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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읽는다. 내게는 낯선 작가인데, 오랜만에 내 블로그에 들른 작은 우주님을 통해서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좋은 소설들을 찾아 읽는 감식안이 상당히 높은 수준인 그녀가 요즘 가장 애독하는 국내작가가 바로 천운영이라고 하니, 한번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풀꽃의 이름처럼 들리기도 하는 작가의 이름에서 내가 우선 떠올린 것은 고고하고 우아한 자태의 난초였다. 까다롭게 꽃을 피워 올린 우아한 난초의 자태나 은은한 향기처럼 어쩐지 무척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으로 씌어진 몹시도 여성스러운 작품들이 아닐까 하는 지레짐작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아뿔싸, 몇 쪽 읽지 않고서도 이름에 기댄 어설픈 내 짐작이 빗나갔음을 나는 알아챘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또 틀린 셈이었지만, 나로서는 반가운 빗나감이었으니 유쾌한 것이기도 했다. 여성작가가 쓴 너무나 여성스러운 작품이라면 좀 뻔하고 지겨워서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런 티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누드 사진을 찍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중년의 사진사가 젊은 여인을 카메라 앞에 두고 촬영하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장들 앞에서 나는 환호작약했다. 배경지 위에 여자가 엎드린다. 바닥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항아리에서 쏟아져나온 물줄기처럼 보여야 한다. 여자는 다행히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다. 어깨도 적당히 말랐고 목뼈도 제법 선이 난다. 엉덩이에 살이 좀 많은 게 흠이지만 각도를 잘 조절하면 괜찮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그는 호흡을 멈춘 채 첫 셔터를 누른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피사체의 오른쪽 측면에서 내리꽂히는 텅스텐 조명. 엉덩이를 휘감았다가 재빨리 돌아가는 섬광 같은 채찍질. 어서 일어나 물을 길어. 도드라진 등뼈에 가 박히는 한줄기 붉은 선. 이 비천하고 더러운 몸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더러운 욕망아. 어김없이 후려치는 매서운 채찍질. 울어라, 소리쳐라, 절규해라. 애원하는 등뼈, 절망하는 목, 울고 있는 어깨, 순종하는 엉덩이. 그는 살점이 뜯겨나가고 피가 낭자해질 때까지 가혹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다. 무의미하던 여자의 몸이 살아움직이기 시작한다. (10~11쪽,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이렇게 단문으로 이어지는 속도감 있는 문장들은 숨가쁘게 읽히고 그 사이 사이에 배치해 놓은 명사어구들은 마치 빠른 속도로 흐르는 시냇물 중간에 놓인 징검돌처럼 독자의 호흡을 잡아채서 잠시 숨을 돌리게 한다. 그렇게 해서 독자는 짧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빠른 속도에 휩쓸리거나 시냇물에 빠지는 일 없이도 이 가파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급류의 시냇물을 무사히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솜씨 좋은 시인이 공들여 쓴 한 편의 산문시를 방불케 하는 이러한 뛰어난 문장들은 어쩌다 눈에 띄는 예외적인 게 아니다. 이 소설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도 없이 출몰한다. 윤성희가 그런 것처럼, 또한 박민규가 그런 것처럼, 천운영도 자기 스타일이 이미 문장에 확실하게 새겨져 있는 작가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위해 보기 드문 추천의 글을 써주면서 박민규가 대놓고 고백하고 있는 천운영에 대한 편애가 내게는 조금도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드물지만 세상엔 그런 류의 책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이 세계의 극 ∙ 소 ∙ 수 ∙ 만이 그녀의 책을 읽었으면 하는 입장이다. 아니, 실은 누구도 모르게 오직 나만이 <그녀>를 읽고 싶은 마음이다. (중략) 드물게,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 알 것이다, 이 세계의 상처가 얼마나 교묘한 것인지를. 우리의 상처가 얼마나 복잡, 미묘한 것인가를. 독(毒)이 왜 독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가를, 알 것이다. 독은 가장 약한 짐승에 의한, 가장 약한 짐승을 위한 유일한 무기이자 치유책이다. <천운영>이라는 유일한 글을, 그래서 나는 상처가 없는 무리를 향해 던지고 싶지 않다. (중략) 당신도 <그녀>의 글도 유일하고 유일, 무이하다. 그러니 당신도 아물고 회복해줘. 제발, 부탁이야. (뒷표지, 박민규의 추천사) 동료 소설가로서의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박민규의 이러한 간곡한 부탁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집에 수록된 천운영의 소설들을 읽고 나면 누구라도 마음이 따스해지지 않을 수 없다. 뭔가 마음에 옹이가 져서 개운치 못한 심정이거나 세상 사는 일에 큰 상처를 받고 채 아물지 못한 흉터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따뜻한 위안을 받고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과 연령층의 주인공들이 마주하고 있는 ‘상실’과 ‘결핍’은 그 모양과 크기에 있어서는 제법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상실과 결핍의 내용과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따스한 결말은, 자신이 창조해낸 소설 속 주인공을 향해, 또한 그 소설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을 향해, 작가 천운영이 건네는 악수이자 포옹이다. 뚜렷하게 나뉘어진 채 각자의 세계를 고집하던 ‘나’와 ‘너’의 단절된 관계는, ‘연대’라고 달리 부를 수 있는 이 악수를 통해서 ‘우리’로 통합되는 계기를 얻는다. 3대가 함께 살고 있지만 산산이 조각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혼혈 가족의 모습을 혼혈아 손녀 알리의 따스한 시각으로 그려낸 단편 「알리의 줄넘기」가 보여주고 있는 결말이 바로 그렇다. 혼혈아에게 적대적인 또래녀석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체력단련의 목적으로 시작된 알리의 줄넘기가 이제 여러 사람과 더불어 함께 즐기는 놀이로 변모할 것이라는 예감에, 독자의 마음은 훈훈해진다. 나는 장롱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밖으로 나왔다. 나는 지금 줄넘기를 사러 간다. 손잡이가 나무로 된 줄넘기를 사야지. 그래야 이름을 적어넣을 수 있으니까. 요즘에 내가 연습하고 있는 것은 솔개뛰기다. 이단뛰기는 성공했지만, 이어서 엇갈렸다 풀기를 반복하는 것이 어려워 솔개뛰기를 완성시킬 수가 없다. 언제쯤 슈욱슉 바람을 가르는 솔개의 날갯짓 소리가 날 것인가. 솔개뛰기를 하고 나면 삼단뛰기와 사단뛰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블더치를 하려면 두 개의 줄넘기와 적어도 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줄넘기를 하나 더 사러 가는 것이다. 줄넘기를 사면 손잡이에 더블더치를 할 ‘우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넣어야지. 나는 지금 ‘우리’를 만나러 간다. (102~103쪽, 「알리의 줄넘기」) ‘너’를 향해 내민 ‘나’의 손이 ‘우리’의 두 손으로 서로 맞잡게 되는 이 연대의 악수는 자연스럽게 포옹으로 이어지는데, 그 포옹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포옹에 의해, 자포자기와 자기연민에 빠져 절망 속에서 흘리는 차가운 눈물은 자신의 재발견과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따스한 눈물로 질적인 변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겠다. 이 책의 표제작인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린 동생에게 빙의된 채 삼십 년을 살아온 한 젊은 여인이 들려주는 어두운 가족사를 통해서 이러한 눈물의 연금술을 보여준다. 나머지 작품들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 역시 이러한 악수(또는 줄넘기 사용법)와 포옹(또는 눈물 사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작가 천운영이 그녀의 ‘줄넘기’와 ‘눈물’ 사용법을 통해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는 따스하고 소망스러운 세계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때 되면 허물을 벗는 뱀처럼 우리도 자신의 허물을 벗어야만이 이러한 연대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허물은 뱀에게는 단지 살갗의 껍질에 불과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살갗의 껍질(즉, 신분이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과오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허물 벗기는 뱀의 경우보다 훨씬 더 힘겨운 일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허물 벗기를 계속 시도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며, 그래서 마침내는 사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인상적인 단편 「내가 데려다줄게」에서, 젊은 여제자와 성관계를 맺은 일이 권력형 스캔들로 번져 학교에서 궁지에 몰리게 된 한 사내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란, 그러니 자살이 아니라 허물 벗기일 수밖에 없다. 사내에게 그걸 가르쳐주는 것은 어린 계집애이다. 계집애가 사내 손에 뱀허물을 올려놓았다. 새끼 뱀의 첫 허물은 거칠거칠하고 바싹 메말라 있었다. 사내와 계집애는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뱀허물을 들여다보았다. 계집애는 삼각형 모양의 머리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아저씨, 그거 알아? 뱀들이 허물벗을 때가 되면 눈이 뿌옇게 흐려져. 안개낀 것처럼. 넌 어떻게 그런 걸 아니? 맨날맨날 보는 게 뱀인걸 뭐. 허물벗을 때가 되면 늪으로 오거든. 할머니가 그러는데 몸을 말려야 허물이 잘 벗어진대. 그래서 며칠 동안 물 한모금 안 마시면서 몸에 물기를 없애는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목이 마르겠어. 허물 다 벗으면 얼른 물속으로 들어가려고 늪으로 온다는 거지. 뱀들은 허물을 벗기 위해 흐린 안개 눈을 하고 늪으로 온다. 사내는 손에 든 허물을 보며 되뇌었다. (115쪽, 「내가 데려다줄게」)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질책을 피해 차를 달리던 사내가 국도에서 맞닥뜨린 안개 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멈추게 된 곳이 거대한 늪가였던 게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내는 거기서 충동적으로 짧은 유서를 쓰고 옷을 차에 다 벗어놓은 채 늪으로 걸어 들어가 즉흥적인 자살을 시도하는데, 마침 그때 그 늪에서 물질을 하던 여인에 의해서 구조된다. 그리고 위 인용문에 보이는 것처럼, 그 집에 사는 당돌한 어린 계집애의 가르침에 맞닥뜨리면서 어렴풋이 자신의 과오를 되새기게 된다. 이후 자신을 구해준 여인에게 느끼는 욕망의 은밀한 진퇴와 폭력적인 파국을 거치면서, 사내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가둬두었던 진실의 모습을 마침내 보게 된다. 그 동안 스스로는 부인했던 자신의 허물, 즉 그가 젊은 여제자에게 한 일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그녀를 농락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내는 다시 늪 앞에 서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옷을 벗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사내의 발목을 휘감을 뱀들을. 그리하여 그 뱀들이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벗겨주기를.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을 벗고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갱생의 몸짓이다. 맹독을 가진 뱀들에게 물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사내가 무릅쓰는 것은, 아니 오히려 기꺼이 그것을 감수하며 기다리는 것은, 앞서 박민규가 말한 것처럼 독(毒)은 독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뱀들의 독에 의해서, 사내는 마침내 자신의 허물을 벗고, 자신이 젊은 여제자에게 주었던 상처에 스며든 독까지도 해독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천운영의 소설들은 그 자체가 독(毒)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독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이자 치유책이다. 세상과 맞서 싸울 때는, 그 독은 우리의 손이 함께 맞잡고 돌리는 ‘줄넘기’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불평등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 독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치료하는 데 쓰일 때는, 따스한 ‘눈물’이 되어서, 늙고 버림받고 외면당하고 잊혀지고 가난한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그게 너무나 아름답고 따스해서 나는 기꺼이 그녀의 독을 받는다. 내 친구 작은 우주님이 작가 천운영에게 빠진 이유를 이 책 『그녀의 눈물 사용법』 한 권만 읽고서도 충분히 알고도 남겠다. 그러나 어찌하랴, 천운영의 독은 한번 물리고 나면 그 어떤 해독제를 쓰더라도 쉽사리 빠져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중독성인 것을. 그 강력한 중독성을 이기지 못해, 지금 내 손에는 천운영의 장편소설 『생강』이 이미 펼쳐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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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세월이 모여 만들어진 제도에 의해 우리의 삶은 제약 받고 있다. 때론 ‘사생활’이라는 단어로 묶어 방기하고픈 영역까지 이 제도들이 침범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건전하게 표출된 욕망이 지지부진한 사회 분위기에 반전을 가져다주듯 일방적으로 억눌린 욕망은 반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되거나 한 개인의 삶을 파멸로 몰고 가곤 한다. 인간의 삶을 ‘사회와의 투쟁’이라 칭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가 한강의 작품에서 느꼈던 독특함이 떠올랐다. 두 여성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금물일지도 모르겠으나, 욕망의 형태가 육체적 행위로 표출되는 점과 욕망에 의해 파멸되는 인간상을 그린 점만은 닮은 듯도 하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정말 우리의 욕망은 우리 자신에게 파괴를 가져다줄 정도로 강렬한가? 글을 읽으며 종종 무섭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천운영의 소설이 그러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전에 그녀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어 이번 작품집에서 그녀가 어떠한 변화를 꾀했는지에 대해서까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허나 그녀의 작품이 성취될 수 없는 욕망이 지닌 힘을 그려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만은 확고하다. 첫 번째 작품에서부터 이는 두드러진다.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젊음에 대한 아내의 비정상적(?)인 집착 그리고 이를 두려워하는 나의 혐오이다. 두 요소 간의 갈등은 부부간의 불화로 나타나는데, 내가 볼 때 두 인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 가장 큰 요소는 다름 아닌 남자 주인공의 심리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젊어지고자 하는 마음을 강렬히 가졌음을 구체적으로 표현치는 않는다. 하지만 젊은 조수와 서로의 몸을 탐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이면에는 젊지 않은 자신을 향한 부정이 숨겨져 있다. 만남에 앞서 타인의 사회적 지위를 따지고 자신의 품위 유지를 위해 개를 키우는 『백조의 호수』의 여주인공은 또 어떠한가?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녀는 음식 아닌 자신의 삶마저도 특정한 틀에 구겨 넣으려 든다. 이는 상위 계층으로서의 삶을 동경 혹은 유지하려는 욕망에 의해 그녀의 삶이 제약당한 탓이다. 하지만 작가는 지저분한 남녀공용 화장실에서의 에피소드와 자신의 발에 밟혀 죽어 버린 새끼 비숑의 사체를 통해 그녀의 이러한 시도는 무리한 행동이었음을 말한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마저 든다. 냉소적인 태도로만 일관했더라면 소설은 차디찼을 것이다. 정결한 종교의 형태를 띤 폭력이나 계산된 눈물 따위로 얼룩진 세상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안타깝게도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우리의 세상을 모사해놓은 듯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알리’라는 이름을 지닌 여자 아이를 창조해냄으로써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꺼내든다. 남자처럼 옷을 입고 주먹으로 전전하는 알리는 부모 없고, 치매 걸린 할머니, 연애마다 실패하는 고모와 함께 라는 환경 덕에 너무도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의 어른스러움을 작가는 하나의 미래를 창조하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블더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블더치를 하려면 두 개의 줄넘기와 적어도 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줄넘기를 하나 더 사러 가는 것이다. 줄넘기를 사면 손잡이에 더블더치를 할 ‘우리’의 이림을 또박또박 적어넣어야지. 나는 지금 ‘우리’를 만나러 간다. (p102-3 중에서) 더블더치가 무엇인진 잘 모르겠으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타인을 끌어안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 더블더치인 것이다. ‘나’ 아닌 ‘우리’가 되는 길을 걸으며 알리는 진정한 성장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 역시 같다. 자기 안에 갇힌 오만한 자세를 벗어나 우리가 되는 순간 우리의 상처는 치유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타인을 속이기 위한 용도가 아닌 진정한 기쁨 혹은 슬픔이 담긴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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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책이 재미있었는지, 재미없었는지, 이 소설을 읽고 있었던 시간이 유익했는지, 무익했는지, 이 소설을 남에게 권하는 게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 아, 모르겠다. 무슨 이런 마음이 다 있단 말인가. 좋으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않은 건데, 이건지 저건지.
이제까지 내가 즐겨 읽어온 소설과는 달라서 낯설었던 것일까. 낯설면 재미없다 생각하고 중간에 덮었는데, 이 책은 낯설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다 읽었기 때문에 내게 새로운 재미를 준 소설이었던 것일까. 그런데 무엇이 좋았던 것인지 말할 수 없는 이 생소함은 뭘까.
어둡고, 질척거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쿨하기도 하고, 결코 산뜻하지는 않고, 끈끈한데 좀처럼 손에서 놓고 싶지는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주인공은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는데 어느 한 사람 밉거나 경멸스럽지는 않고, 주인공이 그러하니 그들의 삶 또한 그러하고, 그 삶을 소설로 그려놓은 작가가 또한 그러하고.
아직은 모르겠다. 이 작가의 다른 글을 읽어 보면 좀더 확실한 느낌의 실체를 잡게 될지,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될지 실망하게 될지. 꽤 당황스러운 느낌이다. 뭐지, 이 불확실한 독후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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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에 대해서는 내가 구독하고 있는 중앙일보 토요일 스페셜 '북 섹션'에서 소개한 적이 있어 관심은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그로테스크하며 강한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래서 의도적으로 기피하고 있다가, 지난 북오더할 때 '무한 도전!' 의 각오를 하고 그녀의 이 단편집을 구입해서 들었다. 신문의 소개말에 따르면 그녀의 전작들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하지만, 이 단편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그래도 처음 읽는 내게는 후추맛이 나는 듯 했다.
총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만구 내 식대로의 분류법으로 아래와 같이 분류해보았다. 1. 사실주의적인 냄새가 나는 글 -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 백조의 호수 * 내 기준으로 사실적이다는 이 생각은 아마도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의 화자의 아내가 나의 모습인 듯 했으며(요가,미용,젊음집착?), 내가 노처녀였다면 '백조의 호수'의 그 재수없는 여자와 같을 것 같은 실존적 자아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ㅋㅋ 2.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나는 글 - 내가 데려다 줄께 - 그녀의 눈물 사용법 3. 마이너리티를 묘사한 글 - 그녀의 눈물 사용법(죽은동생 귀신이 들린 여자) - 알리의 줄넘기(혼혈인의 자녀) - 노래하는 꽃마차(떠돌이 찬양단 막내) - 내가 쓴것(여류소설가&교수) - 후에(극빈가정자녀)
그녀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첫 단어는 '욕망'이었다. 욕망... 더럽다고 하지만, 거북등처럼 인간의 등뒤에 떡하니 붙어 있는 욕망이라는 이름... 성욕,성취욕,출세욕,소유욕 그리고 자살 충동, 사랑받고픈 욕망... 그리고 벗어날수 없는 그 인과관계- 굴욕감,좌절감, 처절함, 비굴함,치졸함 그리고 상처.... 날카로운 상처... (사실 읽고 나니 기분은 안좋다... 이 안좋은 씁쓸하고 서글픈 기분을 뭐라고 표현은 해야 되겠는데, 지금은 내 짧은 어휘력과 표현력을 탓해야지)
독이 왜 독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는가를 알게 해준다? 내가 이 말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상처가 교묘한지 먼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굳이 자해까지 해가면서 상처를 내고 싶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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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관능적이며 다소 냉소적인, 그러나 따스함도 간간이 묻어나는 단편 소설.
* 몇몇 한국 여자 작가들(전부는 아니지만, 적당히 많이) 책을 읽으며 느낀 건데, 좀 야한 부분이 많다. 남자 작가들의 묘사보다 더 도발적이고 관능적이라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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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앞의 단편 '내가 쓴 것'을 읽으면서... 내가 여기까지 읽다가 이 소설을 그만 손 놓아버렸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몇 편의 단편이 지나가는 동안에 다시금 기억을 더듬어.. 아 여기도 이미 넘어갔던 페이지 였구나 하였던 것이다.
사실 요사이 정말 너무 감동깊게 읽은 책이다 라고 맘에 두고서도 영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며칠 전 직원이 무탄트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라고 하는데 도무지 그 마지막 부분이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마지막 부분 이야기를 해주는데도.. 도대체 난 책을 어떻게 읽고 사는건지....
천운영의 이 소설 역시 두번을 읽어내려가는 순간.. 아 맞다.. 내가 이부분도 읽었었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겨우 세 번째 소설집을 읽고서 무어라 말을 할수는 없지만.. 정말 그녀의 소설은 그녀의 첫 소설집 제목처럼 한마디로 '바늘'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신경의 하나하나가 바늘 끝에 닿여 살아서 감각을 전해준다.
아주 감성적이라기 보다는 그래서 오히려 감각적이라는 느낌이 나는 사실 든다. 소설집의 첫 소설은 약각 '김경욱'의 느낌을.. 그리고 그 다음 그녀의 눈물 사용법, 내이름은 알리, 노래하는 꽃마차, 내가 쓴글.. 등등... 제 나름의 무지개빛 색깔처럼.. 고유의 색을 갖고 천운영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한 소설과 같다. 솔직히 이렇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그녀가 사실 많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 분의 소설을 읽고 그녀만의 색깔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아서 좋다. 재밌다. 참 재미있는 소설임이 분명하다. 다 읽고 나서 다시 하나하나 써내려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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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천운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단편집인줄도 몰랐고, 그냥 제목에 꽂혀서 샀다. 뒷면에 있는 '정말이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라는 박민규('삼미슈퍼스타의 마지막 팬클럽' 저자)의 글귀도 한몫 했지만. 혼자만 알고 싶은, 혼자 좋아해서 독차지하고 싶은 그런, 책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읽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여행하면서 읽는다고 미국에 가져갔고, 피닉스에서 혼자 아침을 먹으면서 혹은 해먹에 누워서 한편씩 읽어나갔다. 뉴욕에 도착했을땐 노느라 너무 바빠서 전혀 읽을 시간이 없었고, 그나마 올때는 짐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반쯤 읽다 만 책을 친구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니 너무 마저 읽고 싶어져서, 한국에 오는 다른 친구에게 부탁해서 삼개월만에 다시 손에 넣었고, 그후로 매일 밤 자기전에 한편씩 읽었다. 한편 더 읽고 싶은 마음을 매일 억누르며.
독특한 문체- 그것도 매 편마다 조금씩 달라지는-와 구성, 신선한 발상, 한번 더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 전반적으로 스며있는 멜랑꼴리와 그럼에도 약간의 희망을 내비치는 엔딩. (그녀의 소설 치고는 '밝아진' 거라고 한다) 사실 나는 단순한 책들만 읽어서인지 맨 마지막 서평을 읽고 나서야 이해되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기분나쁘지 않은 정도의 약간의 우울함에 젖은 채 몽롱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었다.
읽기 시작한지 5개월이 되어서야 겨우 책을 덮고 나서는, 정신적으로 좀더 성숙해진 후 읽으면 더 좋은 느낌을 받을 것 같아서 '언젠가 꼭 다시 읽자'라고 적고 책꽂이 한켠에 고이 꽂아두었다. 사실 천운영씨는 나와 몇살 차이 안나는 것 같던데, 어디서 이런 감성을 키우셨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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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소설집을 대할 때마다 나는 설렘으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맛나게 차려진 음식 앞에서 ‘뭘부터 먹을까?’ 속으로 행복한 고민을 하듯이 목차의 제목을 눈으로 찬찬이 훑으며 마음에 닿는 제목을 찾는다. 대부분 작가들이 책 제목을 정할 때 독자의 시선을 확 당길 수 있는 것과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완성도가 높다는 뜻도 됨)이 짙은 것을 꼽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표제작으로 내놓은 ‘그녀의 눈물 사용법’부터 읽을까? 아니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가 감각적 느낌이 보채듯 끌렸다. 물오른 싱싱한 문장에 빨려 들어갔다. 욕망의 속성을 까발리며 명사형으로 끝나는 투명하고도 거침없는 문장이 짜릿했다. 읽는 나의 ‘심장에 한줄기 금이 쩡 얼음 갈라지는’ 듯했다. 역시 인간의 본연 밑바닥을 맹금류의 발톱으로 긁어내는 치열한 소설가 천운영이다 싶었다. ‘이 건방진 육체들’, ‘파괴하고 싶은, 그러나 보존되어야 할 순수한 육체’,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진 듯한 느낌. 폭풍 전야의 이 무서운 정적’.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그 지긋지긋한 욕망덩어리‘. 작가의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이런 문장만 봐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가 파악된다. 관계가 위태위태한 부부, 사진사의 직업을 갖고 있는 남자는 열등감을 갖고 있다. 복덕방 냄새나는 남자의 늙음에 대조되는 풋풋한 아내의 젊은 몸. 예비부부의 누드사진을 찍은 후부터 남자의 내면에 변화가 일었다. 젊은 풋내기 조수를 두면서 남자는 마음에 회오리가 일어 평정을 잃는다. 아내와 그 젊은 조수의 관계가 분명 심상치 않다고. 우리가 흔히 본 드라마라면 이야기는 그렇게 맞아떨어져야 했다. 하지만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칠 듯 극도의 예감을 갖게 한 현장엔 J소년이 아내 대신에 늙은 쪼그랑 할머니의 누드를 찍은 것으로 이야기는 소년의 허벅지에서 말간 햇살을 보는 것으로 독자의 기대를 꺾는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 질질 짜는 애절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을 했던 나는 역시 멋쩍었다. 내 생각의 폭이 늘 손바닥에서 맴도는 수준이라서. 그녀가 열 살이 되어 홍역을 치르던 무렵에 칠삭둥이로 태어났다가 세상사는 것을 관두게 된 ’그애‘가 나타난다. 살이 오동통 찐 우량아의 모습으로 고깔모자를 쓰고서. 가족들은 떠도는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30년 만에 그 애의 천도재를 지내는 걸로 잠잠하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싱싱한 소설가가 왜 그랬는지 한밤중이지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다. 이게 바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나의 편견이고 한계겠만…. 좀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엉덩이를 까고 오줌을 싸댈 때 비로소 시멘트처럼 단단해진다고. 눈물이나 오줌이나 배설은 배설이지만 ‘그녀’로 인해 오줌의 배설이 더 시원하게 느껴졌던 것은 뭘까? 문학을 하는 이들만큼은 자기를 포장하지 않았으면 싶다. 내숭을 떨지 않았으면 한다. 체면 차리지 말고 저 아래 깊이 고인 인간의 본질을 끌어내는데 푸른 팔뚝을 걷었으면 싶다. 칙칙하게 가려진 것들을 첨예하게 까발리고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 숨을 쉬게 해줬으면 싶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나온 여덟 개의 소설을 읽으며 천운영 같은 거침없는 여자 소설가가 좀 더 현대문단에 뛰쳐나와 거들었으면 싶은 생각을 했다. ‘백조의 호수’나 ‘알리의 줄넘기’같은 소재를 남자 작가가 썼다면 어떤 관점으로 그려냈을까? 생각해보다가도 “됐거든!”이 말버릇처럼 터져 나왔다. 바늘 끝처럼 콕콕 찌르는 섬세함과 거침없이 인간의 욕망을 풀어내는 천운영 소설. 박민규 소설가가 그랬듯이 나도 철저히 꼬불쳐 두고 혼자만 읽고 싶은 책이다. <고쳐야 할 부분> *51쪽 성공하길 바래=====>‘바라’가 맞다. *54쪽, 53쪽 맨날======>‘만날’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