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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어렸을 때 친구에게 처음 선물 받아 펼쳐보았던 책으로, 그 당시 부커상을 수상하여 막 유명해진 참이었다. 그땐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몰랐던 때였고, 다독을 하는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1부는 물 흐르듯이 문장만 넘겨 읽었고 2부는 문장을 넘어오는 역겨움 때문에 채 읽지 못했다. 책을 덮은 후에는 어느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 포르노적인 묘사가 얼마나 불쾌했는지,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뜻 모를 거부감이 피부를 타고 올라오더라. 그러다가 문득,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졌다. 내용이 역겹다던 감상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6년 전보다 아는 것도, 느낀 것도 많아진 지금 읽으면, 조금은 다른 이해를 하게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여전히 내용은 역겹고 불쾌했다. 그런데 전과 다른 점은, 그 불쾌함의 원인이 명료해졌다는 것이다. 영혜의 말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는 그의 가족이나, 그를 이해해 보려 한 적도 없으면서 전과 다른 낯선 면을 발견한 양 놀라던 남편이나, 그를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본인의 추악한 욕망을 실현하려 애쓰던 그의 형부가, 불쾌함의 원인이었다.
1부와 2부가, 그러한 불쾌함을 자아내는 인물들의 시선에서 진행된다는 점이,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영혜의 행동이 제멋대로 해석된다는 점이, 오히려 현실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영혜를 미쳐가는 사람으로 여기는 남편의 시선과 본인의 예술적 욕망을 실현시켜줄 뮤즈로 여기는 형부의 시선은 전부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맴돈다. 인혜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3부의 마지막에서야 결국, 영혜의 숨죽인 몸부림은 조금이나마 이해받는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인혜도 영혜와 같이 손찌검을 맞는 딸이었고, 수레에 매달린 개였으며, 이해받지 못하나 그 어떤 것이든 감내해야 했던, 식물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만 보였던 세상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쌓아올려진 제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그것마저 한계에 다다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흉내만 내고 있던 거라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데 흉내만 내느라 진짜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삶이라면, 짐승처럼 포효하느니 속으로 움츠러들어 흙과 하나가 되고 싶어지는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지만, 끝까지 완독하기 너무 힘들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영혜에게 쏟아지는 모질고 냉정한 시선들, 폭력적인 시선들이 문장을 넘어 나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이해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행동은 숨이 막히고 맥이 빠지는 것들이었다. 현실의 몰이해와 손가락질이 그대로 재현되는, 허구의 것일 텐데도 결코 허구 속에서 머무르지 않는 감각들을 그대로 받아내는 건 참 고된 일인 것 같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라는 문장이 발화되는 순간 '제정신'이 아니라는 시선이 따라붙는 건 언제쯤 바뀔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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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3부작으로 불리는 책을 읽었다. 꿈을 꾼 이후 채식을 하게 된 '영혜'를 중심으로 이뤄진 세 장편은 그의 남편과 동서와 언니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내가 읽기에 화자 셋의 고통이라기 보단 영혜, 영혜의 주변, 언니의 고통이라고 생각된다. 직접적인 고통과 간접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의 느낌을 표현한 것만 같다. 실제로 없을 법한 것도 아닌지라 이해가 가는 것과 동시에 불쾌하다. 개중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은 한 번 읽고서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작가가 무엇을 적고자 했는지 전달은 되지만 그렇기에 다신 보고 싶지 않다.
채식주의자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 읽고 또 읽었다. 마치 내가 꾼 꿈 같아서, 내가 겪은 실제 일만 같아서. 그 감각과 두려움이 너무나 생경해서 구토를 할 것만 같았다. 영혜는 이러한 꿈을 겪기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졌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온전히 자신만 느끼고 두렵기 시작한 꿈을 어떤 사람이 멀쩡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삼분의 일 가량은 영혜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렵지 않을까. 극단적이지 않았더라면 영혜가 정상의 범주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영혜의 변화는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되고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날고기를 씹던 것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짐승이었을까. 내가 그랬나. 나는 그럼 사람인가 짐승인가. '채식주의자' 속에서만 바라본다면 영혜가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조차도 저순간만큼은 내가 역겨웠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나는 결국 무엇인지.
영혜는 숨쉴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영혜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적어도 영혜 자신만으로 본다면 결코 영혜는 미치지 않은 것이다. 숨쉬고자 하는 마지막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몽고반점
외골수인 형부가 무엇을 찍고 싶었는지, 무수한 꽃과 잎들 속에서 어떠한 장면을 담고 싶었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벗어난 형부의 욕망은 더욱 더럽고 추악하다. 어쩌면 전부 내던질만큼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모든 것을 잃은 형부는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아내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예술을 앞세워 채운 성적 욕망은 계속 되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무 불꽃
영혜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었다. 미친 사람이 영혜였기에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영혜로부터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인 지아가 방어기재가 되지 않았더라면 언니도 영혜처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언니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는 영혜의 모습이.
주변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환멸,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과 극단의 조치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자신의 원하던 것의 답을 찾았다. 해방의 길을 얻었다. 그와 반대로 언니는 혼돈 속으로 집어던져졌다고 생각한다.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읽고 나면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누가 가장 '고통'인가. 그건 아무런 해답을 얻지도 표면적인 방어기재로 인해 찾지도 못하는 영혜의 언니이지 않을까.
영혜의 언니가 '정상'이라는 범주 속에서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고통이라는 숲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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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글을 작성하려던 것도 아닌데 쓰다가 컴에 무슨 이상이 생겼는지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어쨌거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억을 더듬어 다시 쓰자면.......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많이 들어왔다. 이 작가의 ㅣ이름도 독특하거니와 글을 읽어본 적도 없으나 외국에서 맨부커상이라는 상을 받았다는 언론보도를 통해서다. 솔직히 문학작품에 대한 상은 노벨상 말고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필자에게 그 상의 의미 혹은 가치는 깊이 다가오지 않았으나 언론의 대서특필을 보니 보통은 아닌게 분평한 작품인 것 같다. 일단 저질러 구매를 하였다. 아직 본격적인 읽기에 들어가지 않아서 소설의 내용을 아직 잘 모르나 가족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여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평소 소설을 자주 읽은 편은 아니나 이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의 마음에 미세한 울림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
노벨문학상 발표이후 한강 작가님 덕분에 나까지 왠지모를 들뜸에 가슴설레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뉴스로 기적같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주문한 덕분에 다음날 바로 받아볼수 있어 아끼고 싶은 마음은 뒤로한 채 한달음에 읽었다. 읽어야할 책장이 줄어들수록 아쉬워져만 간다. 책을 덮어도 덮어도 내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영혜의 마음이 맴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무서워지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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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라는 작가는 알고 있었지만 이 분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어요. 우연히 어느분 블로그보고 재미있어보여서 바로 주문 기대이상입니다!!! 갑자기 꿈을 꾸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부분은 납득이 가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 평범한 여자와 선택한 애정없는 결혼. 부인이 미치자 바로 이혼하죠. 충분히 이해 갑니다...... 그리고 형부와의 추문....... 이부분을 보년 영화로 만들어도 히트칠 것 같았어요 ㅎ 그리고 마지막 병원 입원 후의 일상...... 꼭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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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굉장히 불쾌하고 찜찜하고 불친철한 책이라고 생각되었다. 작가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러나 독자가 불쾌함을 느꼈고 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지닌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한강 작가님의 글을 볼 때 마다 정말 한 문장 한 문장 감탄하게 되며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인가 궁금해지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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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채식주의자>를 읽고 지난여름, 한 달 사이에 살이 3킬로그램 넘게 빠졌다. 다이어터에게는 부러움을, 가족에게는 건강에 대한 걱정을 살 만한 일이다. 무더운 날씨와 예기치 못한 업무량 그리고 사람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스스로 빼려고 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한강 전작주의'를 향한 나의 잡식주의 독서가 게걸스럽게 이어지다 이 소설 앞에서 여러 차례 멈추고 말았음을, 다시 말해 조금 읽다가 다른 작품들로 갈아탔음을 고백한다. 그러다 공교롭게도 올여름의 끝자락에 비로소 완독해낸 책이 바로 <채식주의자>이다. 소설은 어느 날 꿈 속에서 알 수 없는 얼굴을 마주한 뒤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며 스스로 나무가 되길 바라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영혜가 직접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의 배우자와 형부 그리고 언니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세 편의 연작소설을 통해 각자의 시선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퍽 흥미롭다. 그 속을 알기 힘들 정도로 말이 적고 감정 표현이 무딘 그녀를 곁에서 지켜봐온 사람들이지만, 과연 그들이 영혜를 오롯이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정녕 타인은 지옥인가. 영혜는 그 지옥에서 탈출하고자 채식주의자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부터 한지붕 아래서 그것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온 언니와 나머지 가족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안으로는 불온한 생각을 피워 올리는 남편과 형부까지, 주변인들 모두가 그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의 화신이 아니었을까. 식물에 대한 인상은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폭력적이고 무저항적이며 평화적이기까지 하다. 이런 식물성은 자연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식물은 말(소리) 없이 주어진 자리에 뿌리 내리고 사는 반면, (인간)동물은 요란스럽게 여기저기 옮겨 다녀서 자연의 골치를 썩이는 말썽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테다. 영혜와 언니 인혜는 상반된 성정(性情)을 지닌 자매이고, 두 사람의 배우자들 역시 다른 성(性)과 정(情)의 욕구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그들은 처형과 처제에 대한 뒤틀린 성적 욕구를 나타내는데, 특히 인혜의 남편이자 비디오아티스트인 남자는 영혜의 몽고반점에 묘하게 집착하여 서로의 몸에 꽃을 그리고 덩굴처럼 얽힌 채 가진 부적절한 관계를 영상에 담는다.
그 현장을 목격한 인혜는 질투심을 삭이고 언니로서 안간힘을 다해 동생 영혜를 보살핀다. 그러나 영혜는 정신병원에서 나무가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물구나무를 서거나 음식 대신 물만 갈구하며 비를 맞으러 병동에서 사라지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석 달 동안 음식을 거부하며 자신이 나무가 되어간다고 믿는다. 영혜가 왜 일련의 행위를 선택했는지 생각해보다 문득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쌈채소 위에 놓인 고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이를 확대하면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작디작은 동물이 되기에 나약한 인간이 구원받는 길은 결국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연유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그저 말없이 깊은 번뇌와 고통 속에 빠진 자신을 나뭇가지로 들어올려 잎사귀로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그녀에게는 다름 아닌 '나무'였던 것 같다.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채식주의자>를 쓴 이유에 대하여 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기대어 보자면,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은 보통 인간에게 기대되는 기준을 넘어서거나 혹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서 소설 속에 두 남자는 각자 내면의 불편함과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질렀다는 평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들마저 인간의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찌하여 이토록 아름답고도 잔혹한지에 대하여 천착해온 저자가 내놓은 또 하나의 답은 아닐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마다의 이유로 숨쉬며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누군가는 짧게 또는 크게 한숨을 쉬고 뱉으며 또 하루를 보내고, 다른 누군가는 깊은 한숨은커녕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숨들이 모여 하나의 목숨이 되어 인생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책을 통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라는 겉과 속을 유지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위태로운지 새삼 깨닫는다. 아울러 인간이기를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일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임을 재발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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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 / 창비 9번째 리뷰]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한강의 소설들'을 뒤늦게 탐독하고 있다. 하지만 리뷰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노벨문학상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한강의 주제의식'으로 파고들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하나같이 다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에 대한 '감'을 잡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에 한강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고통 3부작]으로 소개하였다. 물론 작가 본인이 이 작품들을 쏟아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니, 수긍이 가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로는 이 세 작품은 [불편 3부작]이었다. 첫 번째에는 '채식'이 불편했고, 두 번째에는 '불륜'이 불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정신병'이 불편했다. 세 가지 모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포용하기에 너무도 불편한 것들이니 말이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다. '채식'이 불편한 까닭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유별나기 때문이다. 가리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함께 식사할 때마다 '별도'로 챙겨주어야 하는 수고를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려 차원'에서 그런 정도의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채식주의'가 나쁜 짓도 아니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채식주의자들에게 배려를 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전통음식이 '육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철저하게 '비건'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한식'은 동물들의 절규가 한없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고기육수'가 그렇고, 각종 '젓갈'은 또 어떤가?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뚜껑을 열고 올려지는 '낙지 한마리'는 화룡점정일 것이다. 한 겨울 얼음위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고 '학살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덩치가 큰 '고래사냥'과 같은 것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비건'을 선언한 이들은 그러한 모든 '살풍경'을 멈춰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들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은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불륜'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다. 이건 '불편'을 넘어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줬던 '흔한(?) 일상'일지라도, 형부와 처제가 상간을 벌이는 일을 아름다운 예술로 포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몽고반점>을 읽다보면 그것이 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왜냐면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게 또 말이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위해서 '옷을 벗고 알몸이 되는 일'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이라 하더라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는 없다. 더구나 예술을 빙자한 '외설'이 너무도 판을 치는 속물적이고 저급한 예술쟁이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이들은 외설인 '포르노그라피'를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예술가든, 일반인이든 '예술'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건 아름다움이 주는 '황홀감'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낯뜨거움'을 구분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 형부는 처제의 '몸'을 예술적 도구로 삼아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꽃피우려 했으나 결국은 '상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냥 '범죄'다.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불륜과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이것을 '예술'로 포장하려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예술'로 한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평생 비밀로 하고, 두 번 다시 시도되지 않았어야 '최소한의 예술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이었기로소니 '그 작품(몽고반점2)'을 어디에 내놓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결국엔 '소멸'시켰어야 할 아름다움이었다. 지독하게 불편한 예술품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마지막 '정신병'은 앞의 두 작품의 불편마저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최종적 불편함'이었다. 정신병동에 입원할 지경이 된 영혜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혜가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나무 불꽃'에서 그 이유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영혜가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을 선택했으며, 겉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는 것이 편했고, 형부가 영혜의 몸에 직접 그려준 '꽃'을 보고 즐거워 했으며,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 '물구나무'를 서고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으며, 동물이 먹는 '먹이'를 거부하고, 식물이 되기 위해 '햇빛'과 '물'만을 찾았고,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다녔다. 이런 행위 모두가 일반사람들에겐 그저 '미친짓'으로 보일 뿐이지만, 영혜 자신에겐 실로 중차대한 '순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 그 자체'다. 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 멈추지 못하고, 끝끝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일까? 과연 무엇이 영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나? 영혜, 스스로가 말하기로는 모든 것은 '꿈' 때문이라고 했다. 꿈에 나온 '얼굴'이 두렵고 무서워서 이 모든 '불편함'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불편한 것은 '영혜의 미친짓'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폭력'이 미치도록 불편했던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옹색하고 옹졸한 것일까? 왜 한 사람의 '아픈 환자'를 이처럼 모질게 대하느냔 말이다. '유별난 사람'을 포용할 줄 모르는 사회는 끔찍하다. 모두가 정상인데 '비정상'인 것이 섞여 있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개성 넘치는 사회'가 주는 활력을 감안한다면, 넘치는 재능과 끼를 주체하지 못해 '색다른 개성'을 뽐내는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영혜'가 보여주는 '유별남'을 그의 남편이 보듬어주고, 처댁 식구들이 감싸주고, 이웃들이 배려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영혜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혜가 뿜어내는 '불편함'도 더는 불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쓰고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고,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폭력의 근거'로 삼아 정당방위라고 애써 포장한다. 자신의 속좁음, 옹졸함 따위는 무던히도 감추면서 말이다. 그래서 난 영혜가 보여주는 불편은 감당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나도 옹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불편을 남에게 끼치게 되면 일단 주변사람들이 먼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런 고통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 할 수 있을 듯 싶어서 그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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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읽혀지나 외설적인 문장에 다 읽지 못한 책입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2부는 저에게 넘지 못할 산인걸까요... 1부까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비록 두 번정도 멈췄지만... 문장은 참 예쁘고 읽기 좋습니다. 흐름도 남편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남편의 생각으로 글을 이해하게 됩니다. 표지도 마음에 듭니다만... 좀 더 큰 다음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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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제목은 무언가 신념이 강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지??? 이 책..??? 와..... 망상의 세계를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실감나게!! 4D입체영화처럼!!표현했다. 이 책은 너무나 강렬했다.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는 그녀를 음침하게 음습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상상하지도 못할 그녀만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예고 없이 그녀의 생활을 파멸로 이끌었으며? 오히려 그녀 자신만은 무덤덤하다 핏빛꿈들이 선사하는 밤마다의 악몽은 그녀를 지치게 했고 그녀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더욱 국건하게 했다. (아.. 진작에 병원에 갔었으면.. 남편이 좀 더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영혜라는 주인공으로 진짜 채식만 고집하는 채식주의자, 꽃이라는 매개로 서로 탐닉하며 먹고 먹히려는 채식주의자, 나무가 되고싶어서 스스로를 없애고 식물이 되기를 갈망하는 채식주의자의 영혜 각기다른 3부의 영혜로, 신선하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2부에서는 좀 말도 안되는 전개가 나온다. 예술로 후려치는 선정성이랄까. 미친 예술가라니. 자신의 욕정을 예술로 투과한달까. ㄸㄹㅇ 미친.? 이기주의 남자. 영혜의 언니가 너무 불쌍했다. (저런 남자 .!!왜 택한거야??) "영혜" 그녀자신은 그저 담담하다. 백화점 면접도 다녀왔다는데. 그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엉뚱한 욕정때문에 그녀의 망상을 더 강화시키고 악화시켜 버렸다. 3부에서까지 그녀는 고통뿐이다. 나무가 되고싶고 식물이 되어 먹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을 뿐이다. 처음부터.. 전개가 기묘하고 기괴하달까. 이런 책은 처음이다. 호러물이아닌데, 무서운 호러물을 본 기분이다. 호러물을 좋아하는 나는 읽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징그러운게 또는 잔인하게 나오지 않지만, 기분나쁘게 흥미진진고, 뭐랄까. 신비롭다. 전개 하나하나.. 예상할 수 가 없다. 이런 책은 이런분위기의 책은. 장르를 정의할 수가 없다. 처음이다. 신선하게 충격이다. 너무 좋았다. 대박추천. 대박추천. 대박추천. 275페이지의 짧은 책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나. 음침하고 음습한분위기를 싫어하시는 분은, 패스하시길. (개인차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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