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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의 ‘개념비평의 인문학’은 동어반복 같지만 개념비평을 시도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처음부터 개념비평을 의도하고 쓴 책이 아니라 지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의미를 찾아낸 결과물이다. 개념비평이란 개념에 관한 비평이면서 개념을 중심으로 한 비평이다.(새삼스럽지만 대개 개, 생각 념 즉 槪念이란 단어를 쓰는 개념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관념을 말한다. 비평批評은 거스를 비. 평할 평을 쓰는 단어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갈라 말함을 뜻한다.)
동어반복 또는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지 않는 분석명제 같은 정의처럼 들린다. 어떻든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성, 인권, 총체성, 정치, 보편주의, 이방인, 리얼리즘, 폭력 등 주요 개념들에 대해 설명한다. 인권과 관련해서 저자는 아렌트, 아감벤 등의 논의를 이용한다. 인권 개념에 대해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호모 사케르이다. 이 개념은 존엄하면서도 저주받았다는 이중적 의미의 신성함, 그리고 신성한 생명 곧 호모 사케르에 대한 (존엄하므로 희생제의의 대상이 아니지만 저주받았으므로 죽여도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이중적 배제를 환기한다.(25 페이지)
저자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논의에 일정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지적한다. 예외 상태가 주권 권력 성립의 내재적이고도 근원적인 요소라는, 즉 예외가 권력의 요소로 이미 병합되어 있다는 주권 권력 일반에 대한 설명과, 난민이라는 예외적 존재가 근대의 주권 권력인 국민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논리는 상치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라는 주장을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전자는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이고 후자는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인권이란 특정 주체에 할당된 권리가 아니라 주어진 전체 공동체에서 자리를 갖지 못한 자들이 권리 박탈에 대항해 무언가를 할 때 갖게 되는 권리라 말했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인권의 주체는 정치적 주체화 과정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확인되고 비워진 다음에야 기억되는 인권의 아이러니는 인권 개념에 근본적으로 내재한 한계를 가리키기보다 권리의 박탈로서의 벌거벗은 생명보다 실천하는 정치적 주체를 더욱 외면하는 태도가 야기한 결과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31 페이지)
3장에서 저자는 각종 이론이 난무(?)하는 실상을 점검한다. 저자는 물론 이즈음의 비평들을 들추다 보면 각종 이론의 향연처럼 보일 때가 많다는 표현을 했다. 3장의 제목은 ‘윤리에 묻혀버린 질문들’이다. 저자에 의하면 유행의 흐름에서 한동안 우리 곁에 머무는 뚜렷한 이론적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윤리이다. 이 장에서 저자는 바디우와 아감벤이 국내비평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논한다. 저자는 예외도 규칙 만큼 아니 그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내부와 외부가 실상 구성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체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극히 어려운 일이 된다고 말한다.(61 페이지)
이 장에서는 더 이상 벌거벗은 생명의 예외화에 기반하지 않는 정치의 가능성이 타진된다. 저자는 바디우적 보편주의 나아가 아감벤적 메시아주의와 법의 관계를 더 캐묻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논리를 세심하게 이해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진리, 사건, 절대적 타자, 무조건적 환대, 법의 폐지, 새로운 정치 등 이들 이론가를 매개삼아 등장하는 급진적 언사들이 얼마나 탄탄한 인식에 근거하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며, 탄탄한 인식의 부재가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선언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겸한 것이라 말한다.
물론 저자는 이론을 통해 윤리의 영역으로 비약하거나 포복하는 과정에서 때로 너무 간단히 처리된, 하지만 현실에선 계속 발목을 붙잡는 엄연하고 실정적인 법(으로 대표되는 권력 기제)의 영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란 의문에 답을 구하는데 중점을 둔다. 1장에 이어 4장에서도 저자는 윤리라는 주체가 정치에 대한 회피나 억압으로 빈번하게 활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비평들이 제시한 윤리의 정치성에 대한 의문은 당연하다고 말한다.(73 페이지)
저자는 이론 비평이 문학적 상상력을 얼마나 열어주는지 묻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74 페이지) 저자는 절대적 타자라는 말이 이방인이 우리의 인식체계로 포착할 수 없고 표상 불가능한 존재임을 뜻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몰이해를 경고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지 모르지만 이방인의 미학적 위치를 표상 불가능함 자체로 확정함으로써 다른 의미의 단순화를 이야기하며 주체의 인식능력과 상상력의 결핍에 대한 손쉬운 핑계로 활용될 소지가 있지 않은가, 란 문제를 제기한다.(74, 75 페이지)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할 때와 타자에게 적용할 때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몰이해를 반성한다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주체의 인식능력과 상상력의 결핍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란 말이다. 이 이후에 그런 규정에 대한 합리화가 수반되면 완전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방인, 법, 보편주의에 관한 물음’을 제목으로 한 4장에서는 사도 바울로부터 자본의 공허한 보편과 무력한 주체성주의를 극복할 진정한 보편주의와 보편주체의 가능성을 찾은 바디우 등의 논지를 고찰한다.
문제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법의 종말이라는 말과 사랑은 법의 완성이라는 ‘모순으로 보이는’ 말을 한 데 있다. 물론 새로운 법을 문자를 넘어선 법, 정신의 법, 보편적인 법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적으로 새로운 법을 의미하지만 “이렇듯 전혀 다른 종류의 법이라면 왜 굳이 법이어야 하는가”(78 페이지)란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바디우, 지젝, 니체의 기독교’를 부제로 한 5장 ‘보편주의와 공동체’에서 저자는 종교는 온갖 갈등이 집중적으로 얽힌 마디 또는 그런 갈등을 표현하기에 가장 용이한 표어 같은 것이 된 느낌이라 말한다.
홍익희의 ‘세 종교 이야기’를 읽고 “종교는 정치사회적 신념이나 조직, 이해관계 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된 리뷰를 쓴 기억이 난다. 저자는 기독교 전통을 대안으로 삼는 바디우와 지젝, 그리고 기독교 비판의 최초의 체계화라 할 니체를 함께 다룬다. 저자는 바디우와 지젝이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소했는가란 잣대가 유용할 것이라 말한다. 바디우는 보편화된 단독성은 정체성에 연루된 단독성과 다르다고 보았다. 보편적 단독성을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가 바울의 물음이었다.
바울에게 율법은 특정한 것 곧 차이를 지정하는, 그리고 정해진 차이에 의거한 고정된 분배를 뜻한다. 반면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능력과 무관하고 따라서 보상이나 댓가가 아니라 선물의 하사(下賜)와 관련된다.(97 페이지) 바울에 의해 제기된 차이에 대한 횡단과 초월은 차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해짐으로써 차이를 관용하는 것이고 차이에서 물러나 그 차이를 둘러싸고 논쟁하지 않으며 그저 무심하게 가로지르는 일을 뜻한다. 저자는 진리가 모두에게(보편성) 그리고 각자에게(평등성) 열려 있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일시에 진리와의 관계에서 주체로 거듭날 수 없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지젝은 유물론을 통해야만 기독교의 전복적 본질에 도달할 수 있고 진정한 유물론자가 되려면 기독교적 경험을 이해해야 함을 보여줄 필요가 절실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지젝은 바울로 인해 기독교가 유대 종파와 단절하고 전통을 넘어선 것을 레닌으로 인해 소련 공산당이 당대 주류 마르크스주의 집단을 넘어선 것을 같은 차원으로 본다. 지젝은 바디우에 비해 기독교 진리의 성격을 더 세세하게 논의했는데 가령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두고 전능한 신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계획을 완성한다는 일반적 해석을 적용한다면 기독교 신은 도착(倒錯: perversion)이란 혐의를 벗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나도 예수가 십자가 처형 직전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말을 한 것을 비판적으로 논의한 기억이 난다. 삼위일체라면 성부의 계획을 모르지 않았을 예수가 처형 직전에야 그 사실을 안 것처럼 그런 비탄의 말을 쏟아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의 비판이었다. 지젝은 기독교의 신이 스스로 그리고 스스로에게 수수께끼였다는 반박 논리를 제시한다. 지젝은 주체가 자신을 권력과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고 일말의 거리를 유지하는 한, 그래서 권력의 바깥을 몽상하고 바깥의 삶을 이상화하는 한 여전히 권력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한다.(104 페이지)
지젝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원리가 신 자신의 불완전함이라는 지평에서 발현되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이웃을 자신의 거울 이미지나 자기 실현을 위한 방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닌 영원한 수수께끼이자 외상적 사물(traumatic thing)로 사랑하라는 요구라 말한다.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지젝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믿는 것은 신성이 아닌 그의 믿음이며 “왜 저를 버리십니까?”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그리스도 자신이 잠시 믿음을 접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합일은 차라리 그의 의심과 불신에 동참하는 일이라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죽으면서 그와 함께 성부가 있다는 은밀한 희망도 죽었기에 남는 것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 즉 성령이며 이는 성부(또는 대타자)의 지원을 박탈당한 공동체이므로 사실상 기독교는 무신론의 종교라는 말을 한다.l(106 페이지) 니체가 기독교를 표적으로 삼은 이유는 기독교에서 모든 가치의 역전이 완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바디우와 지젝이 기독교가 유대 공동체와 단절하고 보편성의 종교로 확립되었다고 평가해주는 바로 그 지점이 니체에게 가치전도의 정점이 된다고 말한다.(109 페이지)
바디우는 보편주의에 대한 혐오가 니체의 고질적 문제였고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는 인종/ 민족에 토대를 둔 가장 고집스런 특수주의 내지 공동체 주의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예수를 기독교 역사에서 유일한 기독교도로 보았다. 저자는 니체가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과 다르게 예수에 대하여 일말의 존중심을 보인 것(예수는 역사상 유일한 기독교도라는 말을 한 것)이 바디우와 지젝이 기독교에서 살려내고자 했던 전통과 연결되며 더불어 바디우와 지젝이 니체에 빚진 부분을 증거한다고 말한다.(112 페이지)
저자는 바디우와 지젝의 논의는 니체가 제기하고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가능성을 발전시킨 창조적 해석의 사례인가란 말을 한다. 니체는 기독교식 가치전도의 하나로 누누이 비판한 현실 부정의 의지가 예수에게서도 발동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그는 원한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례도 아니고 가장 바람직한 사례도 아니라 보았다. 예수에 대한 니체의 긍정적 평가는 기독교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을 뒤집거나 교정하는 것은 아니고 비판대상 내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니체의 관점에서는 바디우와 지젝 역시 근본적으로는 바울의 거짓을 반복한다고 보일 것이다.(113 페이지)
그들의 말대로라면 보편주의란 공동체를 비롯한 현실의 문제와 무관한 만큼만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보편주의를 마치 현실적 문제들의 해결책인 양 적용하려 든다. 니체식으로 보면 바로 그 순간 바울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거짓과 자기배반이 야기된다는 지적이 가능하다.(113 페이지) 저자는 보편주의라는 이름의 법이 공동체라는 현실을 적절히 포괄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동체주의라는 추악한 보충물의 형식으로 돌아온 것과 공동체주의야말로 바디우와 지젝식의 보편주의를 야기한 당사자라는 악순환 관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니체의 특수주의, 바디우와 지젝의 보편주의)
저자는 단절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단호하게 단절하라고 밀어붙인다면 사태는 당연히 악화될 것이라 말한다.(115 페이지) 2부 1장 ‘새로움으로서의 근대성’에서 저자는 모던이라는 개념에 대해 짚는다. 저자에 의하면 모던으로 지칭하는 시기에 특별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는가 여부에서 오는 긴장이 이 단어의 기원에 새겨져 있다. ‘법의 폭력, 법 너머의 폭력’(2부 2장)은 흥미로운 장이다. 저자는 폭력은 우리 삶에 일종의 제곱으로 존재하는 상수(常數)라 말한다. 폭력은 잔재이거나 일탈 심지어 부수 현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상 근대문명과 모종의 내적 관련을 맺고 있다는 인식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143 페이지)
호모 사케르 역시 폭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문제는 호모 사케르가 법 질서에서 추방과 배제를 당하지만 바로 그 추방과 배제의 형식으로 여전히 법질서와 관련된다는 점이다. 주권 권력은 호모 사케르를 법질서에서 배제하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권력의 대상으로 포섭하는 양면적 작동방식을 지닌다. 지젝은 문명 자체가 어쩔 수 없이 내장하는 폭력을 인정하면서도 폭력 비판의 초점은 그런 일반화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폭력의 차원에 맞춰져야 함을 강조하는 전략을 제기한다. 이는 폭력을 인간의 굴레 일반으로 확장하는 아감벤의 움직임과 대조적이다.(151 페이지)
벤야민은 신적 폭력이란 개념으로 “분분한 해석의 충동을 자극”(159 페이지)한다. 벤야민에 의하면 신적 폭력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해 모든 생명 위에 가해지는 순수한 폭력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신적 폭력은 베풀어 다스리는 폭력이다. 저자에 의하면 신적 폭력 개념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지젝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에 대해 실재하는 역사적 현상들과 과감하게 동일시할 것을 주장하며 이를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와 연결시킨다. 저자는 법을 넘어선 폭력이 혁명적 변화가 아니라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섬뜩한 자기재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162 페이지)
여담이지만 처음 신적 폭력이란 말을 듣고 이를 신의 폭력으로 오독했다. 물론 신적 폭력이란 의미 있는, 초월적이고 바람직한 폭력을 말한다. 3부 1장 ‘리얼리즘과 함께 사라진 것들’에서 저자는 오늘날 리얼리즘이란 용어가 초라하고 낡은 시대착오를 지시하며 다른 이름들의 신선함을 증명해줄 배경으로 소환되는 형편이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비평에서 불가능성이라는 범주가 널리 유행한 데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재(the Real)를 말한 정신분석 담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225 페이지) 정신분석은 총체성이 아니라 총체성이 깨진 지점에 진실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총체성이란 개념이 반드시 체제라는 거대 단위를 들먹일 때만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228, 229 페이지) 3부 2장 '실재와 현실, 그리고 실재주의 비평'은 라깡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비평들이 지젝이 다양한 텍스트를 활용해 라깡 이론을 설명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를 따지며 그것이 개별 비평의 문제라기보다 지젝식 라깡주의를 전유하는 일 자체가 안고 있는 난관일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을 전개한 글이다. 라깡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범주는 실재이다.
저자에 의하면 실재라는 정의 자체가 단일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아 각종 오해가 양산되고 있으며 현실의 여하한 어긋남이 섬뜩한 실재의 환기로 부풀려지는 과잉해석, 현실 전체를 붕괴시킬 재앙에 미달하는 그 어떤 사태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과소해석, 또는 이 두 가지의 이런저런 조합들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232 페이지) 라깡적 실재개념은 상징화 과정의 출발점과 토대를 뜻하고 때로 그 과정의 산물로서의 잔여나 나머지를 뜻하기도 한다. 상징적 질서가 도입하는 결핍을 아직 갖지 않은 어떤 충만함을 지시하기도 하고 상징적 질서의 결핍이나 구멍을 가리키기도 한다.
저자에 의하면 실재란 결국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생명적 구조에서 불가능성을 표시하는 빈 곳일 뿐이라는 것이 라깡의 설명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저자는 지젝 자신도 필요에 따라 실재의 여러 정의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오간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젝이 말하는 실재에 대한 정당한 이해는 실상 매우 적극적인 개입과 실천을 요구하며 그에 따르면 그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이자 정치라 말한다,(255 페이지)
3부 3장 '자끄 랑시에르와 문학의 정치'에서 저자는 문학의 정치성을 정치에 종속된 문학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태도는 공허하며 문학과 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관련된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는 작가의 정치 참여 여부나 다루는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은 고유의 정치를 갖지만 그것은 흔히 말하는 문학의 자율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등이 랑시에르에 기대어 진행된 문학과 정치 관련 논쟁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생각되는 점이라 지적한다.
랑시에르의 '감지 가능한 것의 배분(distribution of the sensible)'이란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그것은 공동의 것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리고 그 내부의 상대적 부분과 자리들을 정하는 경계 설정의 존재를 드러내는, 감각적 지각에서 나온 자명한 사실들의 체계이다. 공동체의 외적, 내적 경계를 결정하는 배분이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자명하다.(260 페이지) 중요한 점은 정치의 핵심에 미학이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감지 가능한 것의 배분을 통해 예술은 예술의 형식이면서 공동체 감각을 기입하는 형식으로 인식된다.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는 감지가능한 것의 배분이 갖는 두 가지 형식이다. 또한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은 바로 그 배분의 층위 즉 공동체와 공동의 것에 관련된 경계 설정의 층위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예술이 자율적이라거나 정치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랑시에르의 설명에서 미학적 예술체제는 여러 모로 재현적 예술체제와 대비된다. "대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기대어 제시되는 재현적 체제는 허구를 거짓에서 분리하고 나아가 허구와 현실도 선명하게 구분하여, 경험적 무질서에 따라 사건을 제시하는 역사에 비해 사건의 배열에 (필연성과 개연성 같은) 인과적 논리를 부여하는 시(허구)의 우월성을 주장한다."(263 페이지)
이런 우월성을 적절히 담아내는 재현방식은 엄격하게 위계적이다. 반면 미학적 체제는 현실 또는 사실의 논리와 허구의 논리 간의 구분을 흐리고, 허구 안의 묘사적, 서사적 배열 논리가 사회적, 역사적 현상들에 대한 묘사나 해석의 배열과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3부의 마지막 장인 4장은 '비평의 위기, 비평의 정치'를 제목으로 한 글이다. 저자는 비평의 위기와 관련해서도 이론의 비중이 급속히 늘어난 점이 문제의 한 원인인지 아니면 그것의 증상 혹은 심지어 해결의 시도인지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28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론의 난삽함을 고스란히 베끼면서 가독성을 떨어뜨리거나, 인용하는 이론의 맥락을 소거한 채 장식으로 활용하여 오히려 논리의 혼란을 초래하는 일도 빈번하다. 이를 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한 인문학계에서 소통 부재와, 설명하지 않음의 폐단이 드러난다는 점이다.(설명이 요령부득으로 진행되거나 현학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과학이 오히려 그런 일을 더 잘하고 있음은 아이러니하다. 저자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텍스트 자체는 엄밀함과 거리가 있다고 진단한다.(287 페이지)
저자는 카라따니 고진이 말하는 혁명성으로서의 문학의 특별함은 그 시작과 끝 모두에서 네이션의 동일성을 상상하는 문학의 특별함과 별다른 위화감도 긴장도 없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말한다.(2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네이션으로서의 동일성 형성이라는 주장은 말할 필요도 없이 민족에 관한 베네딕트 앤더슨의 그 유명한 상상의 공동체 입론과 이어진다. 저자는 문학이 더 이상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지 않는다는 진술과, 도덕적 과제를 벗어난 문학은 그저 오락일 뿐이라는 진술이 동일한 층위에서 발화된다면 거기 담긴 위기의식이란 겨우 문학의 사회적 위상 하락이라는 평면적 차원이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고 말한다.(290 페이지)
저자는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카라따니가 소설의 내면성을 구체적으로 근대 일본인의 정신적 원동력인 입신출세주의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봉건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근대 입신출세주의는 타인의 인정을 얻으려는 욕망에 지배되므로 내부가 아닌 타인을 지향하는데 카라따니는 근대적 자기라는 것은 전통이나 타인을 넘어서 자율적인 뭔가를 구하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발현되기 어려운 그 뭔가를 문학에서 찾게 되는 것으로 보는바 타인지향적 입신출세주의 또한 분명 근대정신의 핵심요소라면 근대적 자아는 그렇듯 타인지향성을 내장하면서도 그와 대립하는 자율성을 추구하는 다분히 분열적인 주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라며 카라따니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분열적 존재가 아닌지 묻고 싶다. 저자는 카라따니와 랑시에르에 대한 비평의 반응을 돌아보면 문학의 위기에 관한 논의는 사실 처음부터 문학의 정치에 관한 논의였음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299 페이지) 인상적인 표현은 모더니즘의 이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를 질타하고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모더니즘의 정치를 장례 치르는 식이라는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문학의 정치도 오래 지속될 것이고 정치 또한 오래 지속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지금 가동할 필요가 있는 비평의 정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른 방식으로 모더니즘을 환멸하고 모더니즘과 다른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무엇의 이름으로?"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는 더 긴 논의가 필요하겠다고 말한다. 실망을 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이월(移越)은 문학, 그리고 비평의 난처를 입증하는 듯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언제이든 문학은 왜 필요하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듣고 싶다. 이는 과학이 문학보다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는 나만의 문제제기는 아닐 것이다. 아니 흥미롭다는 말을 하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은 과학에 비해 의미를 제시하는데서도 나은 것이 없어 보인다. 문학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과학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덧붙일 것은 이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비평, 그리고 지젝에게서 나타나는 것처럼 모순적인 이론 개진 등이 지양된다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때로 이론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삶의 경험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지혜와 깨달음이 아닌가 싶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란 이의가 제기되겠지만 다양하고 상반된 관점이 이론과 비평의 풍성함을 보장하지만 혼란을 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 비평, 인문은 주관적이고 과학은 덜 주관적인 것일까? 테리 이글턴과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들을 정독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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