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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에만 접속하고 이질적인 것과는 단절해 버리는 우리사회
"같은 것에만 접속하고 이질적인 것과는 단절해 버리는 우리사회" 내용보기
현대사회는 과잉접속의 시대이다. 각종 SNS를 통한 초연결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연결은 얕고 순간적이다. 관심이 있는 동질적 분야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지만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사회를 '단속사회'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편으로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같은 것에만 접속하고 이질적인 것과는 단절해 버리는 우리사회" 내용보기

현대사회는 과잉접속의 시대이다. 각종 SNS를 통한 초연결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연결은 얕고 순간적이다. 관심이 있는 동질적 분야나 취미공동체에는 과도하게 접속하고 의존하지만 자신과 다른 의견이나 타인의 고통같이 이질적인 것의 침입을 철저히 차단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사회를 '단속사회'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편으로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다른 타인과의 진실한 만남이나 부딪침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자기를 단속한다는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있지만 엄마와는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고 친구들과 카카오톡에만 열중하는 한 소년의 모습에서 저자는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단속의 양상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는 언제 누구와 접속하며 또 언제 누구와 단절하는 것일까? 저자는 수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이러한 현상들의 알기 쉽게 풀어나간다. 저자의 눈으로 본  한국사회는 시민 대다수가 자기가 속한 가족, 직장 내에서 소통이 매끄럽지 않음을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정작 그 불통의 당사자와는 일대일로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사적인 문제가 사회적 공간에서 해결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스트레스를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또 다른 힐링의 공간에서 해소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누적되며, 현실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시 피로와 무력감에 휩싸이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남의 생각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고 소통에 무력하며 자신과 친밀한 ‘취향의 공동체’에만 기대는 것이 단속사회의 대표적 현상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단속사회에서는 나와는 다른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남의 고통은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일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이는 메아리 없는 아우성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개인 차원의 힐링 공간에서 해결하게 된다. 결국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해 결국 나를 다잡아야 한다는 주문으로 끝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사회에는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고통과 연결지을 고리, 즉 “고통의 사회성을 발견할 틈”이 없다고 지적한다.

오는날 자기계발서에서 자주 강조하는 경청이나 소통의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볼 만하다. 경청이나 소통은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는 행위이다. 나의 경험은 다른 누군가에게 참고사항이 되어 전승된다. 경험이 이처럼 손에 손으로 이어져갈 때 그 사람, 그 사회는 연속성을 지닐 수 있다. 지금의 단속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로 되돌리는 데, 사소해 보이는 경청이나 소통이란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c******4 2014.10.20. 신고 공감 8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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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은 차단하고, 익명에 접속은 넘쳐나는 사회..
"곁은 차단하고, 익명에 접속은 넘쳐나는 사회.." 내용보기
스마트폰이 대중화 되면서 생긴 풍속 중 한가지는 사람들이 늘 누군가와 접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아니 회식을 하면서도 앞사람과 얘기하기 보다는 자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손을 놀리기에 바쁘다. 처음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단순히 세대의 문제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곁은 차단하고, 익명에 접속은 넘쳐나는 사회.." 내용보기

스마트폰이 대중화 되면서 생긴 풍속 중 한가지는 사람들이 늘 누군가와 접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아니 회식을 하면서도 앞사람과 얘기하기 보다는 자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손을 놀리기에 바쁘다. 처음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라고 치부해 버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단순히 세대의 문제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이처럼 오늘날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소통불가능, 다시 말해 타자와 대면하고 얘기하기 보다는 익명의 다수들과 끊임없이 접속하는 사회현상을 단속이라는 단어와 이라는 단어를 가지고서 재해석한다. 그가 말하는 단속이란 낯선 것, 즉 타자와 만남의 단절, 공적인 것과의 단절,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불가피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드러내기 위한 자기검열, 그리고 연속의 반대개념으로 정의한다. 곁이란 사전적 정의 그대로 자신의 곁 또는 심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가까운데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우리 곁에는 말을 듣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고 자기 말만 들어 달라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처럼 곁은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이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그는,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는 사회를 단속사회라 이름 붙이고 있다.

 

그는 곁이 파괴되는 현상을 정치공동체는 물론, 지역사회 그리고 가정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곧 이견이 있다는 것이고, 이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지금의 불편함을 표현하고 힘을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때, 그 동안의 권력은 이를 불온시 해왔다. 그런 억압 속에서 사람들은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불신하게 되었고, 이는 안전을 위해 자기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 현상의 확산으로까지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에서는 약자나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폭로뿐이었고, 지역사회에서는 이웃을 경계하고 사람들이 나를 모르도록 단속하기에 급급했다. 사람들에게서 말이 없어진 것이다. 아니 말을 한다 해도 타자의 말을 듣기보다는 최소한의 자신의 말만을 할 뿐이다.

 

우리는 말을 함으로서 관계를 맺고, 또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관계를 차단한다. 그리고 말을 한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을 한다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사회가 단속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소통의 부재이고,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통이 안 되는 이유를 저자는 말에서 찾고 있다. 과거 말은 폭력이었고, 현재에 들어와서는 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말을 불온시 했기에 말을 못하게 했고, 현재는 약자들의 말은 못들은 척 묵살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나, 강연장에서나 질문이 사라지고, 막상 장이 펼쳐지면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에 급급하다. 타인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국가는 자신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약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삼아 끊임없이 격리시키고, 고립시켜 유령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고, 곁은 악몽이 되고, 당연하게 쓸모가 없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타인의 안녕이나 고통은 외면하고 대신 자신이 안녕하지 못하다거나, 자신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소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소통이란 공통의 것과 차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즉 서로의 차이 안에서 공통의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경청이 중요한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경청이란 것이 단지 귀 기울여 타자의 이야기만 듣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경청은 낯선 환경을 만나 여러 방법을 시도해보면서 재적응해가는 과정이자, 자신의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는 행위이다. 또한 경청은 타자의 타자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고, 동시에 그를 통해 나의 타자성에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청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을 찾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사회는 단속사회를 넘어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니 나는 경청이라고 하면 흔히 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단순히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을 보이면서도 내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안도하곤 했다. 비록 넘쳐나는 자신만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 역시 스스로를 검열하고 단속하면서 생활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사회가 단속사회가 되는 것에 일조 했던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정치인들이 소통을 못하는 이유는,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말만 하기 때문이다.



k*****1 2014.04.26. 신고 공감 7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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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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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뉴스를 봤다. 임대아파트 단지 주변을 철조망을 막아 해당 단지 주민들이 멀리 돌아가게 만들고 임대아파트 단지 자녀들은 단지내 놀이터도 이용을 못하게 막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식. 부모가 귀가하면 거실에 모여있던 가족들이 뿔뿔히 자기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빗대 바퀴벌레 가족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황당한데 가족간의 소통의 벽이 이제는 조직적 차원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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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뉴스를 봤다. 임대아파트 단지 주변을 철조망을 막아 해당 단지 주민들이 멀리 돌아가게 만들고 임대아파트 단지 자녀들은 단지내 놀이터도 이용을 못하게 막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식. 부모가 귀가하면 거실에 모여있던 가족들이 뿔뿔히 자기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빗대 바퀴벌레 가족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황당한데 가족간의 소통의 벽이 이제는 조직적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구조적으로.

 

(URL 연결됨)

 

사회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집단'이라고 되어있다. 가족, 마을, 조합, 교회, 계급, 국가, 정당, 회사 같은. 이중 '계급'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책에서는 무슨무슨 사회에서 발견되는 무슨무슨 특징을 바탕으로 한 설명이 있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책 도입부에 언급되어 있듯이 '곁'이 아닌 '편'만을 강조하고 인정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이런 계급을 나누는 처참한 뉴스까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파탄. 저녁이 있는 삶은 좋지만 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이기에 정말 그렇게 되었다가는 이혼율이 급증할거라는 우스개 소리가 터무니 없어보이지 않는다. 또 요즘시대에 이웃집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집이 얼마나 될까. 먼저 음식이라도 싸들고 인사하러 갔다가는 문이나 열어주면 다행이고 뜬금없이 음식을 받는 쪽에서도 이 집이 무슨 공사라도 하려나 싶은 생각 정도는 하지 않을까.

 

관용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무시를 언급한 부분도 인상적이있다. 취향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서로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존중하며 이만 넘어가죠?'라는 멘트와 함께. 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같은 편이 아니니 곁에 두지는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아닐 것이다. 제대로된 토론은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아닌 이해와 절충에 그 목적이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지역 공동체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협동조합을 키워야 한다 같은 어떤 길을 제시하거나 목소리가 강한 내용을 담고 있는건 아니다. 하지만 거창한 사례가 아닌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는 단속사회의 모습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보여주며 스스로의 성찰을 꾀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더 멋지게 소개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자신이 안타까울 정도로. 저자의 박사논문을 풀어서 쓴 책이고 외부 강의도 종종 하시는것 같은데 기회가 된다면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 제발 인간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영화 '생활의 발견' 中

b******o 2015.01.14. 신고 공감 3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사회로 칭하기 어려운 단속된 사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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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지금 세대에 대한공통된 점들을 의미없이 찾아 헤매며, 다른 점들은 끊임없이 배척하고, 차단하는 현실 세계가 사회라고 볼수 있을까.. 여기서 [단속사회]라 칭하여 최초의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는 이 책은 섬뜻할 만큼 시대의 위치를 인식하게 한다.  좀전 내가 퇴근한 직장의 위치.지금 내가 들어온 방의 위치.지금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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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지금 세대에 대한

공통된 점들을 의미없이 찾아 헤매며, 다른 점들은 끊임없이 배척하고, 차단하는

현실 세계가 사회라고 볼수 있을까.. 여기서 [단속사회]라 칭하여 최초의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는

이 책은 섬뜻할 만큼 시대의 위치를 인식하게 한다.

 

좀전 내가 퇴근한 직장의 위치.

지금 내가 들어온 방의 위치.

지금 내가 접속하는 인터넷의 위치에 대한

속살을 느끼게 해주는, 살짝 어려운 주제임에도 너무 쉽게 읽히고

이후 여운은 너무 길어져, 다시 구석구석 곱씹어 읽어보게 되는 책이었다

 


각 장에 따른 주옥 같은 구절들과, 생각들이 뒤얽혀 장의 나눔 없이, 두서도 없이 뒤죽박죽

분노의 활자 타질을 시작해 본다.

 

내가 들어와 연맹하고 있는 이방의 건물은 지어(창조되어)졌지만 ,

아파트 외벽, 빌라의 뼈대와 외벽, 어느 브랜드의 창조물인 그 콘크리트로 창조된 벽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각자의 방. 무료하리 만큼 획일된 허무함

그러나 물질과, 브랜드에 자신의 깃발을 꽃아 소유하였다는 것. 그 자산가치로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오늘날 모든 방들은 소모품처럼 즐비해 있다.

모텔방,피씨방,노래방,놀이방,안마방,독서실,회의를 위한 방, 벤처를 위한 방까지..

어린시절에는 놀이에 최적화된 놀이방을 거쳐 청소년기에는 공부에 최적화된 독서실에 근근히

들려오며, 노래가 부르고 싶을땐 노래방에 간다.

커플들은 모텔방에 들어가 우리의 사랑 행위에 칫솔 하나까지 모든것이 기능적으로 셋팅된 공간을 잠시 빌린다. 사랑은 시간의 공유이자 경험의 공유, 역사의 공유이기도 하다. 모텔방을 전전긍긍한 연애를 하다 보면 표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가장 낮선 공간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장 허물없는 모습의 공유라는 아이러니 하지만..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나면 또다른 사랑과 또다른 낮선공간을 빌린다. 이런 사랑에서 우리는 어떠한 역사도 새로 쓸수 있을것만 같다. 조금더 서로의 경험과 역사를 만들고자 결혼에 도달하기도 한다. 월셋방이나 전세방에서 둘만의 서사가 기록되고, 그 시간에 대한 모든 추억은 전셋방에 꾸역꾸역 쌓여간다.

 

그리고...이혼이란 비극과 동시엔 책임감이 주어진다. 방의 처분에 대한 책임. 전셋방에 쌓여진 모든 역사를 등지고 떠나야 하는 책임과 동시에 추억이라는 파편을 각자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떠한 개인사도 다시 새삶으로 리셋할수 있을 것 같은, 방이라는 공간의 공허함. 그 공허한 공간의 소비가 있어야 우리는 관계를 지속해 갈수 있게 되었다.


벤처 타운에서는 각자의 아이템을 칸막이로 차단하며, 건물과 방을 공유하며, 사업이 실패할 경우

새로운 기분으로 리셋하여 다른 벤처타운으로 이동한다. 모든 관계를 과하게 표현한다면 이해관계에는 첨예하지만 ,정서적으로는 무관한인간집단들의 일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모든 표류하는 한시적인 것 같은 소비에 대한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결국 공간을 구매하기도 한다.아파트의 한칸.벤처타운의 방 한칸 이라도 소유하고 난 후, 일종의 안도감을 갖는다. 나의 깃발이라는 소유감으로 그리고 소유물이 된 이후에도 그곳이 거주지 이자 , 사업장소라는 의식 뒤엔 자산가치로서 목적이 존재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격이 오르면 팔고, 다른 좋은 곳으로 이동하고자 하는 암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재의 한국이다.

 

-네비게이션만이 존재하는 사회 -

창조적인 개체가 되길 강요하고 있는 사회 내면에는 시간과 경계가 이미 수학공식처럼 주어져 있고, 그 성취(achievement)에 도달하는 이정표라는 값이 주어져 있다.태어나는 시간부터 한글을 읽혀야 하는 시간,고등교육을 마치고,대학을 마친후에도 결혼을 하고 집을 마련해야 하는 시간까지 이미 이정표라는 최적 값이 주어져 있을뿐이다.그 이정표의 도달하는 시간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자들을 우리는 낙오자라 칭하면서도, 반대로는 창조적 개인의 독창성을 요구 한다.

 

-공유없는 힐링사회

힐링의 문제는 출발점도 나,도착점도 나라는 것이다. 나라는 문제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떤 고통과, 공감도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기에 사회성을 발견할 수는 없다. 다만 힐링마스터나 멘토의 이야기 구매 즉, 위로를 구매하여 힐링하는 시대인 것이다. 멘토들은 각기 다듬어져 그럴듯한 이야기를 풀어놓아 개개인의 고민에 대한 안내방향 제시자가 아닌, 소비자가 구매한 세련된 시간제 점쟁이 들에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를 만나 누구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가.

세월호사건과 같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거대한 배의 방향을 지시하는 선장아래 밀랍인형같이 노를 저어 가는 시대

잠시라도 선장의 말을 내려놓고, 밀랍인형이 아닌 선원 한명 한명의 명분이 되어,

그들과 소통해 보자.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공론으로 발전되는 사회가 온다면

거대한 배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꿀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쓰고보니 뭔소리지??  엉엉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Jinnypark -


  

#지니박


YES마니아 : 로얄 v******r 2014.05.12. 신고 공감 3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내용보기
책을 잔뜩 질러놓고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읽고 싶었던 엄기호 신간을 발견, 읽던 책 다 제쳐두고 이 책부터 정독했다. 오랜만에 ㅂㄷ 교수님 강의가 참 많이 생각났다. 정치와 공론의 부활을 추구하던 아렌트, 타인의 얼굴을 이야기하던 레비나스의 주장이 군데 군데 엿보인다. 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주장들을 우리 사회에서 말할 힘을 잃어버려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내용보기

책을 잔뜩 질러놓고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읽고 싶었던 엄기호 신간을 발견, 읽던 책 다 제쳐두고 이 책부터 정독했다. 오랜만에 ㅂㄷ 교수님 강의가 참 많이 생각났다. 정치와 공론의 부활을 추구하던 아렌트, 타인의 얼굴을 이야기하던 레비나스의 주장이 군데 군데 엿보인다. 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주장들을 우리 사회에서 말할 힘을 잃어버려 홀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나'들의 목소리를 빌려 풀어내고 있다(전작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가 가졌던 매력과 마찬가지로). 2014년 한국의 단속사회(끊어져 있는+자기 스스로를 단속하는)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말하는 이의 입장에서 고통을 해석해보면 자신의 경험과 견해가 이렇게 경청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이슈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바우만의 말처럼 공적인 공간은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하여 공공의 해결책이 모색되고 조정되며 합의"되는 곳을 가리킨다. 이 공적인 공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사적인 것을 넘어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말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278쪽.

 

요즘 교칙 분석을 하고 있어서 아래 내용이 인상 깊었다. 담임이 중학생들과 가장 많이 부딪치는 분야가 용의복장에 관한 생활지도(교육X)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규정을 가지고 교육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해야하는 생활지도 속에서 담임과 학생은 갈등을 겪는다. 많은 학생을 잘 통제하고 사회에 순종적인 사람으로 훈육하기 위한 교칙 속에서 학생은 용의복장규정과 검사를 교묘히 피하면서도 자기 몸을 자유롭게 꾸미기 위해 싸운다. 그 속에서 저자가 전해주는 이야기처럼 학생들 속에서도 위계서열이 용의복장을 통해 드러난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복장으로 '쎈척'해야만 생존한다(영화 "우아한 거짓말"에서 만지 친구는 치마를 그대로 입고 다녀 치마 끝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는 만지에게 "치마 좀 만지작 만지작 해서 올려."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따돌림 당한다고 가르쳐주면서). '찐따'가 되지 않기 위해 그다지 꾸미고 싶은 생각이 없는 학생들도 교칙에 대항해 꾸미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그 사이에서 교복 변형이나 화장을 할 수조차 없는 영혼 없는 신체로 여겨지는 학생 또한 꼭 존재한다. 급우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안 보이는 척하는 존재들이다. 아래 사례에 등장하는 '조용한 아이'는 우리 사회에서 목소리 낼 수 없는 사람을 대변하는 매우 적절한 비유다. 

"영선이 보기에 이들은 "조용히 꾸물거리면서" 다녀야만 하고 "조용히 눈에 안 띄게" 다녀야 했다. 옷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른 학생들이 교복을 줄이거나 늘리거나, 혹은 치마를 접거나 짧게 자르거나 하더라도 이들은 교복이 만들어진 그대로 입고 다녀야 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변형'을 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변형을 가한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능동성/주체성을 보이는 행위다. 이들이 이런 능동성을 보일 때 영선은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유령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이에게 추한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화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누군가 유령의 금기를 어기는 순간, 재수 없는 케이스라면 단지 '조용한 아이'로 불리다가 엉겁결에 직접적인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에서뿐 아니다. 사회 도처에 이런 유령의 삶을 강요받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 있되 아무도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 그들에게서 철저히 가려져 있는 것은 바로 얼굴이다." 151-152쪽.

 

이렇게 얼굴 없어서 목소리 낼 입도 갖지 못한 영혼 없는 신체들은 위험에 놓여 있다. '안전'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참사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 정권에서 우리가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안전'이라는 개념은 사실 국가 존립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북한을 주적으로 했던 '안보'는 이제 그 범위를 넓혀서 사회 전반에서의 '안전' 개념으로 변모했다. 이 정권은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주장하지만 바우만의 말처럼 시민이 아닌 시장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터전이 안전해야하는 건 당연한데, 누구는 안전하고 누구는 위험하다면 이런 상황이야말로 대단히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게 알고 보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러한 정권은 존립할 정당성을 잃는다. 정권에 대항해 말 많은 자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세태 역시 저자의 분석과 일치한다. 이제 국가는 적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는다. 위험이 있어야만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원래 국가는 제약없이 행사되는 시장의 힘에 의해 초래된 손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유 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국가가 자신의 존립근거와 정당성을 안전에서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그 안전을 위협하는 적이다. 과거의 적은 오로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적은 내부에 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내부이 동조자이며, '국론'으로의 결집 같은 내부의 단결을 해치는 자들이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로 여겨지며 내부의 적으로 지목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위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는다..." 58-59쪽.

 

"밀양의 송전탑은 이처럼 우리 사회가 양극화되는 또다른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경제적 양극화뿐만이 아니라 안전과 위험 면에서도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사회의 한쪽에는 안전이, 다른 한쪽에는 위험이 배분된다. 2012년 박근혜정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안전에 대한 요구에 화답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4대 악...을 추방하여 안전을 도모하겠다고 공약했고 이것은 일상이 불안이 된 '국민'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고리나 밀양 같이 위험만을 배분받은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안전'의 추구라는 국가의 통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다.

이 양극화가 더 고약한 것은 다른 이들의 위험을 댓가로 안전을 보장받은 '국민'들 또한 야차(모질고 사나운 귀신)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밀양의 송전탑에 대해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대도시에서 전기를 누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밀양의 주민들은 '안됐지만'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처럼 세상이란 게 누군가의 희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인간은 남의 생명을 뜯어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일말의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야차가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다. 백성의 한쪽은 먹이로, 다른 한쪽은 괴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위험과 안전으로 양극화하여 통치하는 국가다." 162-163쪽. 

 

2014년 대한민국은 내가 안전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외면하는 '단속사회'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카프카의 재해석처럼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귀에 밀랍을 바르면서 자신을 단속했고 세이렌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노래 소리가 들리는 척 연기했다. 배가 계속 움직이게 하기 위해 선원들의 귀에 밀랍을 발랐고, 이야기에서 선원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단속사회에서는 소통도 경청도 친구도 없고 '개새끼'만 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4.10.26.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너의 목소리가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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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맡고 있다. 6년째 되었다. 교회에는 주일학교라는 제도가 있다.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영유아부서에서부터 청년부까지 학교가 있어서 담당 교역자(목사,전도사)가 있고 담당 부장·부감집사가 있고 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은 부장·부감 집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설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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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를 맡고 있다. 6년째 되었다. 교회에는 주일학교라는 제도가 있다. 교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 영유아부서에서부터 청년부까지 학교가 있어서 담당 교역자(목사,전도사)가 있고 담당 부장·부감집사가 있고 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은 부장·부감 집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학교의 교장·교감 역할과는 다르고 반을 맡고 있는 선생님들과도 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서의 예산이나 집행, 각종 행사의 기획에서부터 사후평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서 활동에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부서 안에서 수고하는 반 선생님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도 정치화되고 속물화되다 보니 이런 부장·부감 자리가 차후에 있을 선거(장로, 장립집사, 권사를 뽑는 교회 내 선거)를 위한 사전 활동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극소수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그렇다. 다음 달에 교회 내 선거가 있는데, 뜬금없이 교회의 청년들에게 페이스북 친구요청이 온다거나 누군지 알 수 없는 번호로 좋은 성경구절이 갑자기 문자메시지로 도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해당 부서의 담당 교역자를 지지하고 그(그녀)의 리더십을 세워주기 보다 컨트롤 하고 반 선생님들을 마치 회사 부하 직원 대하듯이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부장·부감 집사를 겪으며 정말 교회도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느꼈었다. 이런 내 경험을 일반화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예전의 부장·부감이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부장·부감 집사가 온 이후로는 부서 전체의 분위기가 또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담당 교역자를 잘 도와주고 반 선생님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지지를 해주고 있다. 교회가 세속·속물화 되는 와중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아직 교회에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전 부장·부감에게 있어 가장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부장집사는 현역교사인데, 이분은 말하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회의를 굉장히 좋아했다. 회의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단지 말하는 것만 좋아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자신이 말하는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공적인 회의 자리에서 싫은 내색을 하고 회의 중에 바쁘다며 나가버리기도 했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하면 엉뚱한 소리로 회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분과 3년을 같은 부서에 있었는데, 3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물론, 담당 교역자와 반 선생님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적지만 각자의 역할이 있고 한 부서 내에서도 담당하는 역할이 다른 것인데, 도통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경청이란 남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다. 그것도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듣는 것이며 자신이 모르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 타자의 말이 아닌 ‘타자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p.269)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려다 보니 벌써 책의 결론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이 책 「단속사회」는 그의 전작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확장판으로 생각되었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에서는 학교라는 하나의 사회를 둘러싼 관계간의 이해와 대립, 갈등과 소외를 담아낸 책이라면 「단속사회」는 분석의 틀을 학교에서 한국사회 전체로 옮긴 것이다. 끊임없이 ‘단(斷)’ 차단하고, ‘속(續)’ 연결하고 접속하는 현대 한국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에 주목한다. 흔히 경청이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되는 ‘남의 말 듣기’는 한국사회에서 병적으로 결여된 사회현상이다. 어제 하루 동안 내가 만나서 이야기 한 사람을 생각해 보면 저자의 말이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주로 내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무적으로나 개인적 대화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그랬다. 퇴근 후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런 저런 말을 쏟아냈던 것이다. 집에만 오면 꿀 먹은 벙어리 같은 남편보다야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먼저 “오늘 하루 어땠어?”라고 아내에게 먼저 묻기 전에 내 얘기부터 쏟아 냈다. 모두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사회다. 하지만 책의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쏟아 내고 싶은 ‘말’을 정제된 언어와 상대방의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모두들 자기 얘기를 자기 방식과 언어로 쏟아내기만 할뿐, 상대방이 어떻게 이해해줬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는 것이다. ‘일단 쏟아냈으니, 속은 시원하네~’라는 생각뿐인 것 같다.

 

 

“내가 글과 말을 팔아먹고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곁’과 ‘이야기’다. ‘곁’은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 ‘듣는’ 자리에 가깝다.” (p.6)

“곁은 파괴하고 편을 강요하는 것, 이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곁은 파괴되고 편으로 몰아가는 사회” (p.7)

 

‘곁’이 파괴된 사회. ‘곁’은 파괴되고 ‘편’만 강조하는 사회라는 구조의 틀은 2014년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좋은 도구이다. IMF이후 경제적 상황과 요구만이 개인의 사회적 활동과 역량, 가족 구성원의 관계구도를 결정하게 되면서 우리의 ‘곁’은 급속하게 파괴되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취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아이의 성적을 높일 수 있을까? 하는 것 말고는 중요한 화두는 모두 사라졌다. 저자가 책에서 줄곧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힐링’의 대두와 범람은 이러한 ‘곁’의 파괴가 단지 개인적 욕망과 소비의 결과라는 것을 내면화하고 개인화 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가장 큰 단위의 사회인 국가가 구조적으로 ‘곁’을 파괴하고 ‘편’을 조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편’이 아니면 ‘남’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리는 기구한 굴레를 벗어날 수 없도록 국가와 사회 각 기능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총체적 난국>으로 표현되는 두 단어가 주는 유의미함은 이 사회의 각 개인들에게는 가혹하다. 총체적 난국이기 때문에 사회의 거대 단위에서 구조적 모순과 한계, 문제를 해결하고 봉합하기보다 손 놓고 ‘개인이 알아서’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부유하는 개인은 기댈 곳이 없다. ‘곁’이 없는 것이다. 가족 단위에서도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가장은 무의미한 대상일 뿐이고, 일정 수준의 학업성취를 보이지 못하는 학생은 교실 내에서 문맹이 되어 버린다. 비단 가정과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폭력이 행사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동의다. 그런 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지 않는다면 불안을 통한 통치는 성공할 수 없다.” (p.223)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오고 있는 국가폭력의 가시적 대두는 가장 자유롭고 활발해야 할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에서조차 ‘내가 쓰는 글이 어떤 이나 세력으로부터 고소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부터 하게 되는 개인적 검열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기관에서 민간인을 사찰하고, 참혹한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문제 등에 있어서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쉽게 타올랐다가 한순간에 사그라진다. 얼마 전 국가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광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사라졌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입을 다물고 포털 검색창에서 그런 단어를 일체 입력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내 문제’가 아니면 괜히 나서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은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이런 개인적 냉소는 이미 학교에서부터 학습된 것이다. 아는 형님의 첫아이가 올 초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한 지 3일째 아침부터 갑자기 학교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는 것이다. 앉혀 놓고 얘기를 들어보니, 담임선생님이 왼손잡이인 아이에게 “왼손으로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오른손으로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쌍팔년도 초등학교도 아니고 2014년 초등학교 교사가 왼손잡이인 아이에게 오른손으로 쓸 것을 훈계했다니 형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국가나 거대 단위 사회가 원하는 데로 학습되고 교육받는다. 일렬로 서야하고 질문은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하며, 선생님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이 옳은 학생, 모범 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착하게 자라난 학생은 사회인이 되어 국가가 주입하고 가르치는 프로파간다에 그대로 동조한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난 놈 정 맞는다.’라는 구언을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하기야 ‘모난 놈이 잘 되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모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적으로 일상이 채워지다 보니 ‘곁’은 파괴되고 ‘편’을 찾게 된다. ‘내편’끼리만 모여 있으면 편하고 ‘내편’만은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직장, 여타 관계에서는 말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자신의 일상을 고백하고 토로한다. 끊임없이 단절되면서도 연결되는 현대한국인의 자화상이다.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 버리고 편만 강요하는 ‘사회’.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p.10)

 

그나마 교회를 다니고 있는 나는 교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속내를 드러내 놓고 대화를 한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나누는 이야기들이 피상적이고 수동적이며 뭔가 더 깊은 속내는 감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책에서 소개된 일선 교사는 부당한 학교장의 지시와 요구에 대해 동료 교사와 이야기할 수 없어 철학관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사회를 사는 우리 개인은 소외되고 격리된다. 모두가 할 말은 많지만 제대로 전하지도, 전할 방법을 알고 있지도 못하다. 그래서 나이의 많음과 직급의 높음을 이용해 자기 혼자만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다름과 차이를 학습하고 경험했더라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각종 사안에 대해 적어도 공감하고 참조하며 배우고 더불어 성장하는 참조점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나와 다르면 나와의 차이가 아니라 ‘틀린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반대하면 나는 종북 세력이 되어 버린다. 직장 내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동료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는다. 그저 니 자신이 못나고 더 노력하지 않아서 지금 그 모양 그 꼴이라는 힐링과 자기계발의 최면에 빠져 끝도 없이 자괴감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짱돌을 들고자 마음을 먹기도 했고, 이명박 시절 광우병 소고기 파동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보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들고 있던 짱돌과 촛불은 거리에서 내팽개쳐 진 채 또 다시 고시원으로, 자취방으로,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그저 ‘내방’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지난 철도노조 파업 당시 정부와 사측, 보수언론에서는 어김없이 <귀족노조> 프레임을 주입했다. 한해 육천만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사람이 더 돈을 받으려고 파업을 하고 있다는 프레임이 기성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 특히 취준생(취업준비생)에게까지 먹혀 들어갔다는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 인터뷰를 하거나 댓글을 단 취준생이 고시의 문턱을 넘어 코레일에 들어간다면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으로 공격했던 사람이 본인이 되는 것임에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쉽게 공기업에 취업해 많은 연봉을 받으며 아직도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개인적 박탈감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경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그것은 자기도 모르던 자기의 삶, 즉 자기 삶에 내재되어 있는 타자성이다. 그 타자성을 깨달음으로써 나와 너는 그 타자성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공통의 운명이 된다.” (p.271)

 

저자는 책의 결론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어느 누가 명확한 결론과 대책을 낼 수 있을까 싶다. 다만, 경청하는 것. 그래서 ‘너’를 ‘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화’해 공감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또다시 말을 쏟아내고 대책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만 생각한다. ‘나의 말’이 아닌 ‘너의 말’을 먼저 듣고 그것에 귀 기울여 배우고 성장하며 함께 공감하는 것은 개별 단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에게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개별 주체간 신뢰를 회복하는 길도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관심을 끄는 사건 하나 생기면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빠져 나오는 파편화의 반복은 무의미하다. 좀 더 유의미한 개인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경청해야 한다.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



l****h 2014.04.3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나와 다른 것은 끊고, 같은 것엔 접속하는 '단속사회'
"나와 다른 것은 끊고, 같은 것엔 접속하는 '단속사회'" 내용보기
요즈음 대한민국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생존권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밀양의 송전탑,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웠던 꽃망울들이 순식간에 바다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세월호 사건, 총리 후보자의 쉽게 넘길 수 없었던 발언들, 그리고 GOP의 총기 사건 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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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대한민국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생존권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밀양의 송전탑, 너무나 예쁘고 아름다웠던 꽃망울들이 순식간에 바다로 잠겨버리고 말았던 세월호 사건, 총리 후보자의 쉽게 넘길 수 없었던 발언들, 그리고 GOP의 총기 사건 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여실히 드러낸다.

 

 이 사건들을 거치면서 사람들 모두 우리 사회가 문제 상황에 있음을 공감하고, 이 문제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변화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굳이 주변을 애써 살피지 않더라도 인터넷에서의 맹렬한 공격들과 차마 눈에 담기조차 어려운 말들이 난무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단속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자유주의가 규정한 '자유'라는 개념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것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개념은 다름과 차이를 드러내면 이를 곧 타인의 삶에 대한 개입으로 판단하는 식으로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뒤엎어졌다.

81p

 

 단斷 속續, 나와 같은 것에는 접속하고 나와 다른 것을 배제하고 끊어낸다. 우리는 다른 생각에 너무나도 공격적이다. 나와 다른 저들을 부정하지 않을 경우에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책의 저자 엄기호씨는 우리 사회가 보이는 모습의 징후를 사회학적 용어들과 자연스럽게 연결지음으로써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책 『단속 사회』를 읽는 것을 통해 사회학적 개념들과 사회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를 진단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우리 주변의 삶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르다'라는 것, 이제는 다름을 포용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한다고 이성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다름에 대한 공포가 강한 듯하다. 아마도 아직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분단 상태와 6·25 전쟁의 공포, 그리고 북한의 도발 등이 전쟁 위협을 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부터 형성된 반공사상은 단순히 북에 대한 증오를 넘어서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놓고 공격할 수 있는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 반공사상이 지닌 폭력성은 우리 사회가 지닌 병폐들과 더불어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정치 공동체로 만들었다.

 

 다 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가 듣지 않고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또다른 나인줄 알았던 친구에서 적대하는 남인 '개새끼'가 된다. 친구와 개새끼는 한끗 차이다. 여기에 '너'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p.265

 

 단속 사회에서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의 경계란 너무나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게 되는 비판과 공격성이 난무하는 이런 삶의 방식이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남'이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착각하게 된다.(p.264) 결국 저자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가 '남'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려 하지 않았던 듣기의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말걸고 들어주는 경청이 요구되는 것이다.  

 

 뚜렷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어슴푸레 느끼고 있었던 일상 속 불편함과 문제들에 대해 저자의 정의를 통해 접근하니 보다 명확히 파악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아픔들과 불편함이 드러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말 걸기와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경청이 필요할 것이다. 나 자신의 문제에만 지나치게 골몰하여 어느새 형성된 내 세계 속의 주변 사람들만 받아들이며 살아오지 않았나 반성해본다. 적극적 사회 변화가 요구되는 이 흐름 속에서 나도 더 열심히 읽고 성찰하여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겠다.  



p****p 2014.06.29.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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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단속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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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에서는 학교가 망했다 하더니, 이번 책에서는 한국 사회가 통채로 망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학교의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가 붕괴했다는 것은 결국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일테니 엄기호는 줄곧 한국사회가 망했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온 셈이다. 계급에 따라 관계가 단절되는 양상은 다르지만, 중산층은 자신과 다른 이들과 부딪치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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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에서는 학교가 망했다 하더니, 이번 책에서는 한국 사회가 통채로 망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학교의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가 붕괴했다는 것은 결국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일테니 엄기호는 줄곧 한국사회가 망했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해온 셈이다.

계급에 따라 관계가 단절되는 양상은 다르지만, 중산층은 자신과 다른 이들과 부딪치는 경험을 줄이기 위해 성을 쌓고 있고, 중산층조차 되지 못한 이들은 관계에 짓눌리면서도 삶의 지표가 될 만한 관계를 맺지 못해 고립되있다. 나와 다른 이들과 마주하는 것은 개인의 일상에서 재앙일 뿐이며, 타인과 마주함을 통한 성장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로인한 피곤함을 서로 서로 최대한 피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다. 나 자신에 대한 신뢰,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신뢰 모두 붕괴했고, 우리의 일상에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사라진채 '남'과 또다른 '나'들만 남았다.

 엄기호 특유의 재치와 생생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이 책에도 담겨져있지만, 그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더 불편하고, 무거워졌다.  대단히 두껍지 않은 분량과 평이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을 놓았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이 사회에 더이상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 없다는 진단은,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당신은 유령, 동물 혹은 속물 아니면 괴물 중에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이 되서 날 불편하게 했다. (참고로 이 책을 읽고,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나는 아마도 속물/괴물에 속하는 듯 싶다.)

 한국사회에 대한 건조하고 서늘한 진단과 함께 엄기호는 책을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배는 이미 침몰하고 있는데, 공론장과 공통의 언어는 사라지고 당신은 계속해서 외로울 수 밖에 없는데 당신의 삶은 괜찮냐고. 그리고는 친절하게도, 귀를 틀어막힌 채 노동하고있는 선원들에게 말을 거는 '세이렌'이 되라고 제안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덮고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세이렌이 되겠다는 일상의 작은 결심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어떤 이들이 폐허속에서도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기둥을 세울까. 나를 드러내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던지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빨간 약을 먹을 용기도, 파란 약을 먹을 겸손함도 없는 내게 엄기호의 질문은 무척이나 무겁다.   

r*******0 2014.03.1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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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차단하고 누구를 접속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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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차단하고 누구를 접속하는가  [서평] 엄기호 저 <단속사회> (창비 , 2014)​지난 13일 바둑기사 이세돌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4대국 대결에서 일승을 거두었다. 비록 3회 연속 ​졌지만 그는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그러기에 그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 이젠 기계가 인간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점점 인간의 뇌를 닮아가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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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를 차단하고 누구를 접속하는가

 

 

[서평] 엄기호 저 <단속사회> (창비 , 2014)

지난 13일 바둑기사 이세돌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4대국 대결에서 일승을 거두었다. 비록 3회 연속 ​졌지만 그는 대단한 정신력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그러기에 그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 이젠 기계가 인간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점점 인간의 뇌를 닮아가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지능화 되는 기계를 생각하면 소름 끼친다. 현대사회는 점점 인간의 뇌를 기계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20년 후에는 인간과 기계의 우정, 사랑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전세계인과 연결 되어있는 sns를 보면 얼마나 우리 시대가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20년전 만해도 전세계 소식을 몇초만에 손바닥 안의 기계를 통해 알 수 있을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sns는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기도 한다. 다양한 정보를 시시각각 제공하고,  전세계 사람들과의 인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원치 않으면 상대방을 차단하거나 삭제할 수도 있다. 우리들은 누구는 접속하고 누구는 차단하고 있을까?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단지 sns의 기능의 문제일까? 아니면 개인의 문제일까? 작가 엄기호는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이것이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등 사회 곳곳을 누비며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포괄적이면서 세밀하게 연구한 사회학자다. <단속사회>또한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책을 통해 교사, 학교의 문제점을 넘어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한국처럼 특히 독재체제를 오래 거쳐온 사회일수록 소통과 공론장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이는 한국이 오랫동안 일반통행의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쳐 온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p.171,174)

​특히 한국사회는 일본 식민지의 잔재, 독재정권의 부작용으로  조직이나 단체들의 대화가 불가능해졌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 "너 빨갱이 아니야?"라고 막말을 서슴치 않으며 코너로 몰아세우니 누구 자신의 의견을 낼 수 있겠는가. 이런 사회 구조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침묵하되 sns에는 생각과 하소연을 쏟아 놓는것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위험을 회피하고 안전만 추구하는 이런 사회를 '사냥꾼의 사회'라고 정의 한 바 있다.

경청은 그저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자신의 타자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북돋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말 걸기다. (p.276​)

저자는 접속과 차단이 응집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경청을 제시한다. 그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상태까지 짚어보라고 조언한다. 사실 한국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다가 갑자기 경청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게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살아간다. 남을 인정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사실 힘든 건 사실이다. 또한 개인의 문제를 타인이 해결해줄 수 없는 사회 시스템이기에 경청이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의견을 나누고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 분야에서 성공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어떻게 성공했는지 책을 출간해 강연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왜 그들은 앞다투어 책을 내려고 하는 걸까? 자신의 분야보다 강연하는 삶이 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잉여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가의 강연보다 함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 나누고 현 사회 시스템 구조와 해결책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강연보다 낫지 않을까? 강연를 듣는 것도 사실 중요하다. 나도 그 부류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그렇지만 무조건적인 강연보다는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사회학 책을 읽거나 함께 토론한다면 보다 소통이 잘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그로인해 자신의 문제의 실마리도 풀리지 않을까?  단속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나마 서로를 알아갈려는 헌신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보다 안전되고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은 사실 어렵다. 나도 다섯번 정도 읽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초보 독서가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한번쯤 자신의 문제와 사회를 바라보고 싶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연, 나는 누구를 차단하고 누구를 접속할까?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a*****4 2016.03.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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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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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라는 제목을 보면서 바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개인에 대한 감시 또는 통제 사회였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처럼 현재 사회의 모습은 개인을 알게 모르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라 생각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설치된 CCTV를 보면서, 회원 가입시 개인 정보 이용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할 때마다 누군가가 이러한 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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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속사회>라는 제목을 보면서 바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개인에 대한 감시 또는 통제 사회였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처럼 현재 사회의 모습은 개인을 알게 모르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사회라 생각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설치된 CCTV를 보면서, 회원 가입시 개인 정보 이용에 대한 동의서를 작성할 때마다 누군가가 이러한 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실제로도 그러한 것이 버젓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모습이다. 그러나,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내가 처음 떠올렸던 의미가 아니라 자아와 타자간의 관계가 끊어짐과 동시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 원인과 그 결과로 인한 현재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단속사회>에서 밝히려는 단속은 어떤 의미일까? 일상의 사례들을 통하여 쉽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책에 언급된 그의 정의로서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단속은 낯선 것(타자)과의 만남의 단절이다.

 두번째, 공적인 것과의 단속이다.

 세번째, 의견을 아예 제시하지 않거나 불가피한 경우에만 최소한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기검열 혹은 스스로를 단속하는 경향으로서의 단속이다.

 네번째, 이런 결과로 나타나는 '연속의 반대'로서의 단속이다.

엄기호는 이러한 단속사회에서는 사람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회라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사회가 왜 도래하였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면서 그러한 사회에서 탈피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를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다양한 예와 인용을 통하여 우리가 공감할만한 내용들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는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부모 세대와 젊은 세대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을 하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 젊은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과 젊은 세대에게 부모로부터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 물려받은 것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없습니다."

 이 질문과 대답으로 인하여 저자는 경험의 단절을 이끌어낸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이 대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대다수는 위와 같이 대답을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하여 저자는 세대를 거쳐서 물려받아야 할 경험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통하여 그 원인으로서 바로 단속을 이끌어낸다. 이 밖에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작은 예를 통하여 단속의 모습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러한 단속은 소통의 부재, 남과 다르게 보이면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라는 의식 등의 예를 들면서 그 원인도 다양한 측면에서 이끌어내고 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단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사람이라면 내가 아닌 타자와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타자성과 함께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점차 타인과의 대화를 꺼려하는 모습. 말을 하더라도 남들과 다른 면을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점차 잃어가는 모습. 그와 동시에 직접 타자와 대면하여 말을 하는 것을 꺼려하면서도 인터넷의 익명성의 가면하에서는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쏟아내는 우리의 모습.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가 단속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속사회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그 대안으로 책의 소제목처럼 고통에 대면하면서 사회에 저항하기를 꼽고 있다. 고통과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주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학을 배우면서 처음 자연수, 정수, 유리수, 무리수, 실수, 허수와 같이 하나의 수 체계에서 새로운 수 체계가 등장하는 모습은 기존의 수 체계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지식의 폭을 좀더 확대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배움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타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세계를 동시에 넓혀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와의 만남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지 말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타자를 인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단속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칫 나르시즘으로 미화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당당히 타자와 소통하는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의 단속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타인의 말을 듣는 경청이 아니라 그 말 속에 담겨 있는 타자성을 듣는 경청도 단속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결국 <단속사회>는 쉽게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자아와 타자와의 인식과 소통을 통하여 단절된 현재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으로 아주 단순화한 과정이다. 실제 이 책을 읽으면서 결코 쉽지 않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 다양한 철학과 사회학 개념이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내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자아와 타자와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어서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만 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존 듀이와 지그문트 바우먼의 사상을 접목하여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저자의 <단속사회>의 원인과 현상, 대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사상이나 관점으로 이 책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호엄기라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는 나로서는 저자의 이전 작품에서 언급된 다양한 예시(다행히 이 부분의 예시는 딱히 전문적인 지식이나 배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도 생소하게 느껴져서 어느 한부분 가볍게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단속사회>를 읽고 나서 쉽게 생각하면 참으로 쉬운 내용이지만, 현재의 모습을 단속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또한 이 작품도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인기를 끌면서 그 유명세를 이용한 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색안경을 끼고 읽기 시작한 부분도 있었기에 초반에는 호의적으로 다가온 작품은 아니었다.(물론 저자는 이 책에서 바로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발생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는 소통의 부재와 혼란도 저자가 말하고 있는 <단속사회>의 한 단면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단속사회>의 씁쓸한 모습이 최근 우리 현실의 자화상처럼 보여져서 책을 다 읽고, 오히려 먹먹해진 느낌이 나의 가슴에 드리워지는 듯하다.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이야기를 카프카와 저자의 재해석을 통하여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면서 책 읽기를 마무리해본다.

g*******7 2014.04.3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