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9.0
  • 30대 0.0
  • 40대 8.0
  • 50대 0.0
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내용보기
첫인상은, 그 낯선 이의 눈이 유난히 연한 푸른색이라는 것이었다. 그 푸른 눈이 내 눈과 몇초간 무심히 마주쳤고, 멍하고 분명 겁 먹은 듯 보였다. 놀란 듯 보이면서도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서린 그 눈은 내가 구체적으로는 기억해낼 수 없는 어떤 사건, 아주 옛날 열네댓살 무렵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얼핏 떠올리게 했다. 그의 눈은 뭔가 교칙을 어기다가 들켜서 놀란 소년의 눈과 같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내용보기

 첫인상은, 그 낯선 이의 눈이 유난히 연한 푸른색이라는 것이었다. 그 푸른 눈이 내 눈과 몇초간 무심히 마주쳤고, 멍하고 분명 겁 먹은 듯 보였다. 놀란 듯 보이면서도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서린 그 눈은 내가 구체적으로는 기억해낼 수 없는 어떤 사건, 아주 옛날 열네댓살 무렵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얼핏 떠올리게 했다. 그의 눈은 뭔가 교칙을 어기다가 들켜서 놀란 소년의 눈과 같았던 것이다.(중략)

 - p. 25 -

 윌리엄 브래드쇼의 눈에 비친 기차 객실 안의 아서 노리스의 모습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작품이다. 베를린을 떠난 영국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1935년에 발간한 이 작품은 <베를린이여 안녕>과 함께 그가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사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그가 베를린에서 머무른 시기인 1929년부터 1933년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시점은 다른 말로 표현되면 히틀러의 나찌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의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영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 베를린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눈길을 끄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이 시기에 베를린에 간 것일까? 책의 첫 머리에 'W.H. 오든을 위하여'라고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셔우드의 동성 연인이라고 한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퀴어'로 불리우는 동성연애자였으며, 실제로 동성연애자 인권 운동에도 기여한 인물이라고 한다. 당시 보수적인 영국에서 동성연애는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시기였기에 이셔우드는 베를린으로 그의 연인과 함께 떠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베를린이었을까? 역설적이지만, 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진 상황에서 만들어진 정부였지만, 오히려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였기에 동성애에 대하여도 관대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나찌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 파시즘은 물론이거니와 공산주의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베를린은 혼돈과 불안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에서는 이러한 베를린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윌리엄 브래드쇼를 비롯한 작중 인물이 실제 자신을 비롯한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누가 보아도 이 작품은 크리스토포 이셔우드가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그가 겪은 일들을 윌리엄 브래드쇼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아서 노리스의 첫인상에 대한 묘사는 의미가 있어 보인다. 사실 이 책을 읽는다면 전체적으로 아서 노리스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윌리엄 브래드쇼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왠지 사기꾼 기질을 다분히 보여주는 아서 노리스에게 왜 윌리엄 브래드쇼는 끝까지 그를 감싸줄까?


 위에 언급한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그의 눈은 뭔가 교칙을 어기다가 들켜서 놀란 소년의 눈과 같았던 것이다."라는 부분을 보면 사기꾼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리스의 불안함으로 볼 수 있지만, 동성연애자로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노리스의 눈에 투영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 작가를 대변하는 인물은 분명 윌리엄 브래드쇼인데, 자신의 불안한 상황은 오히려 노리스에 부분적으로 이입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시종일관 이야기의 흐름은 아서 노리스가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로 진행되고, 윌리엄 브래드쇼는 그러한 노리스를 관조적으로 바라보다가도 그의 협력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윌리엄 브래드쇼의 다른 친구들에게 아서 노리스를 소개할 때마다 그의 친구들은 브래드쇼에게 노리스의 사기꾼 기질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브래드쇼는 노리스에 대하여 여전히 호의적이다. 노리스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를 따라서 공산주의에 빠져들기도 하며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노리스가 브래드쇼의 동성애적인 취향을 이용하여 쿠노와 함께 스위스에 가달라는 부탁도 기꺼이 들어준다. 심지어 노리스가 자신을 이용하여 스파이 활동을 통하여 금전적인 이득을 보려는 계략까지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리스가 베를린을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자신을 대변하는 브래드쇼는 침착하면서도 제3자의 입장을 유지하는 인물로 그려내면서도 자신의 불안한 심리는 따로 아서 노리스에게 이입시켰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말해봐, 윌리머." 그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났다. 

 "도대체 내가 뭘 저질렀기에 이 모든 일을 당해야 해?"

 - p. 302 -

 책의 마지막장에 자신을 협박하는 인물과 함께 도피생활을 해야 하는 아서 노리스의 이 편지 내용은 오히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겪고 있는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동성애자였기에 베를린에 머물렀고, 나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결국 영국이 아닌 미국에 정착을 하는 당시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한다면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노리스는 어쩌면 이셔우드의 또다른 분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라는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의 첫 작품이라 처음 읽을 때에는 어느 정도의 부담감은 있었으나, 오히려 이 책을 통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말기의 정치적인 상황을 이셔우드의 개인적인 혼란스러운 사상 - 공산주의에 대한 옹호 및 자신의 동성애 -과 함께 읽음으로써 당시의 혼돈스러운 상황을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그나마 당시 베를린의 혼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기에 이 작품은 그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찌 정권으로 넘어가는 역사적인 상황을 문학이라는 장르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양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작품은 많지만, 전쟁 이후 또는 전쟁 직전의 상황인 1930년대 초반의 독일의 상황을 다룬 영미문학은 드물기에 오히려 이 작품이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g*******7 2016.04.24. 신고 공감 4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나는 카메라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나는 카메라다." 내용보기
이 글의 제목에 붙인 문장은 사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의 2편 격인 「베를린이여 안녕」의 첫 문장이다. 1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리뷰글 제목으로는 온당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온당치 않아 보임을 애써 무시하고 제목으로 정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 나는 카메라다." 내용보기

이 글의 제목에 붙인 문장은 사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의 2편

격인 「베를린이여 안녕」의 첫 문장이다. 1편이라고 할 수 있는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의 리뷰글 제목으로는 온당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온당치 않아 보임을 애써 무시하고 제목으로 정하게 되었다.

쓰는 사람 마음이라는 땡깡을 좀 길게 풀어 쓴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면 정확하게 보신 게 맞다. 그게 정답이다 ㅎ

작품은 두 영국인이 기차에서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기차의 도착지는 1930년대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혼돈의 공간이다. 생(生)은 멸(滅)하고, 멸의 끝에 다시 생이 있듯 독일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섭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스마르크가 조롱당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멸해가는 세상에 새로 태어난 것은 나치라는 이름의 파시즘이었다. 나치는 사람들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은 이들이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 둘 모여든다. 이 작품은 그 혼돈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방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3년 베를린을 떠나고 바로 든 생각은 그 자료들을 발자끄풍으로 빽빽하게 잘 짜인 한 편의 거대한 멜로드라마 소설로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소설을 '없어진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이 영어 제목, 혹은 독일어 제목은 기가 막히게 불길해 보였다. 나는 그 제목을 당시 독일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과 우리 시대를 비극적으로 일컫는 '길 잃은 사람들'이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뿐만 아니라, 따옴표로 강조한 '실종된 사람들', 즉 점잖은 사회가 기겁하면서 피하는 그런 개인들을 풍자적으로 지칭하는 의미로 쓰고 싶었다. 아서 노리스, 폰 프레그니츠, 쌜리 볼스 같은 사람들 말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p. 9-10

소설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두 인물인 서술자 윌리엄 브래드쇼와 주인공 아서 노리스는 영국인이다. 노리스는 직업도 불분명하고, 하는 일은 어째 의심스러운 느낌이 다분하다. 하는 짓은 철딱서니 없고, 오늘만 사람 같기도 하다. 비서에게 협박당하면서 돈을 몽땅 뜯겨 지갑 사정이 궁하면서도 재산가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 같다.

그의 의외의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은 그의 '붉은 전선' 활동이다. 시류에 찌든 자본의 노예의 모습만 보이던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그를 달리 보게 한다. 하지만 후반부에 바이어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그의 또 다른 이면은 노리스가 정말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종잡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사실, 노리스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기는 약간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기차를 갈아탄다'는 제목의 의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가늠이 된다.

단순히 그가 가진 서사를 이해하기 어려워서뿐 아니라,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 흥미를 가장 자극했던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작품의 서술자이다. 윌리엄은 관찰자다. 그 역시 이방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극적이다. 한 곳에 지지된 게 아니라 끝없이 주변을 배회한다는 느낌이 든다. 서술자의 입장이 그러하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독자 역시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된다. 과거가 되어버린 순간의 이야기에서 독자를 이입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제3자로 만드는 이 작품이 시각이 아주 흥미로웠다.

또 하나의 윌리엄의 매력은 그가 작가인 이셔우드와 참 많이도 빼닮았다는 점이다.

나는 아서에 대한 내 감정이 대체로 소유욕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내가 발견했고, 나의 자산이었다. 나는 고양이에게 버림받은 노처녀처럼 상처 입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p. 138

작가의 말을 읽고 이셔우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았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당시 영국은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하고 형사처벌을 했기 때문에 당시에 퀴어에 대해 아주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성적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난 그곳이 얼마 안 가 광기 배인 파시즘이 갉아먹고 있는 땅이었다는 사실이 꽤나 구슬펐으리라 생각한다. 브래드쇼는 그런 이셔우드의 개인적인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가 노리스에게 느끼는 감정을 '소유욕'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욕 그 이상으로, 브래드쇼가 노리스에게 연애 감정을 가졌는지는 명시하지 않음으로서 작가와 서술자가 최소한으로 두어야 할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떠난 곳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이가 견뎌야 하는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쿠노를 통해─물론 쿠노의 죽음이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보여주면서 소수자의 배척 문제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점이, 한 가지 이 작품에서 인상깊었던 표현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브래드쇼가 바라보는 아서의 '눈'이다. 이 소설이 시작되는 가장 첫 문장은 아래와 같다.

첫인상은, 그 낯선 이의 눈이 유난히 연한 푸른색이라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p. 25

브래드쇼가 노리스를 처음 만나고 가장 먼저 시선을 둔 것이 그의 눈이다. 그리고 작품의 중후반부에 노리스가 브래드쇼에게 겨울 여행을 부탁하는 장면에서 이런 서술이 등장한다.

마지막 시험으로 나는 아서의 눈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니, 이 고전적인 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영혼의 창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연푸른색 젤리처럼, 바위틈에 끼인 조갯살처럼, 그의 얼굴의 일부일 뿐이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p. 224

브래드쇼는 노리스가 자신에게 부탁한 일이 사기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면서,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를 눈을 보며 확인하려고 하지만 그의 눈에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첫인상이 상대에 대한 판단의 절반을 결정한다고 했던가. 그가 브래드쇼에게 부탁하며 했던 설명들이 후에 다 거짓말로 밝혀진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첫인상이 '눈'으로 기억되었던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할 때는 그 눈이 무의미한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게 개인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사실 이 작품을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의 사회적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아야 작품이 가진 결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온전히 다 이해하진 못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작품의 말미에 브래드쇼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프레그니츠는 스스스로에게 총을 쏘았으며, 노리스는 감시를 피해 망명한다. 심지어 노리스는 슈미트와 지독한 추격전을 벌이는 중이다. 베를린에서 '없어진 사람들'은 작품 어디에서도 뚜렷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게 작가가 의도했던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노리스씨기차를갈아타다 #크리스토퍼이셔우드 #영국소설 #독일 #파시즘 #퀴어 #창비 #창비세계문학전집 #창비세계문학리뷰대회


g******8 2020.04.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