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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들처럼 도시에 대한 선망따위는 없었다. 나고 자란곳이 큰 도시는 아니라서였을 수도 있고, 어릴때부터 부푼 기대같은건 하지않는 조금은 현실적인 아이라서 일 수도 있다. 그것은 20대가 되어서도,30대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목을 한참 뒤로 젖혀야 올려다보이는 도심 속 마천루나 한밤중에도 휘황찬란 네온싸인에 둘러싸인 빛나는 야경에 파묻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풀벌레 소리, 고요한 적막에 둘러싸인 한적한 동네가, 때로는 아주 시골촌구석 같은 곳이 나의 마음을 더 동하게 한다. 과도한 발달로 인한 도시의 삭막함, 소음,바쁨 같은건 몇해를 겪어도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다. 작가 강영숙이 바라보는 도시 역시 그렇다. 하나같이 '도시'를 테마로 하고 있는 단편소설집 『아령 하는 밤』이 그렇다. 문명에 잠식당해 버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도시를 보기좋게,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시종일관 '도시'에서 시작해 '도시'로 끝나는 강렬함도 아닌, 그렇다고 느슨함도 아닌, 딱 잘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을 전달해준다.
전하고자 하는 말의 정확성 유무를 떠나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걸까' 싶으면 한 단편이 끝나있다.(대부분의 한국 작가의 단편들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멍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따지고 보면 하나하나 다 무겁고 무서운 이야기들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통해, 날로 발전하는 도시의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나날이 텅 비어가는 내면을 건조하게 내비치는 문체에서는 '따뜻함' 같은건 찾아볼 수가 없다. 젊은 여인도, 늙은 여인도, 남자도...모두가 바쁜 일상속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토로한다. 문명이 발달할 수록 삶이 윤택해지는데 비해 자연의 훼손, 기상이변 등으로 인한 재해는 우리의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곤 한다. 그 놀람과 분노와 적막함과 막막함을 건조하게 평이하게 읊조리고 있는 강영숙 작가의 글은 그래서 궁금하게 만든다. 별것 없이 반복되는 자연재해 속, 도심 속 홀로 겉돌고 있는 인물들 안에서 가고자 하는 도착점을 잃어버린 인물들은 팔딱대는 심장 박동이 삐- 소리와 함께 멎어있는 듯한 그 순간의 고요와 맞물려 있다.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가기만 한다. 시골로, 시골로 파고드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먼 훗날 노년의 평온한 삶을 저당잡는 곳으로 미리예약 정도나 해놓을까, 생활의 중심이 되는 도시의 유혹을 쉽게 저버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나나 당신들이나 말이다.
총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 속에서 탈출구란 없다. 한번 빨려 들어가 버리면 빠져나올 수 없는 잔잔한 호수의 소용돌이 속 처럼 탈출구뿐만 아니라 해답 또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각 소설의 분위기 또한 튀지 않으면서도 주인공들의 보편적이지 않는(이 단편집 속에서는 보편적이겠지만) 행동, 사색에서 그 정의하기 어려움은 더해진다. 여러 작품들 속 하나같이 중첩되는 것은 '도시'라는 테마 외에도 등장인물들이 현실과 환상(환영) 사이를 오간다는데 있다. 이 환상(환영)은 꿈이지만 악몽일수도 있는 것이고 소리 내 드러내지는 않지만 우리가 언제나 마음속으로 품고있는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고 열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환상 또한 사막의 내리쬐는 땡볕과 불어대는 모래바람 사이에서 찾기를 희망하지만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오아시스 같은, 눈 한번 깜빡였다 뜨면 사라저버리는 신기루 같은 꿈이다. 스스로가 무엇을 찾아가고 있는지, 바라고 있는지 존재의 근원 자체가 모호하게 표현되면서 방황을 거듭하는 인물들은 우리의 또다른 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쁜 도시의 흐름 속에 발맞춰 도태되지 않으려 버둥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최후의 소리없는 발악이 강영숙의 단편집 '아령 하는 밤'에서 들려왔다면, 내가 제대로 본 것일까.
첫 단편 <문래에서> 부터 그 기이하고도 비관적인 분위기는 마지막 단편 <어떤 싸움>에 가서야 조금은 희석되는 듯한 분위기도 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강영숙의 작품들 속 이야기이고 보편적이지는 않는 희석됨이다. 특히 표제작인 <아령 하는 밤>은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인데-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나이보다 높은 연령대의 강렬한 욕망,또는 설레임을 표현 해내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주인공 나는 언니를 하늘로 보내고 혼자 사는 할머니이다. 소일거리로 김밥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있는데 맞은편 철판 볶음밥집의 직원인 할아버지를 통해 설레임과 욕망, 두려움을 동시에 투사하고 있다. 늙수구레한 얼굴과는 달리 근육이 울퉁불퉁한 팔을 드러내며 바삐 철판 볶음밥을 볶고 동분서주하는 할아버지는 아이러니하지만 할머니의 내면 속 젊음을 향한 욕망을 대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도시(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산업의 발달로 인한 심각한 환경오염으로 인해 악취가 진동하는)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살인 등의 유력한 용의자로(어디까지나 할머니의 지레짐작으로) 점찍으면서 두려움 또한 표출해내고 있는데 욕망과 두려움의 두 상반된 감정에서 결국 승리하는 감정은 역시나 '욕망'이라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해야하는지 그 자체도 참 껄적지근하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그러면서도 한번쯤은 일탈을 꿈꾸고 싶은-자신이 전혀 하지 않을거 같은 행동 등을 통해- 내면의 소리들, 특히 두려움이 그득하지만 그보다는 또한 <재해지역투어버스>라는 단편에서 보여지는 관찰자로써의 재해지역을 바라보는 눈과 직접적으로 겪었으나 지금은 투어버스 기사로 도시를 쓸어버린 홍수가 어떤 참극을 불러왔는지 시종일관 떠들어대는 버스기사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렇든 감정의 동요는 최소화하면서 그 여운은 극대화할 수 있으면서도 낭만성,서정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문체를 지니고 있는 작가, 강영숙의 단편집 『아령 하는 밤』에서 줄곧 이야기되는 것처럼 도시의 끝없는 산업화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고, 또 이미 오래전부터 문명화 된 그때부터 편리함을 추구해오는 우리, 그 생활이 이미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거리는 두고두고 곱씹게 될 거 같다. 하지만 나부터도 문명의 혜택에 중독된 한 사람이기에 이를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수도 없는게 사실이며, 그것은 들어왔던 입구는 너무 멀어져버렸고 앞으로 나아가는 출구만 오롯이 보여지는 기나긴 여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이 폐부를 쿡쿡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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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내게 공포의 존재이다. 사람보다 더 높은 빌딩 사이에 서 있을 때마다 알 수 없는 현기증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불안과 공포에 견디지 못할 때 네온사인 사이를 배회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텁텁한 공기, 답답한 공간, 숨막힐 듯한 일상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도 다음 날 눈을 뜨면 언제나 제자리였다는 것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던 도시 속의 내 모습, <아령하는 밤>을 읽으면서 그 불안의 실체들로 인해 밤새 몽유병환자처럼 꿈속을 헤집고 다닌 느낌에 사로잡혀 하루를 몽롱함 속에서 보낸 것 같다. 강영숙 작가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는데 현대문명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사는 도시인들의 심리를 섬세하고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도시인들의 아픔에 다가간다. 이 책은 일곱편의 단편으로 엮어져 있는데 일곱가지 단편들이 제각각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으며 모두가 도시를 방랑하는 고독한 순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래에서>는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서 구제역을 소재로 하여 문명의 진보가 자초한 재앙의 모습을 서늘한 감각으로 느끼게 해준다. 구제역으로 인하여 새들이 죽고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피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네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가 이렇게 많은데, 북극의 얼음은 계속해서 녹고 있는데, 건물들은 수시로 붕괴되고 전쟁은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암환자 천지인 세상인데, 그런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 라고 말하는 것으로 현대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면서도 생명력이 가득한 한 여자애를 통하여 아직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가 존재하는 한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고 " 말한다. 그것은 구역질, 악몽, 진땀 , 냄새 등 온갖 고통스러운 기억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의 모습으로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령하는 밤>은 조금 몽환적이 느낌이다. 언니의 죽음이후 언니의 기억만이 존재하는 외로운 한 노인의 고립된 삶을 통하여 도시의 불안과 공포가 어떠한 것인지를 무척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노인이 살고 있는 인근 공장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원인 모를 병에 죽어가고 10대 소녀들이 연쇄성폭행을 당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이 일하는 김밥집 건너 철판볶음집의 노인의 건장한 팔뚝을 본 순간 얼굴과 몸의 비대칭적인 모습에 호기심과 동시에 선망이 된다. 공원을 지나다가 우연히 본 아령하는 남자, 그리고 그와 있던 어린 여자, 그리고 그 다음 날 한 소녀의 죽음, 노인은 아령하는 남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아령하는 남자와 환상을 꿈꾼다. 기괴함과 공포속에서 소통의 상대가 없던 노인은 매일 김밥을 싸고 매일 김밥을 먹고 날이 새면 김밥을 싸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고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타자에게 김밥을 던져주고 오는 것으로 타인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라디오와 강>에서는 친한 킴의 죽음을 잊기 위해 배회하는 모습의 주인공을 통하여 기차가 수시로 오고가는 것 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의 일주일 휴가는 죽은 킴을 회상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킴의 시신이 발견된 아트센터 지하의 벽에서 복원된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은 자신의 기억속에서 킴을 복원해 주인공의 상처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으로 치유해낸다.
<죽음의 도로>와 <재해지역버스투어>의 주인공들은 일상과 악몽사이에서 방황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한다. 자살을 꿈꾸지만 자살하지 못하는 여자, 삭막하고 고단한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재해지역버스투어에 몸을 실은 주인공들은 평온함 일상 뒤에 숨겨져 있는 재난의 풍경속에서 느껴지는 통각의 상상력으로 인해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그린란드>,<불안의 도시>는 실종과 배회가 모티브이다. 패기만만한 젊음 속에서 의기투합한 남자들 여섯이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배회를 시작하다가 실종하게 된 모습속에서 도시인들의 상실감이 진하게 배여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일종의 불안감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프랴파트>와 <문래에서>는 예술적 소통의 희망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원전사고로 인한 체르노빌의 아이들과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케이드'예술가들의 동참으로 프랴파트의 버려진 창고에 버려진 물품들은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두려움을 예술의 감각과 활기로서 새롭게 살아나는 모습으로 일곱편의 단편 주인공을 통하여 표현한다.
일곱 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현대인들의 고단함을 가지고 각자의 상처속에서 살아간다.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한 병폐들 속에서 눈꼽만큼도 없는 희망가운데에 희망을 찾아내는 방법은 바로 그 상처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는 결코 낯설지 않다. 소름끼치도록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뿜어내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실존을 둘러싼 불안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강영숙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소설이다. 또한 소설들의 소재가 되는 자연재해와 환경오염에 직면한 황폐한 도시의 모습과 구제역, 원전사고, 도시개발, 홍수, 살인이라는 소재는 도시인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불안의 요소이자 잠재된 의식의 공포로서 도시인들이 체감하는 모호하고 불안한 위기의 삶을 예리하고 사려깊은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일곱편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불안과 공포를 체집하는 고독한 순례자들의 모습이 바로 곧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척 독특하면서도 사실적인 주제의식을 가진 탁월한 소설이다. 최근 읽은 국내문학 중에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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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익숙함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해야만 한다. 여행이 우리에게 쾌적한 무언가로 인식되는 까닭은 우리가 매일 여행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별한 거동을 통해 우리네 일상이 그다지 유쾌하지 아니하단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아님 반대로 정말이지 숨이 막혀 더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살만하단 느낌을 받게 된다면 그때의 기분은 또 어떠할까?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어쩜 이리도 한결같을 수가 있는지, 지속되는 분위기가 독서 내내 나를 압도한다. 다른 듯 유사한 작품들에 담긴 것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보아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가감 없이 고스란히 우리 앞에 펼쳐졌다. 우선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령하는 밤>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여성 노인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우리 사회의 노인들 대다수가 그러하듯 그녀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것은 외로움의 감정이다. 아마도 얼마 전까진 같이 늙어간다 아웅다웅할 수 있었던 언니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마저도 세상을 등졌다. 이젠 어수룩한 기억력에만 의지해 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따금 홀로 막히는 변기를 뚫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게 이 밋밋한 삶의 유일한 낙이라면 낙이다. 그런데 그녀의 단조로운 일상을 감싸고도는 외피, 즉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러잖아도 수시로 매연이 뿜어져 나오는 공단 지대인지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하필이면 오리무중, 범인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때마침(?) 주인공의 눈에 들어온 근육질의 남자. 몸은 젊으나 얼굴을 보니 노인이 분명한, 아무런 단서도 존재치 않지만 주인공은 그가 출몰할 때마다 사건이 발생한다는 점에 착안해 그를 범인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두려움보다 앞선 것은 생을 향한 강한 의지. 손수 준비한 김밥을 살인범(!)의 집 앞에 고이 놔두고 줄행랑치는 주인공의 모습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심상이 지배하고 있는 이 도시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가 바로 밤이면 아령을 드는 노인으로 그려지고 있기에, 막바지에 이르러 나는 우리는 죽음과 삶이 강렬히 교차하는 노인을 갈망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이해해야만 한다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는 내 자신과 만나고야 말았다. 불편함의 감정은 <재해지역투어버스>라는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재충전을 위한 게 여행이라 하였던가. 하필이면 이야기는 허리케인이 모든 것을 앗아간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재앙이 발생하기 이전엔 지상최대의 낙원이거나 최고의 관광지였는지도 모르겠으나 이제는 허허벌판이 된 그곳. 허나 살아 있는 자는 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죽음과 파괴의 현장을 이용해 돈벌이에 오늘도 나섰다. 여기저기 눈물을 찍어대는 손길이 분주하다.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제 할머니, 사랑하는 이웃의 죽음마저도 가이드에겐 여과 없이 발설해야 되는 좋은 소재로 활용될 따름이다. 계속되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림으로써 삶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발견한다. 대비되는 두 요소의 존재로 인해 어느 한쪽이 빛날 수 있는, 삶은 그래서 죽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를 읽으며 깨닫는다. 이는 <죽음의 도로>와 <프리퍄트창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도로를 떠올리며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되길 끊임없이 기원하고, 언젠가는 암에 죽을 운명이라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체르노빌 사건을 수시로 떠올리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등장 인물들은 살아남는다. 적극적으로 삶을 긍정하진 못하지만 그들의 삶은 죽음을 떠올리는 그 순간에 더욱 맹렬하게,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린란드>와 <불안한 도시>의 몇몇 인물들이 현실로부터의 지워짐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사라진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저자는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진 이들을 찾아 헤매는 또 다른 이들의 존재를 통해 저자는 생은 지켜져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어떠한 형태가 되었건 삶이 지속되는 모습을 통해 삶 그 자체를 긍정해야 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숙명임을 암시할 따름이다. <재해지역투어버스>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저자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후 홀로 소년원에 들어갔고 마흔이 다되도록 자기만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져본 적 없는 흑인 광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 비참함은 살아있다는 이유로 인해 희석될 수 있다며, 마치 저자가 내게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시위라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난 받았다. 삶의 모양새가 어떠한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니 넌 살아야만 한다고, 이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힘들 거란 생각.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충분히 얼어붙지 못한 얼음 위에 선 듯 내 삶을 대하는 내 자신의 태도가 조금은 더 조심스러워졌음은 물론이다. 사실 딱히 불편할 이유는 없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이기에. 하지만 한없이 불편했던 까닭은 그것이 그토록 우리가 외면하길 원했던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담긴 진실은 이러했다. - 우린 안타깝게도 그 한끝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 있을 땐 한없이 죽음을 갈망하고 죽은 이후엔 불가능한 삶을 부르짖는데, 삶과 죽음은 알고 보며 한끝 차이다. 살아 있을 땐 살고 죽은 후엔 온전히 죽는 존재가 되기란, 현실에서도 그렇고 소설 속에서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택한 것이 삶이건 죽음이건, 어느 쪽에 속한 존재건 우린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한 채 우리 자신이 살았음을 혹은 죽었음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그게 삶을 향해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경의이자 죽음을 향해 우리가 표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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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야기에 초대합니다. -강영숙의 ‘아령하는 밤’ 어두운 밤, 인적이 드문 퇴근길엔 왠지 마음이 허한 걸 달랠 길이 없다. 이따금씩 치킨에 맥주를 시켜 먹으며 티브이 화면을 돌려다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뱃살이 늘어 요즘은 뭘 입어도 후줄근해 보인다. 아직 사회 어딜 나가도 젊은 나이인데 벌써 늑수그레한 아저씨가 된 것 같다. 바닷가를 바로 앞에 면하고 있어 한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버틸 수 있는 곳이지만 그 바다 바로 옆에 중공업이 들어서 있어 알 수 없는 분진으로 거실이 뽀얗게 올라올 때면, 이사해야지..... 하면서도 벌써 몇 년째 살고 있는 집이다. 맥주를 한 잔하고 잠자리에 들면 바닷가 근처에서 술을 먹고 배회하는 사람들의 왁자지껄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올라온다. 결국 잠을 청하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불을 켠다. 마음 허한 퇴근길, 치킨에 맥주, 밤공기를 울리는 소음. 그리고 한 권의 책, ‘아령 하는 밤’. 한 손에 들린 아령과도 같은 책으로 밤새 런닝머신을 달리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땀을 쭉 빼고 나면 뭔가 모를 상쾌함이 느껴지는 것처럼 한여름 새벽까지 잠들 수 없었던 무거운 몸과 마음을 책으로 달랜, 2012년의 밤이었다. 그녀의 책은 모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책을 잘못 선택했나..... 싶었다. 안 그래도 고된 마음에 우중충한 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뒷골이 땡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한 편 한 편 곱씹어 읽으면서 알았다. 곱씹어 읽고, 되새김해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저 편, 외롭고 쓸쓸한 환영 속에서 아주 잔잔한 위로를 받고 있음을......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눈물바람을 하면서 주구창장 슬픈 발라드 노래를 일주일 넘게 듣고 있으면서 자연치유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그녀는 ‘문래에서’ 구제역으로 죽어가는 짐승들의 도축 현장에서 인간도 노이로제로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표현해 냈다. ‘문래에서’ 뿐만 아니었다. ‘아령 하는 밤’에서는 아령을 드는 체격 좋은 노인이 연쇄 성폭행 및 살인의 용의선상에 올라와 있었고(물론 마음속 추측 속의 용의선상이지만) ‘죽음의 도로’에선 어떻게 하면 자살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주인공이 있었다. ‘재해지역투어버스’를 타고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죽음의 풍경을 전하고 ‘그린란드’에선 남편이 사라졌고, ‘불안한 도시’에선 이혼한 아내가 사라졌다. 모두 사라지거나, 죽거나, 죽음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녀의 소설은 어찌보면 죽음 그 자체다. 조금씩 다른 형태의 죽음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그 흔한 농담 하나를 볼 수 없다. 그녀는 진지하다. 최대한 진지한 자세로 낮은 음성으로, 죽음을 대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다른 것을 본다. 죽음으로 똘똘 뭉친 그녀의 이야기 하나하나 모두 치열한 삶의 형태가 녹아 있다. 자살의 반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고 했던가. 작가는 결국 죽음이 그냥 이만큼이나 삶과 가까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고된 삶의 고행 속에 죽음을 던져 줌으로써 다시 한번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중 그러한 이유로 내가 가장 사랑한 이야기는 바로 ‘프리퍄트 창고’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일 창고를 관리하던 어머니로부터 다시 한번 더 물려받은 창고를 ‘나’는 ‘프리퍄트 창고’라고 개명하고 새롭게 정리하여 사업을 시작한다. ‘프리퍄트 창고’엔 별의별 물건들이 창고 신세를 지러 찾아온다. 이제는 쓰지 않는 물건들이 창고를 찾아 쏙쏙 들어온다. “공부 할 때 쓰던 기타와 악보를 모두 옮겨다 놓은” 그. “지금은 칠 수 없지만 그에게 기타는 버릴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유로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이 보던 책을 모두 맡긴 고객”도 있으며, 또한 같은 이유로 “부유하게 지내던 시절 부엌 찬장을 가득 채웠던 화려한 외국산 도자기접시와 옷장 속의 홈웨어를 한보따리 가져와 맡긴 고객”도 있다. 소중한 기억, 버릴 수 없는 물건들이 모두 ‘프리퍄트 창고’에 모여든다. 소위 말해 물건들의 무덤인 셈이다. 그녀의 의도는 바로 이 작품에 집약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모든 죽음은 즉 한 사람의 생 전체의 기억에 대한 소멸이다. 그 사람이 있어 돌아가던 세상의 일부분이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요하지도, 돈이 되지도 않아 저 멀리 다른 누군가의 기억의 창고에 갇히게 된다. 아, 나는 그래서 우울하구나. 내 소중한 삶의 일부를 나눠 내 죽음의 저편 내 삶을 기억해주고 추억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잔명이 올라오던 즈음의 새벽, 나는 목이 말라 냉장고에 있던 맥주캔 하나를 더 땄다. 운동하면서 술 먹는 게 아니라던데. 하면서 ‘아령 하는 밤’의 책을 두어번 허공에 들어올렸다 내렸다 시늉을 하면서 웃는다. 죽음의 이야기 속에 삶을 말하는 작가와 한번 ‘작가와의 만남’ 뭐 이런 행사 때 사인을 받아보고 싶단 웃기는 생각을 해 본다. 사인이 든 책은 내 삶의 프리퍄트 창고에 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우울까지 사랑해주는 나의 누군가는 내 새벽의 책읽기를 어느 날 문득 생각해주겠지. 한여름 밤 그는 맥주를 마시고 새벽까지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 라고. 죽음은 도심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을 더 깊은 우울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기어이 건져내게 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거기엔 무한 에너지로 돌아가는 삶의 활기가 보인다. 죽음의 반댓말은 삶.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의 새로운 도약은 바로 거기서부터다. 내일도 출근을 한다. 얼마 못 잔 잠은 퇴근 후 기절한 듯 길게 잘 것이다. 긴 잠을 자고 다시 깨면 그 날부터 다시 활기찬 삶의 시작이다. 지난 주 말복을 넘긴 여름은 곧 가을의 바람을 불러 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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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그리고 추억. 어찌 보면 이 두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재앙이 닥쳐 모든 것들이 짓밟혀졌다면 우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것이다. 절망과 좌절. 우리는 이 단어들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다양한 것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어지러움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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