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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중에서
‘담쟁이’의 시인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현실이 견고하고 높은 벽 같아도 담쟁이 잎 하나가 수많은 잎들을 끌고 가듯 민중이 함께한다면 얼마든지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깨우쳐주는 시다. 작은 힘이라도 뭉치면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인이 10년 넘게 숲에서 칩거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제21대 국회의원. 그를 아는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그가 상처받을까봐.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임을 알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교육민주화에 헌신했던 사람이니까. 세상을 따뜻하게 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맞서 싸우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때껏 그의 시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 그를 TV에서 보게 되면서 조금씩 거리를 느끼게 됐던 게 사실이다.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은 과연 그가 그렇게 했을까 의심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시집은 시인이 자신과 조화롭지 못했던 세상에서 돌아와 자기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시대를 성찰하고 치유하고 다독이는 시간들에 관한 시가 담겨있다. 시 <바깥>에서 자신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이유와 그 이후 겪게 된 일들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지는 해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하늘이 찬란한 것처럼 인생에서 마지막 의지를 가지고 나섰던 ‘바깥’은 각오한 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은 박수와 경멸과 영광과 치욕과 환희와 고통 모두를 주었으며 설렘과 슬픔 속에서 자신의 한 생애가 흘러갔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며 위로한다. 그 선택이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갉아먹어 버렸다 해도. 시 <심고>를 읽어 보자. 세상을 바꾸려 정치를 했지만 마당만 좀 쓸다가 온 것 같다고 한다. 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화자는 세상일에 간섭한 일이 잘못이 아니라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잡다한 말만 많이 했다며 후회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영혼은 황폐해졌다. 이제 자기 내면과 영혼을 돌봐야할 때임을 느낀다.
심고 - 도종환
무엇 하다 왔는고? 시 쓰다 왔습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 세상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좀 바꾸었나? 마당만 좀 쓸다 온 것 같습니다 깨끗해졌다 싶으면 흙바람 쓰레기 다시 몰려오곤 했습니다 수처년 동안 당신께서 못 바꾼 세상을 저희가 십여년에 어찌 바꾸겠습니까 세상일에 왜 간섭하고 싶어 했노? 혹한이 깊어지면 봄 햇살로 간섭하고 싶어 하시듯 땅이 메마르고 갈라지면 빗줄기 보내 세상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시듯 저도 그리하였을 뿐입니다 애썼다, 가서 꽃밭에 물이나 주거라 제 영혼의 꽃밭에 물 주어도 될까요? 겉넘는 소리 그만하고 시키는 대로 해라 말도 좀 줄이고 할 말을 해야 할 때 제대로 못하고 잡다한 말만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나머지 날들을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언제 네가 내 말 들었더냐 P.88
바깥에서 돌아와 이제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바친다. 시 <깊은 밤>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쓴 자화상이다. 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시인은 인내와 기다림의 자세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시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읽어보자. 현실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이다. 가장 어둡고, 거칠고, 사나운 세상이다. 그러나 화자는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이지만 우리 서로가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고 타인이 지옥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상처주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시인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신에게 고해와 기도를 드린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 도종환
깊고 고요한 밤입니다 고요함이 풀벌레 울음소리를 물결무늬 한가운데로 빨아들이는 밤입니다 적묵의 벌판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고인 어둠을 성찰하게 하여주소서 내가 그러하듯 온전하지 못한 이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어제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니 도덕이 단두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예단을 넘어서는 원융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하소서 비수를 몸 곳곳에 품고 다니는 그림자들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관용은 조롱당하고 계율은 모두들 최고 형량으로 단죄해야 한다 외치고 있습니다 시대는 점점 사나워져갑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내면의 사나운 짐승을 꺼내어 거리로 내몰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면죄는 없습니다 지금은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사방이 바닷속 같은 어둠입니다 우리 안의 깊은 곳도 환한 시간이 불빛처럼 내려올 때 있고 해 뜨는 쪽과 멀어져 그늘질 때 있고 캄캄해져 사물을 분별하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모두가 내 안의 늪으로 흘러와 고입니다 서로를 부족한 그대로 인정하게 하소서 곳곳이 전쟁터이오니 당신 손으로 이 내전을 종식하여주소서 사람들이 고요한 밤의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P.16~17
상처받은 시인을 돌봐주고 치유해 주는 것은 다시 돌아간 ‘숲’이었다. 꽃과 나무와 풀이었다. 인생에 대한 가르침 또한 나무에게서 배운다. 시 <가을 나무>에서 상처받은 화자가 가을 나무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화자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작업을 인정받지 못해 힘들어 하며 가을 나무에게 간다. 가을 나무가 잎들을 언젠가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며 마지막까지 가만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다. 자신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시 <겨울 나무>를 읽어보자. 겨울 나무는 침묵을 지키며 바람과 폭설 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겨울나무가 침묵의 언어로 가르친 것은 갑자기 불어닥친 시련을 이겨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인 것이다.
겨울 나무 - 도종환
된바람에 모질게 시달리다 눈발과 함께 바람이 산을 넘어간 뒤 천천히 숨 고르고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자 겨울 나무는 나를 내려보며 말했다 바람을 이기려는 건 무모한 일이죠 바람이 사나울 땐 바람에 몸을 맡겨요 꽃 피는 시절에는 허영에 들뜨지 않고 푸른 잎 무성할 땐 겉넘지 않고 열매가 찾아올 땐 자신에게 충실할 줄 알면 찬 바람 몰아칠 때 비굴하지 않다고 가지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나무가 일러주었다 황홀하게 물든 잎들 허공에 날려 보낼 때나 폭설이 몰아쳐 온몸 오그라드는 날에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게 실력이라고 폭우 쏟아질 때부터 눈발 날릴 때까지 하루하루를 견딜 줄 아는 힘이 실력이라고 그걸 감당할 수 있어야 큰 나무 되는 거라고 겨울 나무는 침묵의 장엄한 언어로 말을 건넨다 웅웅거리던 신음 소리도 잊고 산발치에서 산마루까지 고요해졌다 P.94~95
시인은 자신의 상처 치유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떠나온 세상이지만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치 못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 <칼>을 읽어보자. 태국의 아잔 차 스님의 말씀을 통해 시인이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경구이다. 권력은 칼과 같아서 한 번 쥐고 나면 그 힘에 대해 맹신한곤 한다. 그리하여 그 끝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른다. 이 시는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칼
아잔 차 스님이 승려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원 밖 대나무 평상에 앉아 나무 베는 큰 칼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들 그거 아니느가? 아 칼로 금속을 내리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콘크리트를 베려 든다면 유리나 돌을 자르려 한다면 칼날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정신도 이 칼과 흡사하다 하면서
정신도 그러한데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은 그 칼로 무엇이든 다 베어버릴 수 있다고 믿기 쉽다 돌도 내리치고 쇠도 잘라버릴 수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절대 칼날에 이가 빠지거나 칼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P.118
이제 시인은 조급해 하지 않는다. 세상은 더디가도 간절히 바라는 이들로 인해 바뀌왔다. 시인은 그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림의 자세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려 한다. 또 진흙탕 같은 세상에 담 쌓고 살지 않고 계속 간섭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사람들에게 따끔한 충고와 조언도 포기하지 않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면서. 시 <그때>와 <연꽃>을 읽어 보자. 자기가 바라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올 거라 믿으니까. 또 높은 곳에서 연꽃이 피기만을 바라고 흙탕물에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자신이 더러운 세상으로 나갔다. 비록 상처받아 돌아오긴 했지만 앞으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세상일에 참여할 것이다. 그게 교육자로서, 활동가로서, 시인으로서 살아가던 그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그때 - 도종환
그때가 언제 오는지요?
그렇게 늦게 오기야하겠어요? 곧 옵니까? 그렇게 빨리 오기야하겠어요?
칠순의 종법사는 환하게 웃으시는데 기와지붕 끝에서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P. 124
연꽃 - 도종환
높은 산에서는 연꽃이 피지 않는다 연꽃은 낮은 곳에서 핀다
우리 너무 높은 곳에 있으면서 속으로는 연꽃 같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흙물 튈까봐 조심조심 걸으면서 상식의 영역으로 많이 넘어와 있으면서
썩는 냄새도 물벌레도 불편해하면서 향기만 취하려는 건 아닐까 P.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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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고달프고 많이들 외로워한다는 걸 아는 어두운 뒷자리에서 혼자 많이 울어 본 오늘도 몸은 녹아내려 버티다 녹아 없어지는 자주 갈피를 못 잡고 혼자 감당하기도 버티기도 견디기도 힘들고 아픈 안간힘으로 어둠속에서 한쪽 무릎이 주저앉아 기진맥진 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고요히 그의 시귀가 줄줄히 묵주가 되어 눈감게 한다. 이렇게 또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살게한다. |
|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은 극적인 사건이나 강렬한 갈등 없이도 한 사람의 내면을 깊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은 하루의 한가운데, 가장 밝아야 할 시간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문장은 절제되어 있고 서사는 조용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놀라울 만큼 진하다. 읽다 보면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삶이 충분히 복잡하고 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생각과 감정들이 문장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책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리듬을 가진다. 서두르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독자가 스스로 느끼도록 기다린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는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순간에 특히 잘 어울리는 책이다.#연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