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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전성태의 소설집 <두 번의 자화상>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익숙한 문체의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처음 작가가 되고 발표했던 단편을 동일한 제목으로 한편 더 써볼까 생각했으며, 어느덧 작가가 된 지 20년이 흘러 자화상을 그려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된 지 20년 만에 출간한 이 작품집의 제목을 <두 번의 자화상>이라고 붙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모두 12편의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매우 다양한데, 그만큼 작가의 관심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촉수가 뻗쳐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엮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남북분단의 현장을 찾아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로 창작한 작품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분단과 이산 그리고 탈북자들이 합류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예컨대 <로동신문>은 탈북자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등장인물이 재활용장에서 우연히 북한의 ‘노동신문’을 발견하고, 이미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탈북자의 삶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성묘>라는 작품은 은 군부대 앞의 잡화점 주인인 인물이 등장하며. <망향의 집>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노인들이 얽어내는 사연들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노인의 치매와 가족들의 반응을 소재로 한 <소풍>이나, 불법취업을 했던 외국인 노동자를 공항에서 배웅하는 내용의 <배웅>도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인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주제들이라고 하겠다. 우연히 시골에서 본 개의 밥그릇이 골동품인 것을 보고 그것을 을 핑계로 개를 사면서 그릇까지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 때문에 여러 마리의 개를 팔았다고 예기하는 촌노인의 반응을 담은 <밥그릇>은 로알드 달의 작품을 우리식으로 꾸며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이미 우리 민담에서 회자되고 있는 주제이기에,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낚시하는 소녀>는 허약한 소녀가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엄마와 함게 살아가며, 창밖에 낚시를 드리우며 지내는 내용으로 우리 사회의 경제적 약자에 대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대통령의 지방 순시를 대비하여 모처에서 합숙하며 접대준비를 하는 모습을 그린 <영접>이라는 작품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 빈번했던 공무원들의 형식에 치우친 단면을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저자는 처음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인생에 단 한편을 남긴다는 마음을 지닌 붉은 문학주의자’였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과연 그에게 ‘단 한편’의 작품이 무엇이었는가가 궁금하다고 여겨졌다. ‘두 번의 자화상’을 그려낸 저자에게 다시 20년이 흘러, ‘세 번째 자화상’이 엮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연을 맺게 되어 행복하다’라는 저자의 친필 사인이 담긴 소설집을 천천히 읽으면서, 저자의 작품 세계와 넉넉한 품성을 떠올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독자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며, 문학의 길을 ‘묵묵히 걷고자 한다.’는 저자의 다음 작품들을 기다려 본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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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아름답지 않다. 때때로 우리는 '살아간다'라는 느낌보다는, '생존해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삶을 유지할 뿐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행복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차가운 현실 속에서 우리의 삶이란 음울하고 또 괴로울 뿐이다. 리얼리즘 소설이란 기본적으로 현실의 모사이다. 인간 군상들 중 하나를 포착하여, 그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부러 리얼리즘 소설을 기피하기도 한다. 그들은 말한다. "내 삶이 이토록 끔찍하고 힘든데, 내가 잠시 쉬어가기 위해 책을 읽으면서도 고통받아야 하나요?" 만약 당신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때로 비참해보이는 소설 속 인물들을 우리가 문자를 통해 읽어내는 것은, 그들의 삶보다 내 삶이 낫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한 걸음 떨어져 지켜봄으로써 이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위함도 아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 즐거운 것이다. 물론 이 소설집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갖고 있다. 가족들과 소풍을 나온 노인은 자신이 치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또 그 자식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매일 창 밖으로 낚싯대를 드리우는 소녀의 어머니는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농촌에서는, 이제 막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소년과 소녀가 이별을 하게 된다. 이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 대부분이 고통스럽다면, 이들의 인생 대부분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대부분'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때때로 술자리에서 추억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 삼키는 것은, 우리가 삶을 버텨나가는데 큰 힘이 되고는 한다.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늙어가는 노인이 있으면 커가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약으로 삶을 유지하며 몸을 파는 어머니가 있으면 그 슬하에는 꿈을 낚는 딸이 있기 마련이며, 소년과 소녀가 이별을 한 것은 언젠가 다시 재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의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추진제로 삼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이 책은, 우리가 가진 삶이란 어떤 것인지 본질적으로 보여준다. 삶은 결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동시에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삶은 그저 삶일 뿐이다. 계란장조림 속 매운 꽈리고추도 삶이고, 부드러운 노른자도 삶일 뿐이다. 이게 바로 이 책에 담긴 소설들이 갖고 있는 가치이며, 일주일 간 고통받은 당신이 주말에 침대 위에서,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이 책을 펼쳐봐야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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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에서 받은 다섯 권의 경품 중 가장 훌륭한 책이었다. 글 줄 하나하나에서 땀 냄새가 난다. 성의와 성심이 가득하다. 진정 소설이라 부를만한 작품 열 한 편이 차곡차곡 시간을 깔고 누워 있다. 그럼에도 나는 슬펐다. 그 다섯 권의 책 중 이 책이 가장 팔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수 문학은 잔잔하고 지루한 장르다. 스펙타클이나 환상은 없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을 헤집는 오만가지 사건과는 달리 우리의 삶은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한가.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지긋지긋한 현실을 집어드는 사람은 없다. 그런건 카프카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그러나 문학을 열어 본 사람은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책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가 웬지 낯설고 생소하고 신비롭다는 것을. 어딘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일상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깊은 미스테리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정작 주의를 기울여 세상을 읽어본 적은 거의 없다. 인간은 세상을 덩어리로 인지한다. 우리에게 '세상'이란 것은 진정 추상적이다. 그 큰 덩어리를 이루는 세세한 알갱이를 만지며 살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문학의 역할이 빛나는 지점이다. 문학은 우리를 추상적인 덩어리에서 끄집어내 세세한 알갱이 앞으로 데려간다. 평생을 알갱이와 부대꼈지만 한 번도 그 존재를 눈치채 본 적 없는 것들. 그래서 나에게 문학은 가장 진부하지만 동시에 가장 새롭고, 또 낯선 것이다. 작가 전성태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신화 속에서 살아온 것 같다. 그는 바다와 산을 보름씩 오가며 사는 산갈치라든가, 백년에 한 번 하얗게 핀 대나무 꽃을 봉황이 날아와 먹는 다는 둥, 마을 어른들과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가슴 속에 보물처럼 쌓아오다 끝내 소설가가 되 버렸다. 물론 이 남자의 소설은 그가 어릴 적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환상의 세계를 그려 놓고 현실로 가는 다리 하나를 흐릿하게 지어놓는 스타일도 아니고 현실과 환상을 뒤죽박죽 섞어 한바탕 난동을 부리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들의 평범한 일상이 잔잔한 서정을 두르고 담담하게 나아간다. 그런데 나는 이 열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뒤, 문학의 무게는 그 뻔한 일상을 묵묵히 밀고나갈 때 여지없이 더 묵직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을 찾지 마라. 기적은 일상에 있다. 반짝 반짝 빛나는 삶의 진실도, 그 고통을 어루만질 치료약도 바로 삶 속에 있다. 어릴적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는 이제 치매에 걸려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최근 것부터 차근차근 지워지는 기억이 그녀를 자꾸만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그래서 이제는 작가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가 됐다.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산갈치니 봉황이 뜯어 먹는 대나무 꽃 얘기를 하면 반짝 눈동자가 빛난다고 한다. 이야기를 먹고 자란 아이가 소설가가 됐듯 그의 어머니도 환상을 마시고 현실로 돌아왔으면 한다. 불가능한 일이라느 걸 알지만, 기적은 언제나 삶 속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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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이들은 아픈 데 없고? 유 서방은?" "그래 나야 일없다. 너희들이 건강하면 됐지." "이번에 전세 뺀다는 것은 그리해도 괜찮은 거냐?" "에헤이~ 안가~. 이번에 덕곡댁이 아들놈 직장 옮겼다고…. 그거 물어보러 간다고, 같이 가자고 워낙 달라붙어서 한번 가 줬지, 나는 원래 안 간다. 어쨌든 단단히 챙겨." "그려…. 오라비하고도 연락 좀 자주 하고, 그래도 제일 오래 같이 사는 건 형제뿐이다." "알았어, 알았어. 내 아무 말도 안 한다. 김치는 아직 많이 남았간? 고추 마르면 빻아서 보내주마." "너희 아버지야 맨날 그렇지 뭐 아 몰라 끊어 전화비 많이 나온다. 오냐 그래 들어가거라." 대전 딸애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심 씨는 미안한 마음은 차마 내려놓지 못했다. 집을 사도 은행 거지 자기들 거냐는 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대쪽 같은 성격의 영감과 아등바등 살았건만 자식 집 사는데 보태줄 형편도 안 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문득 뭐가 생각난 듯 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썰매를 타듯 미싱으로 몸을 끌었다. 반짇고리함 안에서 정성스럽게 접어놓은 노란 종이를 꺼내 펼쳐보았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츠바라 프라바를타야 훔.’ 덕곡 댁과 같이 찾아갔던 심학산 선녀 보살이 써준 것이었다. "옴……. 아모가…….바이……. 어허, 참……." 한 글자씩 차근차근 읽는 것도 버거웠다. 덕곡 댁이 봉투를 상 위에 내놓은 뒤, 무릎을 꿇은 채 방석을 타고 옆으로 미끄러진다. 심 씨가 그 자리를 채운다. 자식들의 사주를 불러줬다. 선녀 보살이 뭔가 휘갈기다가 입을 열었다. "문서 잡을 일 있어. 조심하라 그러고." "아 네 안산 큰 애가 집을 하나……." "거기는 물 조심하라고 해. 아주 큰물이구먼." "아, 네…. 딸이 또…." 말을 막고 선녀 보살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갔다 온 거야?" "네?" "영감 말이야. 어디 갔다 온 거냐고? 멀리도 갔다 왔구먼." '하이고 정말 용한가 보네.' 속으로 놀라서 심 씨는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영감이 젊을 때 월남을 갔다 왔는데요. 잠을 잘 못 자요. 맨날 죽은 전우들이 꿈에 나온다고……. 여태껏 베개 밑에 대검인가 뭔가 커다란 칼을 놔둬야 잠이 들어요. "이미 죽은 양반들이 칼이 무섭간?" 선녀 보살이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노란 종이에 뭔가를 한참 또 휘갈겼다 "이거 가져가 " "영감 사루마다 있지? 그거 중에 좋은 놈으로 하나 머리에 쓰고 이거 백팔 번 외우라고." "이게 뭔데요, 부적인가요?" "뭐란 들 알겠어? 아, 알든 말든. 자, 광명진언이라고. 넋 달래주는 거니까 정성 들여서 읊어주라고." "아……. 네네." 심 씨도 흰 봉투를 상 위에 올려놓고 노란 종이는 노란 봉투에 넣어 잘 챙겼다. 심 씨가 고추밭에서 허리를 삐끗하고는 뒷방에 누운 지 며칠이 지났다. 박 노인의 눈치에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박 노인이 평소에 잘 보지도 않던 드라마에 욕지거리 한다. 심 씨는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이불을 푹 덮어썼다. 영감 속옷을 슬며시 머리에 쓰고는 광명진언을 외우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나니 선녀 보살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 하나가 생각났다. 굿이라도 해야 된다 그럴까 봐 차마 말을 못 한 것이었다. 그게 입천장에 딱 붙은 김 쪼가리처럼 마음에 남아 신경이 쓰였다. 노란 종이 위의 글씨들이 붙어야 할 입에 걱정이 붙어있는 꼴이다. 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에라 관셈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심 씨는 광명진언 대신 애먼 관세음보살만 찾았다. "뭐하는 짓거리야!" 심 씨가 화들짝 놀라서 머리에 둘러쓴 걸 벗겨냈다. "아이고 못 살겠다. 내가 허리가 똑 부러져야 시원하겠소?" 행여 박 노인이 주문 같은 걸 들었을까 봐 심 씨는 역정을 내는 것으로 선수를 쳤다. "이녁이야말로 첩질도 아니고 웬 신발을 끌고 방에 들었소? 드러워라." 박 노인이 신발을 신은 채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 씨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박 노인이 전투화를 자신의 갈비뼈에다 쓱쓱 긁어 흙을 터는 듯했다. 이제는 잘 때도 모자라 깨어서도 저러나 싶었다. "야, 편하게 앉아 괜찮아. 운전하는 내가 다 불편하다." "이병 이, 두, 식! 알겠습니다!" 승리상회 박 노인에게 맡겨 두었던 신병을 태우고 가던 김 중사는 신병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힘을 빼줬다. "뭐 좀 먹었냐? 주임상사님이 뭐 안주시든?" "……." "어허, 괜찮아. 그때 먹지 언제 먹냐?" "라면……. 라면이랑 김치 먹었습니다." "그래 맛있지? 요즘 군대 밥도 잘 나온다지만 어디 사제를 따라갈 수 있겠냐." 신병은 주먹에 힘을 빼고 검지 손톱으로 엄지를 긁고 있었다. "전화도 했어?" 신병의 울대가 위아래로 한 번 덜컹거렸다. "부모님이든 애인이든 너무 걱정하지마라. 사회에 있는 사람이 군대 생활하는 사람보다야 잘 지내지 않겠니? 이제 자대에서 잘 적응할 생각만 해. 그러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가니까." 떨리는 신병의 눈동자 뒤로 위병소가 지나가고 초병의 경례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김 중사에게 다시 한 번 오늘이 일직을 서는 날이라는 것을 주지시켜주었다. 대충 경례를 받아주고 신병을 보자 떨리는 신병의 눈동자 앞에 그녀석의 얼굴이 겹쳤다. 일직 서는 날 신병을 데리고 오면, 작년 그 녀석이 다시 생각나곤 했다. 오 일병. 오일처럼 미끈한 오태성 일병, 오일병. 2010 남아공 월드컵, 새벽에 나이지리아와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그 때문에 부대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김 중사는 하필이면 한국 경기가 있는 날 일직사관 근무를 서야 했다. 맥주와 함께 티브이에서 나오는 부부젤라 소리에 한껏 신이 나야할 시간에 김 중사는 시커먼 밤길을 순찰하면서 요란한 개구리 소리나 들어야 할 판이었다. 그 억울함을 병사들한테 내뿜었다. 관물대 검사, 손톱 및 위생 검사, 화장실 청소검사, 총기 검사. 저녁 시간이 금방 갔다. "일직하사 점호 끝나고 전달사항 내무실별로 똑바로 전달한다. 오늘 허락 없이 새벽에 몰래 월드컵 보는 놈들 들키면 바로 군장이라고. 알았냐?" "일동 취침" 새벽 4시 초소 근무 교대시간이었다. 나이지리아와 한국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근무교대를 할 인원들이 중대본부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괜스레 초조한 마음에 김 중사는 교대신고를 받기 위해 일찍 나갔다 아직 교대 인원들이 다 나오지 않았는데 오 일병이 쭈뼛하게 김 중사에게 다가왔다. "일직 사관님 저 근무 시간 좀 바꿔 주시면 안 됩니까?" 비록 김 중사에게만 들릴 정도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그 어이없는 요청이 김 중사의 신경을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미친 거 아냐? 야 새끼야 어디서 월드컵이라도 보겠다는 거냐?" 지금 근무 시간을 바꾸면 전반전 경기 중반부터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직사관님 그게…. 아니라 이번만 좀 바꾸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뭐? 이 자식 개념 상실일세." "그게……." "뭐? 무슨 문제 있나? 야, 일직하사 오라 그래." 오 일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다. "인마 근무 사수가 누구야?" 일병이 감히 이런 말을 꺼내진 못할 것이다. 배후가 있다. "연 성구 병장님입니다." "연 성구? 연병장? 연병장이 나보다 위냐? 님자를 붙이게?" "연 성구 병장입니다." 대답하는 일직 하사는 줄곧 오 일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병장. 성씨 때문에 졸병부터 놀림감이었던 연 성구 병장이었다. "야, 연상병" "상병 연성구" "야, 너 다음 달에 병장 달더라. 국방부 시계 졸라 좋아. 아무나 다 병장 되부러. 넌 병장 되지마라 그랬지. 조또, 크크크끄끄……." "아니지 말입니다. 될 건데 말입니다." "말입니다는 빼고. 새끼, 요새 이뻐해주니까 졸라 빠져갖구……. 되고 싶긴 뭘 새꺄 . 네가 병장되면 뭐냐?" "연병장이지 말입, 연병장입니다." "그러니까 병장되면 넌 연병장부터 돌아, 새꺄. 크끄끄끄" "아 왜 그러십니까. 유병장님~ 이제 그거 너무 옛날개그 아닙니까. 조금 있으면 사회복귀 하실 텐데 그러시면 따 당하십니다." "뭐야 시끼, 내 맘이다. 새끼 졸라 귀여워 갖구." 유 병장이 연 상병에게 헤드락을 건다. 뽀얀 연 상병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입술을 뾰로통하게 만들면서 유 병장을 바라본다. 연 성구는 병장이 될 때까지 특유의 유들유들함으로 자신을 향한 놀림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었다. 연병장이 탄띠도 결속하지 않은 채 방탄헬멧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야 연성구 네가 이 녀석한테 뭐 시켰어? 월드컵 보고 싶어서 환장했냐?" "병장 연성구. 에이 일직사관님 제가 어떻게……. 아니지 말입니다. 근무 열심히 서야지 말입니다." 병장이 되자 연병장은 부사관들에게도 그 능글맞음을 발라댔다. "김 중사님, 근무 서면서 순찰함도 제가 체크해드리겠습니다." "그걸 네가 왜 체크해. 이게 이제 말년이라고. 너 몇 개월 남았어? 새끼……." "에이……. 4초소 제일 멀지않습니까. 중사님 오시느라 힘드실 텐데……. 오늘 월드컵도 있고…….네?" "내 걱정하지 말고 이 새끼랑 근무나 잘 서 인마." "넵! 알겠습니다. 충성!" 연 병장은 얄궂게 발랄한 경례로 김 중사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덮어버렸다. 김 중사의 입에선 헛웃음이 나왔고, 옆에 서 있는 오 일병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직하사 다른 근무인원 이상 없나? 그래, 보고 생략하고 출발." "김 중사님! 김 중사님!" "뭐야?" 일직 하사가 헐레벌떡 중대본부로 들어온 것은 이제 막 아침 점호를 시작하기 바로 전이었다. 김 중사가 이제 막 사령실에서 월드컵을 보고 중대본부에 돌아온 후이기도 했다. 순찰은 사령실에 들어가면서 돌지도 않았다. 일직 하사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에……. 화장실에……." " 씨발….' 가보기도 전에 김 중사는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것 같았다. 화장실 문틀에 목을 맨 오 일병의 쭉 빠진 혀에 설태가 하얗게 보였다. 축축하고 허연 거품이 오 일병의 아랫입술을 넘어서 턱을 타고 흘러나와 있었다. 녹은 소금물 같았다. 긁어내면 설렁탕 서너 그릇에 넣고도 남을 만큼 흥건했다. 그 밑 전투복 상의 두 번째 단추에 흰 종이가 꿰져있었다. 거기에는 몇 글자 되지도 않는 한 문장이 거칠게 휘갈겨져 있었다. '내가 좆 빤 새끼들 다 죽어라!' '좆'이라는 글씨가 흘러내린 침에 번져 있었다. "야 연병장 중대본부로 데리고 와." 그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김 중사는 일직 하사에게 말했다. "어서!" "연병장에요? 중대본부를요?" "야 연병장 말이야 연병장! 연 성구!" 김 중사는 '새끼' 뒤에 '들'을 지울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 유서로 추정되는 종이 쪼가리를 계속 뚫어져라 보았다. 읍내로 나가는 버스에 처녀 한 명이 올랐다. 하얀 남방을 입은 처녀를 본 박 노인은 어떤 직감에 몸이 경직되었다. 국화를 안고 적군묘지에 오르는 처녀를 그려보았지만 이내 다른 이미지가 그 모습에 겹쳐졌다. 월남의 처녀들도 저렇게 하얀 옷을 입고 다녔다. 유심히 처녀의 얼굴을 몰래 뚫어져라 뜯어보았다. 새까만 머리가 하얀 남방 때문에 더 검게 보였다. 커다란 눈이 북쪽보다는 남쪽 얼굴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칠까 박 노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다시 그 꽃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코에는 이미 시큰한 남쪽 땅의 냄새가 배 들었다. 땀이 났다. 중국 사람이든 베트남 사람이든 이젠 다 한국에 온다. 더는 빨갱이 중공군 베트콩이 아니다. 그래서 박 노인은 불안했다.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베트남 사람들에게 에워싸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군인들이야 적군이라고 해도 저렇게 묘지라도 만들어주지만, 양민들은 어디까지 도망가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박 노인이 적군묘지에 술 한 잔 따르는 것이 비단 적군만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술 한 잔 따른 날이면 그나마 좀 더 편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때는 확실히 먼저 간 전우들만 꿈에 나오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베트남 처녀가 나오면 다음 날은 몸이 더 천근만근이었고 다리가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 들어 피곤했다. 새벽 2시 근무 교대 신고를 받고 김 중사는 순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늘 박 노인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순찰 중에 적군묘지를 들를 참이었다. 그 시간에 묘지에 간다는 게 좀 찝찝하긴 했다. 하지만 국화 다발에 대한 김 중사의 호기심이 그보다 더 컸다. 그리고 국화 다발을 처음 발견한 사람도 자기이니 국화 다발 주인이 누구인지도 자기가 먼저 알아내고 싶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허벅지를 스칠 정도로 자란 계절이었지만 새벽 공기는 으슬으슬하게 귀밑을 스쳤다. 검은 도로를 손전등으로 이리저리 비추며 김 중사는 걸어 내려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누가 오고 갔는지는 복잡한 도시보다 더 눈에 띄는 곳이다. 그런데 여태 흰 국화 다발을 놔두고 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저 멀리 보이는 승리상회의 지붕이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 모습이 더 멀게 느껴져 낯설었다. 그 방향으로 손전등을 비추려다 말고 적군묘지를 향했다. 적군 묘지의 초입에 들어서기 전에는 반드시 승리상회를 지나야 했다. 박 노인이나 심 씨도 본 적이 없다면, 아무도 없을 시간에 누군가 하얀 꽃을 놔두고 가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시간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외지인이 아니라 내부인 이어야 한다. 동네 주민이라면 승리상회를 지나올 것이고 아니라면 부대 내부 사람이다. 하긴 깊은 밤에 몰래 오는 사람이라면 어디 길로만 다니겠는가? 대낮에 온다고 해도 길이 아닌 곳으로 다니면 숨어서 적군묘지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굳이 한밤에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공간을 이용해 숨은 것일까? 시간을 이용해 숨은 것일까? '정말 매복을 시켜놔 봐야 하냐?' 머릿속에서 사건의 퍼즐을 몇 바퀴나 돌리다 보니 어느덧 김 중사는 적군묘지에 앞에 서 있었다. 박 노인의 고추밭을 가운데 두고 왼쪽이 북한군 묘역이었다. '그래, 김 대위 잘 있었나?' 김 중사는 뒷골의 으스스한 느낌에 쓸데없이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국화 꽃다발은 없었다. "그렇지 뭐. 헛헛." 김 중사는 헛기침 같은 웃음을 뱉었다. 한 밤 중에 여기까지 온 것이 허망하기도 했지만, 바로 돌아가기에도 아쉬워 목비들을 둘러보았다. 김 대위처럼 성명이 쓰인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명인'이라는 검은 세 글자가 희고 앙상한 목비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면에는 지역명이 쓰여 있었다. 출생지가 아니라 유해가 발견된 장소다. "이제 돌아갈까." 김중사는 혼잣말인지 아니면 또 김 대위가 들으라고 한 것인지 모르게 애매한 소리로 말한 후 돌아섰다. 나갈 방향으로 눈을 들자 저 멀리서 흰 목비 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김 중사는 풀숲에 몸을 숨겼다. 목비가 움직일 리는 없다. 한 곳만 계속 바라보면 착시가 일어날 수 있다. 잘 식별하기 위해 눈을 아래로 깔았다가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허연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목비는 아니었다. '꽃다발을 놔두러 온 사람인가? 이제야 정체를 밝히시는 건가?' 다시 식별을 위해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풀숲에 하얀 쪽지 하나가 보였다. '뭐지? 지전인가?' 하지만 지전은 참배객들이 다녀가는 중국군 묘역에나 있지 북한군 묘역에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쪽지는 제법 그 자리에 오래 있었는지 엉킨 풀들 밑에 구겨져 있었다. 그런데 흙도 많이 묻어있지 않고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눈에 잘 띄었다. 김 중사는 손으로 풀을 헤쳤다. 쪽지 끄트머리가 나왔다. 김 중사는 무릎을 꿇어 자세를 더 낮추었다. 불을 끈 손전등을 입에 물고 양손으로 다시 풀을 더 헤쳤다. ‘으으…….’ 희멀겋고 끈적한 것이 손에 묻었다. 한 손으로 쪽지의 끄트머리를 잡고 풀 사이에서 뽑아냈다. 나머지 한 손으로 쪽지를 잡고 빳빳하게 펼치자 거기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좆 빤 새끼들 다 죽어라! ' "으허억!" 턱에 힘이 빠져 손전등이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중심을 잃고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멀리 있던 허연 무언가가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 보였다. "학?"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은 목젖에 걸려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희멀건 무언가가 읊조리듯 말을 했다. "이제… 좀…그…만 불…러 내소." 김 중사는 억지로 침을 한 번 삼키고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꺽 주임 상사님?" "이제 좀 그만 불러내소." "주임 상사님, 저 김 중사입니다. 주임상삵!" 쉬이이이. 단단하게 음성이 뭉쳐 나와야 할 곳에서 프시식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김 중사가 목을 감싸 쥐었다. 김 중사의 손가락 사이로 뜨뜻하고 붉은 게 흘러내렸다. "이제……. 그만 좀……. 불러내." 힘없이 내뱉은 그 말을 붙잡고 허연 무언가가 뒤로 물러서자 김 중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목을 잡고 있던 김 중사의 손에서 힘이 빠졌고 쿨럭 피가 쏟아졌다. 그 아래에 깔린 하얀 쪽지의 글씨들 사이에 피가 점점 번져나갔다. "그러니까……." 둥그렇게 커진 김 중사의 흰자위에 비친 허연 무언가가 김 중사로부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멀어져갔다. 자리끼를 찾아 심씨가 눈을 뜬 건 어둠이 어슴푸레 여명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다. 위로 올라온 복대를 다시 고쳐 내리고는 한 손으로 머리맡을 더듬거렸다. 축축했다. '물이 흘렀나?' 그러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박 노인의 발을 보았다. 영감 발에 또 흙이 묻어 있었다. 걸레를 들고 와서 자는 박 노인의 발을 닦았다. 두툼한 굳은살에 간지럽지도 않은 지 박 노인은 꿈적도 안 하고 잤다. 심 씨는 침침한 눈으로 박 노인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생을 죽은 사람한테 시달린 영감이다. 아직도 꿈에 전우들이 부른다며 베개 밑에 칼을 놔두고 잔다. 발에 흙 묻히는 거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심 씨는 혹시라도 그렇게 다니다 낙상이라도 해서 몸이 상하면 수발드는 게 더 걱정이었다. 어쩌겠는가. 별일 아니라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심 씨는 속으로 곱씹었다. 심학산 용하다는 선녀 보살에게도, 안산 큰 애나 대전 딸에게도 이 망할 영감이 밤이면 한 번씩 소리 없이 맨발로 나갔다가 들어온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발 닦은 걸레를 뒤집어서 쏟긴 물을 닦으려 하는데 걸레 쥔 손에 뭔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자리끼 물이 아니었다. 어이구……. 영감의 베개 밑에 있는 대검을 꺼내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심 씨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다.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다가 간헐적으로 들썩거렸다. '끄으으…….' 오장육부로 짓누른 울음이 콧물과 함께 새어 나왔다. 박 노인이 일어났다. 오늘도 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허리 아프다는 할망구는 언제 일어나서 나갔는지 뒷방이 휑하였다. 오늘따라 부대는 더 조용하다. 바깥에서 그릇들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부엌 바닥에 목욕탕의자를 깔고 포대 앉은 심 씨의 등이 보였다. "뭔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설거지부터 한다고 달그락달그락 그래 싸. 엊저녁에 안 했어?" 심 씨의 대답 대신 그릇 소리가 더 커졌다. "밖에는 왜 저렇게 조용하데? 아침 구보 소리도 안 들리네." "모르겠소. 나는 모르겠다구요!" "거참 아침부터 역정이야. 아프면 병원을 가." "당신이 가요. 영감 당신이 가소. 허이구……." 오늘도 심 씨의 심산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박 노인은 불똥이 또 튀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었다. "아침부터 쉰 소리는……. 참, 고추는 다시 펴놨나? 어이쿠 다리야…." 마른 고추 소리와 함께 박 노인의 추임새가 가게 앞 도로로 멀어졌다. 설거지통에 물을 비우자 단출한 그릇들과 함께 박 노인의 대검이 드러났다. 심 씨는 통에 다시 퐁퐁을 쭈욱 짰다. 솨…. 물소리가 요란하게 플라스틱 설거지통을 두드렸다. 미동도 안 하고 설거지통 안을 바라보던 심 씨의 입술이 움직였다. "옴 …… 흑, 아……모가 끅, 바이로차나흑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흐어어어…… 츠바……라 흑, 프라바를타야 헉 후……우……움 끄으……헐……." 설거지통에는 하얀 퐁퐁 거품이 뭉실뭉실 피어올라 박 노인의 대검을 감싸고 있었다. ---------------------------------------------------------------- 이상 전성태의 '성묘'를 읽고 지어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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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 참 좋다. '이미테이션'이라는 이 작가의 작품으로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 좀더 읽고 싶어 구한 책인데 성공적이었다. 이제까지 이 작가의 이름도 몰랐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소설은 사실적이다.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는데 소설이지만 읽는 맛이 쓰다. 사는 맛이 쓴 탓이다. 하기야 사실적 소설의 맛이 쓰지 않은 시대가 있었겠는가마는 이렇게 정면으로 확인하게 되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어쨌든 한면으로는 살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작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할 수 있으면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인지. 박완서 작가의 글에서 보았던 솔직함을 본 듯 하다. 특히 작가 본인이 가지고 있을(정확한 근거 없이 내가 그렇게 읽고 있을 수도 있음) 허물같은 성격들을 각각의 인물을 통해 그려내는데, 그게 꼭 글을 읽고 있는 나를 한 부분씩 짚어 나무라는 것처럼 여겨진다. '너도 이러하지?' 하는 듯. 그런데 이게 싫지 않다. 도리어 잠들어 있으려고 하는 내 영혼을 깨어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제발 눈 좀 뜨라고, 자꾸 변명만 하지 말고 주위를 둘러 보라고, 약한 척 비겁해도 참는 척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고 하는 듯.
이 책에 실린 글들이 EBS 언어 영역 문제집에 좀더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 핑계라도 있어야 학생들에게 당당히 권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독서 교육의 절대적 기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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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사이, 삶이 지나간다. 전성태 소설집『두번의 자화상』
작가가 6년만에 펴낸 소설집에는「소풍」을 비롯 총 12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소풍」은 201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도 포함된 작품으로 대상 수상작인 김숨의 「뿌리이야기」만큼이나 인상깊게 읽은 바 있다. 보통 소설집의 제목이 수록단편 중 하나로 붙여지는데, 『소풍』이 아닌 『두번의 자화상』이라고 붙은 제목에 호기심이 일었다. 게다가 절대적인 고요함이 느껴지는 표지라니……! 안읽고 지나칠 수 없었다. 결국 약 나흘간을 이 책과 함께 보냈다. 마지막 소설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와 '작가의 말'을 읽은 뒤, 가슴에 남은 여운을 쓸어내리며 두가지 기분을 느꼈다. 하나는 마치, 한달여간 전국을 여행하면서 군청의 축산계장부터 제수용품 파는 노인과 시골 다방의 레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길 듣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각각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나를 마중 나오거나 배웅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배웅과 마중의 장면들 때문인지 모른다. 배웅과 마중. 내게 이 두 단어는 이 소설집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였다.
「배웅」1하다. 6년간 한국에서 돈을 벌다 위독한 친정어머니를 뵈러 급히 출국하게된 사람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쏘야. 그녀는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전 고용주 미숙. 얼핏 별거 아닌 배웅의 장면 뒤에 우리가 흔히 '외국인 노동자'라고 부르는 이들의 삶이 농밀히 녹아있다. 작가는 마치 쏘야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경험을 그대로 옮겨놓기라도 한듯, 현실보다 더 실제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출국심사 과정에서 잔뜩 위축되어 있는 쏘야가 "너무 무서웠어요. 육년이 그랬어요.", "너무 이상해요. 돌아가는 일 이렇게 쉬운지 몰랐어요." (51쪽)라고 내뱉는 장면에서, 지금은 종료된 방송 프로인 <러브 인 아시아>가 떠올랐다. 쏘야도 어쩌면, 한국으로 시집와서 고향에 10년만에 간다는 이주여성들의 표정을 짓고 있겠구나 싶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급하게 짐을 쌌을텐데도 가족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온 쏘냐의 가방을 들여다보면서는, 삶이 본래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 소설집에는 또 다른 '배웅'의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 중 하나인 「망향의 집」에는 납북피해어민 중 한 사람인 기로성 노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마지막 임종 이야기를 지켜보던 나는 실향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민우씨 오는 날>이 이산가족의 상황을 잘 표현했듯, 이 소설은 실향민의 마음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들이 배웅 나와 노인들을 병원 앞 중국식당으로 모셨다. '(220쪽)
자신의 아버지 기로성을 찾아온 노인들(마찬가지로 납북피해어민들)을 배웅 나온 아들. 문득 이 배웅의 행위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건, 소설 속 노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듯 현실에서도 그렇기 때문인지 모른다. 먼저 와 우리를 마중해주던 세대를, 이제 우리가 배웅해야하는 시점이 온 것이다. 마중하다. 누군가를 배웅하던 이야기들은 다시 누군가를 마중하는데로 옮겨진다. 그리고 여기 조금 더 적극적인 마중을 해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소설「영접」에 나오는 군청 소속 양 계장과 오양숙, 박송이. 이들은 지방관청에서 대통령을 위해 특별히 꾸려진 팀으로, 철두철미한 보안 속에 각하를 맞을 준비를 한다. 그 중 차를 나르는 역할을 맡은 박송이라는 인물이 다방 레지에게 특별수업까지 받으며 영접 준비를 하는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가장 재밌는 부분 중 하나였다. 마중의 행위는 이 소설 속에서, 어떤 정신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국화를 안고」에서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미 고인이 된 한 남자를 흠모하는 여성이 나온다. 그녀가 마음을 쓰는 남성은 광주학살 때 죽은 사람으로, 그녀가 재직 중인 국민학교의 졸업생이기도 하다. 남자가 죽을 무렵 대학생이었던 그녀는 일말의 부채감을 느끼며 그에게 이끌리고 남자를 마중하듯 그의 무덤가에 찾아간다. 그러다 그녀가 다니는 절에서 남자와 읍내 오의원 댁 죽은 딸의 영혼결혼식이 진행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마지막에 암자의 승려 하월과 조우하며 증폭되는 감정선이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마중하고 배웅하는가. 내게 전반적으로 '배웅'과 '마중'의 테마로 읽혔던 열두편의 소설들의 동선을 좇다, 나는 부득이 작가의 어머니었을지 모르는 어느 치매노인과 마주치게 된다. 이 소설집의 맨 처음인 「소풍」과 맨 마지막인 「이야기를 돌려드리다」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만날 수 있다. 이 두편의 소설 외에도 이 소설집 곳곳에는 치매, 즉 기억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스며있다. 본인도 습작을 해본 짧은 경험이 있다. 소설창작은 어쩌면 자신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떤 이야기와 끝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의 반복인지 모른다. 여러 편의 소설에 연거푸 등장하는 소재는 부득이 작가 자신의 이슈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전성태 작가에게 '치매 어머니'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끝없이 마중하고 배웅하며 만남을 지속해온 존재인지 모른다. 두개의 자화상이 아닌, 『두번의 자화상』 나는 문득 작가가 한번이 아닌 두번의 자화상을 그리게 된 중심에 '치매 어머니'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그가 어머니를 둔, 누군가의 아들로서 그렸을 자화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작가이기 앞서 가족을 가진 한 사람임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마침내 열두편의 소설과 작가의 배웅을 받아 어딘가에 당도한 나 자신을 바라본다.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의 동선을 좇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
12편의 소설의 동선을 좇아 마지막에 당도한 곳은, 소설의 내부가 아닌 외부였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소설의 이야기들을 만났고, 인물들이 서로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결국 '나의 삶' 에 도달했다고 느꼈다. 그런데 종착지에 '나만의 삶'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란 울타리엔, 가족을 그리워하는 외국인 노동자(「배웅」)와 실향민들(「망향의 집」)이 있고, 여전히 간첩 취급을 당하기 일쑤인 북한이탈주민들(「로동신문」, 「성묘」 )이 있고 힘든 삶을 못이겨 농약을 먹고 죽어버린 아버지(「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가 있고 매춘을 하며 살아가는 여자(「낚시하는 소녀」)가 있었다.
문득 우리가 배웅하고 마중하는 인생이, 오롯이 나만의 것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척하고 외면하려 했던 곳에 많은 이들의 삶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강인하고 아름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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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극적이지 않고 잔잔하다. 하지만 매우 슬프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노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노인의 치매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다.
작가의 세대가 86세대여서 아무래도 80년 광주 항쟁에 대한 소설이 몇개 있다. 당시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이후 견디는 과정을 소개한다. 2010년도에도 여전히 그렇게 견디면서 지나가고 있다.
군사 독재시대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간첩은 조작되는 것이고, 중세 마녀와 마찬가지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납북 어부는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간첩으로 조작된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재심으로 보상을 받긴 했지만 아픔은 남아 있는 것이다.
작가의 관심은 계속해서 탈북자 등의 북한 주민에게 가 있다. 탈북자가 많이 사는 임대아파트의 경비 노동자를 통해서 장면들을 스케치하고 있다. 아울러 적성군인묘를 이웃하여 인간적인 정을 다하는 은퇴군인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소개한다. 한국전쟁에서 발굴된 중국인, 북한인 유해로 만든 무덤이 있고, 이것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소설을 통해 알게 된다.
해외이주노동자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불법체류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인천공항 출국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일상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직업여성이 손님을 가로채 돈을 버는 여학생이 나온다. 친구의 낙태수술비용에 보태기 위해서이다. 아직 대한민국의 복지가 가야할 길은 멀구나 생각된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2010년 사회의 단면을 보는 느낌이다. 자극적이고 현란하지는 않지만, 슬프고,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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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리를 잡고 거꾸로 털면 딱 두 글자만 나올 듯 싶습니다. "백수" 이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반년간 못 본 게임 동영상 모아서 보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마당을 빈둥거리기도 하는데 여름날 낮은 아주 길지요. 그래서 시간은 요즘은 더디 가는 듯도 싶습니다. 이러다 정말 폐인 되는 것은 아닌지...
"행복만을 보았다"이후 바로 책 한권을 다시 읽었습니다. 전성태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입니다. 단편소설이 몇편 엮어진 소설집으로 시간 오래걸리지 않고 부담없이 차분하게 읽기 좋은 분량의 소설집입니다. 전성태란 작가는 이번에 처음 알게되었는데,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을 잡아내 삶의 진솔함에 대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듯한 허구성이 완전히 배제된 느낌처럼 내 주변에서 어느시점 어느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을 법한 사건과 인물들이 사실적으로 등장해 삶에 대한 진솔한 감정과 허무함 혹은 살아있는 교훈 등을 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사건의 발생상황과 주제도 다양합니다. 치매에 걸린 듯한 어머니, 외국인 노동자와 과거 사장여자, 창녀의 일상과 어린 딸, 골동품 수집상과 영악한 시골할머니, 아파트경비원과 탈북자, 실향민, 시골 선생님과 관련한 사건, 소설 소나기 느낌 비슷한 시골소년과 전학온 소녀, 그리고 마지막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자전적 느낌의 소설까지...나는 이 소설들의 특징을 다양한 주제와 사건들이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일상의 아주 작은 자락을 잡아 현미경들여다 보듯 세밀하게 묘사해 우리가 잊고 있을지도 모를 삶의 진실과 인간에 대한 진솔한 탐구라고 말입니다.
소설가의 능력은 어쩌면 단편에서 증명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쩌면 은유적으로 또 어쩌면 사실적으로 함축하고 요약해 독자에게 감동과 여운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여유로운 능력은 아닐테니까요. 일상을 관찰하고, 정리하고 그 속에서 자기 느낌을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기 적듯 기록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속에 사람의 향기와 진솔함을 담아 낸다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단연 [밥그릇]을 선택하겠습니다.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반전이 있는 골계미가 있는 아주 재밌는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등장인물의 느낌과 황망함이 사실적으로 전달되는 것도 같고요. 다시 생각해 봐도 웃음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