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가 타인을 향해 하는 독백은 정작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머저리들 같으니라고”(40쪽 빛) 그래서 그녀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처지로 전락하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하는 신-식민지 사회를 살고 있는 포괄적인 피해자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죽기만을 바라는 아내가 더 나았다. 기대감을 곤두세우는 딸의 눈길보다는”(110쪽 굴레) “그 선교사에게 가족사항을 얘기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 여겨졌었어. 그들은 참 일방적이었지.”(110쪽 굴레) 그런데 이러한 약자들은 대부분 권력의 편성욕에 목말라 있어서, 스스로 억압을 재생산하는 일을 벌인다. “너 오늘부터 자유복 입고 학교에 갔다와서 기분 좋았겠다.” “저야 그저 그랬는데요, 아이들은 공순이와 구별이 안된다고 불평들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 “너의 말을 들으니 일제시대 때 상당히 많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 어째서 제국군대의 지원병으로, 혹은 장교로, 그리고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식민국의 경찰관으로 돌아갔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나는 그들의 행위가 단순히 민족에 등을 돌리는 타락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 정도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들은 식민군대의 제복을 걸침으로써 일본황국이라는 막강한 권력체계에 발을 걸치는 셈이었다. 그러니까 억압받는 자기 동족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계급 상승의 길이 그 제복을 입는 것이었나 보다. 일본군국주의의 제복을 자진해서 걸쳐 입고 칼이나 삐스또루(피스톨)를 찼을 때, 어제의 비천한 조센징은 오늘의 충직한 일본황국신민, 천황의 적자가 될 수 있었다. 분명 계급의 변혁이다. 제복이란 그런 신통력을 가진모양이다.”(173-174쪽 길동무) 이 부분은 굴레에서 아버지가 제복(교복)에 관심을 가진 이유와 연결된다. 아래의 97쪽의 인용문을 보자. “유행과 사치는 말이다. 삼중의 예속관계를 조성한다. 첫째는 여성이 남성에 대한 예속, 둘째는 자본에 대한 예속, 셋째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한 예속이다.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상표 뒤엔 5백억달러가 넘는 이 나라의 외채가 숨바꼭질하고 있단다. 그러니까 가난한 나라의 유행은 나라와 민족을 외국의 탐욕스런 자본에게, 마침내 그 자본주들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단다.”(176쪽 길동무) 이러한 언급들을 통해 작가는 무반성적인 권력 편승욕이 억압의 재생산을 낳는 한국 사회를 지속적으로 꼬집고 있다. 이러한 억압의 재생산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도 나온다. “길동무”에서 6·25전쟁때 낙산사의 대문이 남쪽을 향한 언덕 배밭을 다 내려가면 지면과 접하는 곳에 세 개의 굴이 나온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그런데 이 굴에서 설악산 소탕작전을 교대하고 휴식하는 사병들을 위해 후방에 있는 여자들을 데려다 놓고 병사의 월급을 담보로 섹스를 시켰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제시대의 정신대와 그대로 닮아 있으며, 황국의 군대로 참여한 조선인 남성들이 그들에게 동일하게 ‘조센삐’라고 부르며 그녀들을 비난하고 동시에 그녀들을 수단으로 동물적 욕구를 채웠던 것의 연장이라고 서술하고 있다.(201쪽, 203쪽 참고. 길동무) 이러한 권력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소외된 농민이라는 또다른 희생자를 낳고(“이제는 사람이 거세될 차례”) 그녀는 또 미 대사관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 입국의 어려움을 통해 미국과 한국의 권력차이를 중산층의 시각에서 보여주고 있다.(“손떠퀴) 이런 표현들이 겹치고 겹치면서 그녀의 소설에는 너무나 내면의 독백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독백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너무나 자세히 함으로써 갈등하는 두 인물의 긴장관계를 너무 팽팽해하고 있는데, 이것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동시에 “도대체 이들이 극중 인물이나, 작가(윤정모)는 왜 이렇게 독백에 익숙해졌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사용하는 독백은 표리부동한 서민의 무릎 꿇고 반항하기, 혹은 억압이 학습되어 체계적 저항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민중들의 무의식적 방어 행위 아닐까? 내면의 독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들은 말을 통해서도 체계적으로 억압을 내면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은 그녀의 소설들에서 열등의식으로 나타난다. “너희들의 주장처럼 고난과 탄압이 더 많이 축적되고 실현이 쌓여야만 민주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우리들의 겪어낸 것으론 너무나도 부족하고 그래서 자꾸만 건수를 올려야 한다면......그래, 그것도 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세대들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는 열등의식일 수도 있다.”(189쪽 길동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열등의식을 학습했고, 미국자본주의의 침투로 인해 또 한 번 열등의식을 학습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코드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윤정모는 고발하고 있다. 자신의 한계상황에 대한 인식이 열등의식으로 인간적 나약함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장면에서 윤정모의 정서가 드러나며, 그녀의 ‘독백’적 글쓰기가 드러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윤정모의 글쓰기는 자신의 삶이 묻어나고 있으며, 그녀의 실천이 묻어나는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수사가 적은 그녀의 사실적인 글쓰기는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문체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도록 했다. 그녀의 글은 그렇게 순탄하고 친숙하게 읽혔다. 윤정모라는 작가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힘은 고삐라는 책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여전히 등장하는 내면의 독백! 억압받는 자들의 병리. 읽으면서 몇번이나 감정이 격해지고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선언문처럼 남성적인 문체가 있다가, 여성적인 섬세함과 디테일을 잃지 않는 그녀의 글을 읽다가 그대로 글에 빠져버렸다.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 글쓰기, 그래서 경직된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1988년에 쓰여진 소설이라 시대 정신을 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그럽게 그런 거부감을 지나칠 수 있었다. 지금은 2007년이 아닌가!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건, 거기에 등장한 '고삐를 끊고 당당히'라는 부분이 바로 작가의 실제 삶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 글을 다 읽고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섬세한 글쓰기와 글쓰기라는 방법을 하나의 실천으로 소화시킨 작가의 힘,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친근하고 쉬운 문체! 오랜만에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기쁨이 배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보다 시대가 낳은 비극을 너무 외면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두운 마음이 더 컸다. 아무튼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이 소설을 추천해준 좋은 친구에게 술 한 잔 사야겠다.^^ | |
|
|
|