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의 즐거움은 내가 알지 못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 더하여 책을 통하여 책을 쓴 저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점도 또하나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씨도니가브리엘 꼴레뜨의 <암고양이>는 나에게 독서의 두가지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해준 책이 아닐까 생각된다. 생소한 작가의 생소한 작품. 왠지 이 책은 읽기 전에 저자인 꼴레뜨에 대하여 먼저 알고 읽어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접하는 책들에 대해서 모두 그렇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암고양이>는 그렇게 읽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꼴레뜨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이긴 하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은 상당히 굴곡진 길이었다. 두번의 결혼과 세번의 결혼, 동성간의 사랑, 근친상간의 행각까지 경험한 그녀가 마지막 세번째 결혼에서 삶의 안식을 누리면서 작품 활동에 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꼴레뜨는 그러한 굴곡진 인생을 통하여 기존의 시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여성적인 시각으로 사랑과 욕망, 질투와 같은 순수한 본능을 탁월하게 표현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암고양이>는 그 주인공이 남성인 알랭이다. 그녀의 약력을 참고한다면 아마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 같았지만, 이 책에서는 알랭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실 <암고양이>의 전체적인 흐름은 그리 복잡하지가 않다. 알랭과 까미유가 결혼을 하면서 짧은 신혼 기간 동안의 갈등으로 인하여 헤어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청춘 남녀의 짧막한 사랑 이야기로 보여지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결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흔히들 결혼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의 결합으로 회자되지만, 알랭과 까미유의 경우에는 극명하게 다른 세계로 각각 표현되고 있다. 어려서 같이 어울려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본다면 모든 것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옷감 상인 집안인 알랭과 세탁소를 운영하는 까미유의 집안 내력의 차이는 뒤로 하더라도 말이다.(왜냐하면 이들의 신분의 차이는 오히려 알랭의 집안의 사업이 위축되면서 역전이 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알랭은 왠지 과거의 추억으로 인하여 현재에서 멈춤을 보여주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까미유와 함께 살게 될 새로운 아파트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태도는 까미유를 대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겉으로는 까미유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때때로 관능적인 육체의 욕구로 표현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여전히 까미유를 대하는 태도는 소극적이다. 이에 반하여 까미유는 좀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다. 왠지 전반적으로 이 둘의 관계에서 리드를 하려는 쪽은 알랭이 아닌 까미유처럼 보여진다. 이러한 모습은 아마도 꼴레뜨에 의한 새로운 시각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꼴레뜨는 까미유를 당차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적극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사이의 성격 차이가 새로 바뀐 계절처럼 확연하게 자리 잡은 것은 유월 말 즈음이었다. 알랭은 그것이 놀라우면서도 때때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융합하기 어려운 그 성격 차이를 그는 한여름에 변덕스레 끼어든 쌀쌀한 봄 날씨를 받아들이듯,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을 떠나오면서, 그 집에 외부에서 온 젊은 여자의 자리를 마련해주기 싫은 마음도 가슴과 함께 담아온 그는, 그런 속내를 별 어려움 없이 감출 수 있었다. - p. 89 - 꼴레뜨는 알랭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위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도대체 알랭은 까미유와 왜 결혼을 한 것일까? '외부에서 온 젊은 여자의 자리를 마련해주기 싫은 마음'으로 대변되는 까미유에 대한 알랭의 태도는 점차 이둘의 관계가 결코 융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는 그러한 마음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까미유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 둘의 관계에 '사아'의 등장은 파국을 예고한다. 알랭이 어렸을 적부터 길러왔던 '사아'는 알랭의 과거의 추억과 옛집의 기억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다. 결혼 이후 새 아파트로 거처를 옮긴 알랭과 헤어진 '사아'는 제대로 먹지 않아서 기력을 상실하였고, 알랭이 '사아'를 까미유와의 보금자리인 아파트로 데려오면서 알랭과 까미유의 관계는 점점 갈등이 고조된다. 마치 암고양이를 자신의 모든 것인 양 대하는 알랭의 태도에 까미유는 끝없는 질투를 느끼고, 결국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고 만다. 알랭이 없는 틈을 타서 '사아'를 창 밖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알랭은 이 일로 인하여 '사아'를 데리고 옛집으로 떠나게 된다. '사아'에 대한 까미유의 질투심을 단순히 치졸한 행위로 봐야 할까? 나는 여기에서 '사아'에 대한 까미유의 행위는 오히려 질투보다는 알랭에 대한 쌓인 감정의 폭발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알랭이 '사아'를 단순히 애완동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의 모든 흔적과 옛집의 추억을을 공유한 존재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까미유는 결혼생활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기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알랭에 대한 불만을 '사아'에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바로 너야, 잔인한 괴물은." "뭐라고?" "그래, 너야. 불행히도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건 장담해. 나는, 그래, 나는 사아를 없애고 싶었어. 나쁜 생각이지. 그렇지만 자신을 방해하는, 혹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있을 때 여자라면, 특히 질투심에 사로잡힌 여자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은 그걸 죽이는 것이지......그런 생각은 정상적이야, 흔히 볼 수 없는 괴물 같은 경우란 바로 너야, 바로....." - p. 174 - 물론 까미유는 자신의 행위가 질투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말하면서 알랭에 대하여 괴물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자신을 그렇게 유도한 인물이 바로 알랭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알랭은 끝내 까미유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까미유에 대하여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암고양이>는 단순한 흐름을 보여주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꼴레뜨가 살아온 길을 떠올려 본다면 작품 곳곳에서 꼴레뜨라는 작가를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알랭은 까미유의 실패한 결혼에서의 무위도식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만의 욕구를 추구하던 남편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암고양이 '사아'는 단순히 남편에게 따뜻한 사랑을 갈구하며 순종적이었던 꼴레르의 모습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또한 까미유는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꼴레뜨가 오히려 사랑에 대하여 적극적이면서도 주도적으로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같다. '자기는 이곳이 나를 얼마나 주눅 들게 하는 지 모를 거야. 자기 집의 이 아름다운 정원 말이야......이곳에 올때마다 나는 마을의 계집아이가 영주의 아들과 놀려고 대저택의 정원에 온 기분이 들어. 그렇지만......' - p. 169 - 항상 알랭의 집에 올때마다 주눅들던 까미유가 마지막에 말한 '그렇지만'과 같이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랭의 집에 당당히 세련된 옷차림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꼴레뜨의 사랑에 대한 변화된 관점과 의지를 다시 한번 형상화한 것처럼 보여진다. 비록 꼴레뜨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왠지 <암고양이>는 그의 결혼과 애정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도대체 왜 알랭과 까미유는 결혼을 하였을까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서로 대립되는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 인물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잠시나마 결합시키기 위한 꼴레뜨의 의도였을까? 어쨌든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암고양이>는 꼴레뜨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관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