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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의 제목에 '바람'이 들어가지 않았거나, 책 표지 속 소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집어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을 펼치기 직전까지, 나는 특별한 기대나 별다른 환상을 품고 있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촉박한 시간에 쫓기며 대충 눈에 보이는 책을 덥썩 집어왔을 뿐이고,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내 손에 들려진 게 이 소설이었을 뿐이다. 이 책을 골라와 읽기 시작한 그 순간에도 나는 이 소설이 내게 어떤 의미로 남겨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찬찬히 소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한 뒤에야 나는 이 책이 처음부터 내게 어떠한 '끌림'을 선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근래, 아니, 내가 살아오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좋은 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와 명지의 첫 만남을 담은 첫 부분부터 어쩌면 나는 이 소설에 매료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하는 순간, 내 예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궁극적인 메시지가 따뜻한 긍정인지, 아니면 차가운 조소인지 알 수가 없어서 더 매력적이었다. 끝내는비극으로 마감한 마지막임에도, 이상하리만치 따스하게 피어나는 부드러운 감성이 주는 여운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어야만 했다. 주인공들의 성장 속에 담긴 메시지가 터무니 없이 희망적이지 않은 점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청소년 문학' 컬렉션으로 발매한 출판사의 어리석음에 더더욱 혀를 차야만 했다.
이 책을 애초부터 '청소년 소설'로 인식하며 읽어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청소년들을 위한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해야만 했다. 좋은 책이다. 정말 좋은 책이지만 막상 이 소설을 쉽게 아이들에게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청소년 문학은 무조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야만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필요 이상의 잔혹함과 지나친 현실성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었다. 최소 고등학생 이하의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이 책이 '청소년 문학' 시리즈로 떡하니 나와 있는 것에 회의를 품어야만 했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해서 그게 꼭 청소년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까지 아이들의 삶은 밝을 수 없었고, 순탄치 못했다. 날고 있는 기분을 느끼며 추락해갈 바람산 정상 위의 명지와, 활활 타오르는 집에 갇혀 죽어서도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할 석준이, 모자란 현실 속을 체념하며 살아야 할 소주의 절망이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 살아줘서 고마워, 아픈 시절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삼켜내는 상처 가득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한참동안 먹먹한 기분을 느꼈다. 섬세하고 차분하며 때로는 냉소적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앞서나가지 않으며 감정의 과잉 없이 올곧게 페이스를 유지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권하은이라는 작가는 언젠가 더욱 좋은 책을 쓸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이 책은 내게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어떤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망연히 앉아있겠지. 바람산의 전설 속에 등장했던 어떤 남자의 인생, 그리고 세 아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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