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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4 _유홍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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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애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북클러버 첫 리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자 필연과 같다.  나는 예스24 인터뷰나 회사에서 독서매니아로 책 소개 등을 받을 때마다 잊지 않고 소개하는 책이 바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기 때문이다. 왜 이 책을 최애의 책으로 꼽는가? "진정한 국제인이란 단순이 언어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곳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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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애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북클러버 첫 리뷰로 선정한 것은 우연이자 필연과 같다. 

나는 예스24 인터뷰나 회사에서 독서매니아로 책 소개 등을 받을 때마다 잊지 않고 소개하는 책이 바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이기 때문이다.

왜 이 책을 최애의 책으로 꼽는가?

"진정한 국제인이란 단순이 언어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곳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 위에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이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론에 공감하기 떄문이다. 유홍준 교수님도 비슷한 말을 하셨다. 


 

나의 문화유산답가기 12 : 서울편4는 구입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야 겨우 다 읽었다. 

사실 그동안 쌍둥이 육아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책 다음 후속편이 나오지 않아 아껴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이 너무나 좋다.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체만으로 휴식이 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이 책을 읽고 그 장소로 떠나서 교수님이 알려준 지식 + 그 느낌에 나만의 해석이 더해질 때 내가 더 커지고, 힐링을 얻는 느낌이다. 

 

고려시대 후기 3경이자, 조선시대 500년 도읍으로 또 일제시대 경성을 거쳐, 해방이후 우리나라 수도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서울은 애초에 가지고 있던 한양도성을 넘어 넓어지고 깊어졌다. 

대도시 서울은 이 책 4권으로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1,000만 인구와 수도권에서 매일 유입되었다가 돌아가는 인구까지 합쳐져 계속 그 이야기가 양산되고 만들어지는 도시다. 그런 대도시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섬세하게 통찰하는 한 편 지금까지 서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서울은 저자 유홍준 교수님의 고향이다. '서울토박이'로 영남대 교수 시절을 제외한 오랜 세월을 '서울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서울의 오랜 도시이자 부자의 도시인 성북동이다. 성북동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서울 도성은 지명의 방향으로 나타내는 도시 이름이 많다. 

성북동은 한양 도성의 북쪽에 만들어진 동네라는 이름이다. 강남은 한강 남쪽, 한남은 한성의 남쪽, 성동은 성의 동쪽 동네 등 서울을 대표하는 성(城)과 강(江)이 많은 도시 지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성북동하면 많은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 또는 그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들이 '여기 성북동인데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사실 이 집들은 1970년대 삼청터널이 개통된 이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을 개발해 만들어진 신흥 저택이다. 

 

정조시대 유명한 체제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번암 채제공은 북문도화를 유람한 모습을 글로 남겨놓았다. 

정조 8년(1784년) 봄,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있던 노재상 채제공은 아들 채홍원을 데리고 벗과 친지 5~6명과 함께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을 노닐고 오는 네편의 기행문을 썼는데,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유북저동기>라는 성북동 유람기이다. 

 

그 당시만 해도 성북동은 성 북쪽의 개발이 덜 된 도성의 외곽기능이 다수였다. 

또 다리를 건너니 어영둔(성북둔)이 나왔다. 정원과 건물이 제법 넉넉해 보였다. 둔사 밖에는 작은 연못에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꽃이 물에 거꾸로 비쳐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 암벽과 맞닿아 활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

혹 가다가 혹 앉아 있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 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

도성의 인사들은 고관에서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p.27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특징은 장소와 더불어 많은 인문학적 지식, 그 지역에 대한 옛 기록이 함께 나오는 즐거움이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유적지는 과거를 보기는 하지만 오늘 현재의 모습이다. 결국 그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 유적이 지나온 시기가 모두 역사가 되고, 추억이 되는 것인데 그것들을 함께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성북동 골짜기에는 유명한 명사들의 별서와 별장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정원과 원림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춘파 황윤명이라는 내시 고관의 별서였다가 의친왕 이강의 별서가 되는 명소가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 불우한 시대를 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왕손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의친왕 이강이 살았던 곳이다. 

성북동 문인촌은 나도 대학교 시절 가보았다. 유명한 소설가인 이태준의 이야기가 나온다. 

최순우 옛집과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그리고 내가 대학시절 정말 좋아하던 간송 미술관 등이 남아있는 곳이 성북동이다. 

성북동 답사만 해도 몇 일은 걸릴 것 같다. 다시 대학생 시절 성북동을 돌아다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내가 도심 속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결혼 전 아내와도 종종 갔던 선정릉이다. 나는 '천원의 행복'이라고 칭했고, 대학시절 마음이 답답하면 종종 간 곳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기 마음이 답답하거나 생각이 필요하면 가장 많이 갔던 곳이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 왕이 되기까지 살았던 잠저인 운현궁, 올라가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 사육신 묘, 근처 밥이 싸고 학교가 너무나 에뻤던 경희대 등이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스팟이었는데, 대학교 4학년 부터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선정릉을 많이 찾아갔다. 

 

선정릉은 성종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침이 있고, 왕비가 셋이나 있었지만 홀로 묻히게 된 중종의 정릉이 합쳐진 명칭이다. 

'뭬야?'로 유명한 드라마의 문정왕후 윤씨가 남편과 묻히기 위해 중종의 묘를 이장하면서까지 강남한복판에 묻히게 했지만 여기는 주변보다 저지대라 침수가 잦았고, 결국 임진왜란 시기에는 도성침탈의 주요 길목으로 범릉적에 의해 능이 훼손되기까지에 이른다.

지금 성종과 중종의 묘는 사실상 주인이 없는 허묘다. 


 

선정릉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이 리뷰를 한 장 다 채울 수 있을 정도인데, 나중에 책을 보시면 된다. 조선 왕릉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그 보전됨이나 의미 등을 통해 우리 역사의 또 한 편에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유홍준 교수님이 주장한 태종대왕 헌릉, 세종대왕 영릉, 세조대왕 광릉, 성종대왕 선릉은 나도 찬성한다. 역사에 어느 정도 해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도 릉이름만 들으면 얼핏 안 떠오르는 능이 많은데, 이렇게 하면 어느 왕의 묘인지 잘 구별되서 좋을 것 같은데 당시 문화재청장일 떄 추진하다가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국회의원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봉은사는 예전 서울 기준으로 하면 강남쪽의 한적한 곳의 절이었겠지만, 지금은 서울이 팽창하면서 도심속에 있는 사찰로 변경되었다. 

 

겸재정선미술관이 있는 강서구 가양동과 허준박물관의 허준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사를 좋아하는 나도 허준박물관 같은 것은 있는지 몰랐다. 다음에 한 번 가보리라. 

허준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은 허준 정오표다. 나 역시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많았다. 


 

특히 의과에 합격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미암 유희춘의 추천으로 의관이 된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마지막은 서울의 북쪽으로 우리에겐 무덤, 공동묘지로 잘 알려진 망우리다. 작가 김영하는 도시에서 꼭 공동묘지를 방문해 본다고 했다. 그 속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유명인이 묻혀있는 무덤은 일부러라도 가보면서 그를 추억해 본다고 했는데, 망우리에는 위창 오세창의 무덤과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소파 방정환, 만해 한용운 등 수많은 근대 유명인들이 묻혀 있고, 그 무덤을 통해 그들을 다시 추억해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로 유명한 시인 김상용의 묘까지 저자의 손길과 글은 지나간 선인의 옛 자취와 일생을 살려낸다. 

 

자연과 풍류를 사랑한 한양의 선비들과 한양에서 생활하면서 도시의 곳곳에 흔적을 남기며 함께 살아간 아녀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또한 서울은 시대와 문화를 앞당긴 수많은 명사와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있다. 

서울의 도심은 많이 개발됐지만 그 주변부는 아직도 골목골목 사람의 향기가 많이 남아 있다. 서울에 꽤 오래 살았고, 지금도 수도권에 거주하지만 유명한 곳만 가보았고, 나름의 좋아하는 장소는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지나간 곳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서울의 진면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d*****2 2023.09.29. 신고 공감 31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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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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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는 서울편 4권으로 강북과 강남 한양도성 밖 체취들을 엮었다. 당초 저자는 서울편 1,2권에서 조선왕실의 유적을 살펴보고 3권에서는 서울의 묵은 동네 이야기를, 마지막 권인 4권에서는 한강과 북한산을 다루겠다고 했었다. 대체적으로 그의 구상대로 답사가 이루어졌지만 한강 유역의 이야기가 빠져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4권에서 그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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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는 서울편 4권으로 강북과 강남 한양도성 밖 체취들을 엮었다. 당초 저자는 서울편 1,2권에서 조선왕실의 유적을 살펴보고 3권에서는 서울의 묵은 동네 이야기를, 마지막 권인 4권에서는 한강과 북한산을 다루겠다고 했었다. 대체적으로 그의 구상대로 답사가 이루어졌지만 한강 유역의 이야기가 빠져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4권에서 그가 답사한 지역은 강북의 성북동과 망우리 그리고 강남지역은 선정릉과 봉은사, 가양동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밖이었지만 근현대들어 서울의 팽창과 함께 지금은 서울의 공간이 된 곳들이다.

 

성북동은 국어교과서에도 실린 김광섭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란 시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한양도성 축조 당시에는 성곽 바깥쪽 10리 이내는 자연녹지로 보존했고 이를 성저십리라 했다고 한다. 성저십리 안에는 중요한 국가 의례를 행하는 제단이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동대문 제기동 밖에 있는 선농단이고 다른 하나가 성북동의 선잠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영조시대 한양도성 북쪽 성곽에 맞붙어 있는 성북동 산동네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때 사람들이 복숭아를 많이 심어 해마다 봄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유람지가 되면서 별장과 별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후 1930년대 들어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우리 근현대 문화사의 핵심적인 현장이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태준, 김용준, 김환기, 한용운, 김광섭 등 문인과 화가들의 자취를 따라 성북동 답사를 한다.

 

성북동과 더불어 저자가 강북의 문화유산으로 소개하는 곳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이다. 1970~80년대 망우리 하면 생각나는 것은 우선 공동묘지였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0년대 서울의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자 일제가 주택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묘지들을 멀리 이장시키기 위해 마련한 곳으로 1933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까지 40년간 조성되었다고 한다. 1973년 폐장 이후 망우리묘지공원, 망우리공원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올해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묘지에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박인환, 이중섭, 조봉암, 한용운, 오세창, 방정환, 안창호 등 역사인물 50여명의 묘지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들을 찾아보며 근현대 우리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의 답사길을 책에서나마 뒤쫓으며 한때는 기피대상이었던 공동묘지가 역사문화공원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알아간다.

 

한강 이남의 문화유산인 선정릉은 조선 9대 왕인 성종과 성종의 비 정현왕후의 선릉,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선정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2009년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모두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제외하려고 하였으나 강남의 빌딩숲 속에서도 보존되고 있는 것이 높이 평가되면서 포함된 과정을 저자는 소개한다. 봉은사는 조선 명종대에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보우스님을 앞세워 선교 양종을 부활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이 되었고 지금은 조계종 총무원의 직할교구에 속한다고 한다. 오늘날 일반인의 눈에는 도심 속 녹지로 편안함을 주지만 보은사의 역사를 더듬어 가다 보면 조선시대 불교정책의 부침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어 그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들 모두는 강서구립미술관, 구립박물관으로 미술관은 겸재 정선이 65세부터 70세까지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 관아가 있던 자리에 그리고 박물관은 허준의 관향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저자의 답사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흔적을 찾아 소개하고 보존하려는 이들의 노고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저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을 완간하면서 이제 그 끝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30여년에 걸쳐 국내편 12, 일본편 4, 중국편 3권 등 총 19권의 답사기를 펴낸 저자의 긴 여정을 나 또한 뒤따라왔다. 그러면서 알지 못했던 것, 무심코 지나쳤던 것 들에서 우리 문화유산의 역사와 미를 알게 되었다.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답사기를 읽는 순간, 순간에는 많은 기쁨을 느꼈고 다음편이 언제나올지 설레이며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찾아보아야 할 곳이 많지만 국토박물관 순례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아쉬움이 들면서도 아직 한 권이 남았다는 기대감에 그의 답사기를 기다린다

k*****1 2022.11.13. 신고 공감 1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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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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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서울편 4 강북과 강남유홍준창비/2022.10.2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지역’의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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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

유홍준

창비/2022.10.2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지역’의 답사기다. 주로 역사적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에 대한 활동내용과 시대 상황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사대문 밖의 서울로 개발이 되면서부터 현재가 있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유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사대문 밖 역사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p.5)” 이들 왕릉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나 각 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아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또한 서울 시민이나 문화유산 답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답사코스 등을 안내하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10리 지역은 ‘성저 10리’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 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p.7)”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행사는 2개의 제단이 있었다. 하나는 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으로 역대 왕들은 해마다 친히 밭을 경작하며 농경을 장려했다. 이를 친경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곳 성북동의 선잠단이다. 성북동에는 300년 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 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라고 예찬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 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었다고 말한다.


“별장과 별서는 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 정확히 말해서 원림으로 꾸며져 있다.(p.31)”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서재,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비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성북동에 있던 별장, 별서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은 ‘서울 성북동 별서’다. 영벽지를 중심으로 건물을 위쪽으로 배치해 창밖으로 이 못 풍경을 즐기게 되어 있다. 또한 북정마을에는 ‘비둘기공원’이라는 쉼터가 있다. 원래는 ‘성북동 가로쉼터’라고 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했다. 한쪽 벽에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 전문을 3개의 시판에 나누어 나란히 붙이고 벽에는 비둘기 모양의 작은 조형물도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선정릉은 조선왕조 9개 왕인 성종의 선릉과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있다.(p.151)” 능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은 지붕도 없고 문짝도 없는 붉은 기둥문이다.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여기가 민이 아닌 관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표지물로 조선시대 능뿐 아니라 지방의 관아와 향교 앞에도 세워졌다. 중국에 패방이 있고, 일본에 도라이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홍살문이 있다. 중국의 패방은 웅장하고 권위적이며, 일본의 도라이는 단순하면서 날렵한 형태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홍살문은 나무 기둥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붉은색을 칠해 여기가 위엄 있는 곳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1545년 중종이 죽자 11세로 즉위한 아들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1553년 명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8년간 조선불교를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p.208)” 명종 7년에는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켜 선종의 예비합격자 400명 중 최종적으로 33명을 선발했다. 보우 스님이 주관한 첫 승과 시험이 봉은사 앞뜰에서 시행되어 이곳은 승과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합격자 중에는 서산대사 휴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 이이는 <요승 보우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과격한 제목 때문에 율곡 선생이 보우 스님의 처벌에 앞장섰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곡집>에 실려 있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보우 스님을 참수하지 말고 귀양 보내라는 내용이다. 보우 스님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 중 제주목사 변협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장살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군의 맹활약으로 전란 후 조선 불교는 새로운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중들은 전란을 치르면서 불교에 많이 귀의했다. 죽음의 문제에 무관심한 유교와 달리 불교는 삶의 고난 앞에서 희망을, 죽음 앞에서는 내세의 위안을 말했다. 황실과 일부 사대부들까지 절집을 찾아와 복을 빌며 시주하고 기도드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다. 나라에서는 이제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p.219)”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나말 여초의 철불에 힘 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과 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고 불상의 생김새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미술관은 그의 관향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p.240)”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다. 유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와 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 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명,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학업은 7,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균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 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라고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p.279)”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 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 보낸 것도 감동적이라며 선조의 또 다른 일면을 소개한다.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 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의로 있던 허준은 선조가 죽자 귀향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죽어 파주의 민통선 안에 그 묘가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p.291)”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서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한동안 매장이 대세였지만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 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 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특히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묘소를 오르는 길은 편안한 산책길이면서 서울 시내와 한강이 보이는 전망을 품고 있다.(p.327)” 점차 공동묘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전환된다면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다. 화장 문화가 대세로 변해서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장례문화는 더욱 간소화 되고 동네 뒷산의 공동묘지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하는 문화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 외곽의 답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 주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달의 사락 k******4 2025.01.18. 신고 공감 1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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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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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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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

유홍준

창비/2022.10.25.

sanbaram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는 서울시 중에서 사대문 밖에 있는 역사문화 유적을 답사한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게 금했던 성저십리를 포함하여 양주군, 광주군, 고양군, 양천현의 일부가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의 성북동,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지역의 답사기다. 주로 역사적 인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비롯하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에 대한 활동내용과 시대 상황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사대문 밖의 서울로 개발이 되면서부터 현재가 있기까지의 변화 과정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유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사대문 밖 역사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예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시대 왕릉이다. 신덕왕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 순조의 언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문정왕후의 태릉, 명종의 강릉, 경종의 의릉 등 여덟 능이 서울에 있고, 여기에 서오릉의 다섯 능과 서삼릉의 세 능 등 여덟 능이 서울 근교인 경기도 고양시에, 동구릉의 아홉 능이 구리시에 있다.(p.5)” 이들 왕릉의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나 각 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놓아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또한 서울 시민이나 문화유산 답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답사코스 등을 안내하고 있다.

 

본래 한양도성 10리 지역은 성저 10라고 해서 사람이 살지 못하게 했고, ‘선잠단등을 제외하고는 자연녹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러다 18세기 영조 때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p.7)”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를 행사는 2개의 제단이 있었다. 하나는 동대문 밖 제기동의 선농단으로 역대 왕들은 해마다 친히 밭을 경작하며 농경을 장려했다. 이를 친경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곳 성북동의 선잠단이다. 성북동에는 300년 전, 영조시대에 둔전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둔전이란 병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주둔하는 군사제도로, 처음에는 이곳에 30여 가구의 둔전 주민들이 베와 모시를 표백하는 마전 일을 하면서 살았다. 둔전 주민들이 성북동 골짜기에 유실수로 복숭아를 많이 심어 이곳은 봄이면 복사꽃이 만발하는 꽃동네가 되었다. 장안에 이 소문이 퍼져 봄철이면 많은 문인 묵객들이 유람을 오는 한양의 대표적인 명승 중 하나가 되었다. 이를 마전골의 북둔도화라고 예찬했다. 조선 말기가 되면 성북동 별서등 많은 권세가들의 별장이 성북동 골짜기를 차지했었다고 말한다.

 

별장과 별서는 혼용되지만 대개 별장은 이따금 드나드는 곳이고, 별서는 본가에서 떨어져 있는 살림집을 말한다. 그렇기에 별장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고, 별서는 아름다운 정원, 정확히 말해서 원림으로 꾸며져 있다.(p.31)” 정원과 원림은 개념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원과 원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원은 주택 울타리 안에서 자연을 가꾼 것이고, 원림은 풍광 수려한 곳에 살림집, 서재, 정자 등 건물을 적절한 곳에 비치한 것이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정반대인 셈이다. 성북동에 있던 별장, 별서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곳은 서울 성북동 별서. 영벽지를 중심으로 건물을 위쪽으로 배치해 창밖으로 이 못 풍경을 즐기게 되어 있다. 또한 북정마을에는 비둘기공원이라는 쉼터가 있다. 원래는 성북동 가로쉼터라고 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했다. 한쪽 벽에 김광섭의 시 성북동 비둘기전문을 3개의 시판에 나누어 나란히 붙이고 벽에는 비둘기 모양의 작은 조형물도 설치했다고 설명한다.

 

선정릉은 조선왕조 9개 왕인 성종의 선릉과 11대 중종의 정릉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있다.(p.151)” 능의 입구에 있는 홍살문은 지붕도 없고 문짝도 없는 붉은 기둥문이다.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여기가 민이 아닌 관의 공간임을 알려주는 표지물로 조선시대 능뿐 아니라 지방의 관아와 향교 앞에도 세워졌다. 중국에 패방이 있고, 일본에 도라이가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홍살문이 있다. 중국의 패방은 웅장하고 권위적이며, 일본의 도라이는 단순하면서 날렵한 형태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홍살문은 나무 기둥에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붉은색을 칠해 여기가 위엄 있는 곳임을 드러내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1545년 중종이 죽자 11세로 즉위한 아들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면서 1553년 명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8년간 조선불교를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p.208)” 명종 7년에는 과거 시험에서 승과를 부활시켜 선종의 예비합격자 400명 중 최종적으로 33명을 선발했다. 보우 스님이 주관한 첫 승과 시험이 봉은사 앞뜰에서 시행되어 이곳은 승과평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합격자 중에는 서산대사 휴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자 율곡 이이는 요승 보우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과격한 제목 때문에 율곡 선생이 보우 스님의 처벌에 앞장섰던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율곡집에 실려 있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보우 스님을 참수하지 말고 귀양 보내라는 내용이다. 보우 스님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 중 제주목사 변협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장살을 당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군의 맹활약으로 전란 후 조선 불교는 새로운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민중들은 전란을 치르면서 불교에 많이 귀의했다. 죽음의 문제에 무관심한 유교와 달리 불교는 삶의 고난 앞에서 희망을, 죽음 앞에서는 내세의 위안을 말했다. 황실과 일부 사대부들까지 절집을 찾아와 복을 빌며 시주하고 기도드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났다. 나라에서는 이제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p.219)”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나말 여초의 철불에 힘 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과 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 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고 불상의 생김새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미술관은 그의 관향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p.240)”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다. 유교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와 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 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학업은 7,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균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 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라고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p.279)”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 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 보낸 것도 감동적이라며 선조의 또 다른 일면을 소개한다. 허준은 동의보감편찬에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병을 고치기에 앞서 수명을 늘리고 병에 안 걸리도록 하는 방법을 중요시 한다. 둘째, 처방은 요점만 간추린다. 셋째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약초 이름에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을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어의로 있던 허준은 선조가 죽자 귀향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죽어 파주의 민통선 안에 그 묘가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p.291)”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서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영향으로 한동안 매장이 대세였지만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 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 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특히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묘소를 오르는 길은 편안한 산책길이면서 서울 시내와 한강이 보이는 전망을 품고 있다.(p.327)” 점차 공동묘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전환된다면 이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인물을 만나는 공원이 될 것이다. 화장 문화가 대세로 변해서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장례문화는 더욱 간소화 되고 동네 뒷산의 공동묘지는 점차 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세월 따라 변하는 문화 중에 조선시대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서울 외곽의 답사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도움 주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달의 사락 k******4 2023.03.13. 신고 공감 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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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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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문득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사고 하나씩 꺼내본다. 수많은 시간동안 쌓인 책들 중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 떠나고 싶을 때 대리만족을 하기도하고 떠날 때 미리 공부하기도 한다. 서울편의 네번째 이야기. 더 나오면 좋겠다. 몇십년을 살았지만 그냥 지나치고 모르는 곳이 너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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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문득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사고 하나씩 꺼내본다. 

수많은 시간동안 쌓인 책들 중 좋아하는 시리즈 중 하나. 

떠나고 싶을 때 대리만족을 하기도하고 떠날 때 미리 공부하기도 한다. 

서울편의 네번째 이야기. 

더 나오면 좋겠다. 몇십년을 살았지만 그냥 지나치고 모르는 곳이 너무 많음. 

z******1 2026.03.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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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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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험을 해본듯한 느끼입니다.다양한 경로로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박진감넘치도록 읽어가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직접 직관하는 기분으로 재밌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습니다.너무나도 감명적입니다. 강력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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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험을 해본듯한 느끼입니다.다양한 경로로 간접적으로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박진감넘치도록 읽어가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직접 직관하는 기분으로 재밌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습니다.너무나도 감명적입니다. 강력추천합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l*****6 2026.03.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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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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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모두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그 실체를 모른 채 지루함과 싸워가며 얼마나 어렵게 암기했었는지를 돌이켜 본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존재는 그야말로 축복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가족과 함께 서울편에 나오는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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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처럼 재미있고 흥미있게 알아갈 수 있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모두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그 실체를 모른 채 지루함과 싸워가며 얼마나 어렵게 암기했었는지를 돌이켜 본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존재는 그야말로 축복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가족과 함께 서울편에 나오는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기 위해 열심히 읽고 있다. 이 책의 연작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희망해본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d********s 2025.08.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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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 서울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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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전 청장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목록이며 사랑하는 도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모든 책들을 직접 구매해서 읽고 있는데, 이번 12편의 경우 지인에게 빌려주고 난뒤 돌려받지 못해 다시 구매하게 되었다. 3편에 이어 서울의 역사를 느낄수 있는데, 성북동과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별곡 등의 내용이 참 재밌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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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전 청장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목록이며 사랑하는 도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모든 책들을 직접 구매해서 읽고 있는데, 이번 12편의 경우 지인에게 빌려주고 난뒤 돌려받지 못해 다시 구매하게 되었다. 

3편에 이어 서울의 역사를 느낄수 있는데, 성북동과 선정릉, 봉은사,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 망우리 별곡 등의 내용이 참 재밌는 부분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문화유산 답사기부터 읽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k******o 2025.07.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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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황유산답사기-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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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이나 된다.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 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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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넓다. 평수로 약 2억 평이나 된다.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이 왕조의 멸망 이후 근현대에도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한양도성 밖으로 팽창할 수 있는 넓은 들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특히 한강 남쪽의 드넓은 강남 지역으로 인구가 대이동하면서 서울의 넓이와 깊이가 크게 확장되었다...
...망우리 별곡은 망우리 공동묘지 답사기다...여기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죽산 조봉암, 설산 장덕수, 종두법의 지석영, 독립운동가 유상규, 서설가 계용묵, 화가 이중섭과 이인성, 조각가 권진규,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략 등 많은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할 때 무연고 묘지의 시신을 화장하여 합동으로 모신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넋이 들어 있기도 하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j****m 2024.06.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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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으로 가게 만드는 추억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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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홍준' 저자의 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담아 만들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벌써 19권 (국내 12권+일본 4권+중국 3권)에 이른다. 1권 초판이 발간된 것이 1993년 5월이다. 벌써 30년 전 이야기다. 그때 결심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 욕구는 50이 훨씬  넘은 지금 느리지만 즐겁게 실행하고 있다.     이번 12권은 서울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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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유홍준' 저자의 팬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담아 만들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벌써 19권 (국내 12권+일본

4권+중국 3권)에 이른다. 1권 초판이 발간된 것이 1993년 5월이다. 벌써 30년

전 이야기다. 그때 결심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답사 욕구는 50이 훨씬 

넘은 지금 느리지만 즐겁게 실행하고 있다. 

 

 이번 12권은 서울 성북동을 중심으로 선정릉, 망우리 등을 다루고 있는데 

지금 사는 곳과 가까운 성북동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기에 

얼마 전 카메라 하나 들고 답사를 다녀왔다. 특히 길상사와 심우장, 최순우 고택

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곳을 지켜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보여 마음을 

잡게 만든다. 지금도 성북동은 대저택과 외국 대사관저 사이에 고택과 미술관,

박물관, 찻집, 사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문화의 향기를 풍긴다.

 

 겨울이 지나 따뜻한 바람이 불면 선정릉과 봉은사를 기꺼이 답사할 예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유산이 머무는 상태와 그것을 느끼는 감정도 달라질 것

이기에 조금 서둘러 찾아 갈 예정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2***c 2023.11.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