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은 미안함으로 남는 거죠. 영혼이라도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이 마음을 좀 알아주실까 싶은데 아버지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 알아주실 것 같지가 않네요. 그래도 아버지에게 미안한 걸 알기라도 했으니 그게 어디에요. 하하."
-정지아 작가 인터뷰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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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 정지아, 출판사 창비) 올해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본 터라 이 책의 제목에 먼저 끌렸고 추천도 받았기에 읽어보았다. 빨치산이라는 묵직한 내용을 다루지만 인물들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웃기고 울렸다. 빨치산 부모를 둔 주인공에게 치매 걸린 아버지가 갑자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시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실제 자신의 부모님이 빨치산이었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라고 소설 속 주인공이 말하는 것처럼 빨치산이었던 부모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빨치산인 부모가 작가에게 물려준 신념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문객들이 들려주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와 주인공이 회상하는 아버지를 통해 마치 아버지라는 흙덩이가 새로 빚어지는 느낌이었다. “자네 혼차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 밤도망 가버린 아랫마을 용식 아내의 빚보증을 주인공인 딸에게까지 지게 만들어악다구니 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방물장수를 하룻밤 재워주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 말에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어머니는 자칫 어둡고 한스럽게 흘러갈 수도 있었을 이 소설의 분위기에 탄산과 같은 청량감과 따뜻한 웃음을 준다. 어찌 보면 오지랖일 수 있는 아버지의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가족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겪은 투쟁의 시간과 신념 아래 아버지와의 대립이 아닌 아버지와의 끈끈한 연대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동료며 친구이자 빨치산으로 죽은 전남편을 수시로 아버지와 비교하며 거리낌 없이 “우리 윤재는 뭐시 어떻고...” 이야기 하지만, 아버지는 가벼운 농으로 넘긴다. 몸 약한 자신을 위해 욕구를 삭혔을 젊은 날의 남편의 정을 떠올리며 눈물짓던 어머니는 화장 중인 아버지를 향해 “쫌 대줄 것을...” 후회한다. 나는 이 말이 “사랑해”라는 말보다도 더 깊은 사랑과 동지애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산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며 그토록 고생하며 투쟁했던 건 민중을 위해서였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였다. 바로 그것이 부모님의 신념이었고 당신들의 존재 이유였다. 비록 현실은 사회주의의 실패와 거대하게 몸집을 키워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자본주의가 크다 못해 더 이상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필요한 신념 즉,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을 믿고 도우며 살자는 아버지의 신념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뒤통수만 맞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준 것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던, 아버지를 도왔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신념은 바로 사람이었다. 먼지에서 시작된 존재가 생명이 있는 동안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인 노동을 하며 현재에 의미를 찾고 서로 돕고 살다가 죽어서는 거름으로 돌아가기 위해 “꼬실라서 뿌레삐레라”는 유물론을 이 책을 통해 따뜻하게 배웠다.
주인공은 아버지 생전에 사회주의자로서, 혁명가로서의 아버지로만 알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하는 사람들을 통해 사회주의자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더 깊고 풍성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를 실감하고 눈물을 흘렸다. 빨치산이라는 단어만 알았지 그 전후 역사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고, 처음 이 책을 봤을 땐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입말이 많이 나오고, 계속 찾아오는 조문객들이 뒤섞여 이게 무슨 말인지, 이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읽는 내내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소설 끝으로 갈수록 주인공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생생해졌듯 나에게도 소설 속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구례 사람들이 생생해지는 느낌이었다. 나 또한 주인공처럼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에게 내가 베푼 것을 인정받지 못해 상처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깊은 관계보다는 느슨한 관계를 추구하면서도 외로워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살면서 사람으로 인해 힘에 부칠 때, 소설 속 아버지의 사람에 대한 신뢰, “긍게 사람이제, 내가 믿으라 했제”를 떠올리며 살아간다면, 훗날 내 자녀들은 모르는 나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조문객이 한 사람 더 찾아와주지 않을까한다. 다만 빚보증은 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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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해 다시 찾은 아버지의 참모습"
정지아의 < 아버지의 해방일지> 를 읽고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한 편의 블랙 코미디같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 이야기-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 소식에 서둘러 우리는 조문을 하러 장례식장을 찾는다. 살아 생전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인간 관계를 맺었는지는 고인의 장례식장에 가보면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조문을 하러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과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고인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이렇듯 죽음을 통해 우리는 고인의 참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아버지는 평범한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죽음도 보통 다른 죽음과는 다른 특별하고 의미가 있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작가가 평생을 '빨치산'으로 살다가 죽은 아버지를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추억한다. 아버지를 조문하러 온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아버지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된다.
'빨치산'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빨치산이라는 말만으로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만하다. 빨치산이야말로 우리의 아픈 역사이며 또 하나의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의 허리는 나뉘어지고 5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한반도의 최전방에서는 한국전쟁과 함께 또 하나의 동족간의 내륙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치산 전투'였던 것이다. 그 당시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살인과 폭력 모든 것이 정당화되었다. 멀쩡한 사람도 빨갱이로 몰려 무차별하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시대였다.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은 어쩌면 한국전쟁만큼이나 민족사 최대의 비극일지 모른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아무런 죄책감없이 자행된 살육과 약탈을 보건대 빨치산이든, 경찰이든, 그들의 가족이든 모두가 피해자임을 이 책 속 아버지의 삶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었다' 라는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짧은 두 단어 속에서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듯하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빨치산으로써 이념을 고수하며 혁명가처럼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볼 때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어 오히려 웃음을 자아낸다. 그렇게 평생을 진지하게 혁명적으로 살아온 아버지는 왜 그런 어이없고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한 것일까. 아버지는 한평생을 빨치산으로 낙인찍히고 감옥살이도 하다가 결국은 고향에서 농부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이념을 고수하며 살아간 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고통의 삶을 생각해볼 때, 그의 죽음은 허무하게 보인다.
빨치산이었던 부모를 둔 덕에 작가는 평생을 '빨치산의 딸'로 살아야했다. '빨갱이'라는 말처럼 빨치산이라는 말 또한 낙인이 되어 평생 그녀의 삶을 옮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자신이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을 밝힌 정지아 작가는 소설 속 '아리'의 어린 시절처럼 중고등학생 시절 아버지의 빨치산 활동으로 아버지가 감옥에 수감되며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자신이 '빨치산의 딸'이기에 밖에서 할 수 없는 말과 감정 등을 글로 적어내고 책을 읽으며 문학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빨치산의 딸로 산 자신의 삶은 그녀의 아버지만큼이나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어쩌면 작가에게도 해방일지도 모른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작가 자신도 빨치산의 딸이라는 오명에서, 낙인에서, 연좌제를 포함한 차별과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쩌면 그녀를 구원하고 마침내 해방시켜준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를 치르면서 책 속 화자인 '아리'는 아버지의 여러 모습들을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던 다양한 조문객들을 통해 만나게 된다. '빨치산'인 형을 두었기에 연좌제에 묻혀 출세도 못하고 술로 허송세월 보내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빨치산의 딸인'아리'의 삶만큼이나 안타깝고 비극적이다.
“니는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묵었냐?” 집안 다 말아묵고 넘의 인생 망친 놈이 가마니로 가만히나 있제 멋이 잘났다고 멀쩡한 사램을 벵신 맹글고 지랄이여 지랄이! 동상 뱅신 만들고 잠이 처오드냐?" -p. 38-39
빨갱이 형 때문에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해온 그의 동생은 형과 평생 반목하며 지낸다. 형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에 대꾸도 없이 냉정하게 끊어버린다. 결국 작은 아버지는 형과 제대로 화해조차 못하고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 것일까. 살아 생전에는 서로가 화해하면서 용서를 하지 못했지만, 형인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동생은 죽은 형과 화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아버지의 딸이자 동생처럼 가족들은 빨치산인 아버지를 둔 이유 하나 때문에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런 삶 속에서 딸인 '아리'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미움을 쌓였을지 모른다.
아버지로 인해 이렇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리는 장례식장에 조문온 아버지의 친구들을 포함한 아버지와 관계 맺어온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소학교 동창이자 시계방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인 박선생, 아들이 없는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들' 역할을 하며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장례를 도운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학수, 아버지의 담배 친구인 샛노란 머리의 열일곱살 소녀 등을 통해 아리는 아버지의 삶을 재조명한다. 그들이 전해주는 각각의 다양하고 입체적인 아버지와의 일화들은 아버지인 '고상욱' 이라는 사람의 삶을 이루는 퍼즐 조각과 같다. 비록 아버지는 가족들에게는 빨치산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주었지만, 열일곱살 짜리 소녀의 담배 친구가 되어줄만큼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이해해주었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품고 있는 생각과 마음들이 사람들에게 베풀어온 살아온 아버지의 삶을 증언해주는 것 같다. 그들이 증언하는 일화들 속에서 생전 아버지의 모습이 되살아나며 '아리'는 아버지와의 추억도 소환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이야기 속 화자인 '나'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된다. 빨치산의 딸로 힘겨운 삶을 살아온 화자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사회주의자였고 혁명가였을 뿐 가족을 부양하고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족들 모두가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있는 고향을 떠나 혼자 살고 싶어했다. 그런 모든 차별과 속박, 비난이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된다. 자신이 정작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던 걸까?" 장례식장을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인정많고 현실적인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보다 아버지의 모습을 닮고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아버지가 우상이었고,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이었음을 생각해낸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p. 198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한 후에야 비로소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게 된다.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들고 '아무데나 뿌려삐리했다니까' 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그를 자유롭게 보내주게 된다.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들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p. 265
이 책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그 3일간의 이야기가 책 한 권이 될 정도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짤막짤막한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함께 이루어져 생생한 대화를 듣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색깔 논쟁이 사라지지 않았다. 배척과 갈등의 말이자 금기어였던 '빨갱이'라는 말은 아직도 우리 삶을 지배하고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시대와 역사가 만든 희생과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빨갛지도, 파랗지도 않는 그들 모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빨치산의 딸로 살아오느냐고 힘들었다고 이야기 속에서 말하는 작가처럼 이제는 더이상 그들의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래본다. 또한 용기있고 당당하게 자신이 빨치산의 딸임을 밝히고 이념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준 작가님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p.224
"미안함은 미안함으로 남는 거죠. 영혼이라도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이 마음을 좀 알아주실까 싶은데 아버지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 알아주실 것 같지가 않네요. 그래도 아버지에게 미안한 걸 알기라도 했으니 그게 어디에요. 하하." -정지아 작가 인터뷰 내용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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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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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2023.1.25. sanbaram
빨치산 활동으로 감옥살이를 한 것은 물론 80평생을 가족형제와 친척의 죄인으로 살아온 아버지의 장례식 3일간의 기록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일제시대 소학교를 나올 수 있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를 가졌던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고상욱은 이웃사람들을 잘 돌보고 마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빨치산이 되어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백운산과 지리산 등을 떠돌며 생활한 근성을 가진 사회주의자였다. 군당 인민위원장을 하면서도 주변사람들을 챙길 줄 알았고, 출소 후에도 이웃들에게 성심껏 도움을 주었지만 그 가족들과 친척들뿐만 아니라 이웃사람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몹쓸 사람이 되어 감시와 멸시 속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 소학교 동창이면서 죽기 전까지 매일 만나며 가깝게 지낸 박선생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여러 차례 장례식장까지 안내하고 조문한다. 장례식장에 문상을 오는 사람마다의 사연을 딸인 아리는 듣고 그들과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화장터의 재로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지난날의 아버지와 그 사상으로 인해 우리의 불행했던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저자 정지아는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판매금지 서적이 되었고, 2022년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재출간 하였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p.7)”라고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의 이름이 개 이름 같은 ‘아리’가 된 것은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한의 리를 땄기 때문이란다. 이 이름 덕분에 주인공은 빨치산의 딸로 자라면서 숱한 홍역을 치렀다고 한다. 아리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씨는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의 중심 서울로 향하지 않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심지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향 반내골에 터를 잡았다. 아버지가 잡혀가기 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어머니보다 더 많이 따랐던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졌을 뿐 아니라 열심히 하던 공부도 손을 놓게 되었다. 안타깝게 생각한 담임선생은 우등생 친구들을 아리의 집으로 보내 방학동안 함께 공부하게 한다. 그럼에도 아리는 마음을 잡지 못했다. 딸의 생활을 방관하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질책을 하지만 주인공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p.12)” 소쿠리를 팔러 마을에 왔다가 나갈 때를 놓친 여인네를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에게 밥을 차리게 한다. 밥은 주었지만 잠은 다른 데서 자게 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빨치산 출신 어머니 또한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황사장의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다는 단 하나로 모든 벽을 뛰어넘어 돈독한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수도꼭지라도 튼 듯 쏟아지는 황사장의 헤픈 눈물이 아리는 미덥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다시 방관자가 되기로 했다고 심경을 토로한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원수였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p.35)” 아홉 살 때 작은 아버지는 학교 교실에 와서 ‘고상욱’씨를 본사람 손들라는 군인의 말에 자기 형이 문척면당위원장 이라고 자랑을 했을 뿐인데, 그 자랑이 군인들로 하여금 마을을 불태우고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는 평생 빨갱이인 형을 원망하고 살았다. 그런 막내아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싫고, 집안에서 제일 잘나 군당위원장까지 한, 시절 잘못 만나 평생 감옥에서 썩은 불쌍한 둘째에게 뭐라도 갖다 주고 싶기는 하고, 할머니는 작은아버지가 취해서 쓰러지거나 장에 간 틈을 타 생쥐처럼 은밀하게 아리 집으로 숨어들었다. 형을 원수로 대하는 작은아버지는 가끔 아버지를 찾아와 패악을 부리고 악을 쓰며 욕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배만 뻑뻑 필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음을 작은아버지께 전화 했지만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는데, 사진 속 아버지는 ‘당연히 그거사 니 사정이제’라며 모르쇠로 일관하며 사팔드기로 인해 어디를 보는지 모르게 어딘가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못 참는 사람이다.(p.81)”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제도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 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 봤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고 아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오죽흐면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p.102)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모심기하는 바로 전날 밤에 이웃의 전화를 받고 나가려는 것을 말리려는 어머니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주인 없이 모내기가 다 끝난 밤에야 들어왔다. 잘나가던 사위가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손을 쓸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이웃의 한밤중 전화를 받고 나가 험한 일을 다 해주고 병원까지 뒤처리를 해줬지만, 택시비 하나 갚지 않는 이웃을 위해 집일을 포기하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리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 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 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고 박사학위로 대학 시간강사를 하는 아리는 판단한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 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고등학교를 중퇴한 여자아이의 말이다. 엄마가 베트남 출신인 모양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미제국주의 운운, 아버지다웠다.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담배를 피우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이가 겪어왔을 세월을 아리는 당연히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리의 아버지는 윤재의 절친한 동무이자 동지였다. 죽은 친구의 아내와 결혼해 살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죽은 친구와 늘 비교당하면서도 화 한번 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심리를, 주인공 아리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같이 흐느끼는 친구의 동생을, 아내의 전 시동생을, 영정 속 아버지가 사팔뜨기 눈으로 보는 듯 아닌 듯 지켜보고 있었다. 느그 윤재 동상 봉게 좋은가? 내 동상 볼 때게랑 영판 다른디? 아버지가 그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p.169)” 때마침 조리실과 연결된 문이 활짝 열렸다. 떡집 언니였다. 민노당 연락책을 맡았던 이의 딸로 아리의 부모를 친부모처럼 챙겨온 언니가 전복죽으로 가득한 커다란 들통을 내려놓았다. 이때 자기 형을 아버지가 산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원망하던 노인, 월남전에서 한 다리를 잃은 노인이 술에 취해 걸어 나간다. 그게 아버지가 평생 살아온 세월이었다. 35동창들은 소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함께했고, 빨치산 어른들은 청춘을 함께했다. 곡성 가톨릭농민회, 구례 민노당원들은 감옥에서 출소한 아버지가 이 세상과 어우러지며 만든 인연이었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대는 중이다.(p.224)”라고 아리는 말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라고 아리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아리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평생 알아온 아버지의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p.249)’라고 아리는 말한다.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들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p.265)”라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아버지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백아산에 수목장 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 있을 이곳저곳을 찾아가 유골을 뿌리며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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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빈소를 들락거리는 일도 많이 있게 되었다. 가까이 모시던 분들을 모두 빈소에서 떠나보내고, 영원한 이별을 했다. 집안의 어른들도 거의 내 곁을 떠났다. 지인 가족들의 빈소도 많이 찾았던 듯하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사람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는 솔직해 진다’고, 많은 사람들의 진솔한 얘기들을 듣기도 했다. 그것들은 충분히 얘깃거리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언어에 향기가 묻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충분히 다듬어 맛깔나게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빈소에서는 확실히 많은 이야깃거리가 탄생한다. 이 이야기는 빈소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를 재료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과 상주로서 며칠을 생활하는 사이에 겪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물론 그 며칠 사이의 이야기가 고인과 상가에 들리는 사람들의 과거에 맞닿아 있다. 역순행적으로 과거의 나들이가 행해지고 과거의 삶들에 대한 진단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도록 근원을 밝혀 나가는 내용으로 첨언해 나가고 있다. 아버지의 주검, 그것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화자의 눈을 통해 매끄럽게 전개되어 나간다.
아버지의 죽음과 문상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자녀가 딸인 나 혼자 뿐이다. 내가 혼자 상주로 빈소에 앉았다. 나도 이제는 많은 세월이 얼굴에 다가와 있다. 이순에 가까이 닿아 있는 나는 빈소에서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방문객들을 맞는다. 혼자서 빈소를 지킨다는 것은 무척 힘에 겨운 일이다. 나중에 4촌들이 찾아와 같이 상주 노릇을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다소 시간적인 위안을 얻으며 두루 주변에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여유도 있게 된다.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지리산, 백운산에서 투쟁을 하였고 나중엔 남부군에 편성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 산에서 내려와 자수를 한다. 공산당 지하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위장 자수다. 당연히 정치적 조직에 참여하고 투쟁을 한다. 그러다 잡혀 감옥살이를 한다. 아버지는 비교적 이념에 투철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비전향장기수가 되어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풀려난다. 그리고 정치적 온상인 서울로 가지 않고, 고향에 반내골에 정착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삶을 이루어간다.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나라에서는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그를 늘 감시한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의 철저한 신봉자다. 생활에서도 공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삶을 산다. 주변의 가족들은 힘들게 만들지만 인민으로 생각하는 타인에게는 언제든 봉사할 마음이 되어 있다. 마을에서 살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돕는다. 주변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를 찾도록 할 정도로. 즉 아버지는 이념에 대한 신념이 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을 생활화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자신의 삶보다는 옆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가족의 삶보다는 민중들의 삶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겐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삶이기 때문이다.
한 번은 마을이 힘을 합쳐 모내기를 하는데, 우리 집 차례가 되었다. 그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 년 농사인 모내기를 위해 자신의 집에 마음을 다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먼 이웃이 사고를 당했다고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집의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사고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집안일은 도외시하고 그 사고를 자신의 일인 양 처리해 준다. 집의 일은 엄마가 고생을 하며 마무리하고 있는데 자신은 뒤늦게 집으로 들어온다. 약방에 감초처럼 곳곳에 끼어들면서 가족을 힘들게 만든다. 그 일은 엄마의 심장을 빡빡 긁어 놓는다. 하지만 인민을 내세우며 같이 빨치산 생활을 했던 어머니의 입을 막는다. 이런 일들이 나에겐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면서 아버지의 삶이 하나씩 드러난다.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어 조카가 진학하는데도 방해가 된다. 당시에 공익을 위한 단체(육사)에 들어가려면 연좌제를 적용했다. 가족 중에 누가 나라에서 생각하는 불온사상을 가진 자가 있으면 신원조회에 걸리게 되어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조카가 그런 경우를 당한다. 육사가 조카의 꿈인데, 연좌제에 결려 떨어지고 낙담을 하게 된다. 그 전까지 나와도 살갑게 지냈는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서먹해지는 관계가 된다. 아버지의 지난 삶이 조카의 진로를 막아버리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그 일은 일가들에게 깊은 상처가 된다. 그러니 아버지를 그들은 좋아할 수가 없다.
흔히 공비라고 이름 붙여진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심리가 드러난다. 이것은 반공으로 교육된 당대의 시대적 흐름도 한 몫을 할 듯하다. 공산주의라고 하면 이를 갈고 반대하도록 한 시대적 정신이 노인의 언행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빨갱이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이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았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이념은 종교적인 그것처럼 타협이 없다. 자신이 가진 생각들이 무조건 옳다. 그것에 방해가 되면 처단을 해야 한다. 그 지독한 언행이 일반인들에겐 주눅이 들게 만든 것이다. 인민을 위한다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이념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일 게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주의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제도권 속에도 들어왔다. 그들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끼리끼리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고, 힘을 발휘하기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빈소에 놓인 정치인들의 화환,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으리라. 민중들에게 조금이라도 자신들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리라. 그것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일반인들에게 악담의 요소가 되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이질감이 아닐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념과 사상보다는 인정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전남 구례가 이 글의 무대다. 그곳의 사투리가 걸쭉하게 상황을 잘 표현해 나가고 있다. 조금은 거친, 그러면서도 인정이 묻어나는 언어는 소통의 요긴한 도구가 된다. 사투리가 있기에 이념이 다른 사람이라도 서로의 가슴으로 다가갈 수가 있다. 이 글에서 사투리는 그 인정을 드러내는데 일목 담당하고 있다. 분노를 표현한 사투리가 안으로 자꾸 말려드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동질성 때문이다. 사투리가 이 글에서 하는 기능이 대단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기능까지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한 몫을 당당히 하고 있는 방언, 소설적 소중한 장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많은 이슈를 접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장례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뛰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 경희를 통해서 종교인들에 대해 느끼는 관점, 빨갱이와 민노당 지부 결성 등을 통한 정치적 동지들의 유대감, 고향 반내골에서 생활하면서 만나는 농민들의 삶의 힘겨움, 아버지를 잃게 만들고 공부를 못하게 된 동생을 통해 가정을 파괴하게 만드는 이념의 허구성, 어린 담배 친구와 만남을 통해 인간적으로 인민에게 다가가는 아버지의 신념의 삶, 박선생을 통해 인정으로 만나는 삶의 소중함 등이 말해진다. 아버지의 인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상가의 문상객들에 의해 재현된다. 서늘하고 처연했던 상가가 활기를 띠게 되는 것은 아버지의 인품 때문이 아니랴 생각된다. 아버지의 삶을 재현해 보게 만드는 문상객들의 모습을 만나면서 상주 아리의 시선은 차츰 변모해 간다.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아버지는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진지한 모습으로 죽었다. 죽음이 상당히 희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공산주의자로 가정의 삶에 등한시했던 아버지에 대한 화자의 의식은 냉소적이다. 처음 시작은 그렇게 느껴진다. 더구나 가족을 그리 고생시키고, 결국엔 치매를 가지고 살아가다 그런 결과를 만들고 있음에 따뜻한 시선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빈소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모해 나간다. 희극적인 언행이 진지한 모드로 변해간다. 아버지의 소멸을 통해 아버지가 행한 삶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으로 이끌어낸다. 즉 소멸한 아버지를 불멸의 존재로 소생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념이나 사상, 신념과 상관없이 가장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살다간 아버지를 다시 일깨워보는 화자의 눈시울이 느껴진다.
화자는 아버지의 삶 속에 신념을 가지고 지식인으로 살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찾는다. 공산주의 이념 때문에 정치적 동지들과 연계를 했던 일을 만나고 그것이 현재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본다, 가끔씩 들려준 정치적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의 신념을 다시 느끼고, 투쟁 당시 질 것을 뻔히 알고 한 싸움 속에서 굳센 결기를 볼 수가 있었다. 정부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분노를 느꼈고, 타인의 어려움을 자신을 일처럼 돌보고, 아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한 속에서는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장지를 두고 논의를 행하는 정치적 동지들의 모습에 감사와 덧없음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결국 장지는 아버지가 좋아했고 많이 머물렀던 곳에 뿌리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행해 나간다. 이념을 배웠던 학교, 인정을 나누었던 삼거리, 빨치산 활동을 했던 지리산, 백운산, 또한 아이와 담배를 피우며 자격증 합격하면 술을 사겠다고 약속했던 자리까지. 아버지가 마음을 나누며 살았던 곳에 아버지를 영원히 살게 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놓아주는 장지를 선택을 한다.
집단으로 인간들을 보면 그것은 기계에 불과하다. 집단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인간을 얼마나 매몰하게 하는지 모른다. 이 글을 통해 개인은 개인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함을 느꼈다. 개인이 가진 장점을 살필 수 있는 안목,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민족의 역사 중, 아픈 손가락의 하나인 빨갱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책속에서 빛을 발견한 느낌을 지닌다.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을 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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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을 망나니의 칼처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사용하던 독재정권 하에서 자신이 ‘빨치산의 딸’임을 당당하게 밝혔던 이가 바로 이 작품의 작가이다. 부모가 모두 빨치산 출신이며 그들이 활동했던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한 글자 씩 따서 이름을 지었다는 작품 속의 ‘아리’는, 아마도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지아)의 분신일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지리신 자락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념으로 갈렸던 과거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갔던 인물이 바로 작품 속의 아버지(고상만)이자 작가의 아버지라고 하겠다. 작품 속의 아버지는 누군가에게는 동질감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퍼붓는 원망의 대상으로 한평생을 살아갔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그대로 실제 작가의 아버지의 일생이기도 했을 것이다.
‘연좌제’라는 제도로 인해서 미래의 희망이 좌절된 친지들에게는 마치 원수처럼 여겨졌기에,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전봇대에 부딪혀 돌아가셨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소설로, 딸인 아리의 시선에서 아버지의 한평생을 회상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문상을 온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되면서, 자신이 선택했던 모든 것들에 묵묵히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냈던 아버지의 흔적을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진정으로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딸인 ‘아리’는 아버지의 삶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비로소 죽음 뒤에 이념으로 갈등을 겪던 세상에서 ‘해방’되었을 아버지의 삶의 자식의 입장에서 ‘일지’ 형식으로 풀어낸 내용이라고 하겠다.
섦의 기로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선택’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이후의 모습이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빨치산’이라는 아버지의 선택도 그렇게 이뤄진 것이고, 이후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누군가의 선택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대중들을 세뇌시키며,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불이익을 안겨주었던 권력의 그릇된 ‘행위’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그러한 효과가 사회의 일각에서 작용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지만, 작품 속 아버지의 자세처럼 모두의 ‘선택’이 온전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이 작품에서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이념’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자본’이 지배하던 세상에 맞서 당당하게 살아냈던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작가는 ‘아버지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었는지를 역설하고 있다고 하겠다. 근래 오로지 현재의 출세만을 위해 자신이 꿈꾸던 과거의 이념과 행적을 부정하면서, 한때 뜻을 같이했던 이들을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그릇된 과오를 반성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입신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렸다면, 그러한 삶의 행적을 마냥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점에서 젊었을 적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며, 올곧게 살아냈던 작품 속 ‘아버지’의 행적은 그야말로 진실된 삶의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잇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힘겨운 삶의 역정을 견뎌왔던 아버지의 삶의 이해하는 작가의 진정어린 ‘추도사’라고 이해하고 싶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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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소설의 첫 문장부터 심상찮다. 글은 첫 문장의 힘으로 써간다고 하는데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코믹하게 다룬 블랙코미디 답다. 더군다나 죽음의 당사자인 아버지는 빨치산 경력을 가진 사회주의자이다. 이 소설은 우리 사회에서 배척과 금기의 대상이었던 '빨갱이'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서 참모습은 어떠했는지 장례식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주는 얽히고섥힌 사연들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평소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하기만 했던 부모님과는 달리 '나'로 등장하는 작가의 필치는 유머러스하고 상쾌발랄하다. 그래서 우리의 어두운 역사와 날카로운 이념의 대결을 담은 장중한 내용이지만 글을 읽다가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등 내용에 쉽게 빠지게 된다. 진지하지만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아버지와 평생을 반목해 온, 그의 동생인 작은아버지와의 이야기다. 평생 술꾼으로 살면서 가끔씩 집에 찾아와 아버지 때문에 집안 망했다고 원망하는 작은아버지와 여기에 묵묵부답 대답하지 않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두번째는 구례에서 아버지가 사귀어온 친구들 이야기다.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색깔을 느껴보는 재미도 있다.
세번째는 ‘나’와 아버지의 이야기다. 정지아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열한 반성'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 소설은 ‘빨치산의 딸’로 힘들게 살아온 자신이 아버지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생활력도 없고 현실감각이 떨어진 아버지 때문에 불만을 품고 늘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지금까지 알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주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아버지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면들을 갖고 있었고, ‘나’를 사랑했던 순간들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네번째는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일화들이다.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는 현실적이다. 그래서 생활력과 현실성이 떨어지는 아버지는 이런저런 일로 어머니 구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론 옷을 털지 않아서,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때로는 빚보증을 서고 농사를 내팽겨져서 잔소리를 듣는 일이 다반사이다. 보통 부부처럼 티격태격하다가도 ‘유물론’과 ‘민족’ 앞에서는 경건하게 하나가 되는 장면들은 독자를 웃음바다로 이끌기도 한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나' 평소 아버지가 자주하던 말이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던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평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장례식 이후에서나 비로소 그 말뜻을 깨닫고 세상을 보니 이 세상이 왜 이리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어떤 삶의 길을 살아왔던지 거기에는 하나의 세상이 담겨 있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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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정지아 작가의 소설 [빨치산의 딸]을 읽은 적이 있다. 1권은 아버지에 대해 썼고, 2권은 어머니에 대해서 쓴 그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살아온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나고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더 큰 비극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바로 살아남은 부역자의 가족들이 겪은 고통이다. 연좌제가 엄연히 살아 숨쉬던 시절에 작가 역시 ‘빨갱이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런 표지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좌절과 번민의 시간을 보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라도 그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말조차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번엔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어쩌면 작가가 아버지를 보내드리기 위한 마지막 의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읽기를 주저했던 까닭은 다시금 그녀의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허나 25살의 나이에 썼던 [빨치산의 딸]과 50이 넘어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흘러간 시간의 무게만큼 아픔이 조금이나마 엷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은 구빨치였던 아버지가 죽은 후 장례를 치르는 3일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빨치산의 딸]에서 부모가 빨치산이 되는 과정에서부터 위장자수 후 형을 살고 고향인 구례로 내려오기까지를 다루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그 후 아버지의 삶을 다룬다. 소설은 장례식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통해 형제와의 갈등, 마을 사람들과의 삶,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작가 사이에 얽힌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작가가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로 시작되는 소설은 비장함보다는 슬며시 웃음이 삐져나온다. 그래서 당황했다. 조금은 비장하게 읽으려고 펼쳐 든 책인데 웃음부터 나오다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다고 소설 속 사회주의자의 삶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소설 속 화자 ‘고아리’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따서 지었다.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피와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화자. 그럼에도 아버지의 영향은 화자의 마음을 지배한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 빨치산 딸의 본질인 것이다.’(53쪽) 그런 화자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의 형제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살아온 세월을 더듬어 보게 만든다. 작은아버지, 큰집 사촌오빠, 그리고 사촌 언니들이 부딪히며 살아온 세월은 화자가 알고 있던 이야기,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섞이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주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고향에서 초짜 농부로 살아오면서 아버지가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는 화자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극히 일부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만든다. 아버지의 일화 등이 밝혀질 때마다 책을 읽는 나는 웃음을 터뜨린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가슴 아픈 이야기인데 오히려 가슴이 따듯해짐을 느낀다. 사람들을 통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하나, 둘 접하면서 화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던 순간순간들을 떠올리며 아버지를 가장 아버지다운 방식으로 보내드릴 결심을 한다. 아버지의 유골을 끌어안고 우는 작은아버지를 보며 유골의 온기가 근 칠십여 년 동안 화석처럼 굳은 작은아버지의 마음을, 아버지로 인해 곤궁했을 사촌들의 마음도 녹여주기를 기도하는 화자를 읽으면서는 가슴이 시리면서도 따뜻해진다.
책을 읽고 나니 아버지가 떠오른다. 어느덧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했는지 별로 자신이 없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후회한다는 게 우리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못나게 느껴진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작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추도사일 것이다. 가슴 아픈 민족사를 다루고 있지만 이 땅의 많은 아들, 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한 나 역시 아버지이기에 아이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을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웃음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지만 끝은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린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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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딸이 얼마나 있을까. 이해하려고 생각은 해봤을까. 자기 안의 신념에 갇혀 타인의 말이라고는 듣지 않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향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생각을 바꾸려 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자식들이 아무리 이야기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은 게 또한 아버지인 것 같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엄마 편에 선다며 서운해하는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쩌면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을 일부러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하면 불편한 감정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아버지 자신만 중요하게 여기고 엄마를 등한시했던 거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갈수록 크게 느껴지는 엄마의 빈자리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평생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작가가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장례를 치르는 사흘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자기 삶을 살아보지 못하여 반목한 작은 아버지와의 관계, 구례에서 만난 아버지 친구들, 나의 버팀목이자 사랑이었던 아버지와 딸의 관계, 남부군 투사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이웃 사람들의 진언으로 ‘나’의 기억으로 나타나 새로운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장례식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지와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전혀 모르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하기야 자식이 어떻게 부모의 모든 것을 알겠는가. 이름만 알고 있었던 인물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부모 세대가 걸어온 질곡의 현대사를 알게 한다. 마을에서 남부군으로 활동했을 당시 아버지와 반목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옥에서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와 터를 잡은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군인과 교련 선생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박 선생과의 우정어린 투닥거림, 노란 머리 여자애를 차별 없이 바라봐주어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었던 것은 아버지가 꿈꾸던 평등한 세상의 한 갈래였다. 열일곱 살의 여자아이와 맞담배를 피우며 아이가 포기했을 미래를 희망으로 이끈 점 또한 ‘나’에게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보통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그가 추구했던 사상만큼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예를 들면, 다랑논에 모심는 날 사고 났다는 전화를 받고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갔다. 아픈 엄마가 밤늦게 올 게 뻔한 데도 ‘오죽하면 글겄냐’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아버지를 제대로 바라볼 준비가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평생의 굴레를 준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뒤늦게 아버지를 제대로 보았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 알지 못한다. 몇십 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아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110페이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뭉클함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나도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안부를 물을 때 의무적으로 하지 않고 그리움 가득한 마음으로 하게 될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감정이 있다. 그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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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스탠스를 나에게 물을 때면 사회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하곤 한다. 간단히 좌파나 진보주의자로 나를 설명하기도 한다. 나는 스물한 살 무렵 군 복무 시절에 '김대중 죽이기',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고 소위 의식화되었다. 누구에게 학습 받지도 않았고, 공부 모임에 참여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책에 의해서 그리고 그에 이은 스스로의 자각으로 스무 해 넘게 갇혀 있던 매트릭스를 깨고 나왔다.
그 후에는 한 번도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유불리와 상관없이 소외받고 힘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지원하는 정책과 법을 지지했다. 혁명가인 양 유난을 떨지는 않았지만, 일상에서도 작은 것부터 평등을 지향하고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찾아 실천했다. 전통과 습관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어도 의식적으로 권위주의를 깨부수려고 힘썼다. 관점과 사고뿐만 아니라 행동도 늘 그렇게 유지하려 했다.
만약에 내가 일제 식민 지배 이후 해방 정국에 여순에 살았고, 그 시대 의식 있는 사람은 모두가 사회주의자였듯 나도 자각한 깨어 있는 청년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 '고상욱'은 그 시대에 사회주의를 선택했던 사람 중에 하나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많은 사람들은 신념을 바꿨으며, 대부분은 현실과 타협했다. 소수만이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그때의 혁명정신을 끝까지 간직했다. 아버지 '고상욱'이 그랬다. 그는 해방 이후 1948년부터 4년 동안 백운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그의 동지가 곁에서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4년간의 투쟁에 불과했지만 그의 신념은 죽기 전까지 50년을 넘게 지속된다.
저자인 정지아의 아버지가 실제로 빨치산이었으며, 어머니도 남부군 소속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창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의 인터뷰와 과거 저작을 살펴보니 그는 정말 빨치산의 딸로 한 평생을 살았다. 소설 속의 많은 부분들이 그가 듣고 체험했던 사실로 보인다. 그래서 글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가족을 떠올리면 그들이 겪었던 고난과 역경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나는 그 어려운 때의 사회주의자는 못 될 것이다. 지금은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사상을 드러내놓기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 나는 쫄보에 겁이 많고 약간은 이기적이다. 내가 좌파연하는 것도 손해 보지 않는 자리를 봐가며 한다. 일상생활에서 조그만 불편은 충분히 감내하지만, 내 눈앞의 큰 이익에는 약삭빠른 편이다. 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늘 내 안위와 퇴로를 마련해 두는 조금 비겁한 기질도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 커다란 바위는 되지 못해도, 수많은 조약돌의 하나 정도는 되지 않겠나.
작가 유시민이 추천한 책인데,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쓴 <남쪽으로 튀어>의 느낌과 비슷하지만 더 재밌고 감동적이라고 호평을 했다. 나는 오래전에 오쿠다의 그 책을 읽었고, 재미와 감동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책으로 언제나 꼽는다.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다양한 인물과 사연이 있다. 여러 관계의 갈등이 등장하고 해소된다. 웅장한 서사와 마음을 졸이는 긴장감, 낙차 큰 쾌감을 주는 소설과는 사뭇 다르지만, 잔잔한 감동과 따뜻함이 있는 소설이라고 나는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