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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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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작가 ‘현기영’씨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쓴지 10년 만에 쓴 소설 이라고 한다. ‘누란’은 그 옛날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존재해 한때 크게 번창했던 왕국이었지만 황사가 삼켜버렸다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작가는 지금 이 땅을 절망적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라고 했다. 심상찮은 기운이 팽배해 있는 우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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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작가 현기영씨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쓴지 10년 만에 쓴 소설 이라고 한다. ‘누란은 그 옛날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존재해 한때 크게 번창했던 왕국이었지만 황사가 삼켜버렸다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작가는 지금 이 땅을 절망적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라고 했다. 심상찮은 기운이 팽배해 있는 우리사회에서 우리들은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 인지? 수많은 개인들의 실패가 그 개인 자신의 탓 이라기 보다는 구조적인 것 이라고 단정하는 저자는 그 일정부분의 책임을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에 돌린다. 비록 운동권에서는 희망을 버리고 있다고 배신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철저하게 절망해야만 그 밑바닥에 닿을 수 있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수면위로 떠오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6.10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으로부터 시작된 이 소설은 2002년 월드컵 때까지 15년 동안 한 젊은 지식인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기구하게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한 보고서 이다. 386운동권의 막내학번인 허무성이란 대학생이 아버지의 병세를 살피러 집으로 귀가하던 중,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로 납치되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 곳에서 허무성은 정신이 파괴되고, 몸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알아서 시키는 대로 반응하는 동물일수 밖에 없는 지경까지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당시 운동권의 핵심인물에 대한 정보를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고문의 참상이 어떠 했는지, 그곳에서 허무성에 대한 고문을 지휘한 엘리트 검사 출신 김일강의 말을 빌려온다. 박정희를 좋아하고, 그의 파시즘을 사랑하는 김일강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은 반드시 부활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일생을 걸겠다는 친미,친일의 극우주의자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술도 시바스리갈만 마신다고 한다.

 

우린 정신의 유물론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정신? 영혼이란 두뇌신경 조직의 화학작용에 의해 산출되는 물질일 뿐이야. 그래서 정신이나 영혼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 뜯어 고칠 수 있어. 우린 말로 묻는 심문 따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의 방식은 정신에 묻지 않고 몸에 묻는 것이야. 몸에 물으면 곧바로 정신이 대답해 주거든. 반역의 정신은 깡그리 지우고, 그 자리에 순종의 정신을 심는 거지. 그게 녹화사업 이란 거다.

허무성의 자백에 따라 운동권 지도부는 체포되고, 풀려난 그는 배신자로 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고문을 당했노라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나는 그곳에서 한 마리 개에 불과 하였을 뿐 인간이 아니었노라고.. 절규해 보아도, 당해보지 않은 그들에게서 돌아온 것은 일신의 안전을 위해 동지를 배반했다는 모멸감 뿐 이었다. 이미 정신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지고, 공황상태에 빠진 그는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고 김일강의 계획에 따라 일본유학을 떠나고, 그 곳에서 근대사를 공부한 후 돌아와 한 사립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자리 잡는다. 결국 남산의 지하실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파시즘의 부활을 꿈꾸는 김일강의 프락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허무성은 그 옛날 자신이 고뇌하던 시기를 떠올리며 인문을 강의하고, 학생들의 의식을 일깨우려 하지만 , 이미 그때 그 시절을 먼 옛날로 여기는 대학생 들에게 그것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소비와 쾌락과 일상의, 찰나의 즐거움만을 찾는 그들에게 허무성은 재미없고 따분한 수구일 뿐이었다. 좌파에게 정권을 넘어간 후 김일강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다. 초선인 그 이지만, 여야 모든 국회의원들은 김일강이 쥐고 있는 그들의 정보에 -이권개입과 지저분한 사생활- 꼼짝하지를 못하고, 과거 허무성의 동지들은 허무성의 자백과 김일강의 체포로 갈수밖에 없었던 교도소 전과를 자랑 삼아 과거를 배신하고 김일강의 그늘로 제 발로 기어들어가 정치에 뛰어든다.

 

항상, 과거의 정신과 현재의 일상이 교차하면서 김일강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공황상태에 빠진 허무성이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술에 취하는 것 뿐이었다. 수없이 ‘’김일강 에게서 탈출을 꿈꾸지만 자신도 모르는 그의 가족사를 줄줄 꿰고 있는 그의 정보 앞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2002년 월드컵이 시작 되면서 붉은 옷을 입은 수십만의 시민들이 시청앞 광장에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을 보고 허무성은 전율한다. 파시즘 바로 김일강이 원하는 파시즘의 한 형태를 그곳에서 허무성은 보았던 것이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대한민국이 아니고 박정희나 또 다른 무었 이라면.. 그들에게 하나의 담론을 제공하고, 약간의 공포를 가질 수 있게 한다면, 그러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된, 2-30만명 정도 죽어나가는 국지전이라도 벌인다면 박정희가 추구하던 그 파시즘은 반드시 부활할 수 있다는 김일강의 신념이 그곳에선 가능하리란 생각에 허무성은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노숙자가 되었다. 옆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도 모든 것에 관심을 끊었다. 몇 시간씩 걸려 밥 한끼 먹을 곳을 찾고, 힘들면 아무데 에서나 눈을 부치고,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그의 몸에서도 나기 시작할 때 허무성은 노숙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을 떠난다. 그의 조부모가 살았던, 이유도 없이 수십만의 양민들이 학살 당해야 했던, 이제는 사라진 산속의 그 집을 찾아가 그 집의 유령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책을 읽은 지금, 조금은 불편도 하고,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속에선 분노도 인다. 무성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마음속으로만 간직한 자의 비겁함도 머리 속에선 꿈틀댄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해 보지만, 저자의 말대로 다른 곳에서는 한물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이 땅에서만은 더욱 공고해져 가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절망하고.. 아주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을 날이 언제쯤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k*****1 2009.09.01. 신고 공감 5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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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망라된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혹독한 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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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를 한껏 낮추어 10대의 청소년도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쓰려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굳이 유치한 문장과 언어를 고르고 골라 쓰고, 어떠한 비유도 상징도 배제하였으며, 책 읽기를 거부하는 시각화된 대중미디어에 각성된 사람들도 히죽거리며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통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마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정권시절과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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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를 한껏 낮추어 10대의 청소년도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쓰려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굳이 유치한 문장과 언어를 고르고 골라 쓰고, 어떠한 비유도 상징도 배제하였으며, 책 읽기를 거부하는 시각화된 대중미디어에 각성된 사람들도 히죽거리며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통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마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정권시절과 80년대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의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사회였던 이 땅을 이야기하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대개 환상문학의 비현실적 터무니없음과 낭만으로 새기는 모양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한 노 작가의 통찰은 다분히 총천연색의 현란한 수사와 직설화법의 선정적이고 충격적 형상화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리라.

 

민주화운동시절 죽음을 희구해야했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의 희생자였던 세칭 386세대인 주인공‘허무성’이란 인물의 심리적 외상이 세월의 진행 속에서도 여전히 고문 받던 그 악몽의 기억이 그대로 얼어붙은 채 당시의 신경망에 갇혀 황폐화되어 가는 삶의 궤적을 좇는다.

인간으로서가 아닌 오직 본능만 살아있는 동물로 다루어지는 잔인한 뭇매와 물고문, 죽음의 원초적 공포만이 살아 꿈틀대는 그 느낌을 당하지 않은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찌 공황장애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로 배척당하고, 고문기술자의 조종은 발작적 두려움과 함께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쟁취된 이 땅의 민주화가 가져온 오늘의 현실은 무엇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을까.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세계화, 시장만능의 방임적 자유주의, 넘쳐나는 상품의 홍수, 모든 것이 희화되고 쾌락의 대상으로 변질되어야 생존하는 사회로 퇴락한 사회는 더 이상 진지함과 사유를 원하지 않는다.

“정신 연령이 십대수준인 사회”, 그저 TV를 보고 시시덕대고 왜곡된 뉴스에 현혹되어 온통 탐욕과 기득권 유지에만 일념 하는 기회주의적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그런 유아적 단순성에 자족하는 말 잘 듣는 대중만 양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노예가 되고 있다는 어떠한 자각도 없이.

 

포르노 아닌 게 없는 세상, 장사꾼의 나라가 되어버린 세상, 경박함과 경쾌함도 구별하지 못하는 우매하지만 교활한 군중의 세상은 더욱 지배하기가 용이해졌다. 소비와 향락에 중독된 인간 군상들에 기대할 것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보수당의 국회의원이 된 가해자인 고문기술자‘김일강’의 인형이 되어버린 피해자‘허무성’은 대학 강단에서, 동료집단에게, 사회의 깨어남을 기대하지만 이미 사고가 마비된 대중들에게 민주와 자유, 정의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기회주의자여야 하고 속물이 될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제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고통만을 남겨줄 뿐이다.

 

동족을 핍박하던 왜경(倭警)의 앞잡이는 고위관료로, 악랄한 고문기술자는 국회의원으로 이 사회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기득권세력으로 여전히 활개치고, 피라미드의 계단 저 꼭대기를 지향하는 욕망의 무리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어 이들의 원숭이로서 권력의 전위부대로 설쳐댄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88만원이란 공포 그득한 세상, 극한적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사유와 정의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이 더 이상 삶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는 신념이 지배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은 온통 거짓과 배신만이 자욱하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시정을 외치는 인간은 사회 부적응자의 꼬리표가 붙거나 빨갱이, 친북용공세력으로 몰린다. 페미니스트라는 외피를 쓴 여교수조차도 자신의 쾌락을 정당화하고, 지위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도덕적 정의를 활용할 뿐이다.

세상 어디에도 삶의 이유를 정당화할 가치가 없고, 존엄하다는 인간의 고귀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멀쩡하게 깨어있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존재치 않는다. 박정희의 파시즘에 경도된 보수권력의 중심세력이 된 고문기술자에게 바보대중들을 조종할 선전도구로서‘스펙터클’이란 개념에는 권력화 된 시각문화를 조롱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이 비관적이기만 한 세상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진정 살아있는 정신을 표현하려하는 여학생의 용기와 사랑에서 작은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려는 왠지 무기력한  행위에서조차 작은 신뢰와 사랑, 피폐해지고 부조리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도 없다면 삶을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이처럼 우리사회의 망라된 불합리와 불의, 부당성, 진리로서의 가치의 왜곡과 상실에 대해 노작가에게 이 혹독한 독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현실이 너무도 아프게 느껴진다. 한국사회를 향한 이 뼈저린 현상들의 노골적인 드러냄이 욕망의 끈으로 탄탄하게 결속된 기득권자들에게, 그리고 이기주의적 쾌락에 도취되어 노예가 된 줄도 모르는 시민들에게 진정 자성을 위한 작은 시작이 되게 할 수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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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가 그 밑바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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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가진 자의 편이다. 권력의 편이다. 권력이 그 모습을 바꿔왔을 뿐이다. 그건 폭력이었고 군부였고 고문이었고 이젠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우리 역사 가운데 어느 한 때 민중이 가진 자가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민중은 가난에 헐떡이고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끈질긴 삶을 이어왔지만 권력이 회유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면 그걸 믿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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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가진 자의 편이다. 권력의 편이다. 권력이 그 모습을 바꿔왔을 뿐이다. 그건 폭력이었고 군부였고 고문이었고 이젠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우리 역사 가운데 어느 한 때 민중이 가진 자가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민중은 가난에 헐떡이고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끈질긴 삶을 이어왔지만 권력이 회유하고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면 그걸 믿었다.

“저번엔 그 녀석이 어찌나 화를 돋우던지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지. 뭐, 다 자백하겠다고? 그래놓고 또 뭔가 숨기려고? 그까짓 거 뭐 중요하다고 입다물고 있는 거야? 안돼! 넌 취조가 더 필요해. 내게 필요한 건 그따위 시시한 정보만이 아니야. 너의 완전한 항복, 너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필요해! 그놈을 칠성판에 올려라!”

운동권의 마지막 학번 허무성은 수배를 피해 잠수를 타다 아버지의 병이 위급해진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다 급작스럽게 잡혀 지하 취조실로 끌려간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 ‘회사’에선 자백도 필요 없다. 무작정 고문을 하고 또 한다. 완전하게 인간을 파괴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최대한 심어 다시는 용기를 갖지 못하게,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게 만드는, 완전한 탈바꿈을 하려고 한다. 한때 열렬한 운동권이었던 허무성은 친구들만 넘긴 배신자가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생을 포기한 사람이 된다.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문자의 편이 되는 수밖에. 그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삶을 산다. 술로 견디며.

“고문을 독하게 당한 직후, 고문자에게 얻어마시는 술맛보다 더한 쾌락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거야. 이 술맛의 기억은 낙인 같아서 평생 잊지 못하지.”

그는 고문자가 보내준 유학을 다녀오고 그가 주선해준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하지만 그는 늘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산다. 타락의 도시, 서울에선 황사가 끊임없이 그 혀를 날름거린다. 이젠 박정희의 공포가 아니라 서태지 같은 아이돌이 통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비주얼과 엔터테인먼트 시대와 함께 성장한 신세대 대중은 전 세대가 온몸을 바쳐가며 얻어낸 자유를 소비의 세대, 상품이 범람하는 신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로, 세계화로 바꿔버렸다.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한때 크게 번창했던 옛 왕국 누란을 삼켜버린 그 가없는 모래바다, 모든 것이 죽고 모래폭풍과 인광들만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었다. 폭풍이 몰아쳐 거대한 바퀴 모양의 깊은 궤적을 파놓으면 흰 뼈들이 드러나고, 밤에는 무수한 인광들이 불티처럼 날아다녔다.’

모래바다는 어디에나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고문자가 떳떳한 프락치인 국회의원이 되어 진실을 왜곡하고 민중을 호도한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어떻게든 솟아올라보려고 허무성은 학생들과 토론을 하고 눈을 뜨게 하려 하지만 이미 소비 자본주의의 달콤한 맛을 본 대중은 자신들이 눈을 뜨고 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용미의 그라피티가 살아있다. 무언의 저항의 몸짓인 그라피티는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관주의자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은 그래도, 그래도, 우리 안에 희망은 있다는 긍정을 품고 있다.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g******i 2009.08.16.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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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직선적인, 그래서 더욱 아픈, 우리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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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386은 항상 경외의 대상이다. 그들이 제도권 밖에서 싸워 이룬 숭고한 의미와 가치들을 존경한다. 이젠 시대가 흘러 제도권 안에도 386은 많이 진출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수많은 386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적 대부분을 이해하며 경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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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386은 항상 경외의 대상이다. 그들이 제도권 밖에서 싸워 이룬 숭고한 의미와 가치들을 존경한다. 이젠 시대가 흘러 제도권 안에도 386은 많이 진출해 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은 수많은 386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신문과 방송을 도배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행적 대부분을 이해하며 경외한다. 그 이해와 경외의 전제에는 80년대로 대변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격동이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서울에서 386이 이룬 성과는 과히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당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내게 그들은 한없이 큰 존재였다. 옳은 것을 향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그들의 용기와 양심은 젊은 시절의 나를 변화시켰다. 오 386이여. 찬란했던 선배들이여. 이 한 사람의 '포스트386'은 비범한 386 선배들의 역동을 기억하며 감상에 젖는다.

  그렇다. 내게 386은 그런 존재다. 동시에 '80년대 한국'은 항상 경외의 시대였다.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국민의 손에 가져온 시대였다. 그것이 형식에 국한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싸워온 386과 80년대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이승만 정권을 시작으로 1차원의 선으로 늘여뜨려 보자. 한 눈으로 보자는 얘기다. 지난하고 굴곡지지 않은가. 동족상잔의 비극, 군사 쿠테타, 독재 정권, 자유의 억압, 민중의 봉기 등 참으로 고생이 많은 역사였다. 서구에서 수백년 이상 겪으면서 달성했던 것들을 한국의 현대사는 불과 50년 안에 이루었다. 그만큼 아프다. 그리고 역동적이다. 그렇기에 경외스럽다.

  항상 뼈아픈 글을 쓰는 문단의 거목 현기영은 신작 『누란』을 통해 박정희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우리에게는 남산의 어느 지하실에서 반인간적인 고문이 자행되었던 바로 그때 그 시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인권이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억압되고 파괴되었던 시절이다. 소수의 죽음은 곧 다수의 삶으로 치환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통제로 조절되었다. 인간의 기본을 유지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경제발전이라는 호도된 '선善'에 의해 희생되었던 바로 그 시절의 어두운 단면을 작가 현기영은 소설의 시작으로 삼는다.

  허무성은 386이다. 독재 권력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던 대학생 허무성의 삶은 항상 투쟁의 연속이다. 그의 행동이 특별한 건 아니다. 보다 인간답고 보다 상식적으로 살고자 소원했던 그 시대 젊은 열정의 원형이다.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의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혹독한 고문의 대가를 치룬다. 고통스럽다. 견디기 힘들다.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을 고문의 소용돌이 속에서 뺑뺑이 돌린다. 반은 죽었을 정도의 고문의 클라이맥스에서 허무성은 동료들의 이름을 불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고문에 약하다. 인내는 한계가 있다. 고문은 너무 고통스럽다.

  허무성의 배신은 지독한 고문이라는 타자적 의지, 즉 국가의 힘에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 찍힌다. 허무성은 외롭다. 하지만 국가의 일에 힘을 보탵 이유로 고문자 김일강은 허무성의 앞날을 책임지는 '은혜'를 행사한다. 김일강의 배려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다. 또한 귀국 후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학 교수가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허무성과 김일강의 동거는 소설의 시공간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관통하는 데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참 지난한 악연이다.

  이 소설은 허무성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해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현기영의 글에는 수사나 기교가 없다. 실제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묵묵히 서술할 뿐이다. 철저하게 건조한 문체로 일관한다. 또한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 절망과 실패라는 어두운 스케치로 허무성의 삶과 평행하는 한국의 현대사를 그리고 있다. 그렇기에 읽는이의 마음은 쓰라리다. 과연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2002년 6월 10일 시청 앞 광장. 한국과 미국의 월드컵 16강전을 향한 예선 2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광장을 점령했다. 현기영은 15년 전에도 수십만의 군중이 동일한 시공간을 점령했었다고 외침한다. 하지만 두 시공간에는 본질적인 괴리가 있다. 물론 진정성의 차이는 아니다. 둘 다 진정성은 있었다. 여기서 진정성은 비본질이 된다. 두 군중의 차이는 본질에서 상치된다. 내용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축구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강렬한 쇼비니즘 젊은이들이 과연 15년 전 6월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작가 현기영의 무미건조한 질문은 우리 세대에게 거울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한다.

  현기영이 소설의 제목으로 선택한 '누란([, Lou-lan)'의 의미를 사유하자. 오래전 중앙아시아 고비와 타클라마칸 두 사막 사이에 존재해 한때 크게 번창했던 누란 왕국은 황사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왜 소설가 현기영은 무겁고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직선적으로 조명하면서 잊혀진 왕국 '누란'을 소설 전면에 배치한 것일까. 그것은 현기영 자신이 절망과 실패의 기록이라고 고백한 뼈아픈 '과거'의 회상과 쓰라린 '현재'의 응시를 상징화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아픈 현재상에 대한 목도를 외롭고 심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는 기억될 때 빛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하지만 그 정지됨 자체만으로도 현재를 일깨운다. 그리고 미래를 추동한다. 인류가 위대한 것은 역사성에 있다. 역사를 통해 인과관계를 학습하는 인간의 지성은 더 좋은 미래를 진취한다. 현기영은 '작가후기'에서 이 소설을 절망과 실패에 대한 기록이라고 고백한다. 절망과 희망, 실패와 성공은 결국 시간차의 문제다. 현기영이 소설의 말미에 그린 절망적 스케치는 어쩌면 그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희망의 기대로 치환될 수 있다는 내밀한 역설이 아닐까.

  소설의 형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소설처럼 쓰지 않은 현기영의 『누란』은 무겁고 건조하며 직선적이다. 사실이 가진 힘은 강력하다. 사실은 사실과 어울리는 방법으로써만이 그 힘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 사실이 픽션적 구성을 갖출 때 에너지의 양은 은밀하게 방전된다. 그렇기에 현기영은 그저 묵묵하게 직선적 서술을 고집했는지 모른다. 그 역사는 아팠기에, 위대했기에, 그리고 현재 또한 너무 아프고 쓰라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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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YES마니아 : 골드 g*****o 2009.09.14.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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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망과 패배,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절망과 패배,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내용보기
1980년대와 2000년대를 걸친 한 운동권 출신의 지식인의 좌절과 체념을 허무의 비관으로 일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허무상' 은 '허무'하고 '무상'한 인물이다.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을 대변하는 허수아비라 할 때 그는 현대를 펜으로 읽어가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또 다른 실재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실패와 절망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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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2000년대를 걸친 한 운동권 출신의 지식인의 좌절과 체념을 허무의 비관으로 일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허무상' 은 '허무'하고 '무상'한 인물이다.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을 대변하는 허수아비라 할 때 그는 현대를 펜으로 읽어가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된 또 다른 실재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실패와 절망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고 있다. 허무상을 통해 80년대와 2000년대의 사회상과 그 사회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다.

80년대 열혈 청년  허무상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고군분투하지만 검거와 무자비한 고문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배신자로 전락한다. 잔인한 육체의 고통 앞에 온전한 정신은 없다. 돌아갈 곳 없는 허무상은 가해자의 주선으로 일본유학을 떠나고 대학교수라는 신분으로 이 사회에 복귀한다. 그를 고문했던 김일강은 정치검사였고 수구 보수이론을 강변하는 인물이다. 그를 통해 오늘날 보수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고 그들이 다수 대중을 지배하는 통치 방식을 알 수 있다.

운동권 출신과 지배 계층과의 타협은 8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이루어진 386들의 정치계 입문과 우파 전향을 통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고, 실제 허무상의 고문에 의한 고발로 검거됐던 다수의 동료들은 투옥이라는 감투를 쓰고 국회의원이라는 훈장을 달고 재등장 한다. 작가는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그들이 도리어 사회에 의해 변화된 사실에 주목한다.

대학교수로 복귀한 허무상은 2000년대 캠퍼스를 배경으로 80년대와 다른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항과 비판 보다 소비와 물질중심.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의 습득보다 취업에 목숨을 걸고 있는 오늘날 대학생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가치관에 논쟁을 벌린다. 때론 연극대본처럼 허무상과 학생들간의 주고받는 대사는 일체의 배경과 심리표현을 제하고 뚜렷한 가치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신자유주의로 넘쳐나는 소비 지향적인 사회와 양극화의 문제, 포르노와 같은 정보 쓰레기로 넘쳐나는 인터넷의 맹독성과 대학생들의 책임없는 섹스의 문제까지 거론한다. 대학교수 허무상이 오늘날의 지식인들의 주의주장을 대변하는 양심적인 인물이라고 볼 때 다소 배신자의 낙인에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변신한 개연성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 허무상은 대학생들과의 설전을 통해 청년 정신을 상실한 그들에게서 실망감을 느끼고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낸다. 사학과 교수로서 시대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그는 우울과 고립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사회 조직 속에서 실패자의 모습이었고 가정 생활 또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사랑과 배려가 없는 기계적인 한 집 살림이었다. 결국 이혼이라는 실패의 결과만 남고 그는 방황한다.

허무상의 주변인물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마치 처절한 절망과 패배의 경연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

대학시절 운동권 동료였던 그이 아내는 자식을 잃은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결국 인도로 떠나버린다.

그의 유일한 술 친구였던 차호진 이라는 약사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의 아빠이고 이로 인해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약국 앞에 있는 모텔보다 손님이 적은 약국에서 혼자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 또한 대학시절 사물을 두드리던 광대출신이었다. 또한 허무강의 친구는 한 때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다 말기암 진단을 받고 노숙자로 전락하고 만다.

어둡고 우울한 80년대 인물들의 자화상이다.

반면 정치검사였던 김일강은 국회의원되고, 지배 세력에 투항한 동료 운동권들은 금배지를 달았으며 다른 이들은 교수가 되었다. 순수와 지조를 잃은 자는 호의호식과 성공의 명예를 얻었고, 저항과 비판의 삶을 살았던 자들은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작가는 '절망과 실패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오늘날 사회에 등장하는 각종 병리현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비판한다. 수구 보수 언론의 여론호도의 병폐, 특정 종교 집단의 무차별한 선교 활동, 우리 이웃에 대한 무관심, 묻지마식 이유없는 폭행과 폭력 등을 백화점식으로 보여준다.

허무상이 87년 6월 항쟁에서 경험했던 다수 대중에 대한 믿음은 오늘날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군중은 이기적이며 우매할 뿐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통해 보여준다. 수십만의 인파들이 시청광장에 모여 붉은 색으로 외쳤던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은 집단적 최면에 걸린 히스테리 현상일 뿐이며, 구조 조정 당한자, 취업 난에 빠진 청년 백수들. 하루 하루 먹기 살기 힘든 자들의 힘겨움을 풀어 헤치는 살풀이 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우매한 군중들의 열기 속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순이의 비명은 들을 수 가 없다.

따라서 더 이상 80년대 변혁에 대한 로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허무상은 군중에 대한 무상을 느끼고 급기야 노숙자로 전락한다.

작가의 말대로 완전히 밑바닥으로 내려가 자신의 해체한 후에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최고의 인테리에서 노숙자로 추락한다는 설정 자체가 다소 비약적 설정이라 설득력이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가의 설정의도는 아군에 비해 적군은 강하고 우리가 뭔가 새로운 각성 속에 새로운 대오를 형성할 수 없다면 이 싸움은 계속 패배할 수 없음을 역설한지도 모른다.

결국 허무상의 모습은 소위 민주와 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80년대 청춘들에게 고하는 죽비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한 번이라도 800일이 넘도록 남편과 자식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용산 철거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아름다운 이 산하가 삽질과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왜 묵인하고 있는 것인지.

당신들이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들이 하나둘씩 적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음을...왜 모르는지....

이토록 실용으로 포장된 경제지상주의자들의 꼬임에 빠져, 소유의 욕망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전직 운동권들에게 작가는 '허무상'을 통해 일갈한다. '당신들은 적어도 허무상이 만큼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고 살고 있는지', '당신은 허무상이처럼 자신을 버리고 밑바닥으로 내려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j****i 2009.1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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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리는, 혹은 잊혀지는 것들에 대하여_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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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자마자, 남영동 1985 영화가 떠올랐다. 허무성이 김일강에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은 남영동 1985의 그 장면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몸 바쳐 시위에 가담했던 대학생 허무성은 고문자 김일강을 만난 후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지하실, 옥죄어오는 어둠의 잔인함, 강요받는 사상 전환, 극심한 고문이 생산해낸 트라우마다.   김일강의 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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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자마자, 남영동 1985 영화가 떠올랐다. 허무성이 김일강에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은 남영동 1985의 그 장면과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몸 바쳐 시위에 가담했던 대학생 허무성은 고문자 김일강을 만난 후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지하실, 옥죄어오는 어둠의 잔인함, 강요받는 사상 전환, 극심한 고문이 생산해낸 트라우마다.

 

김일강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후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게 된 허무성은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수업의 열의를 상실한다. 허무성은 젊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민주화를 위해 각자의 목소리를 모아 바다보다 깊은 울림이 깃든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던 과거 자신의 세대와 시간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은데, 허무성 자신 앞에 앉아있는 학생들은 그저 각자의 목소리만을 챙기기에 바쁘다. 세대와 세대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허무성을 고독하고 외롭게 만든다. 허무성이 살고 있는 공간은 공동체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사회다. 그걸 이해하기 싫지만,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애달프다.

 

교수라는 직책 속에서 입바른 소리를 내던 허무성은 여학생과 부적절한 만남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노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 노숙은 누군가에게 눈치볼 일도, 무언가에 쫓겨 전전긍긍할 일도 없을 틀이 없는 세계다. 이념의 대립도, 사고방식의 차이도 없는 무형무결한 공간.

 

중국의 전설 속의 도시 누란이 거대한 모래바람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것처럼 허무성도 김일강의 시선에서, 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이 누란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주지 않고 피해받지 않고 고요히 모래바람에 실려.

 

+ 거침없이 읽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똑같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러기에 분쟁도, 대립도, 다툼도, 이별도 있다. 하지만 허무성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사고방식의 격차가 벌어지는 사실이 매우 슬프다. 지나간 시간들은 역사의 일부인데, 역사가 존중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기분은 참 찝찝하다.세대 간 소통이, 이해가 원활하게 되지 않는 문제를 단순히 세대 차이라고 정리해버리는 건 몰상식한 생각 같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점점 중요해지는데,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때다.   

 

s*****5 2013.07.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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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 그리고 다시 희망이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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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로 안 좋은 버릇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이나 평론가의 글을 살펴보는 습관이다. 좋게 말하면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이겠지만 나 스스로 무언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주저하는 습관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일 테다. 이 책 《누란》도 그랬다. 맨 뒤에 작가의 말이 있기에 습관처럼 먼저 읽어 내려갔다.    작가 현기영은 첫 줄에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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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로 안 좋은 버릇이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이나 평론가의 글을 살펴보는 습관이다. 좋게 말하면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이겠지만 나 스스로 무언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을 주저하는 습관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일 테다. 이 책 《누란》도 그랬다. 맨 뒤에 작가의 말이 있기에 습관처럼 먼저 읽어 내려갔다.

 

 작가 현기영은 첫 줄에 “이 소설은 실패와 절망에 관한 기록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읽기에 앞서 맥이 풀렸다. 안 그래도 부끄러운 이 삶이 고개 못 드는 그런 이야기이겠구나 싶었다. 잘못되고 부패한 것들에 맞서 치열하게 싸워본 적도, 그럴 예정도 없는 내가 감히 읽어도 되는 걸까. 대학 시절에 등록금 투쟁을 하며 총학생회장이 쓰러져도 연례행사마냥 무심하게 지나쳤고, 철거민도 사람이라고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싸우던 동네의 흉물스런 철거촌엔 가까이가기 조차 싫었다. 세상엔 정당한 일보다 부당한 일이 많다. 입시경쟁도, 취업경쟁도, 비정규직은 직원 취급도 안 하는 직장 내 처우도 부당하다. 다 아는데, 왜 바꾸지 못하나? 그것은 패배의 기억 때문이지 않을까.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폭로한 대표적인 소설로 손꼽히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던 한병태가 절대 권력자인 엄석대에게 덤볐다가 심하게 깨진 후 오히려 그에게 더욱 순응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렇다. 지난 70~80년대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피로 일보 진보했다. 함께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발맞추어, 높고 단단한 독재와 불평등한 벽을 수차례 허물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그 전의 성취보다 더 무서운 실패와 절망, 고독을 맛봤다. 예전엔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더 나은 세상’은 ‘앞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예전엔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 자가 바보였다면 지금은 그런 세상을 꿈꾸는 자가 바보다. 어차피 해봐도 안 되는 것이니 이 한 세상 실컷 즐기고나 가자는 쾌락주의나 덤볐다가 뼈도 못 추스른다는 보신주의가 만연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이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 불편하다. 망각에 대한 서러운 기억의 투쟁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허무한 주인공 허무성은 전형적인 운동권 출신 386세대다. 앞장서 투쟁했고, 모진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뜨겁고 섬뜩한 기억만 있을 뿐 마치 거세된 남성처럼 축 쳐져 산다. 본인을 고문한 김일강을 증오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그에게 정통으로 복수하지 못하고 그가 마련해 준 대학 교수직을 유지하며 산다. 세상이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이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이 시가 떠올랐다. 지금은 고요한 시대다. 물론 거리는 시끄럽지만 울림이 없다. 네온사인이 반짝거리지만 가슴의 열기가 식었다. 허무한 번잡함, 헛배부른 풍요 앞에서 그저 마음이 아플 뿐. 70~80년대엔 최루탄을 피해서 이리저리 뛰느라 몸이 아팠다면 지금은 마음이 아픈 걸까? 허무성이 대학 강단에서 제자들에게 경박하다고, 저질이라고 퍼붓는 독설을 읽어가노라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우리 세대는 아픈 것, 괴로운 것을 바라보지 않는 데 익숙하다. 제 흠이던 남의 흉이던 모른 체하는 쿨한 세대다. 그런데 자꾸 들춰내니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계속 헤짚으며 상처를 덮은 밴드를 떼어낸다. 보라고, 이렇게 곪아가지 않느냐고. 우리 세대는 내 살이고, 내 상처니 당신은 쿨하게 외면하라고 비웃는다. 허무성과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연거푸 찔렸다. 나와 똑 닮았기 때문이다. 쿨함은 시원하기는커녕 가볍고 허무하다.

 

 모든 이는 고품질인 삶을 살고 싶다. 그 누가 싸구려 삶을 살고 싶으랴. 그런데 세상은 자꾸만 더 가볍게, 더 쿨하게 살라고 속삭인다. 너는 네 일만 해, 너는 네 삶을 살아……. 나 혼자서 세상이 오지 않았듯 나 혼자 살 수 없을 텐데. 고문한 김일강이 끝끝내 허무성을 내칠 수 없었던 것과 고문당한 허무성이 김일강을 두려워하면서도 연민했던 것처럼.

 

 현기영 작가의 말이 허한 내 등짝을 쓰다듬는 것 같다. “수많은 개인들의 실패는 그 개인 자신의 탓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것이고, 그 구조는 세계화가 만들어놓은 부분이 크다. 즉 개인의 실패, 개인의 불행은 일국의 문제를 넘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무력감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라는 나를 모두 변명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말의 자유를 준다. 자유를 얻고 무엇을 해야 하나. 초등학교 때 자유는 의무와 함께 행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배운 바 있다.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한 쌍이다.

 

 볼이 빨개질 만큼 부끄러워졌다가 차라리 자유로워지는 홀가분함까지 얻었다. 이제는 가볍지만 육신의 무게만큼은 지탱할 책임을 가져봐야지.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삶, 같이 죽고 싶은 세상이 아니라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야지. 먼저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데, 야만과 비참을 넘어서는 데 딱 한 걸음 떼어 보는 작은 용기를 내야겠다. 더 이상, 우리가 바꾸려던 것을 세계가 다 바꿔버리기 전에.

 

j****l 2010.12.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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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세대의 6월 항쟁 세대에 대한 절박한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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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현기영의 글을 읽었다.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과 시대를 바라보는 심경이 절절히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이순을 넘은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에 접어든 작가는 해방과 6.25, 이승만 독재와 4.19, 유신과 10.26, 5.18, 5공과 6월 항쟁을 겪으면서 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온 세대다.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작가는 역사를 민초들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였다. 역사를 그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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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현기영의 글을 읽었다.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과 시대를 바라보는 심경이 절절히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이순을 넘은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에 접어든 작가는 해방과 6.25, 이승만 독재와 4.19, 유신과 10.26, 5.18, 5공과 6월 항쟁을 겪으면서 현대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온 세대다.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작가는 역사를 민초들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였다.

역사를 그들 민초들의 삶에서 보면, 때로는 고단하고 피로에 찌든 것이면서도 그 아픔들은 쌓이고 쌓여서 분노로 피어올라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은 억압과 착취의 구조에 저항하며 싸우고 때로는 그 구조들을 다 깨부수고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지만, 현실은 잠시잠깐의 희망을 던져주는 듯 하다가 곧이어 질곡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한 잠시의 승리감과 끊임없는 질곡의 반복이 우리 역사를 이어왔다.

지난 87년. 뜨거웠던 여름. 6월 항쟁을 그렇게 타올랐다. 이 땅의 민중은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6공화국과 소위 문민 정부를 겪으면서 제대로 된 승리감을 맛보는데는 아직도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자책할 수 밖에 없는 정부의 탄생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다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잇따른 탄생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부를 아니 민주 정부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승리감에 도취되고, 민주주의를 한층 누렸다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10년' 이 땅의 보수라는 사람들이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절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과거로 되돌아가는 현실을 목도하고만 있어야 한다. 이 현실을 두고 그 동안 민주를 부르짖고 민주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세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싸워나가야 할 것인가? 참으로 갑갑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작가는 이미 60을 넘은 나이에 40대 젊은 세대들의 삶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펜을 잡았다고 생각된다. 앞서 그들 4.19 세대들의 훼절의 역사를 보듯, 80년대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세대들이 기성세대로 접어들면서 '영혼'을 팔아버리고 굴절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의 마음을 담아 후배 세대들의 삶에 대한 성찰을 간곡하게 당부하는 작품이라 느껴진다.

중후한 글쓰기와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가 잘 어우러지기는 했지만, 세대 간의 격차에서 다가오는 훈계적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점이 쪼금은 아쉽기는 하다.

 

처음 쓰는 글이라 요령도 없고, 글도 별루지만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k******1 2010.03.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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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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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현기영 작가의 글을 읽었다. <순이삼촌>을 사두고도 채 읽지 않은 나였다. 펴보기가 겁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내 게으름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접한 현기영 작가의 문체는 매혹적이었다. 힘이 있었다. 단호했으며 분명했다.   84년생인 나는 책 속, 허무성의 제자들과 같은 세대다. 나 역시 그들처럼 물질적이고 소비적이며 향락적이다. 하지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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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현기영 작가의 글을 읽었다.

<순이삼촌>을 사두고도 채 읽지 않은 나였다.

펴보기가 겁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내 게으름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접한 현기영 작가의 문체는 매혹적이었다.

힘이 있었다. 단호했으며 분명했다.

 

84년생인 나는 책 속, 허무성의 제자들과 같은 세대다. 나 역시 그들처럼 물질적이고 소비적이며 향락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를, 나의 윗 세대를 이해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책을 통해 민주화에 대해 접했으며 현대사를 새로 쓴 책을 펼쳐 읽으며 충격을 받았고 386 운동권 세대에 대한 경이로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오늘날은 나에게 과거를 찾아보고 이해해볼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책을 읽는 내내 허무감으로 마음이 쓰라렸다. 386운동권 세대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들었고, 그 다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세대에 대한 연민-. 한데 어울려 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단절감,...

 

오늘날을 살고 있는 모든 세대들이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한다.

 

 

 

YES마니아 : 골드 t******8 2010.01.0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과거와 현재의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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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 숨이 턱턱 막힌다.   답답하고 갑갑해지는 기분이다.     80년대 청년시절을 지나 2002년 40대를 지나는 중년 허무성.  80년대에 태어나 2010년 서른을 바라보는 나.   연일 언급되는 현정권이 자꾸만 내 머릿속에 겹치는 현상을 느끼면서 당혹스럽고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있는 불신만 키우고 있는 세종시 원안 수정이니 발란심 커지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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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

숨이 턱턱 막힌다.

 

답답하고 갑갑해지는 기분이다.

 

 

80년대 청년시절을 지나 2002년 40대를 지나는 중년 허무성. 

80년대에 태어나 2010년 서른을 바라보는 나.

 

연일 언급되는 현정권이 자꾸만 내 머릿속에

겹치는 현상을 느끼면서 당혹스럽고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계속해서 화두가 되고있는

불신만 키우고 있는 세종시 원안 수정이니

발란심 커지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니 하는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운하 정책이 언급될 때에도

반대 여론이 굉장히 심했다던 과거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 추진

당시의 모습을 상상케하더니......

 

작년 촛불집회도 그렇고,

맞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s*****o 2009.11.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