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작년 여름부터 책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독립출판 워크숍에도 참여하여 책을 제작하는 과정을 배우며 원고를 썼다. 책의 제목은 ‘서른아홉 행복가능보고서’. 삼십 대 후반, 인생의 힘겨웠던 시기를 보내며 경험하고 고민했던 이야기를 담았다. 연애와 결혼, 직장생활, 인생의 새로운 꿈에 대해서까지. 나는 왜 이 글을 쓴 것일까. 답이 있다면 하나다. ‘쓰고 싶어서’. 다른 이유는 없다. 언어를 통해 내가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왜 들었을까.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글쓰기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수공업으로, 부단한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 안에 솟구치는 그것에 대해 알아채는 감각, 자기 욕망과 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감성적 역량, 세상을 읽어나가는 지식과 시선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 저이는 알고 있는 듯도 하다. 글쓰기에 삶의 속도를 늦추는 요철 기능이 있고 삶의 방향을 이끄는 안내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다. 이미 축복. 글쓰기는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동작이다. 낫이 아니라 낫질이다." 글쓰기가 치유의 행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적어도 나의 경험에만 비추어보면 그 말은 진실이다. 나의 경험, 생각, 느낌이 적나라하게 쓰인 글이 나를 위로하고 치유한다. 치유와 구원의 순간은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이해되고 공감받을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글로 표현하고 묘사하는 행위는, 완벽하게 나를 이해하는 타인을 빚어내는 일이다. 아마도 내가 ‘쓰고 싶었던’ 이유도 글 쓰는 행위가 가진 그 미지의 힘에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글은 왜 써지지 않는가? 독립출판은 내 몸과 마음에 청량감을 불어넣어준 즐거운 경험이었다. 얼마만인지 모른다. 가족도 회사도 아닌 오직 ‘나’를 위해 모든 감각을 집중하는 시간. 김 빠진 일상에 부어진 탄산수 같은 경험이었고 내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책을 쓰고 펀딩으로 책을 판매하고 독자들의 피드백을 받는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흥분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공감과 위로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독립출판 프로젝트가 끝난 후 흥분은 일상의 중력에 끌려 땅으로 내려왔다. 정식 출판도 해보고 싶어 많은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현실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름 작가라며 사람들에게 으쓱대었던 일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두 번째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급하게 대략의 목차를 정리해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먹힐 것 같’단다. 이번에는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에피소드를 강화하고 극적인 요소들을 넣어 몇 편의 글을 썼다. 하지만 아내로부터 빠꾸만 맞았다. 억지스럽다고 했다. 사실은 나도 내 글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속이 후련한 느낌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강력한 적을 만났다. #글을 쓰다, 나를 쓰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는 동안 힌트를 발견했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 글쓰기 전에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글을 쓰기 전에 스스로에게 중얼중얼 설명하면서 자기부터 설득하는 오붓한 시간을 갖자. 두툼한 책이든 한 페이지 글이든 한 출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것이 글에 대한 예의다. - 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 어떤 느낌, 어떤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그것을 당연시하는 게 아니라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더 깊고 진지하게 파고드는 작업, 그게 문제의식이다.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사실 글을 쓰면서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재밌게 써보자는 욕심에 새로운 시도들을 하다 보니 정작 ‘나’의 생각과 느낌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말이 왜 하고 싶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니 글쓰기가 그저 기술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 나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행위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다시 책상에 앉았다. 내 마음 안에 실타래처럼 얽힌 욕망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며 ‘나’에게만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내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왜’ 그 메시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간의 경험과 생각, 느낌에 집중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의외로 글을 빨리 써 내려갔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한 편의 글을 아내에게 보여줬다. ‘이번엔 좀 괜찮네. 재밌어’ #최전선에서 만난 글쓰기 체크리스트 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글쓰기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글의 메시지를 보다 선명하고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전하고 싶어서다. 항목은 아래 다섯 가지. 혹시 당신도 지금 글이 잘 써지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섯 가지 질문 앞에 정직하게 답해보면 어떨까.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무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1.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가? 2. 내 삶의 장면을 나만의 관점으로 관찰하고 해석하였는가? 3. 나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밀도 있게 표현하였는가? 4.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가? 5.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교훈을 전하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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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책이라는 입소문이 자자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 글을 쓰려는 자-가 읽어도 좋겠지만 글쓰기를 가르치는 자가 읽으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의 본질과, 중요성, 방법, 습관들...그리고 학인들의 이야기까지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이런 귀한 정보를 책 한 권만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 미안할 정도다. 특히 도서리스트까지 제공해주어서 유용하기까지 하다. 표시해둔 곳을 두고두고 펼쳐보면서 글쓰기를 해봐야겠다. *어느 학인이 쓴 르포 "장수씨"는 두세번 읽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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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최전선에 서 있는 게 분명하다. 비바람 몰아치고 총탄 날아드는 전장에서 동료와 몸을 부대끼며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더러는 서러움과 두려움에 복받친 이들의 눈물바람을 다독이다 함께 울부짖기도 한다. 글쓰기 교실에 참여한 학인들이 털어놓는 절절한 사연에 감응하며 에너지를 한껏 소진하다 한소식 들은 듯하다. 삶의 현장에서 날것으로 길어올린 글쓰기여서 생명력이 넘쳐난다.
그래서 내 알량한 글쓰기를 돌아보게 만든다. 안일한 영탄과 도덕적 훈계로 포장한 맥빠진 얘기만 늘어놓았다. 그러니 누구에게 가 닿을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은 나를 위한 경계이자, 질책이고 힐난이었다.
필자는 글로 정을 나누고 앎을 키우며 힘을 모으는 재미를 느꼈다 한다. 삶과 결부된 일이란 얘기다. 현실과 유리된 공리공론 뿐인 글쓰기는 남을 움직일 수 없고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글쓰기 지침서이지만 글쓰기 방법론은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쓸것인가 보다는 왜 쓰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글쓰기의 실용적 기법을 전수하는데 목매지 않고 왜 글쓰기를 욕망하는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등에 더 굵은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글로 풀어내며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고 본성을 억압하며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을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물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 수 단단히 가르쳐준다. 특히 강렬하게 다가왔던 조언은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는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아니어도 쓸 수 있는 글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그러면 내 글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늘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면 색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그동안 진부한 글발만 날렸던 것 같다.
책의 말미엔 글쓰기 교실에 참여했던 학인들의 글 세 편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맥도날드 알바의 꼼꼼하고 솔직한 수기,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와, 인연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를 각각 인터뷰한 글은 진솔하게 다가와 마음 아르게 한다. 힘 있는 글이다. 어떤 글을 써야할지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함께 읽은 시, 소설과 에세이 목록도 울렁거리게 만든다. 책 이름과 간단한 소갯글만 봐도 필자의 강좌에 바로 등록하고픈 욕구가 일어난다. 에필로그에 나오는 필자가 생각하는 좋은 글쓰기 대목은 메모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쓰기가 이것이다. 존재를 닦달하는 자본의 흐름에 익사당하지 않고 제정신으로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자기 돌봄의 방편이자, 사나운 미디어의 조명에서 소외된 내 삶 언저리를 돌아보고 자잘한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어 밝히는 윤리적 행위이자,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이야기를 살려내고 기록하는 곡진한 예술적인 작업으로서의 글쓰기. 그게 돈이든 교양이든 지식이든 학점이든 스펙이든 앞뒤 돌아보지 않고 쌓고 축적하고 평가받기 바쁜 세상에서, 왜 그런 것들을 가져야 하는지 잠시 멈추어서 사유하고 따져 묻는 자리가 되어주는 글쓰기 말이다. (270~2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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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많이 찾아봤다. 읽고 듣는 것에 익숙해진 내 인생에 말하고 쓰기라는 큰 숙제를 이제는 좀 해야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여러 종류의 글쓰기 책을 추천 받았고 많이 찾아봤다. 유유 출판사의 <읽기의 말들> 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던 때라서 <쓰기의 말들> 이란 책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글쓰기 관련 책으로는 같은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 책이 나에게 더 적합하다는 생각에서 구매하게 되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한번이라도 넘겨보고 샀어야 했는데 그냥 바로 주문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원하던 느낌의 책은 아니었다. 나는 글쓰기 스킬에 관한 이야기를 더 보고 싶었는데 이 책은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이런 저런 작가의 생각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꽤 있었고.. 지금은 그렇지만 한참 나중에 읽어보면 바뀔 수도 있으니 일단은 책장에 고이 보관해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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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작가님께서 쓰신 [eBook] 글쓰기의 최전선 독후감입니다. '글쓰기에 관한 책' 하면 많이 회자되는 책이 바로 이 '글쓰기의 최전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내용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나온 조언들을 적용해보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글쓰기를 시작하고자 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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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_ 은유 은유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쓰기의 말들'을 통해서였다. 책을 읽는 내내 '어쩜 이렇게 담백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책을 덮자마자 구매한 도서가 바로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이 책은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과 학습공동체 가장자리에서 학인들에게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는 은유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글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기록하고 타인과 나누는 과정 또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작가의 지난 경험과 학인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 새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작가로서, 선생님으로서, 그리고 약자를 대변하는 데에 앞장서는 행동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은유 작가를 보며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얻은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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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은유는 글쓰기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존재를 닦달하는 자본의 흐름에 익사당하지 않고 제정신으로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기 위한 자기 돌봄의 방편이자, 사나운 미디어의 조명에서 소외된 내 삶 언저리를 돌아보고 자잘한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어 밝히는 윤리적 행위이자, 이야기가 사라지는 시대에 이야기를 살려내고 기록하는 곡진한 예술적인 작업으로서의 글쓰기’라고. 최전선이라함은 전쟁이나 전투에서 적군과 접촉하는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전장 일대를 가리키는 말일 텐데 삶의 전쟁터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한다면 든든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함께 읽은 학인이 “문장 사이사이에 꽃을 달아주고 싶었어요.”라고 소개한 것에 밑줄을 친다. 얼마나 간절하게,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읽으면 이런 감상이 나올까. 우리에게 <좀머씨 이야기>로 잘 알려진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작 <깊이에의 강요>가 떠올랐다. 이런 강요라면 작가 은유를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기분이 들고 책읽기에 바짝 긴장하게 된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허투루 읽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미셸 푸코의 글을 인용하며 첫 문장은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묻지 마라. 아마도 나와 비슷한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아무런 얼굴도 갖지 않기 위해 쓰는 게 분명하다.’이 문장을 내 방식대로 읽자면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사는 ‘나’는 글쓰기를 통해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자신의 껍질을 탈피하며 진정한 ‘나’, 벌거벗은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갈구한다. ‘과연 나의 판단은 옳은 것인가’‘아니라고 생각하는 걸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렇다면 서로의 차이는 어떻게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알아갔다라고 고백한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작가의 탄생’과정과 ‘학습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사유하는 힘과 동료와의 연대로 이어지는 작가의 성장 기록이 담겨있다. 작가가 소개하는 책을 읽고 싶게 하고, 거리로 나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취재하고 싶고, 글쓰기 모임에서 자신의 글을 발표하고 싶게 하며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 그 중에서 파트 5에 해당하는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는 가슴이 뜨거워지게까지 한다. 작가는 말한다. ‘비문학에도 순문학에도 온전히 마음 붙이지 못하던 참인데 르포르타주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보았다. 르포르타주는 기록이라는 뜻의 불어다. 구체적인 현장에서 구체적인 사람과 대면하며 쓰는 기록 문학’에 대한 애정을 피력할 때는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가장 가슴 뜨겁게 한 문장은 요양보호사라는 내 생업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181쪽 ‘기혼이든 비혼이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돌봄노동은 결혼 여부와 무관했다. 어디서나 힘든 일은 그 조직의 가장 약자에게 돌아간다. 마음에 걸렸다. 노령 인구 증가와 여성의 돌봄노동 문제는 ’가려진 영역‘인데 갈수록 중요한 사회문제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이 세계가 앓는 질병의 징후”라고 말한 니체의 진단대로, 각자 개인적인 체험을 구체적으로 쓰다 보면 어떤 구조적 모순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다. 생활 르포. 일상 말하기이면서 진실 말하기.’ <글쓰기의 최전선>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보물 지도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작가가 소개한 참고도서인데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이 그렇고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그렇고, <눈먼 자들의 국가-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등 끝도 없는 깊이에의 강요가 나를 매료시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