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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나는 부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내용보기
나는 부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무더운 여름날,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두꺼운 머리를 이고 진 팔은, 잠에서 깨어보니 감각이 없다. 피가 도는 다른 쪽 손으로 감각 없는 팔을 만져 봤다. 전기가 찌릿 온 것처럼, 팔은 감성으로부터 깨어났다. 감성이 깨기 전에, 나는 내 팔이 한 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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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무더운 여름날, 기절하듯 낮잠을 잤다. 두꺼운 머리를 이고 진 팔은, 잠에서 깨어보니 감각이 없다. 피가 도는 다른 쪽 손으로 감각 없는 팔을 만져 봤다. 전기가 찌릿 온 것처럼, 팔은 감성으로부터 깨어났다. 감성이 깨기 전에, 나는 내 팔이 한 낱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패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한 때,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 만이 시간이 흘러 부패하는 것이다. 결국, 부패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아름다움이 퇴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아름다움을 다음의 아름다움에게 넘겨주는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자연에서 독불장군은 없듯, 시에서도 옹고집은 없다. 여기, 속초 시인의 생뚱맞은 한 낮의 물구나무 서기가 진행 중이다. 시집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인데, 잠깐 맛 한번 봐 보자.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사는 나, 송장에 빌붙어 잠자는 자

송장을 먹여살리느라 평생을 바치는 나

송장을 업고 다니는 자들, 대대로 송장을 따라다니는 가문

쥐가 되었다, 새가 되었다 변신하는 자들

송장의 송장들, 송장뼈의 송장뼈들

 

대퇴골이며 다리뼈며 복사뼈며 두개골이며 손뼈며

척추며 이백여개 괴상한 돌출의 뼈들, 뼈들

혼란스런 존재들, 불가사의한 구조, 천변만화의 아름다움

 

지금은 인간인 존재들, 잠시만 인간인 존재들, 의 책 같은

고단한 죽음의 꿈을 꾸는 자들, 저 문명 바깥의

페이지가 다 붙어버린 절어 붙은 커버 같은

돼지가 된다는 건 꿈도 못 꾸지, 벌레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할걸

돌이나 쇠붙이처럼, 인간들은

 

그런 인간들은 하지만, 화려한 변신을 돌리는 회전부채의 존재들

마술의 거짓말들, 도시 냄새를 풍기는

돌아도 돌아도 더 새로워져, 무한히 낡지 않는

무한궤도 같은, 죽어 새로 태어나는 존재들, 몸을 바꾸는 이상한

존재들, 원래부터 그랬던 이름들 나, 그들

 

인간, 그것의 사이에 있는 인간들

형상의 껍데기를 찾아 자신의 몸을 끼우고 송장을 허파속에 거는

거지 생명들, 거지 행적들, 거짓 진실들, 거짓 실재들의 현실, 거리

어둠의 횡단보도를 절뚝이는 외투 속의 남자

이것만이 의심할 수 없는 나, 통쾌한 나, 나

저 자연의 여여함이 얼마나 싫증나고 아름다운가

 

죽음은 이런 꿈을 망각으로 처리하기 위한 게임임을 인정했다

목구멍에 송장을 걸고 돌아와, 평생 같이 잠잘 꿈 꾸는, 곤한 자들

-<한번 불러본 인간 송장의 노래 전문>

왜 사냐건 그저 웃지요. 라는 천상병의 시인의 시처럼, 어떤 모습으로 사냐건, 송장으로 살지요 라는 시인의 기괴한 발상이 한 여름을 오싹하게 만든다. 성공을 위해, 명예를 위해, 사랑을 위해 등, 온갖 대의명분을 갖다 붙여도 우리는 송장으로 살아간다. 감성이 깨어있지 않고, 물질로서만 사물을 바라보는 순간, 육중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육신을 질질 도로변에 끌며, 잠을 잘 때는 관에 주차하는 것이다. 그 안에 기억이라는 것은 죽음 앞에 한 갓 우스운 장난감일 뿐이다.

 

담천의 서울 한 아파트 거실에서

 

한 동물이 허리를 구부리고 고집의 발톱을 깎고 있다

딱, 딱, 딱 손톱 끊어지는 소리 절벽 밖으로 사라진다

그의 생에서 유례가 없는 평일,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도 전에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내심 확인하고 즐거워한다 왜 그는 이렇게 된 것일까

자신을 동물이라 생각하는 순간, 성선설이 맞는 것일까

 

하 나는 동물이다 발톱을 깎는, 무릎을 세우고

아주 세심하고 사색적으로, 흐린 아침 공기를 마시며

부족함이 없다, 그 발 톱은 벌써 늙었으나

그것은 그가 이 도시에서 많이 걸어왔다는 것을

유일하게 그가 동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표다

어떤 시들은 그 까닭을 표하지 않고 끊어버린다

동물의 이 시도 그런 유의 시에 해당할지 모른다

 

수심(獸心)은 벽을 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다

조용, 이제 손톱을 자른다, 손톱은 희고 길고 귀엽다

종목을 횡목의 칼날이 끊는다, 손톱이 톡, 톡, 톡

무엇부터 쓸까, 동물은 잎처럼 너울, 너울거린다

손톱을 깎는 아침은 모든 것이 틀려먹었다 생각한다

인간으로 이의없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처럼

우리는 최선의 문명으로 진화되어왔다고 믿는다

 

내가 동물의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의 동물이 인간의 나를 기억하겠느냐는 것으로서

나여, 고개를 숙이고 발톱 깎는 아침은 하여간 염염해

-<손톱 깎는 한 동물의 아침 -불가능한 상상의. 전문>

재밌는 것은 「한번 불러본 인간의 송장 노래」에서 자연의 여여함 이라는 표현과 「손톱 깎는 한 동물의 아침」에서 '아침은 하여간 염염해' 라는 표현이 부드럽고 약하다는 형용사적 뜻 과 맞물려, 묘한 시의 이미지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까닭 없이 깎는 손톱 하나에도 시인은 과도한 사유를 부여하는 것은, 태곳적부터 우리에게 부여된 사냥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미 사냥을 하지 않는 우리에게 손톱은 가려운 곳 긁는 것 빼고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이것은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존재'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나는 가끔 이 남양주시 메인도로를 통과했다

남양주시는 모른다. 이런 문장은 맞는 문장이 아니다

나는 이 안되는 문장을 계속 만들려고 한다

나는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청과 남양주경찰서를

결코 모른다는 생각, 나는 이 이상한 생각에 막힌다

어느 시민도 이 모름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오늘 정오의 햇살의 남양주시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남양주시의 햇살의 정오를 밀치고 장님의

남양주시가 되려 한다 마른 햇살의 남양주시 정오!

생각만 해도 개체의 죽음과 삶을 훌쩍 뛰어넘는 듯

시청 앞에 국화, 눈구름 냉기 알알한 늦가을

슬픔과 기다림의 감정이 식은 남양주시의 가을 정오

하지만 남양주시의 가을은 남양주시를 알지 못해

자신이 어디 가고 있는지 모르고 통과하고 있다

나와 말은 절망 속에서 햇살을 잡고 의문을 시작한다

남양주시를 방문한 나를 모르는 장님의 남양주시

남양주시가 남양주시에 있음을 나는 아슬아슬하게 믿어

그 소란한 가을빛과 언어의 남양주시를 빠져나간다

이 통과는 너무나 눈부셔, 차를 노변에 세우지만

남양주시는 가을 하늘 밑에서 혼자 불타고 있다

할말도 아주 없는, 가을도 모르는 나의 가을 남양주시

나도 남양주시가 되어가는 가을의 남쪽 남양주시

그대여 아는가, 알 길 없는 내 마음의 이 가을의 언어가

오늘도 남양주시가 모르는 남양주시를 통과하고 있다.

-<비정치적 남양주시 전문>

'남양주시'와 '남양주시'의 대립은, 결국 나와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립이기도 하다. '나 없는 세계' 와 '나 있는 세계' . 더 나아가 '내 정신적 사유로서의 세계' 와 '나 외적의 현상 세계' 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데칼코마니의 오마쥬 같으면서도, 신이 인간을 내려보는 듯한, 말하자면, 시인이 시인 자신의 미니어처를 내려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나 임과 동시에 나 가 아님이 되는 역설적 상황으로 변모 되는데,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에르덴조 사원을 생각하거나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려다가 생각을 못하고 놓친다

그들은 먼 나의 생각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 나간다

문장 성립은 둘째치고 나는 늘 이렇다

나는 이 사유 자체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이 꼭 성립해야 하는가

길을 가면서, 나는 혼자, 그 생각에 골몰한다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그래 에르덴조 사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다

나에게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동급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문제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문제가 발생한다

허나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내가 너무나 고독하다

음률을 맞추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행보

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그런데 그대여 왜 그대는 에르덴조 사원엔 없는 건가

나는 지금, 그때,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고 있어라

나는 정처가 없어서 나무처럼 외로워 보인다

나 없는 사막 입구의 산처럼 나는 하늘을 쳐다본다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전문>

에르덴조 사원에 있는 것은 뭘까? 실상 에르덴조 사원에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일까? 에르덴조 사원을 인식하는 나와 에르덴조 사원에 서 있는 나 사이에, 혹은 에르덴조 사원에는 없지만 에르덴조 사원을 생각하는 나, 에르덴조 사원에도 없고 에르덴조 사원도 생각하지 않는 나, 등은 엄밀히 말하자면 하등 쓸데없는 말장난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주는 메시지는 고독하다는 것, 외롭다는 것,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존재 본질의 감성을 끌고 가고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송장으로써의 기능만을 가지지 않고, 붉은 피가 돌고, 상처를 회복하는 자생의 존재로서의 '나'를 말한다. 그것은 너와 우리로 치환되는 타자의 공감으로써만 얻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닌, 오직 '나' 자신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장막이 아닌, 자신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 거울로써의 에르덴조 사원인 것이다.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즐긴다

얼마전부터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시작했다

공중으로 번쩍 다리를 쳐들고

뒤에서 보고 있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벽에 발꿈치도 대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웃었다 거꾸로 선 아버지라고

아버지는 책상에 뭔가를 하루종일 쓴다

 

깜박 잊고 엇차, 하는 소리 들려 돌아보면 아버지는

영락없이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하루에 몇 번씩

물구나무서기를 잊지 않으려고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최근엔 물구나무서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식구들은 물구나무서기하는 아버지에 관심이 없다

조만간 우리집은 해체될지 모른다

우리집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쉬지 않고 쓰는 집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집

아버지는 대체 뭘 저렇게 써놓는 걸까

아버지는 저렇게 물구나무서기만 하다 돌아가실 건가

 

아버지가 우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물구나무서기하는 나 전문>

자식의 눈으로 시인 자신을 들여다보는 「물구나무서기하는 나」이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물구나무 서기를 얼마전부터 하는 것일까? 아버지가 우리를 빤히 들여다 본다는 것은,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하는 집의 다른 식구들이거나,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다. 세상을 뒤집어 본다는 것, 그것은 자신 역시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옳은 자세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고정관념에 밀착된 잔가지로서 사물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과 반대의 자세로써 세계를 본다는 것은 밀착된 잔가지를 자르겠다는 말과 같다.

 

송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의외로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엔? 결국 시인의 사유는 고정된 나와 세계의 정체성을, 뒤집어 바라봄으로써 해체하고, 결국엔 다른 나와 세계를 읽으려는 몸짓이 아닐까?



YES마니아 : 플래티넘 s*******2 2010.06.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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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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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를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접 소리 내어 말을 하건 글자를 적건, 이 도구로 인해 인간이 입은 은혜(?)는 놀랍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지금도 다양한 상호작용이 오가는 가운데에 많은 말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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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이를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접 소리 내어 말을 하건 글자를 적건, 이 도구로 인해 인간이 입은 은혜(?)는 놀랍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지금도 다양한 상호작용이 오가는 가운데에 많은 말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제 아무리 풍부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때때로 제 느끼는 바를 충분히 표현해주는 단어를 찾지 못해 서글퍼 한다. 언어는 그래서 이중적이다. 인간의 삶을 담긴 하나 그 담음이 온전하지 않은, 갖은 오해가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매일 하는 것이 말이라 하여도 타인의 말은 귀 담아 들어야 하고, 매일 읽는 것이 책이라 하여도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읽어야만 한다.

시인 고형렬은 이러한 언어의 특징은 과감하게 이용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다분히 홀로된 심상을 드러내고 있는데, 일종의 자제라고 해도 좋을까, 마치 산문마냥 나열된 글의 이면에 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고 있다. 다소 건조한, 그 언어를 통해 표현된 대상은 완벽할 수가 없다. 그의 시에서 정체성의 혼란이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이러한 심상은 일관되게 모든 대상을 향하고 있다. 심지어 스스로를 대할 때도 그는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이 시집의 특징을, 저자의 작품세계를 가장 고스란히 드러낸 시가 아닐까 한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로 시작된 이 시는 혼란스럽다. 없다는 것은 상상이 불가능하므로 분명히 자신이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고, 저자는 곧장 진술을 바꾼다.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단정짓지 못한 채 또다시 저자는 말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이 꼭 성립해야 하는가’. 언어로 스스로를 규정지으려 해 보지만 하나의 거대한 존재를 품기엔 한없이 부족한 것이 바로 언어인 것일까? 언어에 기댄 그의 혼란은 결국 그에게 침묵만을 가져다준다.

택할 수 있는 것은 몇 안 된다. 절대 고독에 빠져드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어떠한 언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자신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차라리 ‘황폐화’를 그는 택하고야 만다.


나는 이미 황폐화를 시작했다

이 황폐화가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지 모른다

시를 뜯어고치기는 나를 뜯어고치기보다 어렵다


그렇다. 스스로와의 싸움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스스로를 언어 안에 가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화에 실패한 나방(‘나방과 먼지의 시’)도 되었다가 비정치적인 남양주시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정의치 못하는 언어는 결코 고요할 수가 없다. 아니 고요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게 쉽게 확립되는 것이 정체성이고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난 모르겠다. 그가 에르덴조에 있는지 없는지, 혹 없다면 그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달의 사락 q*****2 2010.06.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