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의 문체가 주던 야리야리한 약발이 정확하게 꽂히던 시절이 있었다. 『은어낚시통신』으로 시작된,그 눈을 휘청거리게 하던 윤대녕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가슴 한 켠 안개가 고여 사위를 분별하는 이성을 잃고, 보름달 아래의 늑대처럼 하늘 향해 목을 길게 빼고는 들들 끓는 감성을 주체를 못해 신열로 달아오른 입술을 술로 달래고는 했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그놈의 약발도 시들시들. 내가 시들거리는 것인지, 작가가 시들거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들해진 것만은 분명한 그의 글을 오랜만에 읽는다.
"...얇은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에 삼각형으로 잘린 햇살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구절에도 흔쾌히 손뼉을 짝짝 쳤을 것 같은데 지금은 어째 낯간지럽다. 여행산문이라고 이름붙은 책은 그녀 (그러니까 그것은 딱 정해진 그녀일 수도 있고,그저 미려한 감성으로 꼴딱꼴딱 밤잠을 설치며 허공을 향해 허위허위 애틋한 눈시울을 보내는 미지의 그녀일 수도 있는)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여행과 음악을 적절히 얼버무리고 있다.
일종의 미지에게 보내는 여행중의 또는 여행 전과 후의 심사를 고이 접어 간직한 연서와 같은 책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래로 다가왔던 첫사랑을 그리며,
"아, 그깟 노래가 내 마음속 먹물통을 터뜨릴 줄이야!내가 전생에 오징어였단 말인가."
라고 탄식하는 대목이나 동해 바다 어느 기슭에 위치한 홍련암 마룻 바닥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구멍을 용케도 찾아내어 알리는 수단에 대해서는 고개 숙여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술을 마시면 당신의 걸음걸이가 8분의 6박자로 변한다는 사실은 또 알고 있는지요."
라는 부분에서는 용케 내 기억의 한 토막이 탁 채로 걸러진다. 그러니까 대학 일학년 또는 이학년 무렵, 하루라도 발걸음을 하지 않으면 발바닥에 무좀이라도 생길 것 같은 술집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핑크 플로이드라는 맥주집.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 곳의 젊은 주인 형은 그야말로 8분의 6박자로 걸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원광대학교 국문학과에 다니는 여동생이 오빠를 그리며 썼다는 소박한 시(그 형은 그 시를 반지하 자신의 방, 벽에 고이도 붙여 놓았다)에 바로 그 수줍은 표현이 나온다, 우리 오빠는 8분의 6박자(또는 4분의 3박자일런지도 모르겠다)로 걷는다는. 너무나 절대적이고 일상적이면서도 애틋한 표현이어서 십여년을 놓치지 않고 있던 표현인데, 그것을 이 책에서 보게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혹시 윤대녕이 이리도 간곡하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익명의 또는 미지의 그녀가 혹시 그 시절, 원광대학교 국문학과에 다녔던 그 핑크플로이드 주인형의 여동생이 아닌가하는 계면쩍은 연상작용이 일어난다.
책의 어느 부분에서는 또한 내 기억의 가시거리를 좀더 과거로 돌려야 하는 대목도 나타난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714번 국도를 타고 김제로 들어가 거기서 다시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으로 향합니다. 새벽 동진강 갯벌엔 고기잡이 배들이 죽은 게처럼 모로 자빠져 있습니다..."
부안이 고향인 아버지와 김제가 고향인 어머니를 가진 나는 바로 그 길을 수십번도 더 왕복했다. 만경평야를 가로지르며 얼핏얼핏 볼 수밖에 없던 죽은 게처럼 모로 자빠진 고기잡이 배들을 보았던 멀미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여행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들이기에 떠나서 만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크고 넓고 아름다운 풍경 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그런 것들을 가져다줍니다. 떠나면 필연코 누군가를 만나게 마련입니다..."
여행을 하는 것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이라면,그리고 결국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라면,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읽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삶의 지금을 내어주고, 자신의 삶의 과거를 건네받는 일, 또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한 지점을 미리 점쳐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ps. 고혹스러운 과거의 윤대녕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책 속의 '닭과 비'와 '중국 여인'이라는 두 개의 장에서 조금 달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