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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학자금 대출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대출로 인생의 발목이 잡힌 이들은 많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 갚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게 맞겠다. 취업은 쉽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든든한 배경도 없던 나는 3D 직종에 취업을 했다. 노동조합은커녕 갑과 을이 분명한 직장에 불만이 많았지만 동료들과의 어울림으로 힘겨웠지만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1929년에 발표된 코바야지 타끼지의 『게 가공선』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잠깐 안도했고 우리의 노동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학생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간 절간의 어두컴컴한 불당에서 보았던 ‘지옥 그림’을 떠올리며 그것을 바로 자신이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릴 적 그에게 그런 그림들은 마치 이무기 같은 동물이 늪에서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과 정말 똑같았다. ―그들은 과로 때문에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유리창을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듯 섬뜩한 이 가는 소리나 잠꼬대, 가위눌린 듯한 괴상한 고함 소리가 어두컴컴한 ‘똥통’ 여기저기서 들렸다.’ 57쪽
소설은 131쪽의 짧은 분량으로 내용도 간단하다. 제목 그대로 게 가공선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생생하게 담았다. 문제는 평범한 게 가공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1926년 게 가공선에서 가혹한 노동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은 자본에 의해 잔혹하게 소모되는 노동 현장을 고발한다. 먼 바다에 홀로 선 게 가공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보여준다. 감독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소설 속 표현처럼 그곳은 ‘똥통’이었고 ‘지옥’이었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난한 농부, 학생, 어부, 힘든 광산에서 치여 선택한 광부 등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국가적 산업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혹사한다. 그리하여 회사는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작은 희망은 싹을 틔우기 전에 사라진다. 시체로 변하는 동료를 보면서 인간 이하의 대접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단합한다. 파업을 도모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감독이 불러들인 구축함의 해병 앞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소설은 실패가 아닌 다시 한 번 투쟁의 열의를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앞날의 승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사느냐, 죽느냐 하는 거니까.” “그래, 한 번 더! ” (129쪽)
발표된 지 80년이나 지난 소설이 지닌 의미는 특별하다. 그들의 모습은 현재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깊어만 가는 양극화, 늘어가는 청년 실업, 졸업을 미루는 대학생 등 우리 사회 곳곳의 심각한 문제와 맞닿아 있다. 거울처럼 우리네 삶을 비추는 아픈 소설이다.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자본에 휘둘리며 살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의 아픔을 달래며 응원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의 환청과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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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게 가공선>의 강렬한 첫 문장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 시원한 책이다. 같은 노동자 입장에서 보자면 말이다. 지금의 노동이라는 개념과 당시의 개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가 다르다. 일단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과 연봉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일정하게 돈을 지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게 가공선>에서의 노동자들은 어떠한 기준도 없이 그저 주는대로 받아야만 했다. 누구하나 뭐라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기준'이 없었고 그땐 다 그랬으니까...
게잡이를 떠난 가공선. 그 배 안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적은 돈을 받는지 알면서도 떠나야 했다. 그리곤 혹독한 노동을 바쳐야 했다. 아파도, 힘들어도 감독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노동자에게 폭행을 가했다. 뼈를 짜내는 노동과 강압적인 분위기, 그래도 일은 멈추지 않는다. 체력의 한계에 봉착한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감독에게 피곤함을 호소하지만 덕분에 노동시간만 늘었다. 참고 참은 노동자들은 한가지 고안을 짜낸다. 바로 다 같이 태업을 하는 것이다. 감독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그들은 힘을 아끼며 천천~히 일을 하며 반항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단결하여 파업을 시도한다. 결국 파업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들은 실패를 경험으로 부당함을 호소하는 방식을 배운 것이다.
<게 가공선>은 131페이지다. 커피 한잔을 느긋하게 마신다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예나 지금이나 파업하는 형태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적은 임금, 노동 착취, 비인격적 대우 등 점차 심해지며 불만이 쌓이다 이내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호소하는 것. 나도 게 가공선의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다. 같은 노동자이며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다. 그런데 나도 그들처럼 부당한 대우에 항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가끔 TV나 잡지에서 보던 회사 내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자신의 권리를 찾아달라 요구하는 사람과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사람처럼, 나 역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장담은 못하겠지만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은 혹시 모를 보복이나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진 못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도 세상이 아직은 <게 가공선>이 출판 금지 당한 1930년대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뭉쳐야 한다. 부당하면 부당하다 외치고 싫으면 싫다고 외칠 수 있는 권리.....하지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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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일본에서 실제 발생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읽으며 오래 전에 본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년)를 자꾸 떠올렸다. 배우 조재현이 주인공으로 나와 새우잡이 배의 지옥 같은 노동을 연기했는데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영화였다. 일명 ‘멍텅구리배’로 부르는 새우잡이 배는 자체 동력이 없어서 동력선에게 이끌려 바다 한복판으로 가서 닻을 내리고 새우를 잡는다. 그러다가 태풍을 만나 선원이 한꺼번에 희생되기도 했다. 차라리 태풍에 의한 희생은 행복하다. 새우를 잡는 일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우잡이 배의 노동 조건은 게 가공선의 노동 조건과 다르지 않다. 1920년대의 일본 게 가공선, 1990년대의 한국 새우잡이 배, 그리고 지금의 우리 현실이 다르지 않다.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소설의 첫 문장으로 게 가공선을 지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공간 배경은 훗까이도오 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하꼬다떼이다. 토오호꾸 지방 농민이나 훗까이도오의 광부, 하꼬다떼 빈민굴 소년들, 하나같이 극단적인 빈곤에 시달려온 이들이 게 가공선에 탄다. 하꼬다떼에서 출항하는 게 가공선은 넉 달 동안 깜찻까 바다에서 게를 잡는다. 어부들은 어두컴컴하고 돼지우리같이 속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한 냄새가 나는 배 밑바닥의 똥통 같은 널판에서 자고 깬다. 강도 높은 노동에 반해 식사는 조악하기 그지없고 목욕은 한 달에 두 번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수십 마리 이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고 병에라도 걸려 죽으면 차가운 바다에 던져진다. 인간 육체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그것은 당사자보다 감독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일이 끝나고 통나무처럼 널판에 나동그라질 때면 ‘자기도 모르게’ 끙끙 신음 소리를 냈다. 한 학생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간 절간의 어두컴컴한 불당에서 보았던 ‘지옥 그림’을 떠올리며 그것을 바로 자신이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릴 적 그에게 그런 그림들은 마치 이무기 같은 동물이 늪에서 꿈틀꿈틀 기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과 정말 똑같았다. -그들은 과로 때문에 오히려 잠들지 못했다. 한밤중에 느닷없이 유리창을 마구잡이로 긁어대는 듯 섬뜩한 이 가는 소리나 잠꼬대, 가위눌린 듯한 괴상한 고함 소리가 어두컴컴한 ‘똥통’ 여기저기서 들렸다. (57쪽) 게 가공선의 감독 아사까와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지배한다. 일하는 자들끼리 경쟁을 시켜 이기면 상을, 지면 달군 쇠막대기를 들이대고, 때로는 권총으로 위협한다. 죽지 않기 위해 일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노동자들. 이들은 회사에서 세심하게 선발한 사람들이다. 극빈의 사람들에다 노동조합 따위에 관심이 없는,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이 미조직 노동자, 구제불능의 술고래 노동자들도 노예 같은 노동을 하며 마침내 자각하여 단결한다. 그러고는 태업을 하고 나중에는 파업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긴 싸움 같았던 투쟁은 구축함에서 온 해병들의 총검 앞에 무산되고 주동자들은 끌려간다. 하지만 한번 떨쳐 일어섰던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투쟁하기 위해 일어서리라 선언한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매일같이 눈을 뜨면 짭조롬한 바닷물이 입안 가득 찰랑인다 막막하기만 한 수평선, 목조르는 올가미가 되어 조여오고 바다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지 꾸려갈 터전은 못 된다 정박당한 멍텅구리배에서의 삶을 사는 가슴마다에는 융기솟는 분노가 일지만 다시금 무덤이다 층층으로 얹히는 울분을 술안주로나 씹으며 하루분의 노동에 매달리는 군상은 또다른 분노를 일으킨다 살아가기 위하여 비굴을 감내해야 하는가 그물에 매달려오는 새우, 톡 톡 튀는 몸부림에는 반짝이는 햇살이 묻어 있다 땀에 번들거리는 팔뚝마저 물어 뜯어버리고픈 감옥의 일상에서 이따금 신신한 소문이 소용돌이치지만 소용닿지 않는다 굴욕의 삶은 스스로 떨쳐야 하느니 버팅겨 일어서야 한다 비록 억눌려 짜부라든 인생일망정 돛대에 앉았다가 포르릉 제 자리 찾아가는 자유가 없을까 시퍼렇게 날을 벼린다 닻내린 멍텅구리배를 잘라야 하느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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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공선>은 먼 바다 위를 떠도는 노예선 같은 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29년 일본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돼지우리와 같은 환경과 폭력이 난무하는 비참한 노동현장에서 벌어진 투쟁과 반란을 담았다.
이 작품은 먼 바다를 떠도는 거대한 배를 무대로 자본주의의 착취 구조를 드러내고 노동자의 자각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그려내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읽힌 대표작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준을 사상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일본 근대문학에도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코다테 항구에 광부, 농민, 빈민굴 소년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배를 타고 넉 달 동안 캄차카 바다에서 게를 잡는다. 그 배의 상황은 끔찍하다. 숙소는 악취가 들끓어서 똥통이라 불렸고 이가 들끓었다. 작업을 게을리하는 자는 “쇠막대기를 시뻘겋게 달구어서 몸에 갖다 대겠다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폭풍이 몰아쳐도 게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야 했다.
어선은 부정부패에 힘입어 ‘항해선’이 아니라 ‘공장선’이 되어 항해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선장과 선박회사는 공무원과 해군을 극진히 대접한다. 일하다 병들어 죽은 사람은 바다에 던져졌다. 그곳에 모인 거의 모든 이들은 평생 늘 뭔가 해 왔다. 국토 개척, 관개 공사, 철도 부설 등이었다. 그런데도 극도로 가난했다. 홋카이도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다코’(문어)라고 불렀다. 정부도 군대도 그들이 편은 아니었다.
어부들은 이런 말을 내뱉는다. “문어는 살기 위해선 자기 팔다리까지 먹어치운다지, 이것이야말로 우리와 닮지 않았나, 어쨌든 죽고 싶지 않아. 캄차카에서 죽고 싶지 않아…아니 이미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게 가공선>을 발표했을 당시, 작가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면서 지하조직으로 옮겨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집필과 헌신적 활동을 계속하다 1933년 2월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사망한다. 경찰 당국은 사인을 정확히 규명하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그의 작품들을 금서 취급하는 등 사후에도 철저하게 박해받았다. 최근 경제위기로 인해 노동 현실이 척박해지면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게 가공선>이 다시 인기를 끌며 새로이 주목받았다.
<게 가공선>은 발표된 지 80여년이 지난 후, 장기불황과 금융위기로 고통을 겪던 일본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으며 30만권이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일본공산당에 1만여명이 새로 입당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공산당 입당이 증가한 것은, 이 책의 저자 고바야시 다키지가 군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융합해 내달리던 시대에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착취 속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을 향해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살해당하고 있다”고 외치다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라 한다.
2012년 창비가 처음 작품을 번역해 출판했을 때, 경향신문은 "지금 일본 사회에선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인 근로자들이 '게 가공선이네'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요절한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의 대표작 <게 가공선>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했다.
‘게 가공선’의 이미지는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의 젊은세대들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헬조선'과 비슷한 느낌이다. 세월호 참사와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스펙 경쟁에 치이는 젊은이의 처지는 <게 가공선>이 그린 지옥 같은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고공농성장과 시멘트바닥, 광화문 세월호 천막과 병상에 누워계신 백남기 농민이 번갈아가며 떠올랐다.
[ 2016년 8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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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가 다가온다. 새삼 맨 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기 힘겨워진다. 뉘에게 꼴뚜기질을 해야 하는지도, 뉘에게 비나리 해야 하는지도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누굴 붙잡고 달구쳐야 상명(喪明)을 겪은 아비와 어미를 달랠 수 있을까. 혼돈, 제강의 세상에서 이미 염량을 잃어버린 지,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하긴 나에게 애초 그런 염량 따위가 가당키나 했었나. 그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남은 이들의 부은 눈가와 서럽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지금껏 그 얼마나 보듬어 주었기에, 잊어버리자, 흘려보내자는 무참한 이야기가 나올까. “세월호를 시간의 흐름 속에 침몰시켜버리면,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차라리 애원에 가깝다. 여전히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을 그 누가 억지로 잊으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자식을,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슬픔과 한을 달래고 어루만져, 진실과 해원의 너머로 모시는 월천꾼이 되기보다는 무참한 소리장도, 망종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또 이러한 아둔패기, 옹춘마니들에게 호된 꾸짖음을 주어야 할 지식인, 언론인 중 일부는 단지 책상물림이 되어 오히려 권력의 따리꾼이 되었다. 유가족들에게 몽니마저 부렸다. 무참한 세월이었다. 거기에 지도자의 메꿎은 행동은 유가족들의, 수많은 ‘우리’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부친처럼 오래 장기집권을 했던 외국 지도자의 장례식에는 참석하면서도, 제주의 피맺힌 4월은 외면했고, 이제 아이들이 떠난 지 한 해가 되어가는 지금, 그 어떤 ‘중대한’ 업무를 이유로 나라를 떠난다고 ‘통보’한다. 그의 매정한 모습이 이 땅의 수많은 부모, 형제들에게는 범강장달이보다 더한 무서움과 분노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이 잔인하다 못해 무참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그 ‘세월’을 감당치 못해 어리둥절하다가, 어리석게도 코바야시 타끼지의 오랜 소설을 집어 들었다. 아둔한 놈이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도 분명 있었다. 1920년대 제국주의의 피바람 속에, 자본이라는 강력한 괴물 앞에, 짐승보다 못한 노동과 착취에 내몰려 죽어나가야 했던 일본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정당한, 비장한 분노가, 비단 과거의 일이, 일본만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포스러운 자본의 논리 앞에 다름 아닌 세월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식이, 도대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려달라는 부모 앞에, 그리고 아이들의 소박한 밥그릇을 빼앗지 말라는 부모 앞에, 서슬 퍼런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게 가공선>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불순함’이 가득한 작품으로 비칠지 모른다. 물론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게 가공선>에 사회주의의, 공산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것도 당연할 테다. 하지만 1920년대와 2015년을 아우르는 괴물과도 같은 자본의 논리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주눅들 수는 없다.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생명이 가라앉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똑똑하게 되물어야 한다. 과연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괴물스런 자본 앞에 무기력했던 국가가, 권력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세월호 침몰 후 한 달 뒤, 정부는 사고의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증축, 화물의 과적, 컨테이너 고박 상태의 불량 등. 이것들은 껍데기만 다 다를 뿐 오직 하나의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돈이다. 그 돈 때문에, 아이들은 생명을 잃어야 했다. 일본에서 수입된 세월호는, 일본에서라면 벌써 오래 전 폐기되었어야 했다. 이런 노후한 배가 한국에서 버젓이 운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명박 정부가 연안 여객선의 연령을 30년까지 연장하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배는 그 후 증개축이 이루어진다. 화물과 승객을 더 많이 싣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CEO의 ‘사진’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까지 따로 만들었다. 이 역시 돈이었다. 정부는 이런 배에 영업 승인을 내주었다. 컨테이너에 화물들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점검했어야 했다. 하지만 과적과 잘못된 고박에도 불구하고 출항 허가는 떨어졌다. 현장 점검 없이 서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현장 안전 점검의 축소는 현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창조 경제를 이루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이러한 것들은 정부가 설명한 사고의 원인이다. 사고 이후 구조 과정의 참혹함, 정부의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지만 전부 차치하고, 정부가 말한 사고의 원인만 놓고 보아도, 세월호는 오랜 시간 오직 ‘돈’이라는 논리로 누적된 비상식과 비정(非情)으로 인해 가라앉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본과 그 자본을 제어하지 못한 정부가 만들어낸 사고. 감히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세상은, 아마도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자본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게 가공선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세월호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국가 권력은 무력했고, 심지어 협조했다. 이미 세상은 거대한 게 가공선, 거대한 세월호가 아닌가. <게 가공선>은 1926년 북양어업을 떠난 게 가공선 하꾸아이마루에서 노동자가 배의 윈치에 매달린 채 사망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 졌다. 게를 잡아 배 안에서 통조림으로 바로 만들어내는 가공선. 항해법도, 공장법도 적용되지 않는 무법지대. 자본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노동자들에겐 지옥에 다름 아니었을 배.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막일꾼, 가난한 농민과 어부, 학생 등 국가적 산업이라는 허울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노동에 내몰린 이들은, 결국 “죽지 않기 위해” 단결하게 되고, 파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구축함, 즉 군대라는 이름의 국가는 이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탄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일어선다. 먼지가 쌓여있던,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다시금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얻고, 많은 젊은이들이 <게 가공선>을 탐독했다. 어쩜 그들이 처한 바로 지금의 상황이 또 다른 게 가공선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본다. 그렇담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거대한 세월호에 갇혀, 거대한 게 가공선에 갇혀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떠나간 아이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어, 어른이 되어 맞이할 용기도 능력도 여전히 크게 부족하다. 일 년이란 시간이 다가온다. 두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만들어진 지옥, 이 아비규환의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어떻게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 멈춤 없이 되묻고, 또 다시 행동해야 함은 변하지 않았다. 누가 지옥을 만들어냈는지, 누가 이 지옥을 끝장낼 수 있는지, 그 답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건방진 위로조차 닿지 않음을 잘 알지만, 아이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미와 아비들에게, 가족들을 여전히 기다리는 남겨진 이들에게, 부끄러운 목소리로, 치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 전한다. 그리고 위로 드린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의 몸짓도 함께. 그리고 다시. 떠난 이들이여, 부디 영면하시라. 잊지 않음을…. ※ 이 글은 이충진의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유승진의 <포천>에 많은 빚을 지었음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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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타끼지의 프롤레타리아적 작품은 게 가공선에서 벌어지는 노동력 착취 현장을 1930년대 배경으로 펼쳐보인다. 살해당하고 싶지 않으면 오라는 격문으로 선동에도 적극적이었던 그는 결국 체포되어 고문사한다. 자본주의가 필요하던 시기에 자본주의를 흔들다 결국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대놓고 횡포질이었다. 노동인권은 안중에도 없고, 아동 노동 착취는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과거에는 쉽게 발생했다. 인권에 대해, 열악한 노동 현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아주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고, 열린 결말로 끝을 맺지만 상당히 희망적이다. 책의 부록과 작품해설은 작품에 빛을 보태는 요소다. 일단 게를 소재로 삼은 점은 독특하다. 언제나 배 위에서의 인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고 있었는데, 이 점을 제대로 짚어낸 듯하다. 낚시를 가도 이성과 함께 갈 수가 없는 것이 도저히 선박 위에서 안정을 장담할 수가 없다. 사후 처리만 가능할 뿐이다. 중간에 뛰어내려도 위험하고 이렇게 저렇게 불안해서 낚싯배를 타는 경우는 남성끼리만 동행한다. 언제쯤 대륙과 동떨어진 곳에서도 인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지낼 수 있을까. 게 가공선은 그런 점에서 나에게 와닿는 구석이 컸다. 러시아 제국을 만나 노동 인권에 눈을 뜬 게 가공선 노동자들. 하지만 그들을 일깨워준 러시아 제국에 의해 다시 과거의 현실로 돌아가는 역설적인 사태. 이는 과거의 노동 현장이었지만,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만연하고 있다. 굳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어도 이런 일은 개선할 수 있다. 바로 관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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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1929년 일본의 게 가공선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노예와 같은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부를 늘리는 사업에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다는데에 일종의 자부심을 갖기도 했으며, 어쩌다 지나가는 제국군함의 자국국기만 보아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조악한 식사와 비참한 위생환경, 과도한 노동과 도를 넘어선 폭력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가 생기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댓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목숨조차도 '게'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던중 폭풍우 때문에 조난당했던 일부 노동자들이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틀에 도전할 방법을 배운다. 일하는 사람은 위대하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뻐기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일하는 사람은 다수이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큰소리치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정작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싸운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단결한다. "살해당하고 싶지 않은 자는 오라!" 라고 외치며. 즉, 이 책은 노동자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궐기문과 같은 단편 소설이다. 때문에 문학적 성과보다는 대중의 각성을 위해 씌여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작가 코바야시 타끼지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대표적 작가이며, 일본 공산당원 이었다. 일본은 1929년 전국적으로 공산당원을 일제 검거하여 339명을 기소하였고, 코바야시 타까지는 1933년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것은 자본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때문에 1929년 게 가공선의 비참한 노동환경은 신자본주의시대라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의 뒷편 부록에는 일본의 반빈곤운동가와 원로 평론가의 글을 실어 1929년의 게 가공선이 어떻게 오늘날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경기침체로 프리터니 니트족이니 히키코모리가 등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잊혀졌던 코바야시 타끼지의 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의 결말은 태업을 주도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교섭에 나섰던 몇몇 선각자들이 자신편이라고 믿었던 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후 노동자 각자들이 각성하고 다시한번 떨치고 일어나는 희망적인 내용이지만, 배신자 단 한 명의 배반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현실의 노동운동은 글쎄...?
게 가공선의 노동환경은 비단 1920년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1960~80년대의 구로공단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다 잘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 현재 비정규직들의 절규에도 그 처참함은 묻어나고 있으며, 이는 비단 일본이나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자본이 절대권력이 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일이건만 다중은 애써 그를 모른체 하며, 나만은 더 나은 노동환경을 보장받고자 게 가공선의 그들이 담배 한대에 양심을 팔았던 것처럼 눈을 감곤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시 이기적 동물이라고 얼버무리기엔 너무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공산당이라고 하면 일단 빨갱이로 몰아치고, 마치 나라를 망칠 악마의 종자라도 되는 양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코바야시 타끼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읽힌다니 세상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이 맞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다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이 아니라 내 눈앞에 이익인 것이다. 노동자이면서도 감독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연대해 본 일 없고, 궐기해 본 일은 더더욱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더 쉬운 일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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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의 8번째로 소개된 이 책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자인 코바야시 타끼지(창비도 역시 열린책들과 같은 번역 방식인듯 함.)의 작품으로서 1926년 북양어업 게 가공선에서 실제 발생한 노동자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쓴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활발히 참여하였으며, 1933년 30세의 나이로 공산주의 탄압에 의한 가혹한 고문으로 사망한 점과 당시 일본에서 아나키스트와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한 심한 탄압이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면 이해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 작품이기에 작품 전반적으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듯한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1926년 추운 겨울의 어느 항구, 여기에서 게 가공선에서 일할 잡부들이 모여든다. 이들은 홋까이도에서 좀더 북쪽으로 나아가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 근처 혹은 사할린 지역에서 게를 잡기 위한 원양어선에서 일을 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커다란 게 가공선(가공선에서는 여러개의 작은 배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 작은 배들에서 잡은 게들을 가공선에서 바로 가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에 수백명의 잡부와 선원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이 탑승하여 수개월간 추운 날씨와 거센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게를 잡으러 출항한다. 한겨울에 일감이 없어서 탑승한 농부들, 학비를 벌기 위하여 직업 소개소에 이끌려 온 학생들,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차라리 업종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배에 탑승한 광부들. 각기 다양한 출신들의 노동자들이지만, 공통적으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온 사연을 가지고 게 가공선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똥통'이라 불리우는 노동자들의 숙소는 게 가공선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혹독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듯 형편이 없었다.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고, 수십명이 기거를 하는데도 청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온통 이투성이인 숙소.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각 감독관들은 서로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하여 잡부들을 심하게 단속하면서 일을 시킨다. 잡부들은 자신들이 몇달간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을 쓰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지갑에 돈이 없으며, 결국 돈은 자본가가 가져간다고 분개하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잡부들의 불만은 게를 잡아서 식량을 확보하고 수출을 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길이라는 감독관의 일장 연설로 사그러든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세뇌된 잡부들은 비록 불만이 있을지언정 크게 표출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던중 카와사끼선(게 가공선에 장착된 작은 어선) 하나가 풍랑에 휩쓸려 실종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건이 발생한다. 다행히 이 카와사끼선은 조난을 당하여 해안가에 밀려갔을 때, 러시아인들에 의하여 구조가 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가 적대국이며, 특히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하였기에 적대시하도록 교육받았지만, 러시아 주민들은 오히려 조난당한 일본 어부들을 도와준다. 여기에서 일본 어부들은 러시아인 사이에 있던 중국인의 통역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물론 어부들의 교육 수준과 러시아인과의 의사 소통 수준을 감안하면 깊은 의미의 설명이 아니라 간략하게 이루어진다. " 부자, 여러분을 이거한다.(목 조르는 시늉을 한다.) 부자 점점 더 커진다.(배가 불룩해지는 흉내.) 여러분 아무리 해도 안돼, 가난뱅이 된다. - 알아?- 일본 나라, 안돼. 일하는 사람, 이거.(얼굴을 찡그려 환자 같은 모습.) 일 안하는 사람, 이거, 에헴, 에헴.(뻐기며 걸어 보인다.)" - p.48 " 일본, 아직, 아직 안돼. 일하는 사람, 이거.(허리를 굽히고 웅크린 모습을 보인다.)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뻐기며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시늉.) 그거, 모두 안돼! - 일하는 사람, 이거.(무서운 표정으로 일어선다. 달려드는 시늉,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짓밟는 시늉.) 일하지 않는 사람, 이거.(도망치는 시늉.) - 일본, 다 일하는 사람, 좋은 나라. - 프롤레타리아의 나라! - 알아? " - p.49 이런 식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설명을 들은 노동자들은 숙소에서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며, 노동자들은 그동안 적화라고 하면서 안좋게 알고 있었던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감독관은 자신의 실적(게 어획량)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편을 갈라 상과 벌을 준다. 상이라야 별게 없었으나, 벌은 가혹했다. 경쟁에서 진 쪽에는 달궈진 쇠 몽둥이를 살갗 가까이 들이대는 것과 같은 육체적인 고통을 주저없이 가하였다. 급기야 한 노동자가 도망을 가서 배 한구석에 숨어 있다가 감독관에게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한 뒤에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조금씩 저항을 하기 시작한다. 학생은 본토에서 있었던 노동 운동을 본따서 나름의 조직을 구성하여 감독에게 대항을 한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바로 태업이었다. 그러자, 감독관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가혹한 통제로 인하여 노동자들을 수족처럼 부리다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대항을 하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던 것이었다. 거기에 학생과 노동자들은 대표자를 뽑아서 그들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감독관을 몰아 붙인다. 그러나, 갑자기 게 가공선에 다가온 일본의 구축함. 노동자들은 구축함의 해병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만, 이들은 감독관 일행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면서 주동자들을 구축함으로 끌고 간다. 철썩같이 자신들 편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은 일본 해군의 이러한 행위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행위에 소극적이던 사람들도 다시 한번 태업을 모의한다. 이제 노동자들에게는 태업으로 인한 의견 관철은 단순한 노동 환경 개선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였기에 다시 한번 태업을 하고, 결국 성공을 하게 된다.(책에서 결국 성공을 하는 장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성공하였다라고 결말과 함께 이후 귀항해서의 결과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줄거리는 이처럼 간략하고 실제 분량도 많지 않다. 책의 전체 분량 중에서 실제 <게 가공선>의 작품의 분량은 131쪽이 전부이다. 나머지 분량은 일본의 두명의 작가를 통하여 <게 가공선>에 대한 해설을 할애하고 있다. 한명은 프리터족 이력이 있는 작가이며, 다른 한 사람은 기성 세대라 할 수 있는 작가. 이 둘의 시선을 통하여 <게 가공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들의 해설을 포함하고 있지만, 차라리 코바야시 타끼지의 다른 작품을 같이 수록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거의 책의 절반을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채운 점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라는 정치적인 개념을 포함하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문학 작품이라는 장르를 생각해본다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야하지 않았을까라고 두고두고 아쉬운 감정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게 가공선>을 통하여 접하면서 왜 이 작품이 2008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도 되고 공감이 되었다. 당시 일본도 사회적으로 프리터족들이 성횡하면서 비정규직의 대규모 양산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고, 마치 70여년 전에 이를 예측이라도 하듯이 쓴 <게 가공선>은 인기를 끌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된다. 일본에 무언가 모를 거부감을 가진 우리나라지만, 우리의 모습도 역시 일본의 모습을 많이 따라가는 형상인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이 작품에 많은 공감이 갈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장 이 작품에 등장한 학비를 벌기 위하여 게 가공선을 탄 학생들의 모습은 비싼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러개의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공부를 하거나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공부를 하는 우리 대학생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 밖에 어린 자식들도 공장에 보내고 자신도 게 가공선에 탑승한 농부나 탄광부들이 겪는 고초는 많이 좋아졌다고하지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로자의 고통과 틀릴 것이 없다. 우리 사회도 코바야시 타끼지의 거대한 '게 가공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본다. 책의 곳곳에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이 몸짓발짓을 하여 러시아인들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수받는 장면이나 동료의 죽음과 연행에서 점점 적극적으로 바뀌어가는 모습들도 나름 시사하는 바가 커보인다. 우리에게서 금기시되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상 탄압을 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에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이 작품을 통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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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탈리아' 자본주의 사회의 한 계급.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의무도 아무것도 없고 다만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뿐이다. 가진 것은 각자의 몸뿐이며,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먹고 살 방법이 없는 '무산계급'집단이다. 사회주의 학자 마르크스는 이 프롤레탈리아 계급이 사회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말로 계급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난 후부터 지금의 20세기까지 '혁명'하면 이 계급을 분리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작가 코바야시 타끼지도 제국주의 시절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운동권 소설가였고, 그의 대표작인 『게 가공선』에도 사회주의 이념이 많이 녹아있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은 그저 '없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노력이다. 이데올로기니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를 따져 역할을 한정시키기 전에, 우선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고 사람으로 살 권리는 되찾기 위한 움직이다. 이념의 여부를 떠나 혁명은 인간으로서 너무 자연스럽고 본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게 가공선』의 사람들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전 세계가 종주국 아니면 식민지로 나뉘던 2차 세계대전 시절,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어느 곳보다 몰입한 나라였다. 하지만 일본 국민의 모두가 전쟁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니었고, 그 안에서도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있었다. 그 중에서도 '훗카이도'는 조선이나 중국같이 일본 내지에 존재하는 식민지였다. 여름이면 훗카이도의 각 항구에서 국가의 사명을 위해 단단히 준비를 마친 게 가공선이 먼 바다로 출항했다. 게 가공선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몰렸다. 농사를 짓던 시골 농부, 탄광 노동자, 목수, 학생, 게다가 잡부라는 이름으로 노리개가 될 여자아이들. 다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먹고 살기 위해서 그 냄새나고 더러운 배에 탔다는 것. 한 번 출항하여 내륙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들을 견뎌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이 일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이야'마음을 먹었지만 여름이 되면 하는 수 없이 다시 훗카이도의 게 가공선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배를 탄 첫 날부터 고통은 시작되었다. 차라리 손과 발을 잘라내고 싶을 만큼 살을 에는 바다의 추위 속에서 종일 게를 올리고 다듬는다. 매 끼니에는 소여물로나 줄 식사로 허기를 달랜다. 각기병, 변비, 동상으로 몸이 상한 환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었다. 하지만 회사와 감독에게 있어서 그들의 목숨은 '까짓 몇 명 죽어도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다. 그런데, 지옥 같은 그곳에서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거대한 회사의 부를 축적해 주는 것은 선장도 감독도 아닌 자신들의 희생이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서서히 '살해'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정말로 더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한 어느 날, 누군가 태업을 선언했고 나머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했다. 노동자들에게 피도 눈물도 없이 지독했던 감독도 쩔쩔매기만 할 뿐이었다. 그 일로 인해 완전히 각성한 가공선의 노동자들은 조금 더 체계적으로 뭉쳐 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비록 회사로부터 이익을 챙기던 구축함의 제지로 파업은 무산되지만 그들은 오히려 비온 뒤에 굳어진 땅처럼 더욱 단단해져 '다시 한 번'떨치고 일어나기로 용기를 낸다. 그들의 시도가 정말로 성공했는지는 모른다. 결과를 눈앞에 보여줄 결말이 책 속에는 없었다. 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파업 성공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게 가공선』이 현대에서 재조명되며 많은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도 절대 비껴가지 못하고 있는 주제라는 것을 귀띔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