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오래된 정원>의 강렬한 사랑과 이념의 정수 이후, 진흙 속에서도 진주는 역시 진주이듯, 정말 고운 진주가 바리데기라는 소녀를 통해 살아났다. 배경이 북한일 뿐, 이 이야기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보편성의 극치이다. 영혼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지만, 인간다운 모든 면을 가진 보통의 인물이기도 하다. 독재체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인 세상이다. 약한 인간은 어디서나 짓밟히고 어떤 체제도 자신과 맞지 않는 인간은 핍박한다. 중요한 건 어떤 조건이든, 이 세상을 살아내는 인간 모두,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다.
사람은 다 같다. 한번 태어나 살고 둑는 건 다 같다. 그런데 왜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그런 부모를 만나고,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가. 왜 여자인 것만으로도 원죄인 인도에서 태어났는가. 왜 흑인으로 태어나 노예 생활을 했는가. 왜 부모 공양하고 제사를 모셔야하는 한국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가.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네 인생은 불공평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다. 왜 좀 더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진보시키는 능력이 있다. 개인의 조건이든 사회적인 어떤 체제이든.
지독한 1인 독재 체제인 1980년대인 북한에서 바리는 태어났다. 여전히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일곱째마저도 딸을 낳자, 휑하니 집을 나가버리고 엄마는 아이를 숲에다 갖다 버린다. 그런 아이를,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살린다. 그렇게 한 소녀가 태어나 부자도 아니고 문명의 이기가 다 갖춰진 곳도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대가족 안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불행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게 된다. 체제의 불행과 가난은 약하디 약한 개개인에게 극도의 불안과 불안정성으로 다가온다. 더 이상 삶은 없다. 남은 것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삶을, 인간을, 세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북한 말, 찰지고 맛난 그 사투리 안에 내 어릴 적 정서가 다 녹아드는 듯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을 상기시킨다. 수도권에서만 살았지만, 이 작품은 외국어, 외래어 그리고 이제는 인터넷 용어까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맑은 샘물 같은 신선함을 주었다. 정겹고 따뜻한 분위기에 흠뻑 젖다가, 바리가 불행을 겪는 대목부터는 가슴을 쥐어뜯는 듯, 함께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때론 눈물을 쏟다가 바리가 보는 혼령들에게마저 애틋함을 느끼기도 한다.
한 점 옥의 티로 보인 부분은 결말이었다. 끝부분의 모든 세상 문제에 해답을 주는 듯한 그 시도는 좀 작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쩌면 현대의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정답 이상의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보다 이 작품의 집약은 할머니가 바리에게 해주던 바리공주 얘기가 아닐까. 부모님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살려주려면 생명수 약수를 가지러 가야 한다.
‘저어 해가 저무는 서천 서역에 가믄 세상 끝에 약숫물이 있다구 그랬지비. 병든 나라 지나 물 건너고 산 넘고 가는 동안에 신령님들이 도와주고, 왼갖 사람 빨래 해주고, 밭 매주고, 시키는 천한 일 다해주고, 귀신 물리치고, 지옥에두 다녀오지. 지옥에 갇힌 죄인들 구제해주고 서천에 당도하니 장승이 기달리구 이서. 장승하고 내기 시행에 져서 살림해주고 아 낳아주고 석삼년을 일해 주어야 약수를 내주갔다구 허는 거이야. 저어 세상 끝이서 온갖 고난을 겨끄다가 돌아오는데 저승 가는 배들을 구경하지. 황천으로 흘러가는 배 위에 가즌 업보를 걸머진 혼백들이 타구 있대서.
이 세상 모든 곳에, 어떤 체제하든, 인간은 모두 생명수와 함께 호흡하고 마시고 함께 살고 있다. 다만 그 생명수를 알아볼 마음을 못 얻었을 뿐… 정말 아름다운 작품,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황석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떤 삶을 살든, 어디에서 살든, 어떻게 살든,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으라고 일러주셔서요… |
|
살아있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같은 시대에 살면서 꾸준히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라는 것을 황석영의 새로운 작품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작가는 나와 함께 이 시대를 살면서 같은 세상사를 겪으면서도 내가 보는 시선이 아닌 작가가 보는 시선에서 세상을 본다. 이러한 "작가가 보는 세상의 시선"은 내가 세상과 또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든다. 이 것은 정서적으로 자칫 정체될 수 있는 각박한 삶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내면적인 성장이기에 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읽는 것은 고전을 읽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경험이다. "손님"과 "심청" 이후에 기다려온 황석영의 새 작품 "바리데기"는 나로 하여금 분명 이러한 기쁨과 성장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책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책장을 넘기면서 단숨에 읽어내려가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소설 초반에 쓰인 북한 사투리는 처음엔 그냥 "독특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불과했지만, 책장을 넘겨가면서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또한 바리 가족들과 북한 소도시의 어려운 실상이 펼쳐지면서 점점 사투리 함께 그 생활에 동화되었고, 그리 먼 곳에 있는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네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점점 슬퍼졌다. 같은 한반도 땅위에 있으면서도 그리도 굶주리고 죽어가는것이 슬펐고, 화전을 위해 땅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슬펐다.
가족을 다 잃어버리고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런던에 도착해서는 차츰 자리를 잡아나가는 장면에서는 새로운 희망을 보았고. 성공스토리를 보는 듯해서 즐거웠다.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는 땅이 남조선이 아닌 머나먼 이국땅이라는 점과, 조선사람들에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홍콩인, 베트남인,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등 (여러 의미에서) 다른 문화 사람들 속에서 구원을 찾는 다는 점이 바리공주가 세상을 구하는 생명수를 찾는 설화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런던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행복을 찾는 듯하지만 동시대에 지구촌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쟁과 테러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피해가지 못하고 그들은 또 한번 좌절을 겪지만, 다른 문화속에서 생명수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이 책은 보여준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작가의 다음 작품을 배고프게 기다리고 있다. |
|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사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가끔씩 난 세상이 그리고 삶이 나를 외면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있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어쩌면 그런 상처들이 모여 우리의 긴긴 인생을 구성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고 닳아 더 이상 어떤 슬픔에도 반응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땅을 등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일 수도... 작가가 택한 장소는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그 곳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뿌리 내리고 살고 있는 공간이다. 누군가를 부모, 자식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하지만 우리로선 쉬이 닿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곳에 대해 생각할 때면 상상력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다. 나 역시도 그러하다. 안타까운 것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고장, 주인공이 태어난 곳이 청진이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보다는 모두가 굶주리는 서글픈 현실을 먼저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절망'이라는 단어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저자가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이토록 극한 상황을 연출해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분히 미신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바리가 보고 듣는 모습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바리에게 나타나는 형상, 바리에게 들리는 목소리 등이 어쩌면 우리 자신이 자주 무시하곤 하는 우리 안의 소리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을 때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울림이라고 했기에... 세상의 숨결을 느끼는 그녀의 타고난 능력에 나이 지긋한 압둘 할아버지의 지혜까지 더해져 그녀는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누구의 아픔에 공감해야 되는지,... 모든 혈육을 잃고 새로이 얻은 딸을 다시금 보낸 경험 앞에서도 그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플지라도 그 아픔이 머지 않은 훗날에는 한 발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이미 그녀는 생명수를 획득한 것일지도... '아가야, 미안하다' |
|
대한민국 대표 인터넷서점이라는 YES24는 1년 365일 다양한 이벤트를 시행한다. 현재 진행중에 있는 이벤트중에서 다소 감질맛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 4회 네티즌 추천 한국의 작가'라는 코너가 그것이다. 이 코너는 각기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눠 네티즌투표를 하고 있다. '우리시대 대표작가', '차세대 우리작가', '다시 만나는 작고작가'. 이렇게 세 가지 항목으로 네티즌들의 투표를 유도하고 있는 코너다. 뒤의 두개의 항목은 차치하자. 첫 번째 '우리 시대 대표작가'에 대한 네티즌 관심도와 투표율이 단연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의 경우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 네티즌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현재 투표가 진행중이어서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투표집계로 보아 1위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1위에는 단연 황석영이라는 이름 석자가 올라 있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인 24%를 획득하여 그 유명한 조세희나 그 위대한 이문열을 멀찌감치 앞서고 있다. 왜 네티즌들은 황석영에게 '우리 시대의 대표작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감'이라는 영광의 몰아주기를 감행하고 있는 걸까? 다시말해서 황석영은 왜 네티즌과 독서매니아들로부터 이 시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데 주저되지 않는걸까? 그 의문점과 황석영의 현재가 만나는 곳에 『바리데기』라는 작품이 있다.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를 만났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한 여인의 청춘을 설화 '바리공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20세기말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대략 20여년의 시간동안 북한과 중국과 영국이라는 공간에 녹여놓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소설 내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1인칭주인공시점의 화자, 바리가 있다.
바리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이었다. 아들을 몹시 갈망하는 집안에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출생하자마자 어머니로부터 산속에 버려진다. 다행히 기르는 개 흰둥이가 산속에 버려진 바리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 구사일생한다. 바리는 어렸을 때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살 때에는 여느 집안 부럽지 않은 평범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점점 심해져 가는 기근과 고약한 북한의 정치체제로 인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때 바리는 바로 윗언니인 현이언니와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흰둥이의 일곱번째 새끼인 칠성이와 함께 두만강을 건넌다. 중국땅에서도 고난은 연속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때문에 산속에 기거하여 살다가 아버지가 떠나가고, 할머니와 현이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의지처였던 강아지 칠성이까지 죽음을 맞이한다. 배려심이 많은 미꾸리 아저씨를 만나 발맛사지업소에 취직하여 마사지도 배우고 샹언니를 만나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역시나 불행은 바리의 삶을 덮쳐온다. 샹언니와 함께 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인권말살의 잔혹함을 겪으며 간신히 살아서 영국에 도착한다. 어린 나이여서 몸이 팔리지 않은 채 중국집에서 일하게 되고 마음씨 좋은 사장의 소개로 다시 발마사지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여태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되는 바리.. 같이 일하는 루나언니의 집에 동거하게 되고 파키스탄 남자 알리를 만나 결혼을 한다. 결혼의 행복도 잠시, 전쟁이 터져 알리는 사라지고 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이 지나 알리와 다시 조우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가 생긴다. 알리와 함께 런던시내를 거닐던 어느날 폭탄테러를 목격하면서 소설은 종료된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바리데기』의 이야기 분량의 딱 절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바리데기』는 오직 주인공 바리의 관점에만 의지하여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축은 두개다. 하나는 바리의 하루하루 일상이고, 또 하나는 바리의 영험한 능력이 빚어내는 꿈과 환상의 몽환적 경험이다. 이 이야기의 양대 축이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소설의 흐름을 진행하고 있다. 바리는 죽은 자와 소통하며 동물의 마음과 교통할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능력에 의지하여 현실에서 직면하는 의문과 번뇌를 꿈과 환상에서 풀어놓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관찰하기도 한다. 더불어 이미 죽은 칠성이와 할머니의 혼을 만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할머니로부터 '바리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무엇보다 꿈과 환상에서 끊임없이 찾아 질주하는 '생명수'에 대한 존재의식과 모험심이 바리 자신의 의지를 점점 불태우고 있다. 작가 황석영은 북한에서 태어나서 중국을 거쳐 영국에 이르기까지의 바리의 20여년간의 인생여정을 일상적인 일기체로 말하는 동시에 바리의 영험한 능력에 기인하는 꿈과 환상을 매개체로 현실에 대한 해석과 그 소중한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을 교차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리데기』는 매우 우울한 소설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바리의 관점은 이성적이면서 건조한 문체로 불행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있다. 바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암울하다. 바리의 시선은 자신의 기구한 삶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다양한 불행함에까지 관조한다. 더나아가 남북분단, 북한의 기근, 빈부 및 국가적 양극화 현상, 911 테러,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런던 테러, 쿠바 콴타나모 수용소 등으로 대변되는 20세기말 세계사의 어두운 장면까지 관통하고 있다. 어쩌면 바리가 자신의 꿈과 환상가운데 찾아나선 '생명수'에 대한 갈급함은 현실에서 관찰했던 세상의 어둡고 암울하고 억울한 것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갈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의 뒷부분에 '생명수'를 찾기 위해 서천의 끝까지 여행하는 바리의 여정을 압권의 몽환적 문체로 묘사하면서 생명수의 존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과연 바리가 구한 생명수는 어떤 것이었을까? 생명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황석영의 대답은 역시나 단호하다! "숨은그림찾기입니다.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 이는 독자들께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p301, 작가인터뷰中>
작가는 생명수의 존재여부와 생명수의 실체에 대한 답을 독자가 찾아야 할 과제임을 피력하면서 생명수에 대한 폭넓은 해석, 그리고 이 세상의 어둡고 암울함에 대한 책임의식을 독자들에게 은근히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 황석영은 '생명수' 자체보다는 '생명수를 알아보고 찾고자 하는 마음'이 본질이며, 바로 그것은 빈부와 국가와 인종과 체제에 초월하여 진행되어야 할 인류의 숙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표준어와 함경도사투리, 현실세계와 몽환적 꿈과 환상의 세계, 한 여인의 기구한 청춘과 20세기말 현대사의 어두운 사건들이 교차되고 반복되는 이 대서사시는 작가 황석영의 상상력과 고집, 작가의식과 역량을 여실히 보여주는 걸작이라 할 만 하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YES24의 '우리 시대 대표작가' 투표의 황석영 쏠림 현상은 바로 이러한 그의 괴물스러움을 입증하고픈 문학매니아들의 마우스 클릭이 모아진 결과가 아닐까?
★ 네이버 블로그 라이브 선정 : 2007년 8월 11일 Written by David |
|
좋은 책을 미리 만나게 되서 좋았습니다. 받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바리라는 이름을 가진 북한소녀가 가난과 굶주림속에서 가족을 하나씩 잃어가고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런던에 정착해서 또 가정을 이루지만 거기서도 아기를 잃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삶이 계속됨을 느끼게 해주네요. 바리데기설화는 딸중 막내라서 나름 국어시간에 배우면서 감정이입을 많이 했던 얘기라 이 이야기를 를 어떻게 북한소녀에게 적용해서 이야기를 풀어갔을까.. 궁금했는데, 일곱딸중 막내로 엄마에게 버림받을뻔한 아이에게 할머니가 바리란 이름을 지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설화와 책이 만나네요. 책 인터뷰기사를 같이 보내주셔서 읽어보니 사실주의문학이라고 하던데, 읽다보면 정말 현실감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바리의 샤먼같은 능력때문에 사람의 과거와 아픔을 읽고 간 사람들의 영혼들과 대화를 주고받는것을 통해 신화 바리데기이야기와 절묘하게 얽혀들어가네요. 처음 책을 읽다보면 정말 21세기 현실인가 아닌가 싶더군요. 북한의 가난과 굶주림, 같은 민족이고 국가인데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현실같지 않은 현실이 크게 와 닿습니다. 북한에 퍼주기만 한다고 뭐라하시는 분들이 많은 요즘, 우리는 쌀이 남아돈다는데 퍼주면 좀 어떻길래 그냥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북한의 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통일을 위해서도 좀더 북한의 현실에 대해 사실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함북 청진이나 무산이 배경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거기가 어디인가 지리적인 감각도 없더군요. 김일성의 죽음, 9.11테러, 런던테러등의 사건등을 통해 현재의 현실임을 알게 되지만 그 속에 나타난 인간들의 모습은 잘 알지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들이어서 현실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정말 현실같지 않더군요.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이고 사람들이겠지만요. 인터뷰기사를 보니 요즘 흐름에 맞춰 좀 짧은 장편으로 쓰셨다는데, 문장의 속도감이나 몰입력이 뛰어나서 정말 짧게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손님'이나 '심청'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다른 책까지 손을 뻗게 될것 같 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이 문장이 주제가 아닌가 싶네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
|
황석영의 근작『바리데기』를 읽었다. 동명의 신화를 모티브로 삼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1990~2000년대 지구상의 가장 참담한 음지 몇 군데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참담한 현장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다부진 정신을 따라감으로써 어떤 희망이나 구원의 가능성을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바리데기』가 담는 것은 주인공 바리의 출생부터 스물한 살, 성년에 이를 때까지의 삶이다. 열두 장章으로 이뤄진 소설의 전반부는 이북 청진 태생으로 날 적부터 버려진 아이였던 바리가 탈북한 뒤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밀항하기까지의 삶을 따라가고, 후반부의 여섯 장은 런던에 정착한 바리가 이주노동자로, 무슬림의 아내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내는 모습을 따라간다.
바리의 인생이 뒤틀리는 지점은 20세기 후반 이래 세계사에 드리워진 그늘진 풍경 몇 가지와 겹친다. 북한의 대기근과 집단탈북사태, 중국에서의 인신매매, 불법체류자문제, 세계가 경악한 2001년의 테러, 뒤이은 전쟁이 가중시킨 인종차별과 특히 무슬림에 대한 집단적 냉대... 바리가 이런 을씨년스러운 현실에 때로 뒤섞이고 때로는 맞서면서 빚어내는 긴장은, 언뜻 바리라는 소설 속의 사적인 개인을 한 시대의 무게를 통째로 감당하는 공적 인물로 비춰지게 만든다. 10대 이후의 10년을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끝간 데를 두루 경험하는데 바친 바리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생명수를 찾는 설화의 주인공 바리공주가 그랬듯, 무의식의 세계를 빌려 자신에게 해를 가했던 악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에 대한 증오를 눅임으로써 스스로의 영혼을 정화한다. 여기에 남편을 살해한 타이인 정부情婦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에밀리 부인의 이야기가 포개지는 걸 보면, 결국 저자가 현실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어놓는 처방전이란 화해와 용서, 이를 통한 인간성의 회복(또는 영혼의 구원)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저자가 그동안 견지해 온 역사와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를, 민중의 근원적 건강성에 대한 그의 믿음을 현실세계가 감당해 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설득력을 가진다 할 것이다. 유년기 이후 정규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음에도 표나게 드러나는 바리의 이타심은 열외로 치더라도(사실 그녀는 작가의 배려로 나면서부터 일종의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 조건부 온정을 곧잘 내비치는 박소룡과 루의 캐릭터가 소설 안에서조차 매우 예외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결국 현실에 대한 압도적인 비관이다. 소설에서 바리나 에밀리가 품는 용서의 방향은 모두 일방적인 것이다. 산 자가 망자에, 자유인이 구속자에, 가진 자가 덜 가진 이에게 ‘베푸는’ 종류의 용서를, 어떤 행위든 상응하는 대가와 비용을 요구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사회는 받아들일 형편이 못된다. 또 하나, 저자는 바리와 그의 동료들이 모여 사는 런던의 차이나타운과 램버스 구역 언저리를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 소수자들의 어떤 연대의 표지 정도로 해석한다면 모르되 그 이상, 리버럴리즘의 어떤 소이상형으로 제시할려고 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렵다. 파리코뮌이나 80년 광주의 경우에서처럼, 역사 속에서 그런 것은 특정한 상황과 소규모 집단이라는 시공간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했던 현상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저자는 미국의 대對 아프가니스탄 ․ 이라크 전쟁을 부끄러운 전쟁이라 규정하면서도 이에 대항하는 무슬림 청년들의 연대와 지원 움직임을 ‘철없는 짓’으로 규정한다. 선의로 해석하면 이러한 태도를 일종의 균형감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매한 스탠스에서 외치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는 울림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90년대 초반 이래, 발 디딜 곳이 물러진 민중문학권의 평론가들이 애타게 부르짖던 ‘국가의 우상, 시장의 우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모호함에서 ‘21세기의 생명수’를 말하는 황석영의 그림자를 엿보는 것은 내 상상력이 너무 열린 탓일까?
그러나, 이런저런 트집에도 불구하고, 『바리데기』는 탈북의 현실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의 혼란상에 꼼꼼한 우려의 눈길을 건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구토』는 죽어가는 어린아이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구토』가 존재함으로써 어린아이의 아사餓死는 추문이 된다. 이 책이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의 죽음이 동물의 죽음보다 중요할 이유가 없다.”
지난세기의 중턱에 남겨진 사르트르와 장 리카도의 짧은 논쟁은 문학의 현실적 한계에 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남아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 깨달음을 남긴다.『바리데기』를 읽음으로써 휴전선 이북의 기아飢餓와 탈북문제는, 소수 차별과 전쟁과 테러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추문으로 또렷이 각인된다. 그것이 이 책이, 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다. 소설에서 작가는 종종 시할아버지 압둘의 조언을 빌려 바리의 삶에 관여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한 말은, 비록 진부하게 들릴지라도, 타국에서 태어나 전쟁과 분단의 고난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무르익은 어떤 정신의 표지로서 기록해둘 만하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 낸 지옥이다. 우리가 약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저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본문 286, 289)
|
|
‘바리데기’는 무속의 본풀이에서 실연되던 작품으로, 인간이었던 바리가 병든 아버지를 위해 저승에서 약을 구해와 소생시킨다는 내용의 서사무가이다. 간절하게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여섯명의 딸을 낳고, 마지막으로 낳은 자식이 아들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일곱 번째 태어난 자식 역시 딸이었고, 실망한 부모에 의해서 세상에 버려지는 존재가 바로 바리데기이다. ‘바리’는 ‘버리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데기’는 ‘부엌데기’ 등의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천한 존재들에게 함부로 붙이던 접미사였다.
그렇게 버려져 자라던 바리는 아버지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구하기 위해 긴 시간동안 세상을 떠돌며 고생을 하다가 저승에까지 이른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서 장례를 치르던 아버지를 그 약으로 구출하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아버지로의 나라를 이어받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는 ‘무조신(巫祖神)’으로 좌정하는 인물이 바로 바리데기이다. 과거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되었다는 ‘바리데기 신화’는 죽은 이의 넋을 달래는 ‘오구굿’이나 ‘진오귀’에서 무당에 의해 연창된다.
나는 10여년 전에 광주 망월동 구 묘역에서 진행되었던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서, 밤늦도록 만신들이 구연하는 ‘바리데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만신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이 너무도 익숙해서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바로 ‘오구굿’에서 연창되는 ‘바리데기 본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이러한 서사무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주인공 ‘바리’는 탈북민 소녀로 등장한다. 이 작품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되었고, 당시 열독하면서 스크랩을 해서 모아놓기도 했었다.
무당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바뀐 세상에서 무당임을 내세울 수 없었던 할머니의 능력은 그대로 바리에게로 계승된다. 즉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고, 죽은 자의 넋을 보고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등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바리는 일곱째 딸로 태어나 세상에 버려졌다가, 집에서 키우던 개 ‘흰둥이’에게 구출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북한의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삼촌의 탈북으로 인해 가족들은 고초를 당하고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그 와중에 할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던 바리는 아버지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을 잃고, 혼자 숨어 지내는 생활을 하게 된다.
밀항선을 타고 중국을 벗어나 유럽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이어지고, 유렵에서의 또 다른 차별의 대상인 이슬람교도인 남편을 만나 가족을 이루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서사무가인 바리데기를 차용하여, 탈북이라는 주제는 물론 유럽에 실재하는 동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다양한 사건들이 작가의 필치로 생생하게 다루어지고 있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바리데기 - 황석영
바리데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아,,울 아들 옛이야기책에서 봤구나. 배경은 북녘.
북쪽의 처참함이 보이는 순간이다.
남쪽으로 갔다는 소문만 돈 외삼촌으로 인해 바리네도 뿔뿔이 흩어지고 중국으로 넘어간다.
휴...책을 읽는 동안 어찌 그리 한숨이 많이 나오는지.
중국에서 발 맛사지 기술을 배우다 샹이라는 여인의 가족을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런덜을 향하는데. 살아보겠다고 큰 빚을 지고 더 잘사는 나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의 비애에서 또 한숨.
영국에서. 발맛사지 기술로 인해 일자리도 얻고 조금씩 잘 사는 것같이 보인다.
괴로운 일은 사람을 키우는걸까.
옛이야기 속에서는 마침내 찾아낸 생명수가 죽은 아비의 살과 피와 숨을 살리지만..그리하여 |
|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 꼬맹이가 있었다. 딸이 많은 집에 일곱번째로 태어나 버림받았던 "바리".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 소녀가 있었다. 내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과도 같이 하나둘씩 가족을 잃었던 "바리".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 홀리샤 순이는 아직 여기에 있다고 하던 "바리".
바리가 살아왔던 세월은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혹했다. 절망의 순간이 다가오면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바리는 냉철한 인간이 아니였다. 현실에서만 울지 않았을 뿐 꿈속에서는 많은 눈물을 흘려왔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왔다. 아버지, 할머니, 현이와 칠성이와 함게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생활했지만 결국에는 모두를 잃는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보통 아이였다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하나에 슬퍼하며 좌절했을지 모르지만 바리는 희망을 안고 내일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중국에서 영국이란 먼 이국땅까지 건너가게 되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곳의 생활또한 바리에게는 녹록치 않다. 인생의 그래프는 직선이 아니다. 그 누구도 예견할수 없는 기학적인 선을 그리며 고불거리듯이 영국에서의 바리의 생활이 그러했다. 인종과 인종을 넘은 종교와 종교를 넘은 결혼을 하게 되고, 사랑하는 아이를 잃게 된다. 지금까지 많은 힘든 일을 겪어왔지만, 아이를 잃었던 때만큼은 가장 많이 아파했다. 끝까지 놓지 못했던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바리는 평온을 찾아간다.
가끔 바리 꿈에 나타난 할머니는 예전에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바리공주 이야기를 해준다. 생명수를 찾아가는 바리공주. 생명수를 가져오는 바리공주. 바리는 생각한다. 생명수는 그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키며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할머니 생명수가 뭐지? 우리가 마시는 물과 같지. 그게 뭐야? 시간이 지나면 생명수를 보는 눈을 갖데 된다. 라고 말하는 그녀의 할머니.
책을 읽는 내내 생명수를 보는 눈을 갖게 된다와 그 생명수는 무엇일까 생각해왔다. 우리가 마시는 것이 그 물인데, 생명수라고 하는 까치는 나보다 먼저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가 늘 마시는 공기, 물, 햇빛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소중하고 간절한 무엇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나의 생명수이다. 나를 살리는 공기 나를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물, 나의 활력을 주는 빛인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받고 있으면서 나는 이것에 대해서 소중하게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간혹, 창문이 없는 방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밖에 나왔을때 잠깐 몇초동안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느낄때나 잠깐 느꼈을 뿐이다. 사소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우리를 바꾸고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그 중에서도 평소에는 인식하기 힘든 "희망" 이라는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살게 해주는 이유를 부여하게 한다. 또한 바리와같이 어려운 상황, 좌절하는 순간에 "희망"은 그 순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시간이 오래걸리든 짧게 걸리든 언젠가는 좌절이라는 어둠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이 작은 마음가짐으로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갈 수 있다. 바리데기를 읽는 내내 눈시울을 젖혔다. 울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닌 바리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되어 북한에서 중국을 건너고 가족을 잃고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잃고 하는 과정에서 슬픔이란 감정은 겉이 조금은 얇아져 작은 일에도 가슴이 울렸고 희망이라는 감정은 겉이 조금은 더 두꺼워져 보다 큰 좌절에도 꿋꿋해진 나를 발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