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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한 권을 가지고 산에 올라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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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함이 물드는 사물들의 시간 - 도종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에서 ‘뜨거운 시간’을 노래한다. 뜨거운 시간은 뜨거운 불의 시대와 차가운 환멸의 시대를 차례차례 건너온 자가 이른 시적 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무들」에서 “제가 사는 곳을 말없이 제 삶의 중심으로 바꿀 줄” 아는 나무들의 빛나는 시간으로 나타나며, 「하현」에서는 “저물 날만 남았어도 환하다는 것이 고맙다”고 감격하는 하현달의 “환한 시간”으로 표현된다. 온몸으로 우는 울음을 통해 차가운 시간의 너머를 갈망하는 귀뚜라미의 시간이나 소녀(년)들이 뿜어내는 저항의 시간 또한 이러한 뜨거운 시간의 계열에 속한다. 불의 시대의 뜨거움과는 다른 도종환 특유의 ‘뜨거운 시간’의 시학은 사막의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있어야 할) 꿈(희망)을 꾸는 시간이기도 하다.
관엽 어린 싹이 손가락을 비틀며 올라온다 줄기와 뿌리 모두가 저거 하나를 밀어올리는 게 생의 전부였다는 듯 나무도 그쪽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제는 조봉암이 사형 오십이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았다는데 오늘 아침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묻던 소설가 돌아가셨다 꿈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관엽이여 그래, 우리가 꿈꾸지 않으면 이 엄동에 누가 아름다운 꿈을 꾸겠는가 꿈의 어린 혀, 어둔 흙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열망이여 연두여, - 「싹」 전문
꿈을 꾸는 것은 싹을 틔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줄기와 뿌리 모두가” 힘을 합쳐 밀어 올리면, 싹은 싹대로 “손가락을 비틀며 올라온다”. 생명 하나를 만들기 위해 벌이는 나무의 고투는 “생의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숭고한 것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임을 알려준다. 싹 하나가 아니라, 싹은 이미 생의 전부이다. 싹 하나에 걸려 있는 화엄적 세상의 무게는 “우리가 꿈꾸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꿈을 꾸지 않으면, 다시 말해 싹이 트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절멸할 수밖에 없다. 인간만의 꿈이 더 이상 지구라는 생명체의 꿈으로 대치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만의 꿈은 말 그대로 인간만을 위한 세계를 꿈꾸는 것일 뿐이다. 생명의 인드라망은 수많은 (비)존재들이 저마다의 싹을 틔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따라서 “스러지지 않는 열망”만이 여여하게 살아남아 있다. 시인의 말대로 초록의 신세계는 “꿈의 어린 혀”인 “연두”로부터 비롯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어린 존재가 생의 전부를 걸고 피워내는 희망의 싹이 있기에 초록으로 물결치는 세계의 ‘현실’이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는 시집의 제목에 드러나듯, 시인은 초록의 세계마저도 회색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려 하는 “환절기”를 살아가고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은 쌀쌀한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게 다가온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참고한다면,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니체는 정오(Mittgas)를 디오니소스적인 시간의 재생으로 풀이했다. 해 저물녘에 날아오르는 미네르바 올빼미의 잿빛 시간과는 다르게, 정오의 시간은 살아 있는 (비)존재들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넘쳐난다.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 시간과 잿빛 시간의 사이에 존재한다. 강인한 생명력은 수그러들었지만, 아직 잿빛으로 화하기에는 이른 시간이 도종환이 이야기하는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시간 관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2~3연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가 무엇보다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중심의 시간은 비존재가 파괴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인간-존재만의 제한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의 문맥을 따르면, 그 시간은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절멸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묘한 전도의 상황이 발생한다. 시인은 중심의 시간에서 밀려났지만, 그 대가로 절멸의 시간을 피해갈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3연에 표현되거니와, 그것은 물론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지키기 위해 험한 시간을 보낸 대가로써 주어진다. 생명의 인드라망에 포섭되는 존재는 그 이유만으로도 절멸의 시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인류의 멸망이 운위되는 과학의 시대에 선언되는 시적 시간의 역학은 도종환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고요한 대지(자연)의 시적 맥락을 다시금 일깨워준다고 하겠다.
시인은 어두워지기까지 남아 있는 몇 시간의 여유를 기꺼운 마음으로 즐긴다. “찬란한 노을과 황홀”이 오기 전에 펼쳐지는 고요한 대지의 시간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살아가는 시인의 삶을 표상한다. 「은은함에 대하여」에 나타나듯 이 시간은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는 행복한 세계와 마주하고 있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은은한 세상은 이런 점에서 중심의 시간에서는 불가능한 ‘물들임의 시간’을 제공한다. 무언가에 물드는 일은 자기에 대한 아집을 버리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은은하게 핀 꽃은 화려함을 무기로 다른 꽃을 자극하지 않기에, 다른 꽃들이 피워낸 세상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바로 이러한 은은함이 물드는 사물들의 시간으로 정리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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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님이 쓴 발문을 옮겨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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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은 1977년에 청주에서 교직을 시작하고 86년에 낸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을 쓴 시집 ‘접시꽃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 유명해졌다. 이 후 89년도에 전국교직원노조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게 되면서 교사직에서 해고당하고 투옥되었지만 98년도에 복직되어서 다시 중학생들을 가르쳤다. 현재는 정계에 진출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는 도종환 시인은 순수하고 어렵지 않은 시어들을 사용하여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이 이 시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나간다. 따라서 시 자체의 내용이 크게 어렵지 않지만 이 시집을 읽다보면 아내와의 사별, 노조활동으로 어려웠던 시절 등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그의 삶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 도종환 시인은 우리가 평소에 많이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통해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어린 시절을 동경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떤 순간에는 미래에 대한 다짐을 쓰며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앞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가지게 해준다. 이 ‘세 시에서 다섯 시까지’는 도종환 시인이 자신의 인생 중후반에 바라본 자신의 인생을 그린 시집이기 때문에 비슷한 연령층인 중장년층에게 어릴 적 향토적인 정서와 시시각각 달라지는 현실에 대한 표현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집의 제목이자 가장 처음에 실려 있는 시,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는 치열하게 살아왔던 2, 30대를 지나 인생의 중후반에 맞이한 그들에게 아직 당신 인생은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밖에 안되었고, 아직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알려준다. 또한 나는 개인적으로 꽃밭이라는 시에서 도종환 시인이 순수했던 어릴 적 모습을 여러 꽃들에 비유해 어렸을 떄 자신이 이것들과 함께 성장한 것처럼 표현한 부분이 독특하다고 느꼈는데, 이런 자연친화적이고 시골적인 표현들이 중장년층에게로 향토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한다. |
| 처음에 책의 표지의 약간의 누런색과 옛날 사진 느낌이 나는 꽃의 사진이 주로 깔끔한 그림이 들어가거나 제목만 간단하게 써져있는 최근 시집들과는 다르게 읽기 전에도 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것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되었습니다. 도종환 시인님은 1955년 9월 출생하셨고,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하셨고, 2018년 7월부터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 위원을 하신 정치인이십니다. 하지만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이 책의 시들에서는 정치적 느낌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고 정치와 관련된 시 자체도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인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람들이 일상에서도 공감할수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과는 다르게 시인 개인이 경험한 아내가 숨을 거두셨을때의 감정이나 상황, 아니면 그 이후의 자신의 모습 등을 담은 시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인지 서정적인 분위기와 사랑과 관련된 아련하고도 쓸쓸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묻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추천한다면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거나 소중히 한다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거나 현재 그러한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감정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이 시를 읽음으로써 간접적으로 경험을 할수 있을것이고, 현재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겐 그 감정이 더 깊어지는 계기를 만들어줄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겐 공감하며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을것 같습니다. 꼭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아까 말했듯 일상을 공감할수 있는 시들도 많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거나 또는 시를 읽으며 ‘~했었을때도 있었지’ 같이 추억을 떠올리실수 있는 계기를 만드실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이 시의 가장 큰 장점은 분위기가 무거워지거나 서정적인 감정이 너무 과해질수도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시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무겁거나 감정이 과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집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공감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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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시인은 자신의 인생 나이를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고 여긴다. 그것도 오후 다섯 시 근처라고 여기니 시인에게 여름의 인생이 주어진다면 아직 낮의 시간이 남아 있을 테지만 겨울의 인생이 주어진다면 어둠이 멀지 않을 테다. 이제 어둠의 시간만 남아 있다고 여기며 쓸쓸한 저녁의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으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세시에서 다섯시 사이」)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한 인생의 오후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한 발짝 나아가 “쓸쓸해서 고맙다” (「구인산」), “저물 날만 남았어도 환하다는 것이 고맙다”(「하현」) 같은 넉넉한 긍정으로 나아간다. 라일락꽃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씻기면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인생의 시간에 대한 넉넉한 긍정이 곧바로 세상의 긍정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을 더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 그리하여 “목민을 위해 고뇌하고 싸운 시간만이 운동하는 역사” (「새벽 초당」)이고 , “값진 것은 전선에 있던 시절이었다고”(「쏭바) 되새긴다. 시인은 인생의 늦은 오후 시간을 살면서도 여전히 세상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로 싸우면서 “내 나머지 생이 /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 내 생이 여기서 거덜나도 좋겠다”(「바이올린 켜는 여자」)고 노래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은 앞으로도 역사를 비껴가지 않는 빛나는 서정시를 기대하게 한다. 시인은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터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꽃밭」)는 고백도 시인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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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51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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