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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오래, 서서히 읽고, 한참동안 빠져서 머물러 있게 만든 소설이다. 이런 책을 만나면 그 날이, 그 달이, 그 해가, 새삼 행운이자 축복처럼 느껴진다. 내게 황홀한 선물이란, 이런 책을 만나는 것, 내가 나에게 주는 뜻밖의 보석이다. 미리 알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므로.
작가에 대한 믿음도, 다른 이들의 평도 기대하게 만들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읽으면서 얻는 기분과 생각과 회의감이라는 게 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생각이 많으면 많은 대로, 이전과 달라졌으면 또 그런 대로, 믿었던 바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의심이 들면 의심나는 대로. 이 책 한 권으로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내 의식의 폭과 깊이를 감당하는 시간이 퍽 좋았다. 그러게,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더란 말이지.
시작은 나빴다. 감옥 안이 배경이라니. 도대체 이번 주인공 폴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감옥 안에서 시작하는 것인가. 이 배경 마음에 안 드는데, 별로일 것 같은데, 궁시렁궁시렁 하면서 읽어 나갔다. 그리고 곧 폴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시간 여행과 공간 여행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게 되다니.
연민이라는 말과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주인공 폴을 향해 느낀 약간 색다른 감정, 이전에 읽은 소설들에서 좀처럼 가져 보지 못한 주인공을 향한 애틋함, 미안함, 쓸쓸함, 사가여움, 나무라고 비난하고 싶기까지 한 마음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을 너무도 이해하겠는데 그럼에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지 싶은 안타까움까지. 소설이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지만, 폴이라는 인물은 굳이 그렇게 살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더 마음아팠던 독서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내막을 드러내지 않고 다음 장으로 읽어 나가야만 폴의 세상으로 한 발 한 발 더 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한 작가의 솜씨는 여전히 멋지다. 아무리 대단한 사정을 가진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끔찍한 장소의 하나인 감옥 안에서 읊는 독백에 내가 이처럼 빠져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하마터면 감옥이라는 곳을 괜찮은 곳이라고 말할 뻔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반려견을 밤마다 불러서 함께 있어 본다는 설정, 기괴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만큼은 아늑하고 풍요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시간마저 마련할 수 없었다면 폴은 버티지를 못했으리라. 이 또한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살아남는 방법이 되는 것일 모양이고.
남처럼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이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한계다. 그럼에도 한 발짝 더 나아가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소홀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이 나이에도 여전히 든다. 폴이 폴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폴의 아버지가 끝내 나락에 빠졌더라도 살아서는 목사의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폴의 아내 위노나가 위험한 사정을 다 알면서도 비행기를 몰아야 했던 것처럼, 폴의 반려견 누크가 폴과 함께 서로에게 기댈 수 있었던 것처럼, 다들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해 살아야 할 일이다. 끝끝내 용서하기 힘든, 다른 이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인물들을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답을 얻지는 못하면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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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꾸준히 출간해내는 작품들을 읽다보면, 그 생각이나 지향점이 조금씩 변화됨을 느끼게 된다. 물론, 그러한 변화없이 자기복제식으로 카피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십여년전 작가의 '프랑스적인 삶'을 읽고 나서 한 동안 책 속의 그 큰 나무를 발견했을 때의 장면이나 서사, 그리고 그 여운은 한동안 잊혀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즈음에 출간된 작가의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고, 최근에는 '상속'이라는 작품을 찾아 읽다가 지난해에 공쿠르 상을 드디어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이 번역되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올해 번역이 되지 않는다면, 아예 원어로 사읽을 생각이였으니 말이다. 책은 그의 작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불행 또는 상실을 겪고난 후의 삶에 대하여 쓰여져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프랑스적인 삶'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해피엔딩의 여운이 있었다면, 지난번 읽은 '상속'부터는 그러한 꽃같은 결말은 없다. 이 책의 결말도 뻔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그냥...약간은 불안 불안 위태 위태하게 인간적(?)으로 삶을 지속해 나간다. 사실 취향은 '프랑스적인 삶'이 맞겠지만, 나는 이 책 같은 결말이 더 좋다. 요란하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게...아마, 그도 여하튼 밥도 먹고, 감기도 걸리고, 가끔 웃기도 하고, 귀찮아하기도 하고...뭐 그렇게 살다가 죽겠지. 나이가 먹으면서 지극히 현실적이 되고, 아주 고달픈 현실을 마주 하지 않는다면 꿈같은 판타지는 그닥 끌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스타일리쉬하게 우울한척 하는 글들도 별로. 폴 한센의 이야기가 주축이 될 수 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의 마지막이 너무 안타까웠다. 성직자였음에도 세월이 변함을 따라가지 못하여 판단력을 상실하고, 파국으로 치닫고마는 결말이 그냥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또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와이프와 개 마저도 죽고 난 후에 홀로 남겨진 폴 한 센의 모습도 너무 안타까웠다. 그 공허함과 상실감을 극복하려면, 그는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살아내야하는 것일까.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모두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라는 책 제목으로 다 정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공쿠르 상을 탄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프랑스적인 삶'을 썼을때 이미 받았어야하지 않나싶고...살짝, 나이먹고 글 잘 써왔던 노고를 인정하여 상을 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나쁜 듯은 아니고, 그냥 살짝 기존 작품에 묻어가는 듯하기도 하여서) 그러거나 말거나, 간만에 읽은 책같은 책이다. 만족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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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나를 심판하고 단죄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말 한마디만 마음에 새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 단순한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161쪽 / 요하네스 한센의 마지막 설교 中)
수영장 물의 질감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수영을 못하는 나에게는 그 물이 그 물이고, 모든 수영장은 다 똑같은 수영장인데 그렇지가 않나 보다. 물의 질감도 못 느끼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는 게 억지스러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수영장의 물이 다르듯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한 집에 살고 있는 나와 남편과 아이 역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는 프랑스 작가 장폴 뒤부아의 책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가의 다른 책 『프랑스적인 삶』이 책꽂이에 있었다. 이 책을 아주 오래전에 읽었고 다시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치웠는데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책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역시 책은 읽지 않아도 책꽂이에 계속 꽂아 두는 게 정석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폴 한센은 요하네스 한센의 아들이자, 이십 년 넘게 공동주택 렉셀시오르의 관리인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덴마크 태생인 아버지는 평생 목사로 살아왔고, 프랑스 태생인 어머니는 극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자유분방한 인물이다. 폴의 아내 위노나는 알곤킨 인디언으로 작은 비행기 '비버'를 몰며 사람들을 태워 날랐다. 이들은 모두 망자가 되었으며 폴과 그의 아내가 키우던 반려견 누크도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수영장은 오랫동안 나의 근심거리이자 한없는 불쾌감의 원천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른 후 수영장 때문에 내가 해고를 당했고 결국은 교도소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얄궂다. (176쪽)
폴은 어떤 일로 인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일이 어떤 일인지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드러난다. 그의 삶은 극적이다. 평온한 듯 보였으나 굴곡진 삶이었다. 그런 반면 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차분하며 담담하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어이없게도 그의 삶은 평온한 듯 느껴진다. 그는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랑하는 망자들을 감옥에서는 만날 수 있다. 그들을 통해 위로받으며 결코 평온할 수 없는 감옥의 방에서 안락함을 느낀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되기도 한다.
폴은 교도소에서 아버지, 아내, 반려견 세 명의 망자를 만나 위로받는 이야기, 한 시절을 관리인으로 살아오며 몸과 마음을 다해 일해 온 이야기, 아버지 요하네스 한센의 이야기, 함께 교도소 '콘도'의 방을 나눠쓰는 헬스엔젤스 단원 '패트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이크를 사랑하는 패트릭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은 모두 두쪽으로 찢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쥐가 무서워 벌벌 떤다. 가위에 대한 공포증 때문에 머리카락이 턱밑까지 자라있으며 가위 소리 때문에 기절하곤 하는 인물이다. 폴은 패트릭에게서도 위로를 받는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주고받는다.
소설 속에서 폴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야기의 절반은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의 이야기에 할애된다. 목사이지만 어느 날 아들에게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던 아버지,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목사로 살았다. 어느 순간 또 다른 신앙을 쫓아 살아가다 말(馬)에 차이고 모래에 파묻혀 버린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폴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를 있게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을 이해하기 전에 자신과는 다르게 살아갔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선행되어야 했던 걸까?
사실 우리는 저마다의 고통을 때렸다.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멸시를 때렸다. 부재하는 가족들을 때렸다. 시건방진 판사, 바쁜 치과의사, 딱 떨어지게 정의할 순 없지만 조만간 패트릭 호턴이 어떤 식으로든 "두쪽으로 찢어 죽일" 인간들을 때렸다. (42쪽)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폴 한센은 그의 아버지가 살아간 땅,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공동주택 렉셀시오르의 관리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누구보다 성실했으며 누구보다 친절했던 그다. 누구보다 꼼꼼하게 렉셀시오르를 돌봤으며 정원을 가꿨고, 전용 수영장의 물을 관리했다. 나이 들어가는 입주자들도 살뜰히 돌봤다. 하지만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아가지는 않기에 그런 그를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가 관심 쏟는 일(고령화가 진행된 입주자의 생명을 살피는 일 등)이 업무 지침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질책하는 사람은 소설 밖 어디에든 존재한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만을 원하는 세상.
책을 읽다 세계지도를 살펴봤다. 그의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덴마크 최북단에 위치한 유틀란트 반도, 부자가 살아간 캐나다 몬트리올, 위노나의 삼촌이 횡단했던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세인트존스까지. 폴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프랑스와 캐나다, 덴마크까지 걸쳐있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찾아가고, 알아가고, 받아들이는 일 역시 어느 한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도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가 20년 넘게 돌봐 온 공동주택 렉셀시오르의 전용 수영장, 하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그가 관리해 온 수영장의 주인인 적이 없었다. 책의 끝부분에 이르러 수영장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가 물속을 누볐을 그를 상상하니 내 온몸까지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앞으로 펼쳐질 폴의 삶이 물속에서 헤엄칠 때처럼 그답길 바란다.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 않"는다고 불쾌한 시선과 못마땅한 눈, 속박하려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 모두는 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속에만 간직해두는 편이 나은 것들이 있다. 혹은 아내, 아버지, 반려견하고만 얘기하는 편이 나은 것들이. 그들은 스카겐의 모래 어딘가에 파묻힌 이야기를 처음부터 알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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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다양성을 주제로, 삶의 다양한 조건 속에서 인간이 겪는 갈등과 선택을 탐구한 에세이집이다. 장폴 뒤부아는 세상의 불평등이 단순히 경제적 차이로만 설명되지 않으며, 교육, 가족 환경, 사회적 기회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사람마다 다른 삶의 조건을 만든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책은 각 장에서 사회적 사례와 개인 경험을 교차하며,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기회가 제한된 환경에서 노력과 선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삶의 질과 사회적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섬세하게 분석한다. 현실적 사례와 사회적 통찰을 동시에 담아낸 점이다. 뒤부아는 단순한 통계와 분석을 넘어, 실제 사람들의 삶과 경험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는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고, 동시에 인간의 선택과 노력, 환경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성찰하게 된다. 또한 글의 문체가 간결하고 명료하여,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해가 쉽고 몰입감이 있다. 다만, 사례와 분석 중심의 전개가 이어지다 보니 일부 장에서는 다소 반복적이고 이론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으며, 감정적 공감보다는 사고 중심의 독서를 요구한다. 또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깊이와 범위가 넓지만, 때로는 결론이 모호하게 느껴져 명확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아쉬움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는 삶의 조건과 사회적 불평등을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각자의 환경과 기회, 선택이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준다. 현실적 사례와 통찰적 분석을 통해, 사회 구조와 개인 선택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게 하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더 깊이 돌아보게 만든다. |
| 다 다르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누구나 아는 주제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작품들은 기원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리스비극에서는 그것을 하마르티아라고 설명했고 한국에서는 회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살다보면 내가 되고 싶은 모습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좌절하지만 이게 인생이지라면서 세라비를 외치면서 굳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그걸 알려주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법을 알려주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자 좋아하는 작가마다 다른 데 난 이 작가의 작품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