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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게으르고 나른한 삶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다. 그것은 나태한 것이 아닌, 때때로 삶에 탄력을 주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이 책은, 제목부터 작가님의 문장까지 때론 권태롭고 나른하지만, 소설의 주제와 캐릭터의 성격과 잘 버무려져 정말 ‘게으른 삶’을 표방하고 있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고, 이 책을 전부 개워냈다고 생각한 페이지를 들어 감상을 풀어내고 싶다. 자주 꾸는 악몽이었다. 누군가와 거리를 걷다가 예쁜 가게를 본다. 누군가는 선물을 사주겠다고 가게로 들어가자고 한다. 컵을 파는 가게다. 가게의 선반에는 컵들이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못 고르겠어. 난 컵을 원하지 않아. 꿈에서 나는 손잡이를 잡고 언제까지나 그 가게에서 나가지 못한다. p. 88~89 이 장면은 주인공인 진이가 꾼 꿈 속의 장면이다. 누군가가 진이에게 컵을 사준다 하고, 함께 컵을 파는 가게로 들어간다. 모양도 제각각, 색깔도 제각각이지만, 그 안의 컵들은 진이의 마음에 썩- 차지 않는다. 결국 정하지 못하자, 컵을 사주겠다는 사람도, 가게의 점원들도 성을 내거나 당황해 한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사람은 살면서 무수한 선택과 시련 앞에 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비단, 취업 뿐 아니라, 사소하거나 디테일한 삶 속의 무수한 선택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선택은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지만, 이따금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그저 삶을 표류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선택하지 않았다고 하여, 혹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였다고 하여, 그 사람이 곧 비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혹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어떠한 ‘선택’이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과 더불어 나는, 취업이라는 현실적 선택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이라던가, 다른 사람의 시선에 준거한 어떠한 선택점(취업)에 다달아야 한다는 것이 씁쓸했다. 취직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프리랜서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출퇴근이 몸에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인 스스로에게 휴식과 나태함을 줘야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 생각한다. 나는 취업이라는 것이 비단 ‘먹고 사는 문제’, 삶에서 중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어떠한 선택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름의 기준과 선택은 오롯이 그 사람의 것이고, 그 선택은 오로지 그 사람의 몫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 . . 예전 운동권 시절에는 젊은이들의 내면을 풀어내는 소설들이 속속들이 등장했고, 도시화가 되자 도리어 시골이나 농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들을 풀어내는 소설들이 등장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찾게 되듯, 높다란 빌딩이 즐비한 도시보다는 몰디브가 신혼여행지 1위로 꼽히게 되듯, 삭막함 속에서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로, 취업과 현실에 쩌든 우리들 사이에 한 줌 단비 같은 소설이 아닐까 한다. 힘들고 삭막함 속에, 풋풋한 사랑과, 이따금의 권태로움, 때론 게으르라고 말해주는 이 소설이야 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소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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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게으른 순간들. 나는 항상 그런 게으른 순간들을 사랑한다. 빨래를 널어놓고 한숨 돌리는 시간, 카페에 늘어져 차를 마시는 시간, 햇빛 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시간,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시간, 그런 순간들로 삶이 채워지기를 언제나 바라왔다.”
‘게으른 시간 속에서 더 많이 사랑하기를 빈다’는 작가의 말에 이끌려 설레는 마음으로 이종산 작가의 <게으른 삶>을 읽기 시작했다. 낯선 타국, 골목에서 길 헤매는 시간을 즐기는 나는, 작가 역시 ‘진짜’ 이야기는 한발 물러나 있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소설을 다 읽고도 한참이나 평을 쓸 수 없었다. 너구리를 닮은 겁 많은 여자아이와 참치 통조림을 가지고 다니는 담백한 남자아이의 연애 이야기라는데 이견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조하지도 않아서다. 둘의 관계는 친구와 연인 사이 언저리에서 모호하게 이어지며, 그것을 연애라 하더라도 그 온도 자체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아무렇지 않게 성관계와 기술을 얘기하는 시대에 이토록 느리고도 흐릿한 ‘연애’ 혹은 ‘썸’이라니.
너구리(나)는 오랫동안 참치를 짝사랑하면서도, 마음의 진로를 정하지 않는다. 마음에 대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굳이 끝장을 보지 않아도, ‘DHA가 풍부한 물고기가 좋다’는 너구리의 말에 ‘좋아하는 동물이 얼굴이 빨개지는 너구리로 바뀌었다’ 말할 줄 아는 참치가 곁에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행사 마지막 날인 치킨집을 애써 찾아 나섰다가도 안 보이면 다른 곳을 찾아가는 식의 사소한 일상은 언제나 함께 해왔고, 일상을 채우는 수많은 대화가 있으니 그것으로도 만족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누군가를 향하기 시작한 ‘마음’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관성을 지니며, 결국 결정적 순간, 폭발하게 된다는 데 있다. 막막해져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너구리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에 휩싸이고 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상처 받기 두려워 마음에 솔직해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따라서 누구에게도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너구리는 알고 있다.
애써 억눌러 왔던 마음은 그래서 점점 고개를 내민다. 케르베로스에게 잘해주는 참치에게 내뱉는 말은 실은 너구리에게 잘해주는 참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것처럼. “잘해주지 마. 넌 주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가면 케르베로스는 기다릴 텐데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내가 틀려?” 기다리지 않겠다는 너구리의 말 역시, 사실은 끊임없이 떠나는 참치를 내내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기다림의 끝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참치는 여러 번 훌쩍 떠났다가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당분간은 괜찮아. 돌아오면 그렇게 말했다. 참치는 오래 버티고 있었다.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침대 밑에 숨겨두고. 머리맡에 있는 여권을 들고 도망치듯 떠나지 않고. 깊은 밤과 이른 아침 사이의 시간에 전화를 걸어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래서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참치에게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을까.
저 우산을 타고 참치가 내려온다면 물어봐야지. 그리고 내가 돌아와야 할 이유가 됐던 적이 있다고 대답하면 다음에도 그래달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기껏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해놓고는 이런 생각. 한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p97)
참치의 집에서 머무는 날에게 옹졸한 질투심을 느끼면서 더욱 커진 너구리의 짝사랑은 이제 종착지를 향해 달려간다. 희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린 영수처럼, 자신의 마음에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보기로 한다.
“나도 내기를 해볼까? 여기서 뛰어내리면 참치를 정말 그만 기다리는 거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난 더 이상 참치가 겁쟁이라고 무시하는 너구리가 아니고 날 한 번도 잡은 적 없는 그애를 기다리는 것도 그만두겠다. 고백하고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나도 끝내겠다. 나는 난간을 잡고 발을 올렸다.”(p100)
실패가 두려워 회피하고, 귀찮아하고,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또한, 마음에 일종의 부담감과 책임감을 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남녀 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내 마음과 내 자존심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방식의 연애가 얼마나 위태롭고 허약한지를 실패한 지난 연애를 통해 배웠다. 그래서 함께 떠나자는 참치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남기를 택한 너구리의 결정이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장 너구리다운 결정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산한 새벽 거리를 떠돌다 참치를 생각한 너구리가 더 이상 막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평화로운 시간 가운데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또렷한 순간을 자주 마주하기를. 어떻게 끝맺음을 내야할지 몰라, 시작처럼 끝도 작가의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이 세계 혹은 진실은 언제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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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돼지국밥에 부산 소주를 먹자. 부산에 가면. 숙소 침대에 하루 종일 늘어져 있자. (……) 부산에 가면. 헌책방 거리의 카페에서 손을 잡고 옛날 음악을 듣자. “손은 왜 잡아.” “하얀 설탕을 먹을게.” “꼭 챙겨 먹어.” “하루에 한 번씩 물에 타서 마실게.” (17-18쪽)
이 이야기는 너구리가 매실청을 담그기 위해 흑설탕을 사러 나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의 능청스러운 ‘밀당’과 ‘입담’에 속수무책이 된다. 절절한 사랑 고백도, 격렬한 스킨십도 없는 이런 문단에 입술이 마르고 온몸이 짜릿하다. 이런 식의 색깔 놀이, 말놀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말을 거는 화장실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소주를 시킨다. 가게 주인이 묻는다. “빨간 거 줄까, 파란 거 줄까?”(39쪽)
끝없이 막막해지기만 하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막막하다’는 소설 속 주인공, 너구리가 까딱하면 생각하는 말이다. 그늘에 앉아 장기를 두는 노인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볼 때, 케로베로스 옆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울 때, 3년 만에 만난 친구 형에게 할 말을 고를 때, 멀어지는 길고양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생각할 때, 겨우 이 생을 살아냈는데 귀신이 돼버린 귀신을 떠올릴 때, 너구리는 막막해진다. 나도 막막해진다. 이런 글을 읽고 있으면, 뭐야, 나만 막막한 게 아니었던 거야? 세상 모든 청춘들은 이렇게 막막한 거야? 이런 우리는 누가 구원해주는 거야? 이 막막함은 언제 해소되는 거야 그럼 기성세대가, 혹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한경쟁사회가, 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손을 잡고 ‘컵을 파는 가게’에 들어선다. 애초에 컵을 사고 싶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드는 컵이 없더라도, 꼭 하나를 고르란다. 컵을 사야 네 ‘막막함’ 따위를 잊을 수 있다니까! 잊는다고요? 해소되는 게 아니라, 잊는다고요? 기성세대가, 혹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한경쟁사회가, 자본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막막해하는 청춘들 덕에-잔인한 발언이지만-어쩌면 이 세상은 좀 더 인간다워지는 법이다. 잘 적응하고, 곧 순응하는 빠른 개미들 대신, 방황하고, 반항하는 느린 베짱이들을, 난 더 사랑한다. 그들 덕분에 우린 한숨 돌리고, 소설은 빛난다. 너구리에겐 막막한 순간들이 있고, 그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과 손을 잡으며 이어진 전선처럼 삶에 불을 밝힌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
설탕 봉지를 기울이자 흰 가루가 한줄기로 가느다랗게 쏟아졌다. 밀가루면 좋았을걸. 밀가루라면 가루가 눈처럼 날렸을 것이다. 봉지를 천천히 비우고 하나를 더 뜯었다. 두 번째는 입구를 크게 벌려서 탈탈 털었다. 설탕이 떨어지는 것을 본 원숭이들이 날뛰었다. 야유가 함성으로 바뀌었다. 나는 명예를 회복하고 다리를 떠났다.(22쪽)
‘나는 명예를 회복하고 다리를 떠났다’란 문장이 너무나 능청스러워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설탕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빛나는 순간, 너구리도, 참치도, 영수도, 영식이도 모두 함께 빛난다. 밀가루였다면 눈이 날리는 낭만적이고 그림 같은 순간이었겠지만, 설탕이기에, 짜릿하게 달콤하고 새하얗게 반짝이는 청춘들을 함성 지르게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여덟 개의 작은 조각보로 이루어진 하나의 커다란 조각보’라는 표현을 썼다. 여러 빛나는 순간들의 닮은 점을 찾아 이어 붙이면, 그들이 빛났던 이유를 알게 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너구리에게 묻고 싶다. 자, 어떠니, 네 순간들이 모여 한 장의 조각보가 되었어. 네가 막막했던 이유를 알겠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빛났던 이유를 알겠니. 내 것도 없고, 내 자리도 없다는 생각, 길을 걷다 문득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예감 같은 것에 휩싸일 때, 이런 조각보의 존재는 위안이 된다. 내 삶도 어쩌면, 다른 세상의 누군가가 빛나는 조각보로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이 그 자체로 빛나는’ 나만의 조각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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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몸에 힘을 풀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물에 뜬다는 이론 따위는 전혀 상관이 없다.
튜브가 없으면 계곡물에 첨벙 빠지지도 못하는 게 나라서,
나는 수영을 할 줄 아는 애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내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된 후 열 달 동안이나 물 속에서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는 이제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아야겠다.
나는 헤엄치는 법을 잊은 사람이라고 말해야겠다.
그러면 수영을 할 줄 아는 애들과 내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고, 그들 속에 섞이는 것 같으니까. 이종산의 장편소설 <게으른 삶>은 헤엄치는 법을 잊은 여자애가 어떤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이야기이고, 그 중에 한 명을, 헤엄칠 줄 아는 어느 남자애를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여자애 너구리, 남자애 참치,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애는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나는 너를 원한다고 털어놓지 않는 연애다. 그저 만나고, 얼굴을 마주하고, 단단하게 굳은 몸끼리 부딪히고, 그러다 가늘은 손가락을 잡는 연애다. "난 동물보다 물고기가 좋아." 나는 대답을 하고 참치의 얼굴을 슬쩍 봤다. 여전히 담백한 얼굴이었다. "DHA가 풍부한?" "DHA가 풍부한 물고기가 좋지." 버스가 왔다. 나는 얼른 버스에 올라타 일 인용 좌석에 앉았다. 참치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방금 좋아하는 동물이 바뀌었어." "무엇으로?" "얼굴이 빨개지는 너구리로." "왜?" "얼굴이 빨개지는 동물은 흔치 않잖아." 버스 라디오에서 자정을 알렸다. -44쪽 소설을 쓰는 습작생으로서 이 소설이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기름기 없이 담백한 대사, 무표정한듯 하지만 생각에 빠진 인물들. 나는 문장을 쓸 때 항상 꾸며서 쓰려고 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서 이렇게 단문을 잘 쓰는 작가들이 부럽다. 단문으로 소설을 잘 쓴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두 번 읽을 필요가 없이 한 번에 이해되는 쉬운 문장이 깊은 메시지를 담기는 어려우니까. 내가 부러운 부분은 그런 지점이다. 저 짧은 대화에서 너구리는 겁이 많지만 제가 원할 땐 가끔 대범해지기도 한다는 점, 참치는 그런 너구리가 싫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참치가 너구리를, 너구리가 참치를 얼마나
아끼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알 수 있다는 지점 말이다.
작가는 '담백한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다'라고 하지만, 이건 어떻게 보면 담백하지만은 않다.
남자애가 항상 떠날 생각만 한다고 믿는 여자애, 여자애가 가끔 없어진다고 믿는 남자애.
어떻게든 풀어갈 수 없이 막혀 있는 부분들. 어쩌면 이건 아주 슬픈 연애소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슬펐던 부분은,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부분은 다른 이야기이다.
바로 너구리가 꾸는 악몽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컵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서 누군가와 직원에게
끊임없이 컵을 고르라는 권유 아닌 권유를 받지만 나는, 나는 정작 컵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나는 컵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해도, 그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그 가게에서 나갈 수도 있었다고, 꿈에서 깨서야 생각하는 이야기 말이다.
뚜렷한 목표나 원하는 바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취업 준비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꿈이고,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어서 더 슬펐다. 나는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어서 다행이고,
앞으로도 이런 꿈은 제발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연애는커녕 짝사랑도 해 본적 없는 나도 이 소설이 공감되고 좋았던 건 바로 이런 이야기 덕분이다.
돌아가기 싫어. 아래에 내 자리는 없다. 아래에만? 내 자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뿐인데. 졸려. -68쪽
이 소설에서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내내 대화가 따옴표("")를 가지고 쓰이다가 마지막 챕터인 '토막들', 즉 참치와 너구리가 단 둘이서 여행을 가는 장면의 대화에서는 따옴표가 쓰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옴표가 없는 대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소설을 두 번째 읽을 때에야 발견한 것인데, 그 점을 염두에 두고 '토막들'을 다시 읽으니 어쩐지 그 챕터 전체가 환상성을 띄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구리의 꿈 속 대화에서도 따옴표가 없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과연 그 챕터의 환상성에 무게가 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밝은 햇빛 속에서 모든 것이 선명했다. 반짝거리는 먼지 사이사이로 분홍빛 알갱이가 떠다녔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멈춘 듯이. 곧 멈출 듯이. 너도 그렇게 보여? 아주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 같아. 나는 무언가가 깨질까봐 조심스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뭔가 평화로워. 참치가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평화롭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이 몹시 조용해졌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 있다. 여기에. -144쪽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서로를 좋아하는 참치와 너구리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장면은 누구나의 이별처럼 아련하고 애틋하다. 수많은 데이트 코스를 놔두고 굳이 '해양박물관'에 가는 점까지! 결국 무엇도 결정되지 못한 채로 소설은 끝나지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이 결말이 이 소설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너구리에게, 그리고 참치에게 무언가 결정되어버린다면 왠지 그들은 더 이상 너구리와 참치가 되지 못할 것 같다. 뭐든 불확실하고, 그래서 항상 불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게 너구리와 참치다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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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연애는 마카롱이었다. 예쁜 겉모습에 반해 한 입 물면 그 칼로리에 한 번, 기대에 못 미치는 맛에 또 한 번 좌절한다. 그러면서도 안 먹으면 꼭 찾게 된다. 『게으른 삶』에 나오는 연애는 마카롱같이 예쁘고 초코 케이크처럼 달달한 것이 아니다. 약간 심심하다 싶은 크레이프 케이크다. 담백하고 밍밍한, 벗겨먹고 잘라먹는 그 케이크 말이다. 민숭민숭한 그들의 연애가 딱 그 모양이었다. 너구리와 참치의 연애는 참 이상했다. 친구에서는 벗어났지만 연인이 되기에는 물렁거리는 그런 단계였다. 단단해질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단단해지고 싶지 않은 관계였다. ‘사랑과 우정사이’가 생각나는 이들은 서로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다. 형태가 굳는 순간 너구리는 기다리거나 변해야했고 참치는 머물러야만 했다. 둘은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흐물거릴 수밖에 없다. 사실 둘의 사이는 물고기와 어장주인 같다. 서로의 어장에 다른 물고기가 들어 올까봐 겁이 나면서도 자신이 낚이는 것도 무서워한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고, 이미 헤어졌던 연인이 다시 시작하고, 오랜 연인이 소원해지는 것은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 너구리와 참치다. 『게으른 삶』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왜 내 연애가 이렇게 외로운지, 우리는 언제까지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 차이가 좁혀질 수는 없는 건지. 여러 물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실마리 하나가 떠올랐다. 너구리는 떠날 생각만 하는 참치에게 말한다. “말해. 이번에는 언제 떠날거야?” “여름까지는 여기 있을 거야.” “여름이 지나면?” “나도 몰라.” “이번에는 안 기다려.” “기다린 적이 있었어?” 참치의 눈이 사나워져 있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기다린 적이 있었냐고? 내가 너를 알게 된 후로 나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나에게 말을 걸기를, 내 손을 잡기를, 나를 간절히 원하기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나에게 영원히 돌아오기를. 연인이어도 불안한데 이 사람은 온전한 내 사람이 아니다. 너구리는 그 상황에 지쳐있었고 참치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그에 참치는 오히려 너구리를 나무란다. 비록 그녀는 상처를 입었지만 난 그 속에서 희망을 봤다. 너구리는 참치를 사랑하기에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가 없는 생활에 적응하고, 그가 있는 생활을 기대한다. 참치 또한 너구리를 사랑하기에 훌쩍 떠났다가도 결국 그녀의 곁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이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관계 확립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너구리와 참치는 잠깐이나마 하나가 되는 평화로움을 맛봤다. 후에 참치가 호주로 떠나고 너구리 홀로 남는다고 해도 둘은 온전함을 기억할 것이다. 『게으른 삶』의 끝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둘의 관계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독자의 몫이다. 서평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지만 『게으른 삶』은 연애소설이자 청춘소설이다. 너구리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무기력과 먹먹함은 참치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현재 안주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온다. 그녀가 일상에 지쳐있다는 것은 책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걷는 것을 잊어버리고 숨 쉬는 법을 까먹는다. 그때마다 어딘가에 숨어들어 걷는 법,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운다. 이 행동들은 작은 휴식에 가깝고 휴식이 끝나면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부분에서 독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답답한 마음에 크게 숨을 몰아쉬고, 출근 전 우뚝 멈춰 서 다가올 하루를 막막해 하지 않는가. 연애소설이라고 굳게 믿었던 내 생각을 바꾼 것은 너구리의 악몽이었다. 너구리의 ‘쉬고 싶다’는 말에 엄마가 그만 놀고 더 나은 곳으로 가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한 부분이다. 그 말을 듣고 악몽을 꾸는데 꿈 내용이 참 기가 막히다. 벽 전체가 컵으로 채워진 가게 안에서 주인공은 컵을 고르라는 주변의 성화에 조용히 대답한다. ‘나는 컵을 원하지 않아.’ 하지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나가지도, 컵을 고르지도 못한 채 그녀는 컵을 원하지 않아, 그 말만 하고 있다. 컵이 무엇일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내게는 스펙이고 미래, 직장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는 달리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청춘소설이라고 두 문단에 걸쳐 말을 했지만 난 『게으른 삶』을 연애소설로 기억하고 싶다. 『게으른 삶』은 몇 년 째 한 남자만 사랑하는 친구의 고민 상담이다. 그 고민에 공감하고 걱정하고 충고를 하다 보니 제 문제까지 닿게 된다. 연애로 골치가 아픈 사람들에게 장기 투숙 중인 두 마리 물고기의 이야기, 『게으른 삶』을 추천한다. 더불어 크레이프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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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너구리는 언제나 기다린다. 참치가 어느 순간 휙 떠나버리든,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듯, 언제나 있는 그곳에서 담배를 피며, 그리고 술을 마시며, 그리고 과자를 먹으며, 병원에서 업무를 보며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자의는 아닐지도 모른다. 움직이고 싶지만 너구리는 움직일 수 없다. ‘고양이 침대’에서 모이는 친구들과의 자리가 그녀의 최대의 움직임이라면 움직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너구리는 언제나 참치를 기다린다. 마치 깊은 곳에 뿌리박은 나무처럼. 돌아가기 싫어. 아래에 내 자리는 없다. 아래에만? 내 자리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뿐인데. 졸려. 스스로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나무, 너구리에게 갈 곳은 없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무기력하다. 그리고 마음껏 느슨하고 게으르다. 그렇기에 그녀는 오히려 참치를 인내하며 기다린다. 아니 기다린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둔다. 마치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듯, 너구리는 그렇게 참치를 느낀다. 바람 참치는 바람과도 같다. 늘 언제나 꼬박꼬박 너구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어느 날엔가는 아무 말 없이 너구리의 곁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너구리를 사랑하지만, 너구리에게 얽매이지 않는다. 아니 얽매이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너구리가 이를 거부한다. 마성을 가진듯해 보이는 로망의 향수를 풍기는 참치의 모습은 너구리뿐만이 아닌 뭇 여성들의 찬사를 받을 만하다. 어려운 경기에 오토바이 가게에서 일을 하며, 참치는 늘 생각한다. 세상은 넘어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나는 펭귄이 제일 좋아." "펭귄이 뭐가 좋은데?" "잘 넘어져서 좋아. 그렇게 많이 넘어지는 동물은 펭귄밖에 없잖아."
바람과도 같은 참치에게 너구리는 한없이 기다리는 나무와도 같다. 그리고 물이자 공기이다. 언제나 있기에 있는 줄 모르는 존재. 참치에게 있어 너구리의 존재는 동네에 돌아다니는 검은 개, 케르베로스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케르베로스에게 그러지 마." "뭘?" "잘해주지 마. 넌 주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가면 케르베로스는 기다릴텐데 너는 돌아오지 않을 거잖아. 내가 틀려?“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렇기에 책임지지 않는 존재. 이미 마음을 주어버린 케르베로스는 한없이 참치를 기다리겠지만, 참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에. 돌아오지 않는다. 마음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케르베로스에게 너구리는 아마도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아니겠는가. 바람과도 같이 흩어지며 살아가는 참치의 삶에서 자신이 받는 아픔과 상처가 이토록 처량하게 드러난 것이 아닐까. 나무, 바람을 사랑하다. ㅡ 청춘, 그리고 연애소설 이종산의 『게으른 삶』은 그렇게 머물러 있는 존재인 너구리와, 흘러가는 존재인 참치의 사랑이야기이자 그들의 청춘의 한 단면이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덮고 난 순간 밀려온 것은 이 엇갈리는 모순의 사랑이 행간 가득 묻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비극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청춘이라면, 그리고 연애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이야기. 너와 나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다. 또한 활자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고심이 느껴질 정도로 문장 하나하나가 치밀하다. 이토록 조밀한 언어로 세밀하게 쓰인 문장을 쉽게 보기란 쉽지 않다. 또한, 어느새 ‘나’라는 1인칭과 ‘그’, 혹은 ‘그녀’라는 3인칭의 대명사로만 이루어지던 현대소설에서 보기 드물고 또 간만에 닉네이밍으로 이루어진 작명은 괜스레 귀엽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솔직히 평가하자면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분량도 얇다. 등장하는 인물도 별로 없다. 그런데 왜 쉽게 읽히지 않을까. 그는 서사의 성격 때문이었으리라 본다. 이것은 분명 취향의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정지향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이종산의 소설 역시 뚜렷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의 단면, 그리고 일기장 한 쪽, 찢어진 메모 한 장을 읽는 듯, 그들의 이야기는 파편화되고 그렇기에 소소하며 일상적이다. 그렇기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보통 한 편의 장편을 읽을 때, 10쪽을 넘어가면 굵직한 서사의 줄기가 나오기 마련이건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는 현대소설이 가는 또 하나의 길일지도 모른다. 박솔뫼와 김사과가 이루어놓은 서사 해체의 세계까지 있는 마당에, 이 정도는 사실 귀엽고 아기자기하다고까지 느껴진다. 마냥 아련한 소설은 아닌듯한데, 내게는 마지막까지 아련함만이 남는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만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나무, 바람을 사랑하다’. 그들의 사랑은 과연 끝까지 어떻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