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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이야 무정부주의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자면,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꿈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국가라는 존재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도구로서 작용할 뿐이거나, 너무 무능하여 아무런 역할도 못 하거나, 오직 두 부류 뿐이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된 '국가'라는 개념은 현재의 사람과는 너무나 다르게 (혹은 부정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거대 경제의 개념이 희박하고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이 순박하던 시절, 왜 무정부주의가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큰 설득력을 가졌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이 책은 한국 사상사와 독립 운동세력의 큰 줄기중의 하나인 아나키즘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를 다루고 있다. 민족주의 계열 및 공산주의 계열과 어깨를 맞대고 좌도 우도 아닌 제 3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아나키즘은 한국 독립운동 사상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적 특성 때문에 그다지 세인들의 관심을 주목받지 못한 측면은 조금 안타깝다. 영화 아나키스트에서 '의열단이 검정색 옷을 선호하는 이유를 아니? 첫째 사회주의 색이 적이라면 무정부주의는 흑이니까' 라는 대사가 있는데, 실제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 라는 식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은 흑색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붉은 색이 사회주의를 상징한다면 검은 색은 무정부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상징성 답게 (완전히 검지는 않지만) 검은색 표지로 책을 장식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는 아나키스트들의 유명한 경구, 시대적 사실 등을 알게모르게 무척 많이 담고 있어 상당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은 비교적 건조해서 정말로 무정부주의에 관심이 있지 않다면 좀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각 장마다 서언, 결언 이런 식으로 딱딱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 가벼운 마음의 독자에게는 읽기 조금 부담될 것 같다. 내용도, 주제도 역사의 주류 흐름과 거리가 있으니 낯선 인물들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내용에는 실제적인 아나키즘 운동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 문학이나 사상적 실체를 엿볼 수 있는 행동강령, 당시 아나키즘 언론지 등도 많이 소개되고 있으니 자료가 상당히 풍부한 책인 것 같다. 무정부주의 전파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였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가 공산사회로 진행하는데 있어 필요하다고 보았던 중간단계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정부'의 이론이 어불성설임을 일찌기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무정부주의자들과 그와 연관된 핵심인물들이 (김좌진 장군을 포함하여) 사회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에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반목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다. 책 내용에는 이리저리 주목할 부분이 많은데, 시대적 상황을 떠올리며 읽어나가면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간에 '남화통신' 1호(1936년)에 실린 임생의 '최근 세계 정치경제의 동향'이라는 글에서 임생이 세계 경제와 정치동향에 대해 상당히 해박하다는 사실과 세계 2차대전의 발발을 예측한 부분이 좀 인상깊었다. 책의 마지막에는 책을 저술할 당시 생존해 있었던 (현재는 잘 모르겠다) 최갑룡의 대담을 토대로 그의 무정부주의 운동 일대기를 서술해 놓은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최갑룡 개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재구성한 것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잠깐씩 엿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꽤 재미있게 보았다. 다음은 그 한 대목이다. p275-277
도합 2500명의 패싸움이라니 무척 살벌했을 듯. 중국인의 노동력 구축현상, 영/호남 지역갈등 등 현재의 문제가 그대로 있었던 과거의 사회상을 보는 듯 해서 이 구절이 조금 재밌었다. ㅎㅎ 어쨌든, 제목 그대로 아나키즘 운동사의 전반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조금 지루한 문체이나 흥미를 가진다면 읽어볼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