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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학세계, 미노타우로스 - 나더쉬 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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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미노타우로스>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 나더쉬 피테르가 쓴 소설에서 표현하는 것이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라는 것이었다. 나의 지식의 부재 내지는 부족에서 온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감성과 논리는 무척이나 새로운 것이었다. 속된 말로 그의 글을 읽으며 이어질 이야기를 내다볼 여지가 없이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 속 환경 속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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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미노타우로스>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 나더쉬 피테르가 쓴 소설에서 표현하는 것이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라는 것이었다. 나의 지식의 부재 내지는 부족에서 온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작품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감성과 논리는 무척이나 새로운 것이었다. 속된 말로 그의 글을 읽으며 이어질 이야기를 내다볼 여지가 없이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 속 환경 속에서 그만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는 직접 겪고 이러한 성숙과정을 필히 반성해야지만 스토리에 녹여낼 수 있어 보이는 내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였기 때문이고, 이후 작가로서 일정 필력을 쌓으면서 써낸 작품에서는 작품의 내적요소보다 창조적 작가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필법으로 작품을 써나갔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유년기 시절의 성장환경이 그의 초기 작품에서 작가로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쓴 작품까지 반영된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이러한 요인도 그의 선 굵은 개성적 필체가 헝가리 문학에서 입지를 굳히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나더쉬 피테르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를 작품 속에서 자신이 창조한 개성적 환경 속에, 보편적인 정서가 아닌 자신이 느끼는 삶의 역동성, 시대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정서를 투영함으로써 자기 고유의 문학적 정체성을 쌓아올렸음을 느낀다. 조국 헝가리의 면면, 불투명한 미래, 음울한 시대분위기 등이 수면 위에서 부상하는 듯, 잠기는 듯 표현되려 함으로써 그의 문학은 좀 더 자기 고유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고 동시에 완숙해 지는 과정을 거치며 그가 현대의 대표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작가의 신선한 실험적 글쓰기 등으로 새로운 감성과 논리로 다가오는 그의 초중기 작품을 접할 수 있어 헝가리 문학과의 첫 만남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덜 소개가 되었던 동구권 문학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된 듯 하다.

i*****2 2015.05.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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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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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알게 모르게 글 주변을 휘적대며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길을 찾기 어려운 미궁임을 깨닫게 되는 책, 이라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설명이 될까? 표지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미로에서 어쩌다 길을 찾게 되었을 때 맞닥뜨리는 것은 미궁의 정중앙, 바로 괴물 미노타우로스이다. 글쎄,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100에 90은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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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알게 모르게 글 주변을 휘적대며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길을 찾기 어려운 미궁임을 깨닫게 되는 책, 이라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설명이 될까?

표지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미로에서 어쩌다 길을 찾게 되었을 때 맞닥뜨리는 것은 미궁의 정중앙, 바로 괴물 미노타우로스이다. 글쎄,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100에 90은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분출하는 그리스신화 속 존재인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처럼 이 책의 작품성과 수준도 그에 필적한다는 데에 500원 걸겠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정보도 없었으므로─ 장편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받고나서는 묵직한 두께와 무게에 내용이 참으로 실제 무게만큼이나 무게감 있는 장편일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계속 아무 생각 없이 첫 번째 소설인 '성경'을 읽어나가다가 내용이 어떻게 더 발전될지, 감정이입하며 사랑해 주기엔 거리감이 생기는 이 기묘한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궁금증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 막이 내렸다. 어흑. 멋진 단편을 읽을 때면 늘 그렇듯 멋진 소설을 읽어 기쁜 한편으로는 아쉬운 데서 끝내야 하는 슬픔도 느꼈다. 그러나 두 번째 단편도 재미있고 멋졌으며 막이 내릴 무렵에는 나는 또 아쉬움을 느꼈다. 전체 페이지의 2/3에 달하는 분량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읽는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쉬웠으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뒤의 1/3 분량의 단편들은 '미노타우로스' 편을 비롯해 몇몇 편을 빼고는 너무 난해해서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늘 접하는 방식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어지러웠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렇게 복잡한 속에 시적인 느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미노타우로스' 단편을 가리켜 저자가 본인이 완성한 첫 번째 시라고 했다는데, 해당 단편뿐만 아니라 몇몇 이야기들이 모두 그러했다. 다만, 이 시라는 게 요즘 우리나라 현대시가 떠오를 만큼 예측 가능한 심상이나 이야기의 주제를 이리저리 꼬아놓는 식이라 내용을 파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후반부에선 정말 진땀 빼며 읽었다는 걸 실토해야겠다.


틈날 때마다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고는 있지만, 부끄럽게도 헝가리 문학은 단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책만이 아니라 작가들의 이름조차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이름이 너무나 생소해서 듣고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헝가리는 20세기,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던 동유럽권 국가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우리나라에 그 대치 상황으로 인한 특유의 작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만큼, 공산주의를 직접 겪어낸 헝가리 작품에서도 특유의 색채가 묻어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나더쉬 피테르의 이 작품, 전중반부의 작품은 모두 그 사회를 살고 있는 아동에서 청소년에 이르는 시기의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 당시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였던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내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러하기 때문인지 전중반부에서 나는 이야기들이 20세기의 이야기들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치 세계대전이 갓 끝났거나 혹은 그 이전 시기인 것 같은 빛 바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마도 이야기 중간중간 계속해서 '혁명'이라던가 '동무' '동지' '유대인' 같은 단어들이 등장해서인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신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등장하면 그제야 다시 의식적으로 '그렇게 오래된 시기는 아니'라고 내 머리를 세뇌해야 했다. 그리고 그 묘한 분위기가 공산주의 체제하의 헝가리가 지녔던 독특한 느낌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건 시디케 당신 거예요." 엄마가 말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다른 오렌지를 쥐어주었다. 내가 벌써 오렌지를 까기 시작하는 동안 시디케는 눈을 크게 뜨고 손바닥에 놓여 있는 과일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엄마와 오렌지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이게 정말 자기 거냐고 묻는 것처럼.

()

"그래요. 가져가요, 시디케. 이런 건 아직 본 적도 없을 테니." 엄마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오렌지 껍질을 벗기다가 멈췄다. 잘게 찢어낸 껍질 위에 오렌지를 내려놓았다. "이런 건 아직 본 적도 없을 테니." 엄마의 말을 따라 했다.

()

친절한 목소리로 늘어놓은 엄마의 거짓말은 내 입안에서 쓰디쓰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 거짓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건 아직 본 적도 없을 테니."라던, 거들먹거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거리감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갑자기 내가 시디케를 대할 때 어떻게 우월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당신은 하녀가 아니라 오늘부터 가족이에요!"라고 아빠가 소녀에게 편견 없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빠를 거인처럼 보았다. 아마도 항상 멀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p. 70)



표면적으로 공산주의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유혹적인 문구에 해외 수많은 지식인들이 혹해서 목숨을 던지고 자신의 생을 불살랐다.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것을 걸만큼 매력적인 캐치프레이즈이긴 하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소설 속에는 여기에 몸을 던진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문구에서 외치는 평등을 실생활에서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모두가 평등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도 없었고,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자기도 모르게 업신여기게 되는 모습도 엿보인다. 결국 아이들의 눈에 의해 모두의 평등은 허상인 것으로 그 가면이 벗겨진다. 그들이 이룩한 것은 그저 신분 상승의 통로가 차단된, 지도층은 아닌 국민들이 다 같이 못사는, 더 과격한 자본주의의 세상일 뿐.



"더 크게! 부르세요, 요제프, 반복해요, 더 크게! 소년아, 하고 더 크게 말해요, 사랑스러운 소년아, 더 크게, 들려요?" "소년아! 사랑스러운 소년아!" "하느님 아버지, 요제프! 더 크게!" "아들아, 사랑스러운 소년아!" "하느님 맙소사, 요제프! 요제프, 조용히! 듣기 싫어요!" "아들아, 사랑스러운 아들아!" "요제프, 하지 말아요! 아! 요제프, 왜 고문하는 거죠?" "소년아! 사랑스러운 아들아! 마리어! 그에게 말해도 소용없어요, 마리어! 마리어, 편지에서 부르는 것처럼 시작했소, 마리어. 그는 듣고 싶어하지 않아!(…)" (p. 495)


"일어나라, 아들아! 듣고 있니, 아들아? 일어나! 겁내지 마라, 요제프란다, 네 아빠. 엄마가 털 뽑은 닭을 데쳐서 보냈어, 하지만 아직 살아 있단다. 네가 좋아하는 식으로. 네 엄마가, 마리어가 보냈어, 듣고 있니?"

(…)

그의 발 앞에 몸뚱이가 일어선다. 기름지게 반짝이는 텁텁한 냄새의 달콤한 껍질 속에서. 갈비뼈의 넓은 아치가 가슴을 내렸다 올린다. 쭉 뻗은 뿔, 떨리는 황소의 고환들. 빛으로 윤기 나는 몸 전체가 일어선다. 운명 지어진 대로. 요제프는 출발할 수도 있다. 황소 뿔이 닭을 쫓아간다. (p.505)



표제이기도 한 문제작 '미노타우로스'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 단편에서 '20년째 살아 있지' 않은 요제프(요셉)는 '곤히 잠든' 마리어(마리아)와 빙빙 도는 대화를 나눈다. 성경에서 요제프는 예수의 탄생에 관련해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래서 이 단편의 요제프는 이미 죽은 인물로, 마리어가 꾸는 꿈 속에 등장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을 '버린' 자전거 타는 아들도, 나무 위의 새들도 요제프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꿈 속에서 이뤄지고, 요제프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과 대화 사이사이 어떤 벨 소리가 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7층의 화냥년'이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누른 벨일 것이나, 다른 생각도 든다. 요제프를 저승에서 소환하기 위한 벨은 아닐까? 요제프는 자기가 벨 소리를 들었는지 확신이 없어 망설이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소리를 확실히 듣고도 응하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미궁 속에 삐걱이는 철문으로 가둬 둔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한 아들. 그에게 칼을 휘둘러야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또는, 그에게 주어진 그 할 일을 하도록 지시하는 벨은 아닐까? 그래서 그가 벨 소리를 듣고도 빨리 움직이라는 마리어의 재촉에 '그럴 수 없소'라고 대답했을지도.


미궁 속 아들은 그들이 탄생시키지 않았던 원치 않던 자식이다. 마리어는 미노타우로스인 아들을 죽이라고도 하고 죽이지 말라고도 하며, 요제프에게 운명에 저항하라고도 하고 왜 저항하냐고 따지기도 한다. 원치 않던 자식이지만 그래도 자식이기에 칼을 들어 올렸다 내려 놓았다 하는 요제프의 망설임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요제프가 벨 소리를 듣고도 응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마리어가 혼잣말로 요제프의 손에 묻은 피가 닭의 피인지 사람의 피인지 맛보고 싶다더니 곧 사람의 피라고 단정짓는다. 장면이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요제프는 끓는 물에 털이 뽑힌 닭에 제 뿔을 힘차게 찔러넣은 황소의 모습을 한 아들에게 칼을,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에 찔러넣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확정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그의 행위는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표현된다. 따라서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찔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묻은 피가 이 생각에 힘을 실어 준다. 그러나 '찌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는 '찔렀으나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끄트머리에서 마리어가 한 말이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천장에 그림자가 보여요. 그림자가. 요제프! 무슨 일이죠? 대답해요. 황소 뿔을. 갈 수 있어요. 환한 곳에 나타나나요? 그림자가 보여요. 천장에. 요제프, 들려요? 무슨 일이에요? 하느님! 요제프, 왜 계속하지 않는 거죠?" 


그나마 이 '미노타우로스' 편은 후반부의 다른 소설들보다는 이미지가 명확히 새겨지는 편이다. 그런 한편으로 성경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예수를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꽤나 충격적이어서 매력적인 소설이다. 전중반부의 소설들이 쉽게 읽히고 공산주의 체제 하의 헝가리의 분위기를 그려내긴 했으나, 확실히 '미노타우로스'가 이 책의 표제가 될 만한 소설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저자가 한, 본인의 '첫 번째 시'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l*******c 2015.05.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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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 나더쉬 피테르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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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쉬 피테르의 소설 <미노타우로스>를 읽어보았다.오랜만에 읽어보는 깊이있는 소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처음에는 이 한권이 하나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나'라고 지칭하는 자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배경도 계속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워낙 책이나 영화를 사전정보없이 보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이 책이 나더쉬 피테르의 중장편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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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쉬 피테르의 소설 <미노타우로스>를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깊이있는 소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이 한권이 하나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나'라고 지칭하는 자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배경도 계속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워낙 책이나 영화를 사전정보없이 보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이 책이 나더쉬 피테르의 중장편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나더쉬 피테르는 헝가리 사람으로 사회주의 시대의 헝가리의 모습을 소설속에서도 그려낸다.



 



그가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1965년, 그 당시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고들한다. 사회주의 이상대로라면 모두가 평등 삶을 살아야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굶주리는 자들은 배급에 줄을 서야했으며, 관리들의 집에는 보통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음식들이 있었다.


누구는 다른자의 집에서 일을해서 벌어먹어야 했지만, 또 누구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현실적 괴리를 다룬 탓에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은 헝가리의 검열에 한동안 빛을 보지 못하기도 했다.






 




나더쉬 피테르가 1965년 문예지 <새로운 글쓰기>에 처녀작을 실으면서 첫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때 썼던 소설들을 모아 만든것이 이 <미노타우로스(1997)>다. 1997년 묶여졌던 책이 2015년인 지금에서야 우리나라에 출간된 것이다.


덕분에 이 책 한권에서는 나더쉬 피테르의 초기 글부터 그의 생각과 문체의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사실 처음 '성경'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그 심도있음에 놀랐고, 그러면서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청소년기를 겪고있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정말 그 나이또래의 아이가 일기를 쓴것처럼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의 중반부분을 지나면서는 완전히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우리가 변역본을 읽다보면 조금은 아쉬운 부분들이 있을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옮긴이의 글이 있는데 그곳에서 그 아쉬운 부분을 역자가 다시 한번 이야기해준다.



나더쉬 피테르의 작품은 모국어 독자에게도 쉽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라고 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책도 난 쉽다고 말하지 않겠다.

충분히 심도있고 생각을 해야만 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 역시 책을 읽는 재미를 준다.

각기 다른 단편과 중장편이지만 그 안에서 반복되는 상징을 찾는 것은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뒤를 보니 나더쉬 피테르의 중편소설 [세렐렘]이 눈에 띠었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나면 이 작가의 책을 다시는 읽지 않으리라 생각될것 같지만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고야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읽을 책은 [세렐렘]으로 정하며 책을 덮고야 말았다.

내 머리가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책은 다시 읽고싶은 매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더쉬 피테르가 여러나라에서 사랑을 받은 작각가 된 것 아닐까?





r****6 2015.05.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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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문장을 통해 미궁속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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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문장을 통해 미궁속에 빠지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다. 인간의 몸을 갖고 있지만 얼굴은 황소 모양을 하고 있는데 때때로 상반신이 인간을, 하반신이 소의 형상을 띄고 있다. 그의 출생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관계가 있다. 그가 바다의 왕 포세이돈에게 자신이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그 증거로 하얀 황소를 증거로 보내 달라고 했다. 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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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문장을 통해 미궁속에 빠지다.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다. 인간의 몸을 갖고 있지만 얼굴은 황소 모양을 하고 있는데 때때로 상반신이 인간을, 하반신이 소의 형상을 띄고 있다. 그의 출생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관계가 있다. 그가 바다의 왕 포세이돈에게 자신이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그 증거로 하얀 황소를 증거로 보내 달라고 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 말대로 하얀 황소를 보냈지만 그가 기도를 하면서 포세이돈에게 바치기로 한 황소를 제물로 내놓지 않고, 다른 황소를 내놓자 포세이돈이 화가 나서 미노스의 부인인 파시파에를 이용해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게 복수한다.


포세이돈의 주술에 걸려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 명장이 만들어 놓은 가짜 암소에 들어가 하얀 암소를 유혹했고 그 결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자마자 미노스는 자신의 수치라며 폭력적인 그를 미궁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관한 이야기 인데 헝가리 작가인 나더쉬 피테르가 신화와 기독교를 주제로 단어와 문장의 반복을 통해 마치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처럼 어디서 부터 길을 찾아 떠나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다단하게 쓰여진 작품이다.


<미노타우로스>는 전작 <세렐렘>(2014,아르테)에서 출간된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집이며 총 15편의 중편과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성경'을 시작으로 '가족사진, 자줏빛 황혼 속에서'에 이르기까지 그가 작품을 쓴 순서대로 담았기에 중편과 단편을 보면서 그가 천착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문제에 대해 깊이 엿볼 수 있는 작품집이다.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많은 국가들의 책을 만났지만 동유럽 국가 중에서 헝가리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역자의 후기에도 쓰여져 있지만 지금까지 손에 꼽힐 정도로 헝가리 문학이 소개되지 않았던 이유는 20세기 중반 공산주의 체제하에 놓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는 이념분쟁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들과 교류가 이루어 지지 않았기에 전 세계적으로 다층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세계문학 역시 그의 작품이 언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몇몇의 헝가리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지만 지금 출간된 많은 작품들이 중역이 대부분이고, 중역이 아닌 직접 작품을 가지고 번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헝가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고 세계적으로도 호평받고 있다. 수전 손택은 그를 이르러 우리 시대의 토마스 만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20세기 가장 핫한 작가 이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작품 역시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대거 쓰여져 있으며 그의 단어와 문장으로 쓰여진 상황의 반복을 통해 작가 스스로 미궁을 만들어 더 이상 상황이 전개되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반복할 만큼 명확한 이야기가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 이번 작품의 특징이다.


가면 갈수록 명확한 길 보다는 모호한 길 속에서 허우적 거리게 되지만 그의 글 속에서 신화를 차용해 또다른 이야기가 탄생되고 소멸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화의 이야기를 다시 재해석하여 나더쉬 피테르만의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15편의 중편과 단편만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깊이 알 수 없지만 그의 다채로운 문학세계를 깊이 엿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계속해서 그의 작품이 다양하게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끔 반쯤 다시 잠이 들면 어떤 소리가 금세 나를 잠 밖으로 밀어냈다. 꿈이 없는 잠의 부드러운 층으로 다시 가라않아도, 세찬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점점 더 의식 아래 어딘가에서 두려움이 앞으로 뛰쳐나오려 했다. 비가, 시디케가, 그리고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날 잡아갈까 봐, 키스를 못해서, 아빠의 책 하나를 잊어버리고 정원에 놓고와서, 무서웠다. 하지만 이 소소한 두려움들은 내 속에 하나씩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잔디 위의 수증기처럼, 회색으로 무한정 뭉게뭉게 일어났다. - p. 67

l****9 2015.05.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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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노타우로스
"[서평] 미노타우로스" 내용보기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인 나더쉬 피테르.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 저자입니다. 국내에는 세렐렘 이후 두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라 하는데, 관심이 좀 없었던 책이라 그의 작품은 이제 접하게 됩니다. 헝가리 작가로는 어릴적 읽은 몰나르 페렌츠의 팔 거리의 아이들 이후 두번째쯤 되는 것 같습니다. 헝가리 작가인 임레 케르테스라는 분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나더쉬
"[서평] 미노타우로스" 내용보기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인 나더쉬 피테르.
개인적으로 처음 접하는 저자입니다.
국내에는 세렐렘 이후 두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라 하는데, 관심이 좀 없었던 책이라 그의 작품은 이제

접하게 됩니다.

헝가리 작가로는 어릴적 읽은 몰나르 페렌츠의 팔 거리의 아이들 이후 두번째쯤 되는 것 같습니다.
헝가리 작가인 임레 케르테스라는 분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나더쉬 피테르 또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된다고 하니 유럽에서는 헝가리 문학이 어느 정도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헝가리 문학이 국내에 덜 알려진 이유는 예전 공산국가라는 폐쇄성과 문화적인 배경 등의 이유로

우리나라에는 덜 알려지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이제 전작인 세렐렘 출간을 계기로 나더쉬 피테르의 작품도 연이어 나오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기억의 책과 평행이야기' 출간을 앞두고 저자의 이름과 저변을 넓히려는 목적으로 출간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작가가 20~30대에 쓴 15편의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자신의 청소년기에 겪었던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고 자신의 소설의 방향에 대해 여러 갈래로 시도한 흔적이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문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책에 수록된 몇 편을 읽다보면 소설의 집필 방향을 찾아가기 위해

이렇게도 써 보고 저렇게도 써 본 습작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도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노타우르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단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미노타우르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소의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로  미노스

왕에 의해 미로로 만들어진 미궁안에 갖혀있는 괴물로 나오는 인물인데, 저자는 마리어와 요제프의

아들로 반신반인의 예수가 아닌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르스를 등장시켜 문학계에 신성모독이라는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만 저자 자신은 이 작품을 '자신이 완성한 첫번째 시'라고 평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 특별한 애정이 있어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기독교적인 배경이나 헝가리어를 모르는 저로써는 마리어와 요셉이 우리가 아는

성모 마리아와 그의 남편 요셉이란 걸 알 수가 없어 이 내용이 신성모독에 해당되는지도 책 뒷 표지의 글이나 이 책을 소개한 글을 접하게 되면서 알게되었다.

그저 이 소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장의 구조만이 미노타우르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미로처럼 '문장의 미로'를 헤메는 듯한 기분이 드는 정도로써 저자 자신의 문학의 방향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엿 볼 수 있는 작품정도로 생각되며, 글을 쓰기 위해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에 대해 아주 잘 표현된 작품이란 생각은 든다.

 

그 외의 작품들 또한 주인공의 심리나 주변 환경 등 소설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방향을 잡아가는 습작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다른 책에서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는다,

그 느낌은 소설을 쓰려면 어떻게 써야하냐라는 고민에 빠져들게 하는데, 이전에는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는데, 글을 쓰고 싶게하는 욕심이 들게 되면서, 

나도 소설을 한번 써 볼까하는 망상에 빠져들게 하는 책이다.

 

망상일뿐이다.

하지만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글을 쓰고 싶게하는 의지를 살려주니까요.

혼자만의 느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