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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
| 이 책은 죽어가는 한 나치의 참회를 들어야만 했던 한 유대인의 불안과 고민, 참상을 담은 실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를 당신에게 질문하며,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 학자들의 포럼으로 2부를 장식한다. 이 책의 질문은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과 고민을 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삶에 투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죽어가면서 남긴 한 나치의 반성을 용서해 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질문이었지만, 질문 그대로를 쓰기엔 약간 핀트가 안 맞기 때문에 좀 더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당사자(피해자, 가해자)도 아니며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미시적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참회를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역사적인 사실로 각인되어야 할 것을 개인의 용서로 축소하는 식으로 하나의 논의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중에 아시아에서 저질러졌던 제노사이드와 반인륜적인 범죄를 참회하는 몇몇의 일본인들의 반성을 국가적인 것 또는 역사적인 것으로 피해국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끝냄’이다.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라면 용서 받을 일을 저지르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워서는 안 된다’고 이 책에 쓴 홍세화씨의 글은 명확하고도 날카롭게 이를 지적한다. 용서는 결코 남발될 수 있는 성향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조차도 용서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기만행위의 결과로 나타났지, 위대한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사형은커녕 사면된 전두환,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말짱한 사회 지도층, 부유층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용서한 자들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난 이렇게 질문을 바꾸겠다. ‘용서할 수 없는 짓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 처벌, 보상, 복원이라는 조건을 미래 지향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하겠다. 처벌은 단순한 복수 차원이 아닌 훼손된 정의와 역사적 진실을 되돌리기 위한 당연한 권리라고 본다. 처벌에 의한 가해자의 죄의식과 참회는 그렇게 역사적인 것이 되고, 은폐와 망각에 지워질 수 없는 의미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며, 미래의 참상을 방지하려는 예방적 보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정상성을 복원하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죠. 바로 독일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비록 개인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수치심만큼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저지른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승객이 전차에 올라탔다가 내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는지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일인 모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5p 독일인을 이스라엘의 유대인으로 바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에 대해 똑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누구보다도 그 고통을 잘 안다는 것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나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게다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위와 같은 고민은 사치스럽다. 피해의 역사를 뒤집어 쓰고서 가해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으로 뻔뻔하게 포장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다. 인간의 비인간성을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실례를 그들이 보여주기에 곤혹스럽다. 이 책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나치와 유대인의 무덤에 사이 좋게 피는 해바라기를 소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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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표지의 동명 소설이 있어 한동안 많이 헷갈렸던 책이다. 하지만 겉표지를 자세히 보면 "정의와 동정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앞부분엔 문제 제기, 뒷부분엔 세계 저명한 인사들의 답변이 들어가 있다. 앞부분의 이야기도 집중력이 높지만 뒷부분 각각의 답변을 읽는 것도 재미있다. 아니 재미라고 표현하면 안될 것 같다. 기존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깨부수는 것 같은 전기가 올랐으니까. 마치 공부하듯,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어갔다.
작가는 시몬 비젠탈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주위의 일가 친척, 친구들을 모두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은 집단수용소 생존자이다. 이후 미국전쟁범죄조사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유대역사 기록 센터를 만들어 나치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도록 노력했다.
<해바라기>는 저자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한 사건을 주제로 한다. 집단 수용소에서 하루하루 버텨가던 중 일어난 일. 죽음이 목전에 닿아 있고 매일 동료, 친구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비젠탈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어느날 그는 다른 곳으로 차출되어 일을 가게 되고 그곳은 병원이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비젠탈은 참을 수가 없다. 그 중에는 자신이 예전에 알던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사람을, 아는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돼지나 오리, 마차는 수레 따위의 행렬처럼 보는 것이다. 그 와중에 비젠탈은 한 무리의 해바라기를 보게 된다. 무덤가에 심겨진 해바라기. 죽어서도 바깥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있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살아있으면서도 물건 취급받는 자신들을 생각하며 비젠탈은 병원에 도착한다.
그러다 갑자기 간호사에게 끌려간다. 내 의지가 아니다. 나는 감히 거역할 수 없다. 그렇게 간 어느 병실에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듯 붕대가 감긴 누군가가 누워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느닷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더니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끝까지 들어달란다. 어느 유대인들에게 지은 죄. 그것을 담고 죽으면 평안하지 못할 것 같으니 비젠탈에게 대신 용서를 해달라는 것이다. 비젠탈은 몇 번이나 그곳을 나오고 싶었지만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해주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비젠탈은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152p
앞부분, 비젠탈의 이야기는 옛 영화를 보듯 그 시절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나마 편안히 읽을 수 있다. 비젠탈의 사유를 쫓아가며 너무나 고통받았을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전 SS대원이었던 카를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비젠탈의 고민과 친구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는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물음.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뒷부분의 심포지엄을 읽기 전까진 "용서하지 않겠다"였다. 하지만 이 다양한 인사들의 다양한 답변, 다양한 관점, 다양한 종요에서의 "용서"의 의미를 읽고 나니 이젠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답변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양한 답변을 읽는 나는 그저 이 모든 다양한 생각들에 놀라워하며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뒷부분의 심포지엄이 없었다면 이 <해바라기>는 반쪽짜리 책이 되었을 것 같다. 그만큼 이 심포지엄은 더욱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모르겠다. 나에게 묻는다면 나 역시 내가 살아온 역사, 경험, 가치관에 따라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그들이 내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용서"의 의미가 가장 큰 충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안타까웠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범 처리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대처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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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과 나치, 한국과 일본...
개인적용서와 인류적용서, 용서라는 단어하나로 책이 쓰여질수있다니 놀라웠다
아니, 사실 나치시대에 유대인이 당했던 그 상상못할 고통과 아픔은 단어하나로 얘기할수 없겠지만..
.....사실어제 나는 바보같이 지인사칭메신져 피싱을 당했다. 총금액 10,400,000원
똑똑하고, 눈치있어보임에 스스로도 주위에서도 다들 그리 생각했었는데
너무도 어이없게, 내스스로 돈을 입금을 해버렸다.
친구도 아닌, 친언니 아이디로 들어온 사람에게 한꺼번에 큰돈을 부탁한건 아니었지만
쪼개쪼개 주고 나니, 천만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전화해볼 겨를도없었다. 과거 대화내용을 충분히 읽어보고 나에게 대화를 건거였기때문에
전화를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회사생활도 하고, 나름 자기계발로 2외국어 공부하도, 책도 읽고 있기 때문에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수도 이해도 안된다..
밤새 답답해서 몇번이나 잠을 깨었는지도 모른다.
결혼한지 갖 1년되고, 내년엔 이사도해야하는데.... 모아놓은돈도 아닌 마이너스계좌돈을
탈탈 털어 입금을 했던것이다...... 10월 1일 10시 1분..... 이었다
경찰에 신고도하고 은해에 지급정지 요청을 했으나, 경찰에서도 은행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게
좋겠다며 위로아닌 위로를 해준다.
잃은 돈도 돈이지만, 너무도 의심없이 그리 당한 스스로가 너무 어이가없고 이해가안가
그게 힘들다.
이런 나에 비하면 시몬 비젠탈 저자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무임금에 착취를 당하는것도 아니요, 건강상에 문제가 생긴것도 아니니 말이다.
심리학에서 이런 상태를 자기합리화라 한다던가...
어제부터 책읽는것이 조금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무슨일이 있어도 책이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된다하던데...
지금은 옆에있는 남편의 넓은 이해와, 언니의 걱정의말과 바보같다는 책망이 되려 위로가 된다.
하아=3 살면서 많은 일은 겪는다지만, 이리 조심성이 없어서야 될까 싶다..
올해는 조금 많이 힘든것같다. 마음적으로... 10월 1일...
자꾸 멍때리면 안되는데 바쁜 일도 많이 쌓여있는데 중심잡기가 힘들다.
잃어버리고 나니 천만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많은것을 할수있었던 기회를 잃어버린것같은 기분에다가, 없던기회조차 뺏겨버린기분이다
울고불고 기운빼고나서 회사도 조퇴하고 한숨 잔뒤에, 해바라기의 마무리 부분을 간신히 읽은거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를, 사기를 당한 나도 너무도 분해서 그사람에게 해코지 하고싶은 마음인데
유대인, 아니 개인적인 시몬비젠탈저자가 겪은 일에 모두 공감하기란 나는 아직 어린거같다
얼른 잊고 탈탈탈 털고, 더 열심히 그리고 조심히 살아야지.......
하루 세가지 감사를 하라는데, 마음은 상처이나 세가지 감사를 찾았다
1. 조금더 겸손해지고, 조심성있게 살아야함을 가르쳐준 감사
2. 언니에 대한 나의 믿음, 언니가 나에대한 마음을 알게 되어 감사
3. 남편의 넓은 이해와 위로로 그 사랑에 대한 감사
그래 배운것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겸손하게 살자.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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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유익한 책을 접했다. 150페이지의 책 내용과 나머지 그만한 분량의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나치에 의해 89명의 일가친척을 잃은 시몬 비젠탈이 쓴 실화이다.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온갖 수모를 당하며 굶주리며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비젠탈은 어느날...
병원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중 한 간호사에 이끌려 병실로 들어간다. 그 병실에는 죽음을 앞둔 온몸이 붕대로 감겨진 나치의 최고 병사인 SS대원이 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 중에 틈틈히 발견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에 참여했던 SS대원 카를...
죽어가는 이 SS대원은 유대인 학살에 참여했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할 대상을 찾던 중 노역 중에 있는 유대인들 중에서 한명을 찾아달라고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이 비젠탈을 만나게 된다.
죽어가는 이 청년은 참회를 하고 싶어했고, 유대인 비젠탈은 이 살인마 중의 한명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의 참회를 끝까지 듣는 비젠탈은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하게 되고 침묵으로 그 방을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일생동안 이 상황에 번민하게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살인마를 동정할 수 있는가? 자신이 용서를 비는 그 나치 청년에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인가? 과연 비젠탈은 죽음당한 유대인 600만명의 대표자로서 용서할 자격이 있는가?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오랫동안 이 작품으로 인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고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책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다양한 의견들 중에서 중심되는 내용은 이렇다.
'용서란...직접 피해자가 내리는 것이다. 결국 살인은 직접 피해자가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범죄이다. 따라서 작가의 연민과 동정은 이해하나 그는 용서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정말로 자발적으로 잘못을 비는 전범들이 없다는 점이 큰 문제이다. 독일 전범들도 일본 전범들도...
광주 대학살의 주범 전두환 일당도 그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친일파와 그 자손들은 오늘날 이 정권과 보수세력의 큰 목소리 앞에서 오히려 잘못을 인정하기 보단 일본이 좋은 일을 했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고 있다.
먼저 용서를 하기보단 용서를 구하는 자들의 참회가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정신대 문제로 계속 싸우고 있는 당사자 할머니들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돈으로 보상을 한들, 지각있는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과한들 이 할머니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용서는 가해자 당사자들이 직접 구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참회해야 그 다음에 피해자가 내리는 결정인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행동을 미화하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생각을 갖게 한 책이다. 함께 토론하면 좋을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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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임박하면 진실해지는가? 생의 마지막을 앞둔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마음의 빚진 것이 있으면 용서를 구하기 마련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진실해 보이며, 삶의 가장 순도 높은 시간을 보내는 듯 하다. 당연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누군가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해 거짓을 가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관점도 있다. 혹시 주중에 이런저런 죄를 짓고 대충 살다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신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나간 것인가? 종교인이라면 살아 생전에 지은 죄, 특히 그 죄가 씻을 수 없이 참혹한 것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용서를 구하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을 가지려는 이기심이 있지 않을까? 혹은 사후의 받을 형벌이 두려워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빌어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책의 1장에서는 저자 '시몬 비젠탈이 수용소에서 겪은 일상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 비젠탈이 우연히 경험한 한 사건은 그의 나머지 일생을 좌우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주게 되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용소에서 병원으로 강제노역을 하러 나갔던 시몬 비젠탈은 어느 죽어가는 SS대원의 요청에 의해 그의 병상으로 불려가게 된다. 카를이라는 이름의 젊은 SS대원은 난생 처음 보는 비젠탈에게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낱낱이 자백하며 참회한다. 카를은 유대인의 학살에 참여했다는 죄의식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며 죽음에 임박하여 유대인 중의 한명인 비젠탈에게 유대인을 대표하여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한다. 비젠탈은 아무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지만,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은 평생 동안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숙제였으며,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묻는다. 어떠한 행동이 옳은 것인지를. 2장에서는 저명한 인사들이 비젠탈의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의견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의견은 비젠탈의 행동은 옳은 것이었으며, 누구도 희생당한 자를 대신해서 용서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유대교에서도 인간에 대한 범죄는 그 범죄의 피해자만이 용서해 줄 수 있으며, 하느님조차도 신에 대한 죄를 용서 해줄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수의견으로 젊은 SS대원의 선한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여느 극악한 나치대원과는 달랐고, 그의 죄를 진실하게 뉘우쳤으며, 무릇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를 해주는 것, 용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마지막 순간을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물론, 갑작스럽게 아무런 예고 없이 그 상황에 처한다면,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덜컥 용서를 해줄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기대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 자신의 일관된 행동이나 의식적 의도와는 다른 즉흥적이면서 임기응변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2장의 어느 인사가 말했듯이 비젠탈이 처한 상황은 인간의 생존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이성과 배려, 양심이 소거된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 병상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렸을 수도 있다. 빵 조각 하나 훔쳐가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행동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나는 그 SS대원을 용서하지 않겠다. 책에서 인사들의 의견을 읽고 나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판단의 근거가 더 명료해졌다. 내가 피해자인 유대인으로서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SS대원이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는 이미 죽어버려 용서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용서를 한다면, 나중에 희생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누구를 대신해서 용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라면 가족이나 친척 등 희생자의 죽음으로 인해 그 만큼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몰차게 ‘당신은 극악한 존재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소’ 라고 저주하며 육체적 고통 속에 있는 그 SS대원이 정신마저 괴로워하며 죽도록 놔두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비젠탈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논의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하는 만큼 내 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해 주겠다. “내가 희생자를 대신해서 용서를 해줄 수 없는 입장이며, 당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자는 이미 죽어버린 희생자 뿐이다. 그래도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이라면, 신에게서 용서를 구해라, 신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용서를 대신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줄 것이다. 그리고 편히 눈감으라. 다만, 당신의 씻을 수 없는 범죄의 희생자들은 더 이상의 이런 극악한 범죄가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터이니, 당신이 보고 느낀 바를 당신의 동료와 SS대원에게 얘기하라. 그래서 희생을 최소화 하라. 그러면 하늘에서도 희생자들은 당신을 용서해줄 마음을 기꺼이 가질 것이다.”라고 말이다. 죽음이 임박하거나, 권력관계가 뒤바뀌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참회는 진실하지 못하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의 참회와 반성이라야 그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 상대방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어떠한 이득도 없는 상태에서의 반성과 행동, 그것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판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책속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구하는 용서는 인간의 이기심의 마지막 표현일 수 있다. 이승의 잘못에 대한 저승의 징벌이 두려운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부담을 안고 싶지 않은 사람이 주고받는 요서는 일종의 거래가 될 위험이 있다. 어쩌면 용서받지 목하고 마지막 길을 가야 하는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야 하는 자의 부담을 피하기 위한 용서는 정서적 편의주의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 무기력하고 죽을 운명에 놓인 불쌍한 유대인 한 사람에게 설교하는 대신, 자기 동료인 SS부대원을 불러다 놓고 똑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아니, 하다못해 몇 명의 목숨이라도 건질 수는 없었던 걸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참회가 아니었을까?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대신 용서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심지어 하느님조차 인간이 당신을 향해 지은 죄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 지은 죄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살인이며, 다른 하나는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한 죄다. 두 가지 모두 참회는 가능하지만 용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그 살인자를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한 명예란 한번 훼손되면 결코 이전과 똑같이 복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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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글쓴이가 마지막에 던진 이 질문은 책을 덮은 후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늦은 밤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불쑥 떠오르곤 했다. 이 책의 지은이 시몬 비젠탈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 수용소에서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이다. 그는 어느 날,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나치 대원에게 끌려가 나치가 저지른 학살을 용서해 달라는 애원을 듣게 된다. 시몬 비젠탈은 그 나치 대원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파리를 쫓아주고, 자신의 손을 부여잡는 그의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는 못하지만, 용서에 대한 답변을 침묵으로 대신한 채 그 자리를 떠나고 만다. 그 후 시몬 비젠탈은 자신이 한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비열한 행동이었을까, 과연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공적인 잘못’을 사사로이 용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은이는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나치의 침대 곁에 앉아 끝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이 책을 읽는 독자, 곧 ‘나’의 양심을 향해 묻는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용서라는 것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딜레마였다. 쉽지 않은 답변, 그러나 그에게 답변을 꼭 들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끊임없이 용솟음쳤다.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려고 교도소로 찾아간다. 살인자를 위해 꽃다발까지 준비해 간 그녀는 그가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한다. 그리고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내 허락도 없이 먼저 용서해 준 하느님을 향해 ‘거짓말’이라고 울부짖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밀양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주인공이 겪은 참혹함의 정도를 저울질할 수야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둘은 똑같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 중 가장 최악인 살인의 희생자들이다. 다른 점이라면 시몬 비젠탈은 나치라는 거대한 권력의 희생양이었던 수백만 유대인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과, ‘밀양’속 신애는 살인사건을 통해 아들을 잃은 부모였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의 본질은 같다. 시몬 비젠탈이나 신애나 모두 살인자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지은이가 던진 질문에 대한 열쇠이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에서는 비젠탈 딜레마에 대한 세계 각국 저명인사들의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비젠탈 딜레마 해결의 출발점은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의 관계 정립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나치대원으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임종 직전에 용서 받고자 했던 나치대원 카를에게 비젠탈은 유대인 집단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카를 입장에서 보면 비젠탈이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죽인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에게 용서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젠탈은 그가 직접 죽인 대상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대신 용서해 줄 수는 없다. 따라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받은 고통에 대한 용서를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어떤 한 사람이 대신해서 할 수는 없는 것이다.(p.216) ‘테슈바’는 참회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테슈바의 가장 첫 단계는 내 잘못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라고 한다. (나치 단원 카를은 이 첫 단계부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내 죄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을 찾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밀양’의 가해자는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피해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런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과의 관계가 죄를 짓기 이전처럼 회복 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살인의 경우 가해자는 있으나 직접적인 피해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혹은 용서하기 가장 힘든 죄인 것이다.
비젠탈의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그들이 속해있는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테두리 안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용서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비젠탈의 행동을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를 낳게 한다. 홀로코스트를 직접 겪었거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 사이에 느끼는 문제의 심각성 정도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또한 전 세계가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역학관계 안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구성원들의 관점에도 명확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비젠탈의 질문은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한 것일 수 있으나 이 책을 읽는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자유로울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명쾌한 답변을 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어느 것 하나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순수함을 찾아보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이제 그에게 답을 할 순간이 왔다. 나는 유대인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커다란 죄를 지어 용서를 구한 적도 그렇다고 용서를 받은 적도 없다. 나는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그를 용서하지는 않았으나 한 인간으로서 임종을 앞둔 그에게 최선의 배려를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나치에 대한 모든 분노를 그 순간 개인의 감정으로 표출하지 않고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그에게 옳은 판단이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해바라기가 지천으로 피는 계절이다. 나치의 무덤 앞에 한 그루씩 피어 있는 해바라기를 바라보면서 비젠탈은 자신이 죽어서 어둠 속에 누워 있을 때, 그 어둠 속으로 햇빛을 가져다 줄 해바라기 한 그루조차 없는 것을 슬퍼했다. 지금 당장 길가로 나가면 탐스럽게 핀 그 꽃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껏 보았던 해바라기와는 전혀 다른, 비젠탈이 보았던 바로 그 꽃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