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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독문학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바란 건, 글을 통해 하나의 집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을 제 나름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하나의 집이지요. 이 집에 난 창을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을 좀더 깊고 넓게 이해하길 희구했습니다."ㅡ문광훈 독문학자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김영사, 2015)은 푸코의 윤리적 주체론과 실존미학을 토대로 미적 아름다움과 윤리적 성찰의 문제를 조명한다. 푸코는 자신을 자기 행동의 윤리적 주체로 변형시켜가는 것을 실존미학의 궁극적 이상으로 보았다. 실존미학이란 진리에 대한 지속적 관심 속에서 자기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한 그리고 사물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자기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고 고안해내는 것을 말한다. 심미주의 선언이 지향하는 것은 삶의 미학, 다시 말해서 삶의 자기양식화이다. 이는 반성적, 성찰적, 비판적 계기의 내면적 육화로서의 심미주의를 지향하므로, 화려하고 멋진 것을 추구하는 보들레르의 심미주의 혹은 유미주의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저자는 예술의 경험을 통해 자기 삶을 살아가는 심미적인 자기형성의 길을 탐색한다. 푸코의 실존미학적 주체론은 주체의 변화 가능성을 중시하는데 이런 변화는 우선적으로 자기수련적이고 자기실천적 함의를 지닌 자기배려의 개념을 토대로 한다. 자기배려의 개념은 자기돌봄과 자기수련의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푸코는 주체가 절제와 연마의 실존적 기술을 통해 스스로 얼마나 변해갈 수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윤리적 주체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중시했다. 푸코는 역사상 나타나는 세 가지의 자기실천적 모델을 플라톤적 모델, 헬레니즘적 모델, 기독교적 모델로 구분한다. 플라톤적 모델은 자기를 인식하면서 절대적이고 진실된 존재를 상기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일명 '존재상기의 모델'로도 불린다. 기독교적 모델은 성경의 해석에 치중하는 '자기주해'와 성서적 진실 앞에서 자기자신을 버리고 금욕적 실천을 강조하는 '자기포기'를 지향한다. 헬레니즘적 모델은 자기인식과 자기포기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수련과 절제를 통한 '자기실천'을 지향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강조한 자기실천은 자기변형을 위한 윤리적 실천이며, 초월적 가치나 사회적 규범 등의 외적으로 강제된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재적 질서의 요청에 따라 자기자신을 윤리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저자 문광훈은 이를 '내재적 초월의 길', 혹은 '현존적 초월의 방식'이라고 부른다. 심미적 경험은 윤리적이기도 하다. 심미적 경험은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시키면서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공적 행복으로 나아가는 개인적 자아의 자기갱신적 변형활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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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문광훈/김영사] 마음의 아름다움과 좋은 삶에 대한 인문학...
예술과 삶은 어떤 형태로든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원시사회부터 이어져온 유구한 문화가 예술이다. 하지만 예술은 멀고 삶은 가깝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그런 삶에 단비처럼 예술적 감수성으로 촉촉이 채워 줄 심미적 인문학자 문광훈 교수의 이야기가 현실과 예술의 접점을 돌아보게 한다.
예술의 마음밭을 가는 일(심전경작)은 기품 있는 자유의 즐거운 길이다. 미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고, 심미적인 것의 가능성은 유효하다. 이 가능성이란 줄이면 ‘자기를 만드는’ 데 즉 자아의 형성에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인격의 심미적 형성론’이다. (11쪽)
처음에 나오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담긴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이야기가 강렬하다. <최후의 심판>은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프레스코화인데, 땅과 하늘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들어 있다.
성 바돌로메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순교한 예수의 제자다. 그림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에 가죽이 벗겨진 채 바돌로메의 손에 매달려 있다. 알맹이는 없고 허물인 채 심판을 기다리는 얼굴이 미켈란젤로로 밝혀졌다니. 결국 심판을 기다리는 순간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인 셈이다. 1923년 이태리의 의사인 카바가 밝혀냈다는 미켈란젤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허물을 그려낸 미켈란젤로의 재치가 돋보인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기에 결국 남는 건 껍데기가 아닐까. 가장 자연스런 모습,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 아닐까. 과연 인간이 심판을 기다리는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 자기직시의 자기성찰의 표현이라면, 이 자기성찰이란 삶의 진실을 위한 성찰이고, 그 진실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수난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다. 이 의지의 표현으로 그는 자기가 껍질로 내걸리는 수모도 견딘다. (19쪽)
현재의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보는 예술가로서의 용기 있는 표현이 아닐까. 대대로 전해질 자신의 굴욕스런 모습마저도 수용하는 대인의 포스도 보인다.
저자는 죠르죠네의 <자화상>을 통해 화가의 눈빛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오만함을 이야기한다. 바른 자세로 정면을 응시하는 뒤러의 <자화상>가 실제보다 미화된 그림이기에 화가가 추구하던 균형과 조화, 완결 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살바토르의 <자화상>에서는 눈빛과 꽉 다문 입매보다 서판에 쓰인 문구인 “침묵하거나, 침묵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라”를 강조하고픈 화가의 의지를 전한다. 앙소르의 <자화상>에서는 화가를 둘러싼 무수한 가면, 다중적인 면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거울은 속이지 않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화상은 예술가의 자기직시, 자기성찰의 표현이다. 세상의 모든 화가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내적 세계를 드러내고 미적 자아를 보여주며 세상에 대한 시선도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 여러 자화상을 보며 너 자신을 알고 무지를 깨쳐라고 외치던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그렇게 자의식, 예술적 자아, 사회적 자아, 가면의 세계와 진실의 세계를 표현한 자화상을 보며 나의 내면의 모습도 돌아보게 된다.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에서도 자화상이나 자서전은 작가들이 흔히 다루는 소재다. 먼저 자신에 대한 성찰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일까. 관상학은 아니지만 한 점의 자화상을 통해서도 작가의 개성, 인생관, 예술관을 볼 수 있다니, 재미있는 경험이다. 허물을 벗기는 일은 누구나 필요한 과정일 것이다. 페르소나를 쓰고 살았던 일생에 대한 자기반성, 자기표현이 자화상이라니, 무심코 스쳤던 자화상들이 이젠 새롭게 보인다.
책에서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이태리 정원에서 야만과 무지를 내쫓는 미네르바>,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 플라톤의 영혼의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격과 습관의 실천문제, 롤란드 사베리의 <오르페우스>, 푸코의 자기로 돌아가기, 공재 윤두서의 고요 가운데 자신을 지키는 예술, 카라바조, 백석, 바를라흐 등의 예술과 삶에 대한 통찰이 가득하다.
시와 산문, 그림과 사진, 조각과 철학이 있는 심미적 인문학이다. 실제적이고 생활 중심의 심미적 체험을 제공하는 심오한 이야기다. 마음의 아름다움과 좋은 삶에 대한 인문학이랄까. 무심코 펼쳤다가 쏙 빠져드는 깊이 있는 예술적 삶에 대한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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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삶의 교사가 아니고요. 아직은 그렇게 되기에는 어리고 미숙하지요. 책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좋은 책은 상투적 사고로부터 거리를 두게 한다는 것 말이지요."
위의 글은 본문이 아니라 부록에 실린 인터뷰집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일전에 읽었던 스토아 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강조했던 부분과 상통하는 부분이라 읽는 순간 리뷰의 중심을 '반 상투적 사고를 위한 예술'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미주의 선언의 저자 문광훈 교수도, 에픽테토스도 결국 책을 읽기 전 후가 같다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심미주의 선언을 읽고 어떻게 달라졌을까? 문교수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더 긍정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지만 정작 그 예술이 우리사회 혹은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헤아려보면 나아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심미주의라는 말 뒤에 '선언'이라고 강하게 말한 까닭이다. 책을 읽고 사고가 변화하지 않은 것이나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마음의 경도가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결국 독서도, 예술감상도 의미가 없게 된다.
푸코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그리고 공재의 <행장>까지 논평한 후 이 조선시대 선비의 <자화상>에 이르면, 이제 우리의 관심은 -중략- 자기배려/자기돌봄/자기형성의 문제가 더 이상 논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술작품과의 구체적 경험 속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가 논의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 237쪽-
예술을 접하고 삶의 녹여내지 못하고 학습을 통해 '지식'의 하나로 예술을 대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들은 예술에 '관한'지식은 해박할 지 몰라도 결국 '예술가'가 결코 될 수는 없다. 심미적 경험에는 여러개가 있지만 슬픔을 표현하는 서정적 모음곡을 다룬 파트에서 마음이 동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결국 자기애에 빠져있거나 자기비애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패로서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등 음악가 말고도 학부시절 제임스 조이스를 접하면서 알게 된 '에피파니'나 이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발터 벤야민의 '세속적 계시'가 삶에서 느껴지는 시적 순간이자 앞서 말한 내가 느끼는 예술적 순간이기도 하다.
제목이나 책의 두께를 보면 전공서적처럼 무서워보일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두꺼운 책은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적어도 이 책은 그들이 말하는 '두껍고 두려운'범주에서 빼줘야 할 것 같다. 저자 스스로 어려운 말로 교란시키는 것이 미학이나 심미가 아니라 쉽게 접해서 삶의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주장한 만큼 이 책은 어렵지만 쉽다. 쉽지만 사례로 든 작품이나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재밌기까지 하다. 더이상 예술의 정의와 역사만 붙들고 머리아프다고 투정부릴게 아니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찾던 '심미'가 이 책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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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엔 총 네 개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죠르죠네의 삐딱한 고개, 뒤러의 정면 응시, 로사의 앙다문 입술, 앙소르의 괴물들. 특히 마지막 앙소르의 자화상에는 다종다양한 '것'들이 나오는데 그 기괴한 괴물, 좀비, 해골, 시체, 인간들은 '멀쩡한 앙소르'를 겁먹게 하지 못하며, 멋진 붉은 모자를 쓴 그는 종국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동일시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화상의 주인공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좀비나 흡혈귀와도 같다. 나ㅡ앙소르ㅡ그들은 거울, 성수(聖水), 십자가나 마늘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들의 두려움은 승진, 실패, 잔고 액수, 자동차, 실직(失職), 안락한 집에 있다. 때문에 문광훈에 의하면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 스스로의 생활을 만들지 못하고 자신의 색채를 찾지 못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하나, 그의 말대로 끝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똥파리처럼 죽어갈 공산이 클 것이다. 공공의 미덕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예술 체험이 자발적 발의와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술의 진정성이라. 글쎄. 아름다움이 내가 보고 만질 수 있게끔 경험적 산물로써 작용해야 하건만 그 고유하고 일관된(현대사회에서) 방식이 아름다움 자체로 현현되기까지의 시간과 간극을 어떻게 메운다는 건가? 항거의 발현이라는 것이 규범 일탈로 정의되지 않고 예술생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결국 나ㅡ앙소르ㅡ우리가 주체를 이해하고 연마해, 자신과 예술 발현의 관계를 개선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규범의 틀 속에서가 아닌 나 스스로 즐겁고 기꺼워하는 상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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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문광훈 교수는 네이버 열린연단에서 좋은 에세이를 여럿 썼다.그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많이 느끼고 배웠기 때문에 이 책을 접할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저자는 독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윤두서 선생과 이태준 작가를 다룬다.보통 서양의 문학이나 역사를 전공한 사람은 서양의 고전이나 작품들을, 동양 쪽으로전공한 사람은 동양문학이나 동양미술만 다뤄서 아쉬움이 있었는데 저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도 책 속에서 잘 녹여내고 있다.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본인에게 주어진 행운만큼 스스로를 철저히 관리하고 덕을 쌓은 윤두서 선생의 이야기는 어떻게 좋은 삶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지 알려주고, 일제와 북한이라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상이 꺾이는 이태준 작가의 사연은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국어 시간에 문학을, 미술 시간에 미술을 배우곤 하지만 진선미를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주제로 엮어서 하나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기는 어려운데 이 책은 그러한 시도를 해냈다.서양 철학자들의 고전, 각종 미술작품은 물론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까지 엮어서 예술과 아름다음울 통한 선, 선을 통한 좋은 삶을 그려냈다.집단주의를 경계하고 개인을 강조하면서도 혼자만의 말초적인 쾌락이 아니라 열려있는 행복, 자신을 성찰하되 사변적이지는 않고, 아는 것을 실천하지만 배우고 쇄신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는 심미주의는 참 매력적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자기개발서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도 무엇보다 먼저 성품부터 길러야 한다고 조언하는데, 이 책에서도 프리드리히 실러를 인용하여 성격의 고귀화를 강조한다.마찬가지로 좋은 정치, 좋은 사회란 개인들이 좋은 삶을 사는 것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에세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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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을 읽고 문득 ‘미학자’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예전에 읽은 소설이 서울대 미학 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아, 미학과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다는 사실을 핑계로 삼고 싶지만 말이다. 유명한 논객 덕분에 미학자는 낯선 직업 군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지는 감이 잘 안 왔다고 할까? 그런데 그 뜻이 ‘미학을 연구하는 학자’였다. 미학자는 미학을 연구하는 학자라니, 느낌적인 느낌과 비슷한 순환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대신해보고 싶어진다. 미학자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심미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학자라고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여러화가들의 자화상, 푸코의 담론분석과 푸코가 의지한 플라톤의 저작,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이렇게 나열하면 상당히 거창한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유려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그의 말이다. ‘너는 너 자신에게 주의해야 하고, 너 자신을 잊지 말고, 너 자신을 돌봐야 한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지나친 침착(沈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오롯이 하나뿐인 존재인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과연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도 갖게 된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속의 그의 자화상이 다시 한번 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상허 이태준 선생의 빛 바랜 가족사진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이 있다. 마치 그 순간의 행복을 박제해놓은 듯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라보니 그것이 얼마나 거짓된 기록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꺼내놓지도 못하는 그런 사진이다. 심지어 얼마나 꼭꼭 숨겨놓고 싶었는지, 인생을 조금 더 서정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이 글을 읽으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그 사진을 떠올릴 정도였다. 문광훈은 그 사진에 담긴 각각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한국의 모파상이라 불릴 정도로 단편소설을 잘 썼던 이태준은 월북을 한 후, 그 끝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막노동으로 생을 이어가던 그에게서, 자신의 수필에서 나이 들어가는 것을 농익은 능금으로 비유하며,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라며 쓰고 싶어했던 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각자 찾아낸 최선의 삶의 형태가 아닐까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 속의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제각각 이듯이 말이다. 행복이란 어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삶을 수용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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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서 저자가 선택한 싸움의 방식이 어떤 반향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도 해본다.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며 당연시되고 있는 악이 출담음 치는것을 보면서 예술작품을 보며 인간다움을 입증해가고자 했다. 공동체의 집단성보다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고민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다. 개인의 각성을 통해 사회의 합리화를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다는 명제로 이상주의적 사회를 갈망하는 게 이 책의 집필 의도 인듯싶다. 예술가의 창작활동을 알려면 작가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수용하고 문제의식의 표현을 읽어내야 함을 본다. 어떤 실재 사실을 보며 다르게 느끼고 새롭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자기 형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하며 현실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없이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저절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겼던 그림이나 철학자 화가 들의 작품을 그야말로 심미주의로 그들의 삶과 행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았다. 저자가 들춰낸 문제의 예술성들이 저자 앞에서 매 순간 경이로움과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며 글 틈 사이로 놀라움을 향유하는 일은 재미도 있었고 부러움과 반성도 되었다. 예술을 통해서 보는 삶의 관계를 가타부타 껄끄럽게 비난하지 않고도 관대하고 진보적이며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술에 대한 탐구가 작가가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가며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기와 현실이 한 묶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듯, 저자는 그 작가와 닮은 꼴 존재를 의식했을까. 저자 또한 작품을 심미주의적 관점으로 누구의 강압이나 권유가 아닌 자신의 내면과 예술작품을 말하고자 했다. 미켈란젤로의<최후의 심판>, 성 바돌로메의 껍데기의 모습, 무수한 군상들을 주제로 한 가면 가운데에 앙소로의 자화상들을 보면서 삶의 단면이 정치, 예술, 종교 그리고 심리학적 관계의 유기적인 현상들을 보았다. 부자연스럽고 섬뜩한 예술성은 화가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자인 저자를 통해 서사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작가가 보았던 그 당시의 사회적 결과물들은 지금의 사회 문제와 톱니바퀴를 맞추듯 맺어지고 있는 것을 보며,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며 예술성으로 표현했지 싶다. 시대적 역할을 결코 망각하지 않으려 했던 공제 선생의 자화상도 본다. 출사의 길이 막혔던 그의 삶으로 인해 번민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자화상은 세상을 응시하며 자신을 지켜야 하는 모습이다. 공제 선생은 언제나 선량하게 어울렸지만 결코 자신을 잃지 않았던, 원칙과 자존감 또한 본받을 만 하다. 시대적 의무감으로 예술성을 발휘한 문제작들의 해박한 지적 향연들을 보면서 시대를 예술적 재해석으로 은근한 반어법으로 표현되는 것을 본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한 인문 작가의 선언은 자기 형성적 글쓰기로 후세에 던질 만큼 위대하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며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다. 정치에서의 민주화와 경제정책에서의 복지, 사회 안에서의 법률적 정의와 문화에서의 자유, 그리고 남북 관계에서의 평화를 문제로 삼는다. 나는 저자의 책을 처음 대면하고 나서 예술작품을 보는 관점이 확대됨을 알아 차린다. 나처럼 예술작품에 대한 교양이 없는 사람들이나 최고의 심미주의적 배경을 알고, 자신의 삶을 통찰해보고 싶은 사람은 분명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고 새로운 독자층으로 되고도 남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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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두꺼운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심미주의라는 보다 깊은 의미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에 그 두께에 아주 만족했다. 진중권의 미학에 관한 책은 겨우 한 권 밖에 보지 못했는데, 시리즈물로 3권으로 나온 책은 보지 못했다. 한권짜리를 봤는데, 뭔가 시리즈물은 조금 부담스럽고 한 권짜리는 분량이 아쉬웠다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미학에 무지한 내게 이 책은 그 두께에서도 뿌듯했고, 내용도 마찬가지로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미학이란 학문 자체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미적감각이나 지식이 없으면 소화하기가 힘들다. 당연 무지한 나였기에 보다 뜻깊은 독서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실상 내용의 깊이(?)나 수준에 있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비해서는 좀 더 쉬워서 수월했기는 했다. (물론 쉽진 않았지만) 작가의 지식과 필체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워낙 미술이나 미학, 예술에 무지하다보니, 살아가면서 내게 어떤 영감이나 도움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리고 타인이 보기에 쓸데없는 의욕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을 언제나 부러워했던 만큼 그들이 이루어놓은 작품들을 알고 싶은 욕망이 컸다. 특히 미술에 있어서는 서양의 미술만을 우월하다거나 상위에 놓지않고 한국미술도 마찬가지로 치고 있기에,(특히 한옥을 너무 너무 사랑한다)나름 동서양의 미술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자 다른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온 까닭에 편파적인 관심과 확신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러니까 뭔가 대단히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나 나는 무지하기에 그렇다. 미술에 무지한 초보자들을 위해 아주 쉽게 쓴 미술서적은 나름대로의 유용성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흥미를 일으키기 위함으로 쓰인 서적들이라서인지 아쉬운 면도 많이 있었기도 했고, 논문같은 수준으로 너무 어려운 미술서적은 도대체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 아쉽기도 했다. 이 책은 내게는 그 중간쯤이라 할 수 있어 (너무 쉬운 책 보다는 어렵고, 너무 어려운 책 보다는 쉽고)적절한 책이었던 것 같다. 물론 책의 모든 부분들을 다 이해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엔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은 한 번 읽고 던져놓을 책이 아니라 읽고 되풀이해서 또 읽어야 될 책이기에 언젠가는 다 이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양질의 책을 읽게 되어 뿌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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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언(Manifesto)>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인권선언>은 인권에 최우선의 관심을, <독립 선언>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선언(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을 통해 부르주아지의 횡포 아래 고통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Manifesto for Life Aesthetic)>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삶은 먼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예술과 철학을 통해 자기기만의 가면을 벗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문광훈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최후의 심판>에서 묘사한 ‘성 바돌로메’가 들고 있는 ‘가죽’에 집중합니다. 그 ‘가죽’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허물입니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가면적 삶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다는 뜻일 겁니다.
깊이를 상실한 감각적인 글들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문광훈의 <심미주의 선언>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적인 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분명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좋은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푸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합니다. 특히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해 글은 이 책의 압권입니다. 문 교수에 따르면, 공재는 ‘염정자수(恬靜自守)’, 즉 ‘담담하고 고요하게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공재의 눈빛에서 현실의 불운과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재는 푸코의 말처럼 ‘매일매일 불운을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광훈은 예술이 지금 현실의 삶을 쇄신하는 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도대체 존재의 의미가 있는지 묻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광훈의 ‘심미주의(aestheticism)’는 보들레르의 ‘심미주의 내지 유미주의’와는 다릅니다. 예술의 경험은 값싼 취향의 과시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의 양식(style)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개인이 자기 물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살아내도록 도전하고, 그것이 결국 이 사회가 내면적으로 성숙해지는 일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책에 함께 끼어 있는 ‘별책부록’은 저자 문광훈과 편집위원 박광성의 대담입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저자의 저술 의도가 잘 드러납니다. 문광훈은 시와 예술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삶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인문학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심미적 방법이고 생각합니다. 정말 멋진 인문학을 접했습니다. 내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놓친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자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나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야 하며, 예술이라는 간접적 언어로 나 자신의 삶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불행도 연습하며, 고요히 자신을 지키는 염정자수(恬靜自守)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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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능인 것 같다. 아름다움이 진화론과 관계가 있을까? 란 생각을 해보면서 우리는 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가? 생각해본다. 어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고, 그게 아니라 유전자 상태에서 이미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가 새겨져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도 해보고. 문화권 별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미에 대한 기준을 논하는 것은 무가치하지만 최근의 동향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삶과 예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심미적인 여러 장르들 중, 미술을 먼저 말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성 바돌로메의 그림이 책에 실려있는데 이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미술이 주는 자선적인 형식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한 작가는 일평생 단 한권만의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말했던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술은 나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서전식의 표현, 미술에서 보면 자화상의 표현같은 것들이 가장 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내며, 자기 직시과 자기 성찰의 표현을 통해 작가의 많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두번째 장에서는 예술의 '자기성형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연마를 통한 과정을 예술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관람자가 알아보는 것이 예술 감상의 중요 포인트라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정화하며, 변형하고 변모시키는 과정, 그리고 그 완성으로서 스스로 자기를 구제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여러 장르의 예술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사람들로서 철학을 먼저 예로 들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행복에 대해, 특히 철학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철학적 배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의미가 현대에 와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독자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공재 윤두서도 '자기 형성적 실천'에 대해서 예로 들어진 인물이다. 그는 1600년대 말에서 1700년대를 살아간 조선의 화가이자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몸'으로 앎을 익히자라는 생각을 생활로 실천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고 그가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항들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자기의 삶을 오롯이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 마치 그가 현대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그의 초상화는 유명해서 나도 많이 보아왔던 것인데, 눈을 이상할만큼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공재의 시선은 세상을 이루는 소음과 소란의 장면에서 세상의 환란을 직시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조선의 당파싸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바 대로 살아가려 했던 그의 삶과 참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세번째 장에서는 삶의 리듬, 세계의 화음이라고 해서 음악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자기 성찰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있어왔는지 여러 작곡가들의 화음의 모습과 자유롭고 편안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정신적인 것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고요하게 빛나는 선율은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예술의 경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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