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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기 즐겨하고 시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나의 시읽기는 편협한 시읽기 였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시집은 오래전 외국의 유명한 시인들이 쓴 시만 읽었고, 요즘에 읽는 시는 한국의 시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러고보면 현대시들은 한국의 작가들의 시만 읽어온 것 같다. 이렇게 편협할 수가.
그런 의미에서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은 내게 큰 의미가 생겼다. 내가 현재 살아있는 외국 작가의 시를 읽는다는 것. 이처럼 외국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게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시인의 시라니. 비채 아니었으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라.
표지에서부터 동화적인 느낌이 강했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렸을때에 하루에 수십번 읽어주었던 '사과가 쿵'이란 표지와 비슷하다. 누군가 한 입 베어먹은 사과가 초록색 바탕위에 놓여있는 동화적인 표지다. 표지에서처럼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도 동화적인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 시인들과는 좀더 다른 느낌이랄까. 가까운 나라이지만 감성은 조금씩 다른듯도 하다.
그러나 네로 곧 다시 여름이 온다 새롭고 한없이 넓은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 새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맞이하고 봄을 맞이하고 더 새로운 여름을 기대하면서 모든 새것을 알기 위해 그리고 내 모든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15페이지, 「네로 - 사랑받은 작은 개에서」 중에서)
죽은 개 네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시다. 네로가 머물렀던 여름이 아닌 다른 여름, 같은 여름인데도 늘 다르게 느껴졌던 네로가 없는 여름에 대한 시였다. 한 사람을 잃고 힘들어하듯 시인은 사랑하는 개 네로에 대해 이처럼 오래도록 슬픔을 잊지 못했나 보다.
대답할 수는 없다, 사과다. 물어볼 수는 없다, 사과다.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사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 (35페이지, 「사과에 대한 고집」중에서)
사과에 대한 본질, 그 어느 것도, 그 무엇도 아닌 사과에 대한 본질을 담은 시였다. 사과 속에 숨은 내용까지는 내가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저 사과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 싶다.
고구마 먹고 푸 밤 먹고 푸 안 그런 척 헤 미안해요 파
목욕하는 뽀 남 몰래 스 당황해서 뿌 둘이 같이 뿡 (39페이지, 「방귀 노래」전문)
무심코 시를 읽는데 굉장히 재미있어서 나도 몰래 소리내어 읽고 있었다. 방귀를 끼는 사람, 방귀 소리에 대한 것들을 시어로 나타내니 저절로 즐거워졌다. 「방귀 노래」라는 시에서 그의 동심을 느낄수 있었다. 시인은 우리가 즐겨보았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가를 작사한 작가라고도 하니 왠지 친숙하게도 느껴졌다. 그는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시인이라고 한다.
여러 편의 시와 산문도 실려 있었는데, 산문 또한 '조금 더 긴 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엿보이는 글도 있었고, 시와 산문에 대한 생각들도 엿볼수 있었다. 직업란에 시인으로 할수 없었던 일들에 대한 글도 만날 수 있어, 시인은 하나의 직업이라고 하긴 그렇겠구나 하는것도 느낄수 있었다. 하이쿠 외에 일본인이 쓴 시를 처음 읽었는데 괜찮았다.
시는 노래도 그림도 논리도 시시함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말이 되지 않는 '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리고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 있어요. 시는 지구에 있는 숱한 언어들의 차이를 초월해서 우리 의식에 바람구멍을 뚫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부는 바람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바람일지도 몰라요. (128~129페이지, 산문 「바람 구멍을 뚫다」중에서)
* 이 시집의 특별한 점은 일본인이 번역했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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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집을 들춰보지만 시집을 통째로 보기는 오랜만이다. 시집 한권을 보면 뭔가 써야 할 것 같아서 안 본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집 보고 잘 쓰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왜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건지. 그래 차라리 시를 쓰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구나. 그건 시집을 보고 생각한 건 아니구나. 우리나라에는 시인이 많고 시집도 많이 나온다. 다른 나라에도 시가 있을 텐데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소설은 다른 나라 말을 우리말로 옮겨도 아주 이상하지 않지만, 시는 느낌이 다른 듯하다. 일본말은 우리말과 비슷하다 해도 정서는 아르다(이것은 어디나 그렇구나). 우리나라 사람도 요즘 많이 쓰는데, 일본말에는 능동태보다 수동태가 많다. 어쩌면 일본말도 서양 문화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시 이야기하다 다른 말을 하다니. 여기에 실린 시와 산문 쓴 사람(다니카와 슌타로)이 일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옮긴 사람(요시카와 나기)도 일본 사람이라니, 신기하구나. 일본 사람 가운데도 우리말 공부하는 사람 많겠지. 읽기에 어색하지 않지만, 다르게 하는 게 더 낫겠다는 것도 조금 있다. 나 태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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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시인'으로 맞아주시기를 바란다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사과에 대한 고집'은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저자의 시와 산문을 담아낸 책이다. 왜 굳이 사과에 대해서 고집을 피울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과 먹음직스러운 사과 그림을 보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책을 통해서 일본 내에서 저자 다니카와 슌타로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난 개인적으로 장르소설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찾아서 있는 일본 책의 대부분도 거의가 장르소설이다. 장르소설에 대한 조금은 과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편이지만 일본 시인의 시집은 거의 읽은 기억이 없다. 예전만큼 시를 자주 접하는 편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의 시를 접하는 기회도 적은데 일본 시인의 시는 접하거나 굳이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암축된 단어를 통해 만나는 시는 그 느낌이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많이 다르다. 온전히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시를 읽은 적이 몇 번인가 싶을 정도로 시에 대해 어려움을 느끼는 면이 많지만 그럼에도 시를 만나게 되면 늘 아름다운 언어에 늘 감동하는 경우가 많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는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자꾸만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장르소설을 술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하나의 시를 읽는 것에도 자꾸 시간이 걸린다. 모든 시가 다 이런 느낌은 아니다. 조금 재밌다는 시 구절도 있고 아하~ 이런 의미를 여기에 들어가 있나 싶은 구절도 있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생각의 생각을 이끌어주는 심오한 면도 갖추고 있다. 그만큼 다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즐겁게 느껴진다. 여기에 뒷부분에 담겨진 산문집을 통해 저자의 면모가 느껴져 인상 깊다. 시인이면서도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시에 대한 생각을 통해 하나의 장르에 국한 된 시가 아니고 우리 생활 다양한 곳에서 시를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시도 있고 가볍게 스치면서 읽어도 좋은 시들도 있다. 시는 시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보는 즐거움을 안겨주며 저자만이 가진 유머와 위트를 시를 통해 느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기소개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공구 같은 게 싫지 않습니다 또 작은 것도 포함해서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것들의 명칭을 외우는 일은 서투릅니다 저는 지나간 날짜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권위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팔뜨기고 난시고 노안입니다 집에는 불단佛壇도 신위神位도 없지만 방 안에 직결되는 커다란 우편함이 있습니다 저에게 수면은 일종의 쾌락입니다 꿈을 꾸어도 눈만 뜨면 잊어버립니다 여기에 쓴 것은 다 사실인데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하니 왠지 수상하네요 따로 사는 자식 두 명 손자손녀 네 명 개나 고양이는 없습니다 여름은 거의 티셔츠 차림으로 지냅니다 제가 쓰는 말은 값이 매겨질 때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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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는 사과, 쪼아 먹히는 사과, 잡아 떼이는 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 썩는 사과, 운반되는 사과, 소화되는 사과, 소비되는 사과, 사과라 부를 필요도 없는 사과……. 징그러울 정도로 사과를 고집하는 시인의 글이다(시 전문은 더 징글맞다). 시는 시인의 감정 표현을 넘어서 때때로 언어 자체에서 이어지는 연상과 상상, 결합, 해체, 조탁, 실험에 의해 깨지고 부서지기도 한다. 존 스튜어트에 의하면 서정시는 곧 엿듣는 발화이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어떤 이야기를 엿듣게 될 때, 우리가 전형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발화자와 문맥을 재구성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다.(조너선 컬러 『문학이론』) 비단 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 대상이 운문이라면 한층 유달리 이런 자세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텍스트 하나하나의 가리킴과 방향은 물론이거니와 발화자의 태도(혹은 성격)를 감상하고 상상하며 엿듣는 거다. 나는 시집에서 처음 언급한 표제작 「사과에 대한 고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시집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그 때문에 마음에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시의 삼분의 일가량은 사과에 관한 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과에 대한 모습이 나오긴 하나 그 역시도 어느 찰나의 사과를 그대로 나열한 듯이 무미건조할 뿐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오로지 사과만 남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시인에게 이런 취급(정의됨)을 받는 사과로선 불행할지도 모르겠다(정의된 순간 그 정의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는 식의 어렵고 난해한 메커니즘은 모르겠으나 사과의 입장에 서면 자신을 지독히도 고집하는 자, 혹은 지독할 만큼 자신에게 충실한 자가 마냥 탐탁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이 세계에서 시인에게 선택되어 불행하지 않은 삶은 사는 대상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양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을 멍하니 기다릴 때가 많다고 밝혔는데, 그러면서 남의 눈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도 썼다. 어딘가에서 귓결에 얻어듣기로, 작가란 가만히 있을 때야말로 진정으로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다니카와 슌타로도, 시인인 자신이 일반적인 노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혹 시인이 안개를 먹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한 마음을 품고 있다(어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시인은 밥이 아닌 안개를 먹는 건지도 모른다(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렇기에 사과를 향한 집착도 보이고(「사과에 대한 고집」) 방귀 뀔 때 나는 소리도 정밀히 연구하는가하면(「방귀 노래」) 어느 때는 시 자체의 태생적 전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거다(「2페이지 둘째 줄부터」).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시/시인의 그럴싸한 허무맹랑함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내가 이 시집에 대해 고집을 부리는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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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일그러져 있다/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 // 우주는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 시인이 20대 초반에 쓴 시다. 외람된 생각일지 몰라도 천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를 젊은 날에 썼다면 평생 언어를 품고 살아야 할 운명이라고 말이다.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지겹도록 말하면서도 저자를 통해 시에 좀 더 다가간 것이 사실이다. 궁금하니 저자의 작품을 찾아보며 읽고 있는데 시와 산문집을 엮은 이 책도 역시나 좋았다.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시라는 세계로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만났다. 그러나 네로/ 곧 다시 여름이 온다/ 새롭고 한없이 넓은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 <네로 - 사랑받은 작은 개에게> 종종 별거 아닌 고민에 빠지곤 한다. ‘여름과 겨울 중에 굳이 선택하라면?’ 같은 시답잖지만 단박에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다. 지금껏 끙끙댔지만 여전히 나의 대답은 시원찮았다. 청명하다는 이유로 겨울을 마지못해 꼽곤 했는데 올 여름을 보내고 나서 여름이 더 좋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여름이 지나버리면 한 해가 훅 가버린다는 사실이 서글퍼서였다. 서글픔에 끝에는 겨울이란 계절이 있었고 날씨가 추우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드는 게 싫었다. 그러다 이 시를 만났다. ‘곧 다시 여름이 온다, 그리고 나는 역시 걸어갈 것이다’란 시구를 읽으면서 왜 여름의 서글픔만 생각했는지, 다음 여름의 새로움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허망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져 버렸다. 우리는 아침을 릴레이한다/ 경도經度에서 경도로/ 교대로 지구를 지키는 것이다/ 잠들기 전 잠시 귀를 기울여보면/ 멀리서 우는 자명종 소리/ 그것은 당신이 보낸 아침을/ 누군가 단단히 받았다는 증거다 <아침 릴레이> 이런 시는 어떤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피곤한 아침을 누군가 받았다고 생각하면 뭔가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잠시나마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이렇듯 저자의 시에서는 시로 인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광활하게 뻗어나갈 수 있음을 느낀다. 나처럼 내면도, 겉으로 드러나는 시야가 좁은 사람은 이 광활함이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쓰는 시라는 데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이토록 잔잔한 평화로운 마음이 든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시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명사가 물에 잠기고/ 형용사가 썩고/ 조사가 흐슬부슬 떨어지고/ 접속사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었다 (중략) 활자이기를 포기한 시는 목소리로 퍼지고/ 시단은 드디어 국어사전 속으로 은퇴했다 <2페이지 둘째 줄부터> 언어와 동고동락하는 시인의 재치가 느껴진다. 그리고 국어사전 속으로 시단이 은퇴해 버린다면 세상은 훨씬 더 삭막해질 거라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시를 아찔하게 사랑하는 것도, 즐겨 읽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우리 언어로 쓰인 시를 읽는 것도 힘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번역의 문제로 해외 시를 좋아하거나 일부러 찾아 읽는 일은 극히 드물다. 다니카와 슌타로라는 시인으로 그의 시를 읽고, 시에 대해 관심을 갖는 마음이 그래서 더없이 소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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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집에 갔더니 현관에 아버지가 죽어 있었다.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아버지를 넘어 안으로 들어가봤더니 부엌에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시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해질녘>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충격적인 도입부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이런 식이면 형도 죽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욕실에 형이 죽어 있었다'로 이어진다. 집안 풍경은 이리 처참한테 평상시와 다름없는 해질녘이라고 마무리되는 이 시의 방점은 '내일이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은'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 있길래 불을 끄고 스튜의 맛을 보고, 국수 배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소리도 일상처럼 들리고, 이웃집 아이가 거짓으로 울고 있는 소리도 다 들리는. 그래서 너무도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화자는 그 충격을 내일이 소용없는 오늘이라고 말한다. <탄생>이라는 시 역시 굉장히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어법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리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기가 묻는다. "아버지, 생명보험은 얼마짜리 들었어?" 나는 황급히 대답한다 "사망 시 삼천만 엔인데" 그랬더니 아기가 말한다 "역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출산하는 과정은 보통 성스럽다거나, 아름답게 묘사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아기가 부모와 일종의 거래를 하며 세상에 나올지 말지 결정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네 방에 텔레비전도 있다고 구슬리고, 남편은 디즈니랜드에 데려가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먹히지 않자 급기야 아내는 입덧은 이제 질색이라며 소리지르고, 남편은 안 나오면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며 위협해서 겨우 아기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 전개냐 하겠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부모, 자식 간의 도리라는 게 잊혀진 지 한참인 요즘에 너무도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너무도 씁쓸하고, 처참한 광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력 63년을 맞아 출간한 기념 선집이다. 시인 신경림의 추천사처럼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난도 너무나 진지하고, 친근한 어투에 술술 읽히는 내용은 매우 적나라하기도 하다. 일상에서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광활하고 깊다.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책>이라는 시에서 자신이 책이 된 것보다는 흰 종이, 그 이전에 나무로 있고 싶었던 책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책으로 된 자신을 읽어본다. 검은색 활자로 쓰여진 글자들을 읽으며 책은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한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는 것 때문에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조금 기뻐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단 받아들이고 수긍하면, 주어진 상황을 조금 여유 있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기게 마련이다. 잔혹 동화처럼 무시무시한 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시도 있으니 시인의 시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벌서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그의 시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글을 펼쳐낸다. 시인의 나이는 차치하고 시력으로만 따져도 환갑이 넘었는데, 나이가 무색하도록 신선하고, 기발한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언어에서 리듬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각적인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가 존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 시를 단 한번도 읽지 않고 인생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조차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는 삶을 일상과는 다른 관점으로 돌이켜보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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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의 깊고도 넓은 시[사과에 대한 고집]
빨강과 초록. 보색대비가 확실하게 이루어진 책이라서 눈에 띈다. 국내 시인의 시도 잘 읽지 않으면서 일본 시인의 시를 읽으려 하니 걱정이 앞섰지만 과감히 펼쳐든다. 왠지 백설공주가 베어 문 "독약이 묻은 빨간 사과"를 연상케 한다. 동화같은 설정이지만 마냥 아기자기한 동화스러운 내용은 아닐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사과에 대한 고집>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만큼 사과 표지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사과" 보다는 "고집"이라는 단어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만 같다.
낯선 시인의 이름 다니카와 슌타로. 그의 고집이 얼마나 , 어떻게 드러나 있을까.
<자기소개>라는 시에서 나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라로 자신을 표현한 노시인은 시와 에세이로 내게 말을 건넨다. 언어가 달라 말로는 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번역된 글로나마 그와 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는 나이 많은 시인의 시가 좋다. 비록 난해하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시인의 넓고 깊은 세계에서 유영하며 조금이나마 세상의 비밀을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의 시는 어느 한 가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수없이 많은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노래한다. 시만 써서는 살 수 없다고 푸념하는 듯하지만 시에는 가격도 없고 무엇보다 종잡을 수 없는 자유로움이 있다며 시에 대한 생각을 확실하게 정립한 시인이라서 멋지다.
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그리고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 있어요. 시는 지구에 있는 숱한 언어들의 차이를 초월해서 우리 의식에 바람구멍을 뚫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129
혼자 놀고 혼자 시 쓰기를 좋아한다는 시인은 인생의 많은 부분들을 자신의 감성으로 이해하고 글에 녹여낸다. 시인이 부려 쓰는 글은 어떤 것은 이해가 되고 어떤 것은 난해하지만 한 번 읽고 넘기기엔 아쉬워서 읽고 또 읽어보게 된다. 처음엔 눈으로 읽다가 다음엔 입 속에서 굴려 본다. 좋은 말이네. 머릿속으로 이해한 것이 하루 이틀 뒤엔 좀 더 감성적으로 풀어져서 마음 속에 자리를 잡는다.
산다는 것을 목이 마른다는 것이라고 표현한 이 한 마디도 내내 입 속에서 굴리고 굴려 본다.
시인이 걸어온 길에서 문득 산다는 것을 쓰고 싶어졌을 그 즈음에는 목이 말랐겠구나. 나는 지금 목이 마른가? 충분히 촉촉히 적셔져 있는가? 시인의 그 즈음과 나의 현재를 나란히 두고 보면서 쉬엄쉬엄 곁눈질 해본다. 시를 두고두고 읽으면 그 때마다 다른 말들이 떠오른다. 단 한 줄의 시구도 허투루 읽어낼 수가 없게 된다.
미세먼지가 목구멍과 콧구멍에 들어와 박혀 간질간질함을 유발하는 봄날, 산다는 것은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는 시 한 구절이 액면 그대로의 뜻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간질간질하게도 튀어나올 듯 튀어나오지 않는 마음 한구석의 아픔이나 슬픔이나 우울 같은 것들을 한바탕 "에취"로 날려버리라는 뜻으로 끌어다붙일 수도 있다. 내가 읽고 내가 마음대로 해석하는 재미~ 지금 나는, 재채기가 필요한 때인가? 이렇게 자문도 해 보면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 본다.
장소는 다 지구 위의 어느 한 점이고 사람은 다 인류 중의 한 사람
열아홉에 이런 시를 적은 적이 있다는 시인은, 그리하여 자신을 '이웃 시인'으로 맞아 달라고 부탁한다. 63년 시의 역사를 기념하는 선집으로 풍성한 과실을 따서 쌓아놓은 것 같은 이 시집은, 그래서 언어와 국경의 경계를 넘어서 가볍게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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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시인의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라는 장르의 특성상 요약이나 함축이 많고 그러다보니 자신의 나라 말로 쓰여진 단어들조차도 어색할때가 많은 것이 '시'라는 장르가 아닐까. 요즘은 산문같이 긴 시들도 많이 나오고 편하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단어들로 쓰여진 시들도 많지만 일단 시에 대한 기본적인 감상은 그러하다. 그런데 하물며 다른 나라 말로 쓰여진 시를 번역을 해서 읽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래도 많은 시들이 번역되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런 것을 보면 시라는 장르가 꼭 딱히' 글'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올 읽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인의 이름은 낯설면서도 그렇지 않다. 얼마전 이 책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 읽어주는 예수'라는 시집에서 언급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편의 시를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 두었던 시집, 그 속에서 이 책에서 실려있는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라는 시를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다가갈수 있는 듯 하다. 이 시집과 함께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같은 시를 가지고 어떻게 해석해 두었는지 알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번역자 마저도 독특하다. 작가인 신경림의 감수를 거치긴 했지만 번역자가 일본이름이다. 어떻게 일본사람이 한국말로 번역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찾아본다. 한국에서 공부한 일본인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번역자인 요시카와 나기는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에서 공부를 했으니 가장 양국간의 언어의 입장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자유로운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탁월한 번역자의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수자인 신경림 시인이 말한 것처럼 다니카와 상의 시의 세계는 어느 것 하나로 한정적이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것 같으면서도 약간은 잔인하게 느껴지는 시들도 있고 우리나라 시처럼 말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들도 있다. 가령 말의 어미를 맞추어서 같은 말이 반복되게 들어간다거나 아니면 한 문장은 다른 말을 쓰면서 같은 말을 하나 건너 반복하는 식이다. [평범한 남자가 있었대/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팔다리] '평범한 남자'(40페이지)는 그렇게 시작하면서 말하는 단어마다 '평범한'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말하고 있다. 이런식이면 나도 이 뒤에 계속 연결해서 쓸수 있겠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발상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시인의 생각인 것이다. 평범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시는 결코 평범하지 않는 맺음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남자는 평범한 줄을] 이렇게 시작하는 마지막 3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 궁금하다면 직접 시를 찾아볼 일이다. 한편의 추리소설을 보는듯한 전개. 짧은 시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전개를 펼칠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12월 15일'이라는 제목의 시는 [나는 이날에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호적과의 요다씨가 말합니다]라는 지극히 아이적인 것 같으면서도 또한 생각지 못한 발상으로 깜짝 놀라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신고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 것을 시로 쓸 생각은 어떻게 했을가. 시인의 말처럼 자신의 머리속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글들을 잡아두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사소한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어떻게 '글'이라는 존재가 바꾸느냐가 평범한 사람들과 시인의 차이가 아닐까. [고마워요 요다씨/ 축하해요 나/누군가 뭔가 줘] 라는 마지막 행에서는 웃음이 터진다. 그 나이가 되어도 생일날 무언가 받기를 좋아하는거구나. 그런 생각은 누구나에게 일반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일수도 있고 이런 말을 자유롭게 펼쳐보이는 작가의 순수한 마음이 보이는 듯 해서 그렇기도 하다. . 이런 표현은 '자기소개'라는 시에서 좀더 발전된 형식을 띠고 있다.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분명 자신의 소개를 하고 있다. 그것도 짧은 한문장 한문장으로, 그러면서도 함축적인 말들을 포함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를 말하고 마지막 연에서는 [여기에 쓴 것은 다 사실인데 /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하니 왠지 수상하네요] 라는 말로 약간은 수줍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할 말 다해 놓고 나중에 조금은 몸을 사리는 형식이다. 왠지 시인의 당당함과 약간은 소심함을 동시에 엿볼수 있는 듯 해서 역시나 재미있다. 이 시집의 제목인 '사과에 대한 고집'은 말 그대로 사과다. 표지에도 사과를 큼지막하게 그려놓았다. 왜 사과에 대해서 고집을 부리는지 궁금하면 얇지만 시적인 표현이 풍부하다 못해 넘치고 위트가 속속들이 숨어있는 시인의 고집을 직접 느껴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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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58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요시카와 나기 옮김 비채 2015.4.24.
《사과에 대한 고집》(다니카와 슌타로/요시카와 나기 옮김, 비채, 2015)은 어떤 글을 묶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글님은 스스로 노래님이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묶은 글은 노래일 테지요. 노래꽃 한 자락을 쓰며 글삯을 얼마를 받든, ‘직업사전’이란 책에 ‘노래님(시인)’이란 일이 실리든 안 실리든, 스스로 노래님입니다.
저는 우리말꽃을 짓는 사람이니 ‘우리말꽃지기(사전편찬자)’일 텐데, ‘직업사전’이란 책에 ‘사전편찬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을까요? 아마 없지 않을까요? 날개를 타고 나라밖으로 나가야 할 때면 으레 ‘일(직업)’도 적어야 하는데요, 저는 ‘Korean-Dictionary writer’나 ‘Korean-Dictionary editor’로 적습니다. “하는 일”이란 바깥으로는 낱말책 쓰기요, 집에서는 집안일입니다. 그래서 곧잘 ‘살림지기’나 ‘살림꾼’으로 적기도 합니다.
이렇게 적으면 으레 눈살을 찌푸려요. 틀에 안 맞는다고 하면서요. 그러나 일을 어떻게 틀에 맞추나요? 일이 ‘회사원·공무원·노동자·교사’만 있나요? 은행이란 곳에서 일을 볼 적에도 “하는 일”을 적어야 할 때가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흙지기(농부)’는 안 보입니다. 우리 터전은 삶을 두루 품거나 고루 아우르는 길하고 자꾸만 멀어지지 싶어요. 틀에 맞추거나 가두거나 옭매어서 생각까지 틀박이로 얽어 놓는다고 느낍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총칼로 짓밟던 무렵에 ‘한글’이란 이름을 새로 지어서 총칼에 맞선 이들은 일본뿐 아니라 이 나라 임금틀에도 맞섰습니다. 총칼나라가 물러난 뒤에도 매한가지예요. 사람들을 굴레에 가두려는 나라지기나 벼슬아치하고 맞서는 ‘말길’입니다. 배움터에서 달달 외우도록 가두는 그 배움수렁판에서 쓰는 말이 재미나나요? 배움터에서는 글(시·소설·수필)을 글맛이 나게 가르치나요?
다시 《사과에 대한 고집》으로 돌아와 보면, 아니 내내 이 책을 놓고 빗대어 말했습니다만, 글님은 스스로 재미나고 즐겁게 글빛을 지으려고 했구나 싶은데, 자꾸자꾸 ‘안타깝고 안쓰러운 일본 터전에 시나브로 젖어든’ 빛이 제법 드러납니다. 밥을 먹고서 보임틀에 푹 빠져도 나쁘지 않지만, 밥을 먹고서 맨발로 풀밭을 거닐면 이녁 글빛이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둘레에 나는 풀을 그때그때 조금 훑어서 밥으로 삼고 해바라기를 하면 이녁 글결이 새로우리라 생각합니다.
능금은 능금이지요. 배는 배예요. 딸기는 딸기입니다. 언제나 그뿐입니다. 글은 글이요, 사람은 사람이고,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사랑’ 아닌 다른 낱말로는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에, 창공이나 창천이나 상공 같은 낱말로는 도무지 못 그려요.
ㅅㄴㄹ
빨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이 아니라 사과다.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양이 아니라 사과다. 신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맛이 아니라 사과다. 비싼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값이 아니라 사과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가 아니라 사과다. (34쪽)
고구마 먹고 푸 / 밥 먹고 포 / 안 그런 척 헤 / 미안해요 파 // 목욕하며 뽀 / 남 몰래 스 / 당황해서 뿌 / 둘이 같이 뽕 (39쪽)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했다 /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 /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 조금 기뻤다 (69쪽)
저녁은 밖에서 먹을 때도 많다. 이제는 조식粗食이 체질에 맞아서 집에 있을 때는 채소를 쪄서 현미밥과 함께 먹는다. 식후는 당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된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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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고집_다니카와 슌타로 시와 산문/비채> 원제 : りんごへの固執
“한국 독자 여러분, 이웃 시인으로 맞아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_다니카와 슌타로
'일본의 국민시인'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림책 <살아 있다는 건>으로 이었다. 살아 있다는 건에 대한 경이로운 이야기를 가슴 먹먹하게 써놓은 글과 그림이 힘이 됐다. 그는 그림책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소설, 번역, 대담집, 작사 등의 2백여 편의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 중 시와 산문을 모아둔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의 깊고 깊은 문학의 서사를 느낄 수 있는 육십여 편의 시와 산문이 담겨 있다. 그의 글에서는 소박하지만 진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유는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일본의 어두운 사회 분위기에 새로운 한줄기의 빛과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펼쳐지는 페이지를 향유하며 읽었다. 그때 마다 풍겨오는 시어들이 참 아름답지만 철학적이다. 생각과 감정의 언어를 가장 황홀하게 표현하는 것은 ‘시’라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을 바라본 끝없는 고뇌의 시간들로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나온 것 같다.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아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제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그림책에는 <구덩이>, <우리는 친구>, <만들다>, <옛날 옛날에 내가 있었다> 등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그는 요미우리 문학상, 아사히상, 일본번역문화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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