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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생활 50여년, 시집 여럿. 이보다 더 간략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축약해 놓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언부언하는 것보다 짧은 한 문구에 핵심을 담는 것이 더 어려울 법인데, 짧디짧은 프로필을 읽고 있자니 노작가의 드높은 내공을 알 법도 하다. 새로이 출판된 <내 변방은 어디 갔나>를 읽으며 나는 꼭 한 번 보았던 작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때는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고조되었던 순간. 교보문고 입구를 가득 메운 줄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끝이 어딘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펜을 꼭 손에 쥔 손에서는 한 치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자 한 자 꾸욱 눌러가며 글씨를 생산해내는 그 손에 수십 혹은 그 이상의 눈길이 꽂혔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침 한 번 꼴깍 삼키는 것도 실례가 될 거 같았던 긴장의 순간. 누구나 할 수 있는 서명 행위가 이토록 무게감이 있을 수도 있구나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주인공이 오늘에 이르러 ‘변방’을 노래한다.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탄생한다면 제일 첫 타자가 될 것이라 일컬어지곤 하는 시인 고은 님이 스스로를 ‘변방’에 속한 자라 칭하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단 생각이 자꾸만 든다. 중심에 선 자가 변방을 그리워하고 변방에 속한 자는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려 안간힘을 쓰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역설이란 말인가!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우리 사회에선 모두가 경쟁에서의 승리를 열렬히 갈망한다. 1등하면, 세계 최고의 부자이면 세상의 모든 행복이 제 것이 되어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 매달려 한 계단씩 오르기에 급급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제일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많은 사람들은 허망해 한다. 왜 내가 이토록 아등바등 거리며 살았단 말인가? 물질문명의 첨예함을 뚫고 최상의 것을 쟁취하는 게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그제서야 실감하는 것이다. 물론 경우는 다르다. 제 평생을 글을 쓰며 살아온 작가에게 물욕이란 낯선 개념일 게다. 돈을 바랐다면 시인이 되기보단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 그렇다면 그가 그리워하는 변방이란 과연 무어란 말인가. 사람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달라질 수 있다. 오랜 생을 살아본 자만이 맡을 수 있는 지난날에 대한 향취. 아무나 읊을 수 없는 그리움이 시 한 편 한 편에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존재치 아니하는 듯한 타클라마칸 사막, 살아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짖는 목소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들에는 바로 본질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만든 존재들. 그 존재들을 부인하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겠지? 지금은 메마른 공간에 불과한 사막도 천년 전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는 지금의 나를 가능케 만든 모종의 생명체가 살아 있었을 게다. 그런지라 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옛날을, 텅 빈 공간을 보고파해야만 한다. 이는 현대 문명과는 상반되는 것들이다. 미래를 그려야만 한다고 부르짖는 사회에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목소리는 자칫 죄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그래서 속으로만 제 마음이 내뱉는 목소리를 삭힌다. 하지만 저자는 적극적으로 제 생각을 옹호한다. ‘에디슨아 / 에디슨아 / 에디슨아 // 더 이상 발명하지 말 것’(포고 중에서). 하지만 이러한 적극성이 결코 삶을 배척하는 것은 아님을 우린 기억해야만 한다. 그의 시는 삶에 대한 긍정으로 오히려 가득하다. ‘아니 / 누구에게는 이 세상은 / 단 한번이 아니라 / 여섯 번 / 일곱 번이나 또 태어나서 / 여섯 번 / 일곱 번이나 또 살아야 할 세상이겠지’ (일몰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제 중심에서 놓친 채 살아간다. 오래도록 스스로를 다듬어 온 저자마저도 그 사실을 시인하는 듯 변방에 밀어놓았던 삶의 요소들을 하나씩 긁어모은다. 그가 ‘변방’이란 용어를 사용해 부른 그곳이 진정 변방일까? 삶을 이토록 긍정하는 작가는 뼈 마디마디마다 삶의 에너지가 온전히 가득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는 애써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물음을 던진다. 산다는 건, 태어났으니까 어찌저찌 해 살아지는 당연한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증조할머니와 못 본 고조할아버지도 함께 살던 시절,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을까 말까한,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그 깊이를 헤아리려 드는 현대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굳이 단어를 빌리자면 ‘단아함’이다. 우리의 것이라고 하면,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면 왠지 투박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랜 세월 들추지 않았던, 그가 다룬 삶의 본질이라 하는 것은 어이 이리도 고운지를 모르겠다. 아, 그래서 시는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뭇사람들이 수군거렸던가? 아직도 새 한 마리 앉아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얼마나 많겠는가 외롭다 외롭다 마라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어디에 있겠는가 괴롭다 괴롭다 마라 -부탁- 조용히 이 모든 시에 순응하련다. 난 아직 나를 알지 아니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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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49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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