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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는 누군가에게는 책 제목만으로 어떤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그러한 기대와 희망, 더 나아가 절망마저도 덤덤하게 바라보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장애인 시위를 처음 접했을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장애인들이 시위하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면 안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논조를 지금도 쉽게 접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당황했던 것은, 그 장애인들 시위의 취지를 이해한다는 부분이었다. 정말 이해를 하고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와 현실을 제대로 본 적은 있을까? 연이은 사건과 사고는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절망이란 단어가 엄습해왔다. 우리가 쌓아올린 탑이 이토록 허술한 것이었나 싶었다. 답답했다. 이제껏 우리가 얻은 것은 신기루나 한 여름 밤의 꿈에 불과한 것이었나 싶었다. 그 와중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제목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와 가슴이 뻥 뚫리는 대안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러한 기대는 참 쉽게 무너진다. 위로는 커녕 역설로 가득찬 민주주의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허망함이 다가온다. 그것도 온갖 역설을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어 얄밉기까지 했다.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의 실체를 하나씩 까발기면서, 조목조목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반박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인내심이 필요했다. 나중에 뭔가 화려하고 통렬한 정리와 대안이 제시되고 찬란한 희망이 보여질 것이라는 기대를 미련처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부터, 전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정밀한 분석과 풍부한 자료에 압도되었다기보다는, 어떤 기대와 낙담을 반복하는 나 자신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챕터에 다가갈수록, 감정이 요동치던 나로부터, 온갖 역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희망이라는 것을 보고자 하는 마음에 들떠 있었는데, 점점 절망과 희망을 나란히 두게 되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저자가 언급한 온갖 역설들을 조망하듯 바라볼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우리를 돌아보는 기회가, 결국 이 책이 독자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들떠 있지 말고 차분하게 상황을 보자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줄 엄청난 능력의 영웅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그러한 영웅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도 결국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쳐서 도출된 제도의 하나일뿐인데. 정부도 공무원도 결국 이저런저런 역설을 끓어안고 있는 불완전한 것들인데, 왜 그런 허망한 기대를 가졌던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된다. 책의 마지막 챕터는 그야말로 절망과 희망을 나란히 놓고 봐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빛과 그늘이고,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다. 절망이 무서워 허우적대면 바로 옆에 같이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늘 희망은 곁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쫄지 말자. 절망적인 상황인 것 같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 희망이 있으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지나가면, 차분해져 있지만 결코 차갑지 않은 누군가가 남아있을 것이다. 절망하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누군가에 의해 전해지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그 뒤에 여전히 서 있는 희망을 직면하는 침착함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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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을 건네며 제1장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 절망과 역설 제2장 들리지 않는 목소리 제3장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제4장 최후의 인간들이 머무는 곳 제5장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 제6장 민주주의의 마음 제7장 공공성과 '작은공' 제8장 역설, 선택, 그리고 희망 이야기를 맺으며 특이하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표지설명이 각 장마다 무슨 글을 쓸것인지 알려주고 오만한 기계와도 같다는 "최후의 인간"은 우리의 모습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의 해석은 흥미롭다. 우리에겐 절망과 희망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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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보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나의 얕은 생각을 미쳐 깨닫기 이전이었기에 좀더 '심도깊은' 독서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책을 만나서 첫장을 넘기고 내용들을 읽으면서 많은 허들에 부딪혔다 한국말인데, 분명 한국말인데 단어들의 하나하나의 뜻을 모르지 않는데 글을 읽어가는데 자꾸 속도가 느려지고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아차 싶었다 물론 '이 책이 어려우니 읽지 마세요' 라던가 '나는 이책을 이해하기 부족한 사람이니 포기합니다' 라는 결말을 맺을 생각은 없다 '새로운 영역이다', '나름 대로의 나만의 결말을 맺으면 그 뿐이다' 라는 생각으로 조금 느리지만 책장을 넘겼다 사실 읽으면서 모든 말이 맞다고 생각되기도 했고 또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너무 흑백논리인가? 내가 너무 귀가 얇은가? 하는 책에 대한 비판과 나에 대한 자각을 반복적으로 느끼면서 그래도 책장이 하나둘 넘어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이 책은 그냥 이렇게 읽으면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생각을 비판할 필요도 없고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다는 것? 이 책에 대한 서평은 아마도 부분부분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남기며 나의 생각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할 것 같다 이 또한 작가로 하여금 다양한 독자들에 대한 경험이 되어 조금이나마 함께 소통하길 바라며! 민주주의는 소중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더 많은 사람들의 풍요를 꿈꾸기 위해 과연 더 나은 정치제도가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민주주의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철인왕을 기대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실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긍정하고, 합의를 추구하고, 누구의 목소리 하나 외면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시원시원하게 해결될 리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독재적 리더들에게 끌리는 마음의 역설에 직면하게 됩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나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으며 성장한 성인으로 이 글을 마주할 때, 약간은 이렇게 까지 긁어낼 일인가? 싶을 정도의 소제목이었다 "민주주의의 역설" 그런데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래 그렇지' 하는 말만 계속 반복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민주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위해 다수결이라는 겉으로 아주 공정해보이는 법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한다 장애인 문제나 사회의 보호가 필요한 소수의 최소한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기관과 단체들이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떄문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교과서 적인 부분 말고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뭐랄까.. 그 '현타' 가 이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힘들지만 그 것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살면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철인왕과 같은 독재자를 찾는다는 말에 일부분 동감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는데 그 책임의 소지가 명확하지 않은 일을 결정할 때 누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반대되는 누군가 역시 큰 소리를 내어 결국 답을 찾기 위해 싸움을 조장하게 되고 반대의 경우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소수의 문제로 치부되어 조명되지 않는다 이것을 속시원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독재자를 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민주주의에서 독재자를 원한다는 글을 보면 오묘한 괴리감이 든다 맞는 말인데.. 또 틀린 말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작가는 이런 식으로 계속 나의 생각을 뒤집어 놓고 휘져어 놓았다 그래서 아마도 책장을 넘기는 한장한장이 너무 무겁고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의 세계에서 리더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흔힌 권력 자체를 쫓는 특성이 있고, 권력은 그들을 부패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권력추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우리가 처한 문제를 푸는 데 있어 민주적 정부의 무능력을 조롱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얻어 바로 그 정부의 수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은' 리더라는 정치적 역설을 마음껏 활용하여 정당성마저 누립니다. 그러고는 우리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놓고 스스로도 파괴됩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학생이었을 때는 정말 그 어떤 정치 뉴스에도 관심이 없었다 뭔가 억울한 일을 뉴스로 접하면 그 일에 푹 빠져 정의를 운운하며 학생운동을 하던 그 시대와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나의 대학교시절에는 과도기 어디쯔음에서 뉴스에 댓들을 다는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선 투표권을 가지게된 즈음 부터 국회의원이나 그 정도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과 같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던것 같다 어쩌면 대선 때만 관심을 가지고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부터 다음 대선까지, 어쩌면 그전에 뭔가 사건이 발생할 때 까지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던게 아닌가 싶다 '나만 그런가?' 하는 생각에 살짝 부끄러운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내가 관심을 주지 않아 내가 내 손으로 뽑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직전에 그자리에 있었던 그들과 같이 변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내가 내 손으로 뽑을 수 밖에 없도록 가면을 쓰고 있다가 발표되는 순간 가면을 나에게 쥐어주고 이것만 보고 현실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고 이야기한 후 그들이 하고 싶었던 권력놀음을 시작하는 것인가..' 그들이 나쁜 것은 맞지만 그 책임이 그들에게만 있는지는 생각해 볼 부분임을 나도 모르게 인정해버린 것 같아 씁쓸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가감없이 할 수 있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 임을 다시 상기하면서 다음 글로 눈을 옮긴다 첫째, 마음은 우리 안의 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마음은 마치 빈 그릇처럼 무언가가 채워지는 공간입니다. 셋째, 마음은 흐르는 물이나 바람과도 같습니다. 넷째, 마음은 지향입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사실은 이 부분에서 글 하나하나를 포스팅에 담고 싶었다 이유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뭔가 정의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나의 일부가 되고 때로는 나의 전부가 되어 나를 표현하고 있엇다는 것을 글자로 확인하는 순간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것이다 마음을 정의하는 것! 너의 마음은 어때? 넌 어때? 하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난 이런거 같애 하고 이야기 하다보면 이 마음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진다 이 마음은 나를 말하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첫째와 넷째 마음 그 어디즈음에서 헤매이고 있었음이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글이라서 이 부분은 천천히 읽고 또 읽었다 현대인에게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한없이 채우고 싶어하는 욕심? 불안함? 그 것은 어째면 여기서 두번째 마음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 될 것 같다 민주주의라는 주제를 마주할 때 그것이 나의 근본적인 생각과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할 줄이야!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읽는 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그동안 뭔가 알기 위해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대책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글을 읽어 나갔는데 어쩌면 책은 나를 돌아보게하는 그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 읽게 되는 거 같다 적어도 앞으로 나의 독서를 예상해본다면 이 비율이 점점 늘어나면서 나는 책 속에서 또 조금은 성장하고 그 마음이라는 것을 채우게 될 것 같다?? 결국 이 책은 다양한 형태의 역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우리 삶의 복잡함을 드러내는 것, 세계를 단순화하는 행동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고 감추어진 세계에 주목하는 것, 우리에게 세계의 모든 문제를 풀 능력이 부재하다는 점을 살펴보는 것, 그러는 가운데 찾을 수 있는 겸손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멋진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아! 내가 앞서 느낀 것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 표현해주는 작가의 문장을 보았다! 사람들은 많은 생각들을 하고 그 안에 내가 선택한 문장들을 머릿 속에 그리고 가슴에 품고 그것이 나인양 그리고 정말 그것이 나의 모든 또 다른 판단의 근거로 삼아 살아간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같은 결을 하는 사람을 보면 더 정이가고 더 마음을 여는 지도 모르겠다 멋진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려는 것이 이 작가의 목적이라는 문젱을 보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늘어놓고 답을 찾기위해서 계속 반복해서 읽고 돌아가서 읽는 것을 멈추고 문장 속의 흐름을 그냥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시간을 늘여갔던 나의 행동이 어쩌면 정말 작가가 원했던 그 성찰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몰아쳤다. 독재적 철인왕처럼 나의 아이디어가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이 역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를 우리의 마음과 작음에 초점을 두고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거나 소용없는 듯 보일 때도 우리의 일을 해나가는 것, 그때에 우리 내면에도 역설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절망과 희망은 사실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앞서 나온 독재적인 철인왕의 재등장에 잠시 멈칫 했지만 그들이 민주주의를 갈망하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독재자를 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 그 마음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리며 다음 문장을 자연스레 읽어나갔다 그들을 바라고 내가 어쩌면 그들이 될 지오 모른 다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갖는 순간 다시 방향을 틀어서 우리의 공존에 다시 초점을 두자는 말이 어떻게 보면 작가가 계속 해서 말하는 역설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나의 해결이란 그 답을 찾아 내 나름 마침표를 찍는 것이었고 그 마침표를 기점으로 다시 힘을 내서 다른 것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었던 나의 성향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독재자 철인왕이라는 것에 빗대어 잠시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작가는 과연 또 남은 이 책의 어마어마한 문장들 속에서 어떤 이야기로 나를 이끌어 혼돈 속에 가둘 것인가? 우리는 흔히 '사회적 약자'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혹은 ‘배려 계층'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소외된 사람들' 혹은 '소수자'라 고 하기도 합니다. 한 정치인은 선거 구호로 지워진 사람들'이 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16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불렀습니다.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들을 '비참한 사람들' les miserables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리고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비통한 자들' the brokenhearted 이라고 불렀습니다. 18 박신애는 '삶의 폭이 상실된 사람들' ...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갑자기 등장한 인용문장에 다시 멈춘 것은 "비통한 자"라는 말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계속 등장하는 작은 사람들은 정말 많은 이름으로 많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존재해 왔는데 나 역시 그 중 하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데 왜 그동안은 무대위의 탑조명으로 그것을 비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철인왕의 뒤에 있는 하나하나의 얼굴들이 조명에 비춰질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개념에 맞는 사회가 될 텐데 왜 그들은 또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조명을 철인왕에게 넘겨주며 자 이제 잘 해봐 하는 눈으로, 나 한테이러면 안되는거 아니야? 하는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고 있을까? 어쩌면 이 즈음에서 당신은 사회적 약자입니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회적 약자이다 하지만 패배자도 아니고 위에 언급된 부정적이고 하찮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라는 말을 꼭꼭 담아서 그 사람을 바라보며 민주주의에서는 모두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줄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나의 많은 생각들과 문장들 중에 나는 몇 가지를 선택해 마음에 담았고 그것이 내가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또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준다) 여러분이 던진 표는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 delegate가 되어달라'는 의사표시인지, '우리 정치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자 trustee가 되어달라' 는 의사표시인지가 늘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의민주주의의 이상은 후자이지만, 현실에서는 여의도에 가서 국가적 사안에만 계속 관심을 두는 국회의원이 반드시 최선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투표를 통한 대표자라는 관념에서는 어느 정도 기속적屬的 의무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 中 내가 뽑는 나의 생각과 나의 의도를 전해줄 국회의원, 시의원, 대통령 등의 대표자들에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그리고 바라는 것은 어느 쪽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단순히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서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억울하고 소외된 사람없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원한다는 교과서적인 생각으로 잠시 덮어두었던 진심을 까보자 나는 나의 아이가 안전하게 자라고 또 안전하게 살아가길 원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매년 결정되는 국가정책이나 세금을 사용하는 예산을 정할 때 나의 필요에 반하는 영역의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나의 필요가 정말 대다수의 필요라고 객관화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몰아치면서 나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 중 의지가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을 내가 뽑기를 (그들이 선출되기를) 고작해야 마음으로 바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둘 중에 무엇이 맞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지만 사실은 작가도 알고 있을 것 같다 둘다 맞다 둘다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회적 약자의 필요는 어쩌면 국민 모두의 필요이고 어떤 비통한 자의 억울함은 국민 모두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나는 또 왜 여기서 둘 중에 하나의 카드를 뽑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생각에 빠졌는가! 아직 이 책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지극히도 이과적인 (문제해결적, 흑백논리에서 답을 찾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직 멀었다 조금더 빠져들어야 한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어디즈음에서 마무리 하면 좋을지 계속 고민하면서 조금씩 내용들을 기록하고 생각들을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저장하고 또 저장만 하고 발행하지 못하는 글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이 부분까지의 기록만을 포함해서 오늘 발행을 하려고 한다 #창비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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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에 '태평성대'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러 이런저런 글을 읽다 보면 아래 노래를 찾을 수 있다.
[격양가]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고 우물 파 물 마시고 밭 갈아 내 먹으니 임금의 혜택이 내게 무엇이 있다더냐.
임금이 아무것도 안 했다. 무능하다.라고 읽힐 수도 있지만 이 노래가 유행하던 시대의 임금은 임금은 백성들과 똑같이 초가에 살면서 방안도 꾸며 놓지 않았다. 마음을 항상 백성들에게만 두어서 , 굶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도 끼니를 걸렀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도 같이 떨었고 , 죄지은 사람이 있으면 자기도 죄인처럼 괴로워하였다. 신선놀음이라고 여기는 바둑을 만들어 낸 것도 이 시기이며, 다음 임금 역시 새벽같이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 물에 가서는 물고기를 열심히 낚았으므로 평소에 게으름을 피우던 백성들도 모두 임금을 본받아 부지런하게 되었다. 더라....
우리는 요즘 정치 이야기라고 하면 등장하는 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잘 뽑았어야 하고 그들이 잘해야 하고... 예전에 임금 탓하듯 말이다.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그들의 역할이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의 민주주의 점수는 그럼 몇 점이란 말인가? '임금의 혜택이 무엇이 있다더냐?'라고 격앙가를 불렀던 태평성대가 100점이라면 말이다.
책을 읽으며 '작은 자'들이 시작하는 '작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읽을 때... 결국 국가와 사회에서 무언가 하지 못하고 민초들의 자발적인 무언가에 떠 맡겨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라고 툴툴대면서...
결국 민주주의란 것이...
작은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대표를 뽑는데 에너지를 온통 소비하고는..., 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조직의 정책과 체제 속에서 과연 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결국은 작은 자의 문제를 작은 자들이 해결해야 하는구나. 싶어 괜히 삐딱해지는 순간도 있다.
공연히 철학적으로 세상에 작은 자는 누구이며 큰 자는 또 누구인지...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라는 책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
'절망하는 이'들이 없기를... 절망하는 이들이 없어지는데 민주주의만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민주주의가 크게 한몫해주기를... 그리고 큰 자와 작은 자 모두가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자기들의 몫을 다해내기를...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창비 #절망하는이들을위한민주주의 #서평단 #최태현 #창비스위치 #스위치 #셔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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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사람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혼란스러운 사회의 문제를 모두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문제를 모두가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양되는 과정은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한다는 전제에서 다양한 생각을 인정해 주는 과정과도 같다. 포스트 모던을 논의하는 시대에는 동일한 생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공동의 문제에 모두가 만족할 순 없어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려면 다양한 생각을 논의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집합적인 문제로 여러 사람들의 삶과 이해, 신념이 관련되어 있어 함께 풀어야 할 문제(25쪽)이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문제들의 대다수는 불평등 속에서 나타난다.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서는 이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평등을 지향하는 그렇지만 불평등한 세계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국가란 국민을 위해, 지구라는 기반 위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문제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절차적 정의의 관점에서 주로 논의한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에 갇혀 분배적 정의의 실현에 대해 놓치는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이슈가 되었던 장애인의 이동권, 기후 변화로 인한 쪽방촌의 열섬 현상, 폭우로 인해 반지하 공간의 침수 등등은 우리의 정치가 외면해 왔던 영역을 보여주었다. 소득과 부의 성장에 집중하느라 소외된 자들의 영역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잘 사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평균의 함정에 빠져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대표성을 상실한 정치 엘리트 현상은 그들의 이익에 갇혀 정의로운 분배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 내지 못하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의 시민들은 이것을 제대로 해쳐나갈 수 있을까? 정권에 기대하는 것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 바라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의 갈등을 긍정하고, 합의를 추구하고, 누구의 목소리 하나 외면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30쪽). 여기에서 갈등과 합의, 소외되지 않음은 시민이 자기의 이익에 갇히지 않고 공공의 관점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배제한 논의가 아직 성숙하게 자리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역설을 포함한다. 그러나 한편,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의 역할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공공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시민이 필요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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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은 ‘대표’라는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가고, 현대 민주정치에 나타나는 대표의 역설. 그리고 대의민주제 자체에서 오는 한계를 살펴본다. 3장은 ‘정부’가 문제해결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을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많은 역설이 있음을 보여준다. 4장은 ‘제도와 조직’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공무원에 대해 가지는 우리들의 상반된 기대에 따른 모순을 살펴보고, 우리가 이에 대해 어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를 본다. 5장은 제도와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들의 역설을. 6장은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타자를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7장은 ‘공공성‘ 또는 ‘공적 영역’의 개념과 지향하는 바를. 8장은 위의 다양한 역설들을 마주하는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를 본다. +) 그리고 책 곳곳에 ’작은 공‘, ‘철인왕’, ‘작은 자’ 등 저자가 조작적으로 정의한 개념들도 소개되어 있다. 즉, 이 책은 현대 정치의 다양한 차원에서 나타나는 ‘역설’들을 심도있게 살펴보고 민주주의의 당사자들인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이 역설들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민주주의로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 스스로 대답하도록 안내한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과 함께 하나의 실험을 한다. 책의 본문에도 언급되어 있듯, 저자는 일부 주제들에 대해 굳이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서술한다. 하버마스식 토론의 장을 책 속에서 연 것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평소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는 자주 접하고 공부하지만, 스스로 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다는 명확한 가치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치판단이기에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매번 달라질 수 있을 터인데, 단 한번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단순히 공부한다는 개념으로만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왔던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펼친 학자들과 그 역사는 잘 알지만,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 지금 이 사회를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작은 자’들이 살고 있는 ‘감추어진 세계’에 남들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생각했지만 그들에 대한 동정, 연민,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절망적인 감정과 인권 감수성을 가지는 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내 마음을 피로하게 할 지라도 계속해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주변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관심을 가지는 태도는 우리 사회의 많은 ‘작은 자’들과 강강술래를 하듯 손을 붙잡고 연결되어 있게 한다. 한국 사회는 계속해서 개인주의로 점철되어 가고 있으나, 재난과 위기를 겪어 나갈 끈끈한 유대로 금방 뭉칠 줄 안다. 이러한 매커니즘을 만들도록 훈련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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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가?
솔직한 입장으로 본인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불편해서'였다. 그렇게 끊임없이 권리를 주장하며 논리를 펼치는 데도, 정치인이 더 나은 제도를 제공하며 이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논쟁을 펼치는 데도 해결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풀에 금방 지쳤던 것이다.
이 책은 현 사회에 민주주의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지, 이 사회는 많은 역사, 문화, 정치, 제도 등으로 건설이 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일어나는 차별, 억압, 배제 등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에 다양한 사례(실화, 영화, 경험 등)을 제시함으로써 어려운 정치이야기를 조금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이런 낱낱히 공개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에 우리는 희망을 품기도 절망을 다시 한 번 맛보기도 한다. 우리가 이렇게 끊임없이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해결을 하기 위함일까? 설령 해결이 됐다고 할지언정 우리들이 억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성찰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분위기 측면에서도 성찰과 이해를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사회에 호소하는 마음을 들어줄 수 있는 건 '사람으로서의'우리이지, '제도적인'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각박한 사회에서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자 노력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이 사회에 목소리를 목놓아 외치는 이유가 아닐까? 제도적인 측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측면에서 충족이 어려울 경우,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이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배제하고자 했던 '감정'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람이기에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 없다면 우리도 없는 셈이 된다. 소통에는 감정이 포함이 되고, 그 감정을 통해 우리는 공감하여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분노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더욱 해결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는 할 수 없다며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러한 점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존중받고 싶어하는 만큼 이 사회도 존중받기를 원할테니까. 이 사회를 존중하는만큼 나를 존중하니까.
그것이 우리가 이 사회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고 ,이 사회를 지키고 싶은 이유이다. 이 사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도모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창비 출판사로부터 무료제공받아 주관적인 시선에서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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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없다. 민주주의는 더이상의 효용을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상일 뿐이고 당장의 현실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독재자일지라도. 너무도 익숙한 말이 아닌가. 명목상이라고 할지라도, 민주주의 외의 체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서조차 심심찮게 들려오는 반-민주주의 구호들이다. 나또한 평생을 민주주의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으나 그 효용성보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더딜지라도 부당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장점이자 핵심보다는 폭력적일지라도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미는 독재자를 원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p.49 멋진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찰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 역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우리의 마음과 작음에 초점을 두고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p.105 누군가가 누군가에 의해, 혹은 무언가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은 그것들 간의 어떤 연결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주권이 여전히 자신들은 정치로부터 멀다 느끼는 민중에게 있을 때, 권력이 한 명에게 집중되지 않을 수 있는 견제장치로서 자리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가장 조용하고 무력한 것처럼 보이나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 정치형태이다. 무엇에? 퇴보에, 독재에, 권력의 폭력에. 설령 그것이 와닿지도 않는 한 줄짜리 문장으로나마 존재할지라도.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요즘이다. 멀게만 느껴진다. 일개 시민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수천 명이 모여 외친들 권력의 손짓 한 번에 함구할 수밖에 없지 않은지 회의적으로만 느껴지는 시대이다. 나날이 그러하다. 정치분야 뉴스에 한숨 한 번 쉬어보지 않은 자만이 이 책을 보지도 않고 밀어둘 수 있다. 아니, 그런 이야말로 더더욱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주권자로서의 민중이 영원히 일치단결될 수 없는 권력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p.198 우리가 리더에게 ‘우리만의’ 이익을 기대하는 것을 리더나 리더가 되려는 권력추구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이러한 마음에 호소함으로써 사회적 검증 시스템을 지나 우리의 리더가 되고, 그의 무능력과 무책임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결단코 말하건대, 민주주의는 단 한 번도 모두가 만장일치로 박수치며 환영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쉽고 빠르고 편한 길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가. 어째서 포기하지 말아야할까. 제목만 보면 절망하고 지쳐버린 이들에게 위로를 줄 것만 같다. 희망차고 즐거운 구호로 다시금 우리를 똘똘 뭉쳐 약진하는 세계로 이끌어줄 것만 같다. 그렇게 “철인왕”을 바라는 나약하고 은밀한 인간의 습성을 마주하게 하는 것도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것만 믿고 따라오시라는, 희망의 청사진이나 등불 따위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다고, 그것만이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제목의 참된 의미이다. p.225 민주주의에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유입니다. p.362 우리는 우리가 놓인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헛된 철인왕과 독재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있다. 기대하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실망하고 아파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가능성이다. 상상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키는 대로만 살다 죽으면 그만인 삶이 전부가 아님을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 절망은 희망의 존재를 증명한다. 민주주의는 허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모든 정치체제가 그러하고,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 대체로 그렇다. 상호간의 관습적이고 암묵적인 합의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만이 허상이 아니며, 민주주의 사회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허상이 아니라고. 그러니 조금만 더 고민해보자고, 우리가 절망하는 바로 그 지점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마음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낙관이 아닌 희망을, 끝이 아닌 절망을,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이기를 포기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p.370 우리는 절망과 구분되는 희망을 품는다기보다는 절망하기에 희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절망이 틔우는 싹이자 꽃일 것입니다. 하찮은 절망이 아닌 운명적 절망은 우리가 순진한 낙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희망의 방부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생명의 방부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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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사회 속 안에 그 어느때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 익숙한 체계인 민주주의 안에서 어쩌면 그것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많은 문제들을 단위에 치중을 둔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작은 단위의 문제나 여론이 형성되지 않는 사건들에 대해서 일일히 생각해볼 기회는 적다. 연결되어 있다는 건 언젠가 어떠한 문제든 개인에게 발생할 수 있고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그 문제가 일어나거나 영향을 받는 그제서야 그것을 해결해보려고 해도 우리에게 익숙한 체계의 도움을 받을 때 해결책이나 답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절망할 수 있다. 절망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책의 저자는 다른 사회과학서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 구조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그 구조 자체도 이 책이 전하고자하는 메세지와 어울린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같은 대안을 주는 대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체계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이야기를 해본다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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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태현 교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전에 알지 못하던 분이었고, 강의 분위기도 꽤나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사실 강의 내용도 막스 베버나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조직내에서 악의를 가지지 않은 공무원들이 수동적인 악마가 될 수 도 있다는, 어찌보면 훈계와 같은 이야기를 예의바르게 이야기하는 정도였기에, 그냥 끄덕이면서 듣는 정도였다. 그런데, 뭔가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제도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는 방식이랄까, 태도랄까 하는 것에서 뭔가 성찰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냥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검색해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그 느낌은 남아있다. 이 분이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약간의 짐작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이 들게 되는 독서였고, 일부러라도 천천히 드문드문 읽어나갔고, 딱히 어느 부분이 맘에 든다고 말할 건 아니었지만... 두 번의 탄핵 정국을 지나면서,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눈치,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단독자의 입장을 경험해 가면서 느꼈던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그런 정서를 얹어 볼 수 있는 글들이었다. "....민주주의의 곤혹스러운 역설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위한 제도로 고안되었는데, 오늘날 국가 역할의 확대로 인해 민주주의 체제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가 태동하던 18세기 이후 문제의 해결은 정치보다는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에 의존하는 것으로 역사가 흘러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의 작동조차 국가에 의존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발전국가 혹은 촉매국가와 같은 개념은 이 시대의 국가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국가의 구성 원리인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문제를 잘 풀지 못하자 이제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리더를 우리 스스로 갈망하는 역설이 등장합니다. ..." 나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냐 (민족)국가냐 하는 질문은 너무 고급지고 사변적일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그 혼재의 상황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도화된 민주주의 국가들이 끌어안고 있는, 어찌보면 현대 인류들이 끌어안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기, 그리고 대학 다닐때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문제, 소위 데모에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 엄마와 논쟁 아닌 언쟁이 여러차례 있었다. 그럴 때 종종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면서, 어찌보면 의미 없을 이야기들을 엄마에게 한 것 같다. '민주의의라는 건 얼마나 인간 개개인들에게 도덕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건지 아세요? 엄마가 그냥 싫어하는 빨갱이의 문제도 아니고, 열등감에 빠진 이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것같은 건 아니라구요. 정말 중요한 거에요'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 그러한 매우 이상적인 철학이고 윤리의 기준 같은 것인데... 그 민주주의의 현실의 문제를 이 인용 부분이 잘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리더, 독재자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쓴다. "... 여기서 대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정치적 의사결정과 그 결정의 집행을 나누어놓았습니다. 이 체제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기술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전문가들이 알아서 처리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이냐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시민들의 의사를 그나마 고려하는, 거의 유일한 체제입니다. 즉 대표라는 것은 우리의 의견이 들리게 하는 원리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 하지만, 리더를 선출할 때, 이러한 민주주의의 원리와 철학에 맞게 뽑는 사람이나 뽑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가 현실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역대 대통령들 모두 어떠한 문제를 잘 해결했냐 아니냐를 가지고 파가 갈리고 있는 이 상황. 공론화, 대토론, 숙의민주주의 등등 화려한 레토릭들은 많지만, 어쨌거나 자기편의 의견을 더 많이 들리게 하려는 노력들로만 점철되어 온 상황. 그리고, 내가 들었던 강의에서도 언급하지만, 저자가 언급하는 기술적 부분의 전문가를 대표하는 공무원들 조차도 집행과 결정 사이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현상이 많이 발견된다. 시민의 자유와 평등한 의사개진을 위해 고안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민주주의가 왜곡된 리더관과 문제 해결을 위한(문제 자체가 계급, 계층적인 성격이 다분하겠고) 기술적 제도화에 파묻혀 있는 상황에 개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드러나는 문제 중 하나가 능력주의가 아닌가 싶다. "... 지나친 능력주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 부여되는 재능의 종류와 양에서부터 시작되는 운의 통계적 편차(그것이 운의 본질이죠)에서 오는 결과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배분의 불평등과 부당함을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사고를 우리 마음에 심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존엄성에 생채기를 냅니다. 지나친 능력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능력의 차이와 그에 따르는 합당한 수준의 보상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의 결과를 즐기는 이들은 언제나 이러한 역설을 회피함으로써 공적 담론에서 우위를 점하려 합니다. ..." 능력주의의 문제는 공시적으로 원리에 대한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구축되어 버린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를 회피하려는 기득권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와 평등이 원초적으로 논의되는 것이냐, 아니면 어떠한 기반 위에서의 자유와 평등인 것이냐의 문제, 그 문제를 얼마나 자유롭게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것이냐의 문제. 저자가 인용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의 표현...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좀더 평등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지만, 어떤 사람들은 좀더 자유롭습니다." 참, 민주주의의 길은 고행의 길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가 인용한 토크빌의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에 대한 감성이 이 책이 쓰여진 주요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자유로운 민주정치는 능란한 기술을 가진 전제정치처럼 그 모든 계획을 말쑥하게 성취하지는 못한다. 민주정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전에 계획들을 포기하거나 위태로운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경우 그 계획들을 내버려두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민주정치는 어떤 형태의 절대정치보다 많은 결실을 거둔다. 잘하는 것이 많지는 않아도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민주정치 아래서는 정부가 하는 일에서보다는 정부가 개입하지 않거나 정부 밖에서 이루어진 일의 성과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민주정치는 국민에게 가장 능란한 정부를 제공해주지는 않지만 가장 유능한 정부라도 흔히 이루어놓을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모든 부문에 걸치는 활동, 충만한 힘, 그리고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기적들을 낳을 수 있는 민주주의와는 뗄 수 없는 활력, 그런 것들이 민주정치의 진정한 장점들이다. ..." 아, 이토록 지독한 공자님 말씀같은 민주정치의 설명이라니... 능력주의, 실적주의로 찌들은 현 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우니 절망을 거쳐가며 그래도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는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저자의 낭만이 강의때도 독서때도 느껴진게 아닌가 싶다. 저자의 과도한(???) 낭만은 다음 이글턴의 인용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끈질기게 희망을 품는다. 왜냐면 우리는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 만약 우리가 '희망은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는면,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은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 확실성'으로 변하기 쉽다." 내 신분으로는 그런 시위에 가서는 안된다는 제도적 한계를 분노와 절망을 씹어가며 무시할 때, 아이가 유아때는 그냥 달래가면서 그리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직장을 포기했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대오에 슬며시 끼어들었을 때, 분노와 정의감 말고 분명 저자가 말하는 절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낙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란 놈도 있었음은 자신이 있다. 그러한 세월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써, 저자의 낭만이 멋지게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