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65 실로네의 책 가운데 『독재자들의 학교』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학교는 가정과 더불어 세상에 태어난 인간에게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가정이 원초적으로 애정의 장소라면 학교는 기본적으로 훈육의 장소다. 학교는 사회 질서의 유지에 필요한 이념을 전수한다. 그러므로 모든 독재자들은 학교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모든 조직적 혁명이 성공한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어 다음 세대에게 혁명 정신을 고취하고 계승하는 일이다. 1961년 5·16 쿠데타와 더불어 시작된 나의 학창 시절에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가르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아마도 오늘날 나의 비판적인 지적 성향은 복종을 강요하는 그 분위기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반발심과 저항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한국 사회 사이에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성장한 시대와의 불화였고 그 불화는 구체적으로 '독재자의 학교'에 대한 불만에서 싹이 텄을 것이다. 120-121 예술작품은 예술가 개인의 작품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많은 느낌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그것을 창조한 작가 개인과 시대를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유한 창조물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차가운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왔다. 지금도 이성에 대한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성적 삶이 주관성을 배제하는 삶은 아니다. 이성의 뿌리에는 감성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이성인가? '이성을 위한 이성'은 쉽게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권력과 자본의 시녀로 둔갑한다. 이성은 나와 너와 우리들의 인간답고 의미 있는 삶과 그런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위한 이성이어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회학'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글쓰기로서, 인간다운 삶과 인간의 얼굴을 한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는 글쓰기가 될 것이다. 그런 사회학은 보통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대화를 유도하며 성찰을 증진하는 사회학이다. 개인의 성찰성을 증진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의 성찰성을 키우는,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이고, 차가우면서도 뜨겁고, 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감성이 함께 작용하는 '예술 형식으로서의 사회학'을 발전시키는 일이 프로방스에 와서 생각하는 나의 지적 과제이다. 180-181 지배자들은 항상 "분할하고 지배하라"는 격언을 충실히 따른다. 그들은 피지배자들이 세상을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라고 가르친다. 전체를 알게 되면 지배자에 대한 도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은 인간, 사회, 지구, 우주의 본질과 질서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정의는 전문화된 지식이 아니라 종합적 지식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종합적 사상과 지식은 지식을 추구하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페트라르카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서 출발하여 인간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세상은 무엇이고, 세상 너머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를 붇고, 자기 나름의 답을 추구한 종합적 사상가였다. 255-256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말'이라고 붙이고 1부 '읽기'와 2부 '쓰기'로 자신의 인생을 요약하고 있다. 책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지만 쓰기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읽는 일에서 쓰는 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해야 정상이다. 인생의 체험과 독서의 내용이 서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로 합쳐져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력하게 치밀어오를 때 글을 쓰게 된다. 그러니까 나이 쉰이 된 어떤 남자가 지금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단지 현재의 생각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50년 동안의 삶의 체험과 책 읽기가 합쳐져 나온 생각을 쓰고 있는 것이다. 276-277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나 시인, 작가,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껍데기를 벗기고 인간, 사회, 역사, 우주의 본질과 진실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인은 언제나 절대 권력의 감시와 탄압, 박해와 감금의 대상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세속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일 때 고개를 들고 진리를 말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세속의 명예와 영광 너머에 있는 초월적 차원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그 초월적 세계게가 꼭 종교적 차원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있는 대로 인정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초월적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특수 집단의 사사로운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가치와 기준을 추구하면서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려는 지향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기에 지식인의 삶은 항상 현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개인적인 수난을 겪기도 한다. 287 예술가와 지식인과 종교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늘 자기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고 세상은 정체되어 보인다. 현재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을 더욱 깊숙이 느끼고,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신에게 더욱 가까이 가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을 먼저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예술가와 지식인과 종교인은 늘 자기를 바라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거울을 마음속에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291-292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상을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저서 『자기분석을 위한 소묘』는 일종의 '사회학적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개인적 주관성을 객관적 사회 분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은 그가 속한 사회의 구조와 역사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가족과 학교와 텔레비전과 인터넷 등의 매체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속한 사회적 장의 논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누구라도 바깥에서 가해지는 영향력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런 뜻에서 정신분석학자 퐁탈리스의 말대로 "우리는 수천 명의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인간은 물을 부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물병이 아니다. 아니, 물병도 자신의 모양대로 물을 보관하지 않는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부터는 바깥 세계와 대면하여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적 존재다. 그렇게 해서 주관성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개인은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타인의 입장에 서보게 마련이다. 주관성의 세계만으로는 상호작용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관성은 상호주관성이 된다.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사회는 상호주관성의 세계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삶의 장소가 사회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생각하여 그린 나의 '자화상'과 타인이 나를 관찰하여 그린 '초상화' 사이의 간격이 오해와 불신과 긴장과 갈등을 자아낸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피할 수 없는 측면이다. 서로가 서로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차이를 차이로 받아들이는 아량이 살아 있을 때는 평화가 있지만 그것들이 약해지고 없어지면 다툼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