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은 내가 죽은 배우자, 연인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배우자가 죽은지 10년도 지났는데 바짓단에서 그의 발견한 그의 머리카락을 유품 보관함에 고이 넣으면서. 나는 사랑이 종말에 가까워지는 시대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술하고 있는 노인이다. 젊은이들은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랑, 헌혈, 자살, 애국심, 희생 같은 단어들 가운데에서 사랑의 특질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감각적인 경험이라기 보다 탐구의 대상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사랑의 종말이 머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의 날을 만들고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사례를 기록하기 급급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늙은 노인인 나는 배우자와의 사별 이후 다만 그와의 기억을 추억할 따름이다. 그 추억의 진위 여부도 사실 불분명하다. 배우자인 윤미의 기억과 나의 기억에는 차이가 있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가 떠올리는 기억의 조각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회상하는 사소한 기억 하나 하나 모두 사랑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윤미가 죽은 이후, 나는 다시금 과거에 마주한 적 있는 귀신과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가만히 곁을 내어준다. 윤미의 상실 이후에도 벚꽃은 피고, 빨래를 개고, 귀신의 서늘함에 온기를 조금은 나누어 주는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계절은 또다시 돌아온다.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 속에도 사랑은 결코 종말하지 않고, 사랑했던 이의 기억 속에 깃드는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정말로 사랑했던 시간이 영원불멸히 이어지는 거 아닐까.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로 남아. 한줄평: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일까 * * * 언젠가부터 나는 골목의 소소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변화는 조금씩 소소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한꺼번에 새로 등장했다. 그때마다 나는 몸살을 앓았다. 13쪽 윤미는 주인공이 자살하는 감독판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게 더 사랑 같다고 말했다. 아무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기 때문에. 그게 더 사랑 같다는 윤미의 그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 혼자 그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두 버전 모두를. 16쪽 윤미가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동성혼이 합법화되었다. 윤미와 내가 사회로부터 부부로 인정받은 것은 우리의 오십여 년 중에 고작 일 년이었다. 윤미와 지하상가에 갇혀 뛰어다녔던 밤부터 윤미의 유품 몇 가지를 크라프트 정리함에 넣어두던 순간까지, 우리를 지켜온 것이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줄곧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과도 같은 피로 속에 살았다. 피로가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을 한 채 표면을 차지한 때도 많았다. 우리는 우리의 피로를 우리의 사랑만큼 사랑했다. 21쪽 나는 그가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계속 나타나기 위해 나를 찾아온다고 느꼈다. 33쪽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욕망하지 않기로 했다. 윤미와 나는 그것들을 함께 포기했다. 포기한 욕망들이 포기한 이후에도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요일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듯 우리는 버린 것들을 또 버리기 위해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돌봤다. 그게 더 사랑 같다던, 열일곱의 윤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윤미는 기억도 못 하던 말. 37쪽 *그 외 단편에 대한 짧은 감상들(특히 좋았던 작품들은 볼드체 표시함) - 관종들: 읽으면서 묘하게 불쾌했던 작품. 정해의 입장에서 읽고 있지만 정해 바깥 사람의 시선대로 정해를 읽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정해 바깥의 입장에서 보았던 경험이 더 가깝기 때문이려나…. 정해에게도 정해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일은 별로 없다고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읽는 사람 몫인지도 모르겠다. - 사과: 사람과 사람이 교차하고 흩어지는 것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 여백과 채워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삶이란 그저 오고 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불과하지 않은지…. 상당히 좋았던 작품. 커피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애리는 종종 생각했다. 111쪽 - 상어: 상당히 재미있게 잘 읽혔던 작품. 아내의 전남편의 사고 소식을 따라 가는 과정에서 싹 트는 의구심을 따라 갈등이 전개된다. 상어는 크고 사납지만 무섭고 생명을 파멸시킬 수 있는 존재다. 위험하지만 동경해서 쫓고 있는 것은 결국 그나 나나 마찬가지 아닌가? - 일일야성: 중년의 시기가 도래하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 시기의 위기를 타개해 나가는 과정을 맛깔난 문체로 잘 그려냈다. 도대체 어떻게 결혼한 거야, 이 부부는? 한 사람은 과거로, 한 사람은 미래로. 그 흐름이 기이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묘하게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불륜 관계에 있던 남자의 죽음, 이별을 고했던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 삶이 엄청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민수의 어머니를 일부 원인으로 해서 헤어졌으나,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 생긴 보험금을 이유로 다시 민수에게 연락을 해야 하고 돈이 필요한 것은 여태껏 빚을 묵인해 주었던 원철의 죽음 때문이고, 그 내용증명을 보내는 것은 원철의 부인. 인생은 돌고 도는 것. 사랑했을 뿐인데 무슨 용서를 구하냐고 말하기엔 인과의 맛이 씁쓸하다. #연말리뷰 |
|
현대문학 수상 소설집~ 재밌을 것 같습니다ㅎㅎ 제 디지털 책장에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이 포함되어 뿌듯하고 설레네요. 어느 날 밤에 숏츠 보거나 그냥 핸드폰만 보지 말고 책 읽고 싶을때 간식 같은 거 두고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2026 현대문학상으로 선정된 소설을 사드렸습니다! 주말에 한적히 독서를 하시며 스트레스도 해소하시고, 재밌게 읽으시는 모습을 보니 정말 뿌듯합니다. 예스 24 덕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사드릴 수 있어 더 행복합니다. |
|
임솔아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 “... 윤미가 죽음을 앞두고 호스피스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동성혼이 합법화되었다. 윤미와 내가 사회로부터 부부로 인정받은 것은 우리의 오십여 년 중에 고작 일 년이었다. 윤미와 지하상가에 갇혀 뛰어다녔던 밤부터 윤미의 유품 몇 가지를 크라프트 정리함에 넣어두던 순간까지, 우리를 지켜온 것이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줄곧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과도 같은 피로 속에 살았다. 피로가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을 한 채 표면을 차지한 때도 많았다. 우리는 우리의 피로를 우리의 사랑만큼 사랑했다.” (p.21) 올해의 수상작이다. 사랑 이야기인데 살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여인의 평생에 걸친 사랑 이야기의 어떤 정수를 뽑아 놓았는데, 인간들 사이의 관계 맺기에 대한 아련한 정석을 본 것도 같다. 과감했던 시작으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러 마무리가 되었는데 단순한 허무로 다가오지 않아서 좋았다. 독자들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니까... “... 우리의 하루하루는 대체로 무던했고 평화로웠다. 격렬하게 싸움을 한 적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한 적도, 둘 사이에 이견을 부추길 만한 갈등이 일어난 적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무언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욕망하지 않기로 했다. 윤미와 나는 그것들을 함께 포기했다. 포기한 욕망들이 포기한 이후에도 계속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요일에 맞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듯 우리는 버린 것들을 또 버리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를 돌봤다...” (p.37) 임솔아 「금빛 베드 러너」 검사 결과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판정받은 딸 지윤이 있고, 폐암 4기라는 진단을 받은 엄마가 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여행을 왔고, 엄마는 기침을 하고, 딸은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찾기 위해 헤맨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무덤까지 가져갈 필요 또한 없다. 그 어느쪽으로의 선택이 무색한 그런 관계가 있다. 김혜진 「관종들」 정해와 남편 영기,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다. 자신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 특히나 아이들의 표면에서 읽히는 어떤 징후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좁혀진 거리만큼이나 그것을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떨어뜨리려는 반발력이 존재한다. 그 사이사이에 촘촘한 사정들이 있다. 박솔뫼 「사과」 “... 선호를 만나 이 집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어도 좋을 만한 정신적 육체적 친밀함이 있었지만 애리의 마음속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는 잠이라는 갈 곳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졌고 선호는 점점 애리가 길에 서서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일을 하는 애리와 그곳을 거의 매일 찾는 선호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고 정리하고 말기에는 문장의 사용이 독특하다. 잠을 공간으로 여기는 애리의 어떤 감수성이 소설 속 문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끊어져야 할 때 혹은 끊어져야 할 데에서 끊어지지 않고 무심히 이어지는... 서장원 「상어」 정연은 상록과 이혼을 하였고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한 번의 폭력이었다. 나는 그후 정연과 만나 결혼하였고, 정연은 어느 날 성록의 모친으로부터 성록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나는 정연과 함께 그 바다로 향하고, 그 여정이 매끄럽지 않다. 정연은 정말 어째서 나를 선택한 것이고, 나와 정연의 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상어는 물밑 어딘가에 있어요. 하지만 수면 위에선 도저히 상어에 대해 짐작할 수 없어요.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크고 위험한지, 또 얼마나 배가 고픈지. 하지만 서퍼들은 다들 상어를 기대하죠. 한 번쯤 보고 싶어 해요.” (p.155) 그러니까 나와 정연은 자신들만의 상어를 만나지 않고 살아낼 수 있을까... 이미상 「일일야성一日野性」 “지문으로 지저분한 빌라 유리문을 미려 운주는 오늘의 일일야성一日野性이 기다려졌다. 몇 년 사이에 유행한 그 말은 하루 동안 야성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주로 캠핑을 떠날 때 사용했다. 아니면 갑자기 월차를 쓰고 출근하지 않을 때라거나...” (p.175) 운주와 남편 경수는 자신들의 청년기를 복각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한다. ‘경수는 미래로 갔고 운주는 과거로 갔다.’ 경수는 갑작스럽게 페미니스트가 되어 자조 모임을 갖고, 운주는 중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지배하였던 선숙을 찾아간다. 일종의 ‘일일야성一日野性’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임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정혜는 얼마전 거래처 직원인 원철을 교통 사고로 잃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서 깊은 슬픔을 내색할 수 없는 그런 사이였다. 원철의 남겨진 아내는 거래 장부를 토대로 정혜에게 미수금의 수납을 요구한다. 정혜는 한때 연인 사이였던 민수가 어머님의 죽음 이후 받은 보험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혜는 민수와 사귀던 시절에 몇 차례 보았던 어머님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민수와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민수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원철의 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그런... 임솔아, 김혜진, 박솔뫼, 서장원, 이미상, 임현 / 2026 제7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현대문학 / 251쪽 / 2025 |
|
제71회인 2026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는 수상작인 임솔아 작가의 <사랑보다 조금 더 짙은 얼굴> 외 수상후보작인 5인의 작가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올해 현대문학상은 예심이 없이 모든 작품들에 대해 5인의 심사위원이 추천한 소설들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했다고 한다. 요즘의 트렌드를 6인의 작가의 소설만으로 가름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개성이 다른 여러 작가의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