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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부담스럽다. 섬찟하고 오싹하고 마력적인 가벼운 이야기가 판치는 시대에 무거울 것이 뻔한 지루한 이야기에 누가 선뜻 귀를 기울이겠는가. 처음엔 이 책을 추천한 독서모임 회원이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가 안톤 체호프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가 지루한 이야기를 말해야 했다면 거기엔 지루함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결국 비호감이었던 <지루한 이야기>가 나를 급격한 호기심으로 끌어당기며 읽게 됐다.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이야기의 주인공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는 여러 모로 작가 체호프의 삶과 정신적 고뇌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그동안 읽은 그의 단편소설들 중에 <귀여운 여인>, <약혼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에서 보여준 여성을 향한 따뜻한 그의 시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루한 이야기>는 내게 관심이 가는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62세의 노교수 니콜라이는 의과대학 교수로서 평생을 고결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건강문제 외에도 가족과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 인해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가지와 같은 인생을 산다. 이런 그에게 유일하게 공감하고 동정하는 사람이 수양딸 까쨔다. 까쨔가 일곱 살 때 니콜라이의 동료 교수였던 까쨔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과 함께 후견인이 돼 달라고 니콜라이에게 딸을 부탁하고 죽었다.
20대 초반 학교를 마치고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희망에 들떠 멀리 떠났던 까쨔는 남자 배우와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았다가 잃었고, 연극계에서도 실패하고 돌아와 따로 집을 얻어 우울하게 살고 있다. 니콜라이는 말벗이 되어주는 그녀를 종종 방문하는데 그녀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그중에서도 니콜라이의 아내 바랴와 딸 리자는 그녀를 증오하고 혐오하기까지 한다. 이에 질세라 까쨔 역시 그녀들을 '허접한 인간들'이라며 경멸하며 지낸다. 까쨔가 연극계에서 몸을 망치고 결국 연극을 버리게 된 이 대목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불고 있는 연극, 영화계의 '미투 운동'을 연상시킨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 도사린 성차별이 예술계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질 뿐 아니라 어쩌면 그들만의 무대 뒤에서 여배우는 더욱 잔혹하게 짓밟힌다는 점에서 오늘의 성차별과 이어지고 있다. 또한 바랴와 리자처럼 남성중심 사회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물든 여성의 의식이 뒤틀린 점은 시집살이를 호되게 겪은 시어머니일수록 며느리에게 호되게 대하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현실과도 맞물린다.
남자들은 소위 몸을 버린 까쨔를 증오하거나 혐오하기는커녕 오히려 연민의 정을 갖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데 반해 여성들이 까쨔를 증오하는 이유는 남자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높거나 순결해서가 아니라 교육의 부족 때문이라고 니콜라이는 생각한다. 증오와 혐오의 감정은 연민이나 동정보다 낮은 차원의 정서로 인격 수준을 고양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보는 그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실제로 의료봉사에 투철한 의사이기도 했던 체호프는 매춘 여성과 아동을 위한 교육기관에 후원하였다고 한다.
음악학교 학생인 딸 리자의 약혼자가 정말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맞는지 확인해보라는 아내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니콜라이는 하리꼬프 지방으로 내려와 낡은 호텔에 머무는 동안에도 불면증으로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까쨔는 니콜라이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지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다 결국 크리미아로 떠난다고 알린다. 두 달쯤 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니콜라이는 까쨔가 자신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것을 서운해 하며 중얼거린다. '잘 가거라, 나의 보석이여!'
그럼 까쨔가 왜 니콜라이의 보석일까? 마지막 대목에서 마주치는 질문이다. 의과대학 교수이긴 하지만 책을 쓰거나 개업을 하지 않아 수입이 별볼일 없는 자신에게서 돈만 뜯어가는 가족들과 달리 까쨔는 니콜라이에게 공감과 위로를 보내는 친구이자 젊은 여성의 몸으로 남성중심 사회에서 자신의 인생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대견한 여성이다. 까쨔는 오늘날보다 더 심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난무하던 시대에 주체적으로 일어서는 바람직한 여성상이었을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며 의존해 사는 아내와 딸보다 니콜라이에게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자 기특한 (수양)딸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뭇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까쨔 같은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을 가져오는 데 일조한 그 시대의 주춧돌이었으니 보석이라는 비유가 과장되지 않은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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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안톤 체호프의 중편소설 <지루한 이야기>를 읽고 토론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함께 실린 단편소설 <검은 옷의 수도사>도 읽게 되었다. 처음엔 뒤에 실린 작품 해설을 살짝 보고 어느 정신 질환자의 이야기라는 걸 알고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정신분석과 심리학에 대한 그동안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은 나와 거리가 먼 병이라는 편견이 이해 불가능성의 두려움과 함께 작용한 거다. 하지만 지난번 읽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떠올려보면 정신질환자의 내면 세계가 정상인의 내면과 그다지 멀리 떨어진 지점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매일 밤 이해할 수 없는 꿈을 통해 정신질환자를 집어삼키는 무의식과 접촉하고 있으니 말이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어린 시절 부모가 죽고 과수원의 농장 주인 예고르 쎄묘니치에게 입양돼 성장한 안드레이 바실리치 꼬브린 박사가 신경쇠약에 걸려 휴양차 시골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과수원 사업에 남다른 열정으로 부를 일군 나이 든 예고르는 멋진 엘리트로 장성한 꼬브린을 환영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수원을 물려받을 유일한 딸 땨냐와 꼬브린이 결혼하길 바란다. 예민하고 상냥한 성격의 따냐에게 사랑을 느낀 꼬브린은 마침내 따냐에게 청혼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그즈음 그의 머릿속엔 하나의 전설이 찾아오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의 환영에 관한 전설이다.
천 년 전쯤 검은 옷의 법의를 입은 수도사가 시리아나 아라비아의 어느 광야를 걷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호수에서 물 위를 천천히 걷는 수도사의 모습을 어부들이 보았다고 한다. 이제 이 전설의 수도사는 연이어 환영을 만들어내며 아프리카, 에스빠냐, 인도, 극동 시베리아 등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의 대기권을 떠나 떠돌던 수도사의 환영이 광야를 거닐던 때로부터 천 년이 지난 뒤 다시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검은 옷의 수도사 환영을 오늘 당장에라도 사람들이 볼 수 있을 거라고 꼬브린은 따냐에게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 꼬브린은 직접 검은 옷의 수도사의 환영을 보게 된다.
이때 호밀밭에 물결이 일렁이더니 가벼운 저녁 바람이 꼬브린의 맨머리를 부드럽게 스쳐갔다. 잠시 후 다시 인 바람은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세게 불었다. 호밀밭이 솨악 소리를 내며 물결치고 뒤편에서는 소나무 숲이 공허하게 울부짖었다. 꼬브린은 깜짝 놀라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지평선에 돌풍 같기도 하고 회오리바람 같기도 한 거대한 검은 기둥이 땅에서 하늘까지 솟구쳐올랐다. ... 기둥은 바로 이곳, 꼬브린을 향해 정면으로 몰려오고 있었는데, 가까이 오면 올수록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형체가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꼬브린은 몰려오는 검은 기둥에게 길을 내주려고 호밀밭 쪽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 검은 법의를 입은 수도사가 흰 수염과 검은 눈썹을 휘날리며 두 팔을 십자가처럼 가슴에 포갠 채 휘익 지나가는 것 아닌가 ...
그 후 꼬브린에게 다시 나타난 검은 옷의 수도사 환영은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교활한,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이다. 수도사는 자신을 '유령'이라고 말하며 "나는 자네의 상상 속에 존재해. 그런데 자네의 상상이란 자연의 일부야. 그러니까 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셈"이라고 말한다. 그는 꼬브린에게 "자네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이라 불려 마땅한 소수 중의 한 사람일세. 자네는 영원한 진실에 봉사하게 되어 있어. 자네의 생각, 의도, 놀라운 학식, 그리고 자네의 삶 전체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것, 즉 영원한 것에 바쳐졌어. ..."라고 한다. 수도사에 대한 환각이 끝나고 꼬브린은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이 된다. 수도사의 몇 마디 말이 그의 전 존재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꼬브린에게 종종 나타나는 수도사의 환영은 식사 중에도, 한밤 중에도 나타나 꼬브린과 대화한다. 마침내 따냐가 한밤 중에 깨어나 허공을 향해 혼자 말하고 있는 꼬브린을 발견하고 경악하며 아버지와 함께 의사에게 데려가면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불안정해지며 불행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의 결말은 슬프지만 전체 이야기는 검은 옷의 수도사의 환영으로 인해 매우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단편소설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굳이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으로 설명해야 할까라는 반감이 들 수 있지만 연이어 나타나는 수도사의 환영과 관련해 최근 읽은 칼 융의 <분석 심리학> '3장 루머의 심리학'에 나오는 한 부분이 정신질환자의 환영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본다.
인물이 복제되거나 증식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인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말하자면 축적된 리비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컬트와 신화학에서, 이 같은 복제의 의미는 아주 두드러진다. 정신분열증에서, 인격의 증식은 주로 리비도가 축적되고 있다는 뜻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증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틀림없이 환자가 전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고 있는 이 분열은 일종의 분석적 비하이며, 이 비하의 목적은 지나치게 폭력적인 인상을 자극하지 않도록 막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인격 증식의 최종적 의미는 그 인물의 일부 속성을 살아 있는 어떤 형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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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거둔 비범한 성취와 명예로 세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과학자이자 의사인 주인공도 노화와 질병,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죽음을 앞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상류계급 남성이 삶과 죽음의 의미 가운데서 헤메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유사하다. 다만 이반 일리치가 위선적이고 빈 껍데기같은 삶을 살았던 반면 체호프의 주인공인 니꼴라이는 나름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평생 믿고 애쓰고 가다듬으며 쌓아 올려왔던 모든 것들이 퇴색하고 쇠락하고 침잠할 뿐이다. 영혼의 구원은 커녕 주인공의 몸과 마음의 고통에 작은 위안조차도 되지 못한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죽음이란 것을 맞이하고 '한평생 행복하게 후회없이 살다 가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지금까지 몇 명이나 되었을까?
어쨌든 묻기는 계속해야 한다. 아니면 죽기도 전에 이미 죽은 듯이 살게 될 터인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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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프 13기 33주차에 박형규 교수 번역본 <체호프 단편선>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아직 그 독후감이 책좋사에 남아 있습니다만 네이버 카페 플랫폼 개편 때문에 책의 서지사항이 지워져서 보이질 않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학원사 刊 한권의책 시리즈 중에 포함된 책이고, 전 아직도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번역의 정확성 면에서 그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2016. 8. 21에 남긴 그 독후감에는 묘하게도 <지루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이 빠져 있는데 4년 정도가 지난 지금 다른 역본을 읽고 나서 이 독후감 속에 이런저런 느낌을 털어 놓을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지루한 이야기>는 어쩌면 제목 그대로, 체호프의 다른 단편이 보여 주는 교과서적 깔끔한 형식미와 미학적 충격과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체호프 자신의 자전적 회고로도 보이지 않는, 어느 노교수를 1인칭 작중 화자로 삼아 펼쳐지는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노교수는 젊어서 명철한 지성을 자랑하던, 인품도 빠질 데 없는 명사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심사가 꼬여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대목은 호주의 소설가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1인자> 1부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뇌에 이상이 생긴 후 성격이 괴팍히 변해 가는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거인 모두 한때는 자신에게 타인에게나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잣대를 유지할 줄 알던, 수양의 정점에 달한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죠.
"선생님께서는 요즘 무섭게 늙으셨습니다."
무섭게라는 부사가, 늙은 모습이 무섭다는 뜻인지, 아니면 노화의 속도가 급작스럽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죠. 교수는 특히,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후배, 사위 등을 신랄하게 비꼬고 조롱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데, 그의 슈퍼에고는 이런 1차원적 반응에 대해 준엄한 꾸짖음을 내립니다. 중편에 가까운 긴 분량 속에서, 우리들 일상인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외적인 캐릭터의 잔잔한 내면 속 전쟁을 다룬 이 소설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아마도 니콜라이 고골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직한 신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한국에서 안 읽은 독자가 거의 없을 법한 명단편입니다. 석영중 교수의 이 새로운 번역으로 즐기는 맛이 또 별미였다고나 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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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프 13기 33주차에 박형규 교수 번역본 <체호프 단편선>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아직 그 독후감이 책좋사에 남아 있습니다만 네이버 카페 플랫폼 개편 때문에 책의 서지사항이 지워져서 보이질 않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학원사 刊 한권의책 시리즈 중에 포함된 책이고, 전 아직도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번역의 정확성 면에서 그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2016. 8. 21에 남긴 그 독후감에는 묘하게도 <지루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이 빠져 있는데 4년 정도가 지난 지금 다른 역본을 읽고 나서 이 독후감 속에 이런저런 느낌을 털어 놓을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지루한 이야기>는 어쩌면 제목 그대로, 체호프의 다른 단편이 보여 주는 교과서적 깔끔한 형식미와 미학적 충격과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체호프 자신의 자전적 회고로도 보이지 않는, 어느 노교수를 1인칭 작중 화자로 삼아 펼쳐지는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노교수는 젊어서 명철한 지성을 자랑하던, 인품도 빠질 데 없는 명사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심사가 꼬여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대목은 호주의 소설가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1인자> 1부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뇌에 이상이 생긴 후 성격이 괴팍히 변해 가는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거인 모두 한때는 자신에게 타인에게나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잣대를 유지할 줄 알던, 수양의 정점에 달한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죠.
"선생님께서는 요즘 무섭게 늙으셨습니다."
무섭게라는 부사가, 늙은 모습이 무섭다는 뜻인지, 아니면 노화의 속도가 급작스럽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죠. 교수는 특히,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후배, 사위 등을 신랄하게 비꼬고 조롱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데, 그의 슈퍼에고는 이런 1차원적 반응에 대해 준엄한 꾸짖음을 내립니다. 중편에 가까운 긴 분량 속에서, 우리들 일상인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외적인 캐릭터의 잔잔한 내면 속 전쟁을 다룬 이 소설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아마도 니콜라이 고골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직한 신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한국에서 안 읽은 독자가 거의 없을 법한 명단편입니다. 석영중 교수의 이 새로운 번역으로 즐기는 맛이 또 별미였다고나 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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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프 13기 33주차에 박형규 교수 번역본 <체호프 단편선>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아직 그 독후감이 책좋사에 남아 있습니다만 네이버 카페 플랫폼 개편 때문에 책의 서지사항이 지워져서 보이질 않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학원사 刊 한권의책 시리즈 중에 포함된 책이고, 전 아직도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번역의 정확성 면에서 그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2016. 8. 21에 남긴 그 독후감에는 묘하게도 <지루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이 빠져 있는데 4년 정도가 지난 지금 다른 역본을 읽고 나서 이 독후감 속에 이런저런 느낌을 털어 놓을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지루한 이야기>는 어쩌면 제목 그대로, 체호프의 다른 단편이 보여 주는 교과서적 깔끔한 형식미와 미학적 충격과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체호프 자신의 자전적 회고로도 보이지 않는, 어느 노교수를 1인칭 작중 화자로 삼아 펼쳐지는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노교수는 젊어서 명철한 지성을 자랑하던, 인품도 빠질 데 없는 명사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심사가 꼬여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대목은 호주의 소설가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1인자> 1부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뇌에 이상이 생긴 후 성격이 괴팍히 변해 가는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거인 모두 한때는 자신에게 타인에게나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잣대를 유지할 줄 알던, 수양의 정점에 달한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죠. "선생님께서는 요즘 무섭게 늙으셨습니다." 무섭게라는 부사가, 늙은 모습이 무섭다는 뜻인지, 아니면 노화의 속도가 급작스럽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죠. 교수는 특히,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후배, 사위 등을 신랄하게 비꼬고 조롱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데, 그의 슈퍼에고는 이런 1차원적 반응에 대해 준엄한 꾸짖음을 내립니다. 중편에 가까운 긴 분량 속에서, 우리들 일상인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외적인 캐릭터의 잔잔한 내면 속 전쟁을 다룬 이 소설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아마도 니콜라이 고골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직한 신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한국에서 안 읽은 독자가 거의 없을 법한 명단편입니다. 석영중 교수의 이 새로운 번역으로 즐기는 맛이 또 별미였다고나 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